프랑스의 전통이 된 댄스파티에서의 칼부림
댄스파티에서의 칼부림 사건이 처음 일어났던 곳은 프랑스의 소도시 크레폴이 아니다. 인근 지역인 아르데슈에서 일어났던 칼부림 사건의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당시 사건에 대해 정치적으로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사회적 이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드롬 지역의) 크레폴에서는 현장 수사가 까다롭게 진행 중이다. 이 살인 사건은 어떻게 시작됐을까?(1) 럭비를 열정적으로 좋아했던 16세 토마 페로토는 어쩌다 평범한 마을 댄스파티가 끝날 무렵 목숨을 잃었나? 이런 종류의 까다로운 질문은 필리프(2)라는 인물에게 던지는 것이 제격이다. 크레폴과 여러 산을 사이에 둔 아르데슈는 론 지역의 외곽에 위치해 있는데, 이곳에 사는 필리프는 젊은 나이에 은퇴했으며 체격이 건장했다.
그에 대해서는 확고한 평판과 동시에 부인할 수 없는 전설이 있었다. 그 전설은 그가 10대 때 섭렵했던 마을 댄스파티 수만큼이나 지역 내에서 많이 알려졌다. 비밀스러운 얘기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어릴 때 싸움꾼이었다”, “그가 파티에 오면 항상 싸움판이 벌어졌다”, “1대 10으로도 너끈히 싸웠다” 등의 이야기들이었다.
말보로 담배로 불붙은 패싸움
당사자에게 물었다. “당신이 젊었던 1970년대 말 댄스파티에서는 어떻게 싸움이 시작됐나?” 필리프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떻게든 시작됐다. 그렇지만 내 남동생이 전문가이긴 했다. 동생은 아랍인들이 오는 걸 보면 탁자에 말보로 담배 한 갑을 툭 올려놓고 방치했다. 그리고 술을 마시면서도 담뱃갑을 계속 확인했다. 그러면 결국, 언제나 아랍인이 그걸 주워갔다. 탁자에 놔뒀던, 담배가 꽉 찬 담뱃갑 말이다! 가져간 사람이 담배에 불을 딱 붙이고 자기 친구들에게 담배를 나눠주면 동생이 난입해 ‘네가 내 담뱃갑 훔쳐갔냐, 이 자식아?’라고 말하는 거다. 그놈이 ‘몰랐다, 미안하다’라고 한들… 상황은 이미 걷잡을 수 없다. 동생의 말보로 담배 때문에 패싸움이 하도 일어나서 사람들이 무서워했다. 나는 의자 같은 걸 들고 동생을 지켰다.”
그렇다. 어마어마하게 심각한 이유로 아랍인들과 싸운 것이다. 게다가 각 진영은 본인들 논거의 견고함을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1983년 당시 사귀던 여자 친구가 간호사였다. 그 애가 나를 병원 간호사들의 댄스파티에 초대했다. 지인들끼리의 파티라 초대를 통해서만 참석할 수 있었다. 나는 여자 친구가 초대해 그곳에 갔다. 파티 장소에 도착했을 때 어떤 차랑 마주쳤는데 나한테 헤드라이트를 여러 번 비췄다. 젠장, 몰랐는데 내가 헤드라이트를 계속 켜고 있었던 거였다. 라이트를 끄고 파티장 입구 앞에 주차했다. 그런데 그들이 갑자기 U턴을 했다. 셋 다 아랍인이었는데 간호사들한테 초대를 못 받은 것 때문에 입장을 거부당해 화가 난 상태였다. 그들은 내 앞에 서서 이렇게 말했다. “우린 백인들한테 쫓겨났는데 넌 우리 앞에다 라이트를 켜고 있냐 이 자식아?” 이유가 이렇게 심각할 줄이야.
“나는 나한테 말한 놈에게 주먹을 날렸다. 퍽! 그놈을 깔끔하게 쓰러뜨렸다. 나머지 두 놈이 내게 덤벼들었다. 1 대 2로 붙는데 망했다고 생각했다. 파티 장소로 도망가는데 둘 중 한 명이 내 배에 주먹을 날렸다. 간호사들이 문을 닫고 내게 물었다. ‘무슨 일이야? 셔츠가 온통 피범벅이야!’ 그놈이 내 배에 칼침을 놨는데 나는 그걸 느끼지도 못했던 것이다. 다행히 그곳엔 의사가 많았고 나는 바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7cm짜리 칼이 복부로 들어가 위와 복막 바로 앞에서 멈췄다. 거기서 나는 죽을 뻔했다.”
피로 얼룩진 간호사 댄스파티
다음 날 아침, 필리프는 고통이 상당한 상태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 지역 경찰에게 가해자의 인상착의를 설명했다. 아르데슈는 마을이라 불과 몇 시간 뒤인 그날 오후 두 경찰이 필리프에게 가해자를 데려왔다. 경찰이 필리프에게 이 사람이 범인이 맞는지 묻자 필리프는 그 자리에서 그를 알아보고 “이 사람이에요”라고 말했다. 가해자는 격렬히 부인했다. 그러자 두 경찰 중 하나가 그의 두 어깨를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병상에 누워있는 애가 누군지 아니? 필리프라고. 내 아들이란 말야. 내가 얘 아빠라구. 자 이제 말해봐. 얘 아빠 앞에서 이렇게 만든 사람이 네가 아니라고.” 가해자는 눈을 내리깔고 범행을 자백했다.
얼마 뒤 경죄 법원은 가해자에게 집행유예 9개월을 포함한 징역 18개월을 선고했다. 결국 징역 9개월이라는 뜻이었다. 그는 옥살이를 6개월만 했다. 모범수라는 이유에서였다.
“잠깐, 필리프 씨. 3mm만 더 갔어도 당신은 죽었을 거다. 그럼 살인 미수 아닌가? 그리고 이 사건은 경죄 법원에서 맡았다. 그런데 이 일이 징역 6개월짜리라고?”
“내 말이 그 말이다. 법관들은 이걸 댄스파티에서 일어난 싸움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스무 살 먹은 멍청이 두 놈이 벌인 바보짓이라는 것이다. 사실 법관들 생각이 전적으로 옳았다. 우리는 똑같이 머저리였다.”
간호사들이 사적으로 주최한 파티에서 백인들에게 입장을 거부당한 아랍인들이 이유 없이 백인 남성을 칼로 찔렀는데 겨우 6개월 형을 받았다? 우파나 극우파 정치인인 마레샬, 제무르, 르펜, 보키에, 치오티는 어디서 뭘 하나? 사회 쟁점, 공화당, 민족주의와 관련된 이번 사건이 1983년 지역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실리지 않았다. <CNews>, <BFMTV>, 주간지 발뢰르 작튀엘, 일요 신문은 어디 있고? 아들을 찌른 아랍인은 6개월 동안 교도소에서 휴가를 보내며 휘파람이나 불 텐데, 인자하게 그의 두 어깨를 잡은 경찰 아버지는? 그는 어디에 있나? ‘사회의 해충들’, 소란, 야만인 무리와의 ‘전쟁’을 선포한 프랑스의 방패, 전국 경찰 연합, 전국 독자 노조 연맹, 경찰 근로자 노조 연맹 노조들은? 다들 어디 있나?
그때는 멍청이 난투극, 오늘날에는 사회적 이슈
필리프가 자상을 입은 지 몇 주 지나지 않아 평등을 지향하고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행진이 마르세유에서 대대적으로 거행됐고(3) 그 행사는 가해자의 재판이 있기 몇 주 전 마무리됐다. 이민자 10만 명이 파리를 행진했다. 대표단은 요구 서한을 들고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과 면담했다. 역사적인 상황이 일어나면 사람이, 정치인이, 법관이, 언론이 그 상황에 맞게 행동한다는 것을 안다. 아르데슈에서 제일 적적한 곳에 사는 사람을 포함해 마을의 어느 누구도 1983년에 일어났던 멍청이들의 난투극에 대해 동요할 가치조차 못 느꼈다. 이곳에서 댄스파티에서의 싸움이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이야기라-소도시에서는 이런 일이 수도 없이 일어난다.-이 사건에 무관심했다. 그런데 그 사건을 구성했던 본질이 오늘날 국가적 문제로 격상됐다. 그러고 보니 좌파가 잃은 선거구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반면 (극)우파 정치인 마레샬, 제무르, 르펜, 보키에, 치오티, 바르델라, 르타이오는 아주 만족스러워하고 있다. 아르데슈에서 일어났던 40년도 더 된 이야기를 듣자니 당시에도 아랍인들은 이미 그렇게 많았는데, 그들이 프랑스인을 위협한 만큼 이민자로서 위협받았다고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즐거워하며 이 사건을 사회 이슈화하는 저 우파 군단의 말을 들어보면, 아랍인들의 위협이 지속적으로 있었던 것 같고 아르데슈 이야기가 그 사실을 증명하는 것 같다.
이런 유형의 민감한 주제는 늘 그렇듯 필리프에게 물어야 한다.
“파티에서의 싸움 상대는 왜 주로 아랍인이었나? 당신은 인종차별주의자인가?”
“어떤 면에선 그렇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먼저 가장 피부로 와 닿는 불만은 지역적인 문제다. 한 탄광에서 아르키(알제리가 프랑스 식민지이던 시절 프랑스군에 입대한 알제리 군인. 자국이 독립하자 프랑스로 망명함-역주) 공동체 출신 알제리인을 많이 고용했다. 두 번째로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들은 똘똘 뭉친다는 점이었다.”
“무슨 뜻인가?”
“싸움이 재밌으려면 한 놈을 패러 여럿이 움직여선 안 된다. 그놈들은 탄광에서 파티로 20명, 25명씩 왔고 우리도 20명 남짓이었다. 그러니까 패싸움하기 딱 좋았다. 그놈들이 알제리인인 것은 나중 문제였다.”
이쯤 되니 아둔한 인간상을 집대성한 백과사전과 상당히 닮은 이야기에 대해-이 분야에서 전문가인-올리비에에게 도움을 청할 필요가 있었다. 지역에서 싸움의 전설로 통했던 올리비에가 봤을 때 자신 옆에 있는 필리프는 동네 건달이었다. 필리프가 40년도 전에 떠났던 마을이나 그 근방에서는 지금도 올리비에에 대해 말했다간 바로 헌병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만약 올리비에가, 이 싸움성애자가, 강조해서 쓸 수밖에 없는 이 댄스파티 싸움꾼이 마을로 돌아온다면, 누구에게 그 사실을 알려야 할지 안다고 볼 수 있다.
“사실은 증오가 아닌 대립의 논리였다”
공교롭게도 필리프처럼 힘이 센 올리비에 또한 싸움에 뿌리 깊은 애정으로 인해 죽을 뻔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필리프처럼 올리비에도 남자 중의 남자가 되었다는 점 또한 알게 됐다.
“올리비에 씨, 당신이 한창일 때 댄스파티에서 아랍인들과의 싸움판이 벌어졌었나?”
“당연하다! 1970년대에 그들이 리카마리, 생샤몽, 피르미니, 발레드라루아르 전역에서 여기로 정착했다. 노동자의 아들인 아랍인들과 농민의 아들인 우리는 자전거 체인, 곡괭이 손잡이 등을 들고 정정당당하게 싸웠다.”
“그래도 인종차별적인 측면이 있었나?”
“그래 보였지만 사실은 증오가 아닌 대립의 논리였다. 이것은 이웃 동네끼리 일요일에 열리는 축구 경기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태클 하나, 오심 하나에 언제든 패싸움이 일어났다. 심지어 선수 엄마들도 우산을 들고 싸웠다! 내가 꼬맹이였을 때 사립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학교가 끝나면 공립학교 애들이랑 온 힘을 다해 싸웠다. 발차기, 주먹질, 돌멩이, 밤나무 판, 뭐든 무기로 썼다. 이렇게 싸우고 다닐 땐 아랍인이 한 명도 없었다. 서로 대립하는 무리 사이에서 일어나는 순수한 폭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면 깊은 곳에서 우리를 단결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 대립이었다.”
“어떻게 말인가?”
“사실 사회에서는 우리 중 어떤 무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사회적으로 완전히 투명인간이었다. 구석에 있는 축구선수, 댄스파티에 참가한 농사꾼, 시골 초등학생이었던 우리는 모두 우리가 사회에서 가장 끄트머리에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무리 지어 옆에 있는 놈들을 밟아버리려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집단 정체성을 확고히 했다. 아랍인들과의 싸움도 딱 이 경우였다.”
어린 나이에 교육 제도에서 배제된-가정, 학업, 직장에서 두루 실패한-올리비에는 필리프처럼 토요일 밤 열리는 댄스파티에서 자기네 적들과 동일한 지위 하락을 경험했다.
사회적 투명인간, 그 동일한 경험
지위 하락이란?
크레폴에서 있었던 댄스파티의 어린 희생자인 토마 페로토는 로망쉬르이제르에서 도피네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 학교는 피혁공을 배출하는 특성화고였다. 이런 직업 전문과정은 지역에서 수십 년 동안 ‘신발 제조업의 세계 수도’를 상징하는 깃발 역할을 했다. 일자리 수천 개가 폐지되기 전의 얘기였다. 일자리가 사라지자 로망쉬르이제르는 국가적으로 탈공업화를 상징하는 곳 중 하나가 되었다. 우리네 가족 중 여럿이 최근 몇 년 동안 같은 고등학교에서 같은 길을 걸었는데 이 분야에서는 일을 전혀 구할 수 없었다. 이들은 아르바이트에 매여 먹고 살기 위해 뭐든, 어떤 일이든 한다. 크레폴에서 사망자가 발생한 싸움의 주역 여럿이 로망쉬르이제르 외곽에 있는 모내라는 지역 사람들인 듯한데, 이 지역에 신발 공장 근로자들이 사는 동네가 형성됐었다. 이 동네가 만들어졌을 때부터 십여 년 이상 그곳에 살았던 나탈리는 “아르메니아, 이탈리아, 마그레브 사람들 모두 직장이 있었다. 가정주부도 부업으로 신발을 만들었다. 매일 아침 여러 공장에서 소형 트럭이 이 동네에 와 집집마다 문 앞에다 경적을 울려대며 일거리를 나눠줬다!”라고 말했다.
일거리…. 로망쉬르이제르와 모내, 공장에서 주는 월급으로 ‘건설한’ 주변 작은 마을들-크레폴까지-은 신발로 먹고 살았다. “로망쉬르이제르산 신발을 만드는 데 인생을 다 보낸” 나탈리가 부르짖었던, 뉴욕부터 도쿄까지 전 세계에 판매되는 초대형 브랜드의 신발을 제작한다는 “노동자의 자부심”이 하늘 높이 치솟았었다. 그런 자부심, 그런 일자리는 이제 모내에 거의 남아있지 않다. 토마의 마을도 마찬가지다. 한 지역 농촌 노조 간부는 “2019년 우박을 동반한 폭풍우에 이어 눈 폭풍이 몰아쳤을 때, 벽지에 살던 남자들이 전기가 끊긴 상태로 열흘 이상 있었다. 도대체 며칠 동안 전화가 끊겼는지는 모른다. 여러 부처에 어려움을 호소하러 갔지만 모두 신경 쓰지 않았다. 언덕이 많은 드롬의 이 동네는 소외됐고, 주민들은 모두가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에 일체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바닥 중에서도 밑바닥 사람들 취급을 받는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치 측면에서 봤을 때 선거마다 세를 확장하는 극우파에게 이득이다”라고 말했다. 올리비에의 상황을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모내와 크레폴 지역민들은 사회적 투명인간 취급이라는 동일한 경험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올리비에의 상황을 과거의 시각에서 보면 크레폴과 모내는 그저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것”으로 끝난다. 우파나 극우파의 시각에서 보면 이런 대립을 준비하고 더 나아가 앞당겨야 한다. 필리프의 이야기를 떠올리면 못 바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글·피에르 수숑 Pierre Souchon
기자이자 작가, 2019년 아를 시에 위치한 출판사 악트 쉬드에서 ‘바벨 컬렉션’으로 출간한 『여전히 살아있다』의 저자
번역·김은혜
번역위원
(1) 피에르 드 코제트, 『크레폴 시 토마 사망 사건 : 복잡한 사건임을 보여주는 요소들』
(2) 가명을 사용했다.
(3) 1985년 8월 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게재된 모리스 리모안의 ‘이민자 2세들’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