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들의 여행 ‘그랜드투어’

Special 관광, 탈출산업

2012-07-09     베르트랑 레오

해외여행이 신분 유지 수단이던 17세기 귀족들. 어떻게 외국에서도 지배자의 지위를 누렸을까.

사회적 지위 상승을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환경에 맞는 태도를 습득하는 것도 중요하다. 17세기에도 '그랜드투어'(Grand Tour)라 불리는 해외여행은 젊은 귀족들의 교육 완성을 의미했다. 몇 개월에 걸친 해외여행은 젊은 귀족들이 다른 나라의 귀족 및 학자와 교류하는 기회이기도 했지만, 안락한 생활에서 벗어나 열악한 환경을 체험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랜드투어는 지금도 존재한다. 명문 학교들은 그랜드투어 같은 해외 체류를 학업과정에 포함시켰다. '국가 간 개방이 대세를 이루는 지금 교육도 국제적이 되어야 한다'고 시앙스포(파리정치대학)는 홈페이지를 통해 밝히고 있다. 노베르트 엘리아스가 설명했듯, 사회생활 내 물리적 폭력이 점차 사라지면서 세련됨의 정도는 평화적 관행에 따라 결정된다. 즉 힘 자랑이 아닌 문화적 소양, 일상에서 유려하게 대화를 이끌어갈 수 있는 능력 등 그런 위신과 실력이 한 사람의 위상을 결정한다. 이런 자질은 여행을 통해 노하우와 대인관계술을 익혀가며 습득할 수 있다.(1)

'관광'(Tourism)이라는 말의 어원인 그랜드투어는 영국을 비롯한 전 유럽에서 젊은 귀족층 교육의 마지막 단계를 이뤘다. '학식 있는' 젊은이를 키워내려는 학문적 여행이 가진 교육 목적을 넘어 그랜드투어는 '교양 있는' 젊은이를 키워내겠다는 목적도 있었다.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치하 윌리엄 세실 경이 제시한 구분에 따르면 말이다.

여행자들의 동기와 관심 분야는 제각각이기 마련이다. 성스럽고 종교적인 것을 찾는 이가 있는가 하면, 지식과 교양을 쌓으려는 사람, 미학 탐구를 하는 사람,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는 사람도 여행을 한다. 여행 중 이들은 대체로 내키는 대로 모든 것을 하지만, 이들이 여행에서 습득하는 것은 다른 이들로부터 자신을 엘리트로 구분짓는 요소다. 그렇기에 "숙련된 포격술과 치밀한 축성술이 전술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음에도 젊은 귀족들은 여전히 유럽 각국의 승마학교에 다니고 검술 연마에 열심이지만, 이것이 문제되지는 않는다".(2)

여행은 고국에서 배울 수 없는 것을 습득하는 기회가 된다.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여행자를 인도하는 것은 다름 아닌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뒤의 목표다. 프랑스에서 2년을 보낸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은 여행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언어, 준비성, 후원자, 지도, 여행책자, 추천서, 여행일지 작성, 그리고 여행을 끝내며 얻을 교훈."(3)

젊은 귀족은 파리·로마·피렌체 등 여기저기를 방문하며 외국의 풍토, 지리, 예술, 문인과 예술가, 법과 관습에 익숙해진다. 정치인과 대사관 서기관을 만나고, 교회와 법정을 드나든다. 문화유적지와 도서관, 대학을 방문하고 사형장도 가본다. 비록 과학적 학습의 철저함보다는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요소가 더 많지만, 젊은 귀족은 그렇게 귀족으로서 기본 원칙을 익힌다.

파리, 베를린, 토리노, 피렌체, 로마 같은 도시들에서 찾을 수 있는 여가활동은 사회학적 발견에 대한 기대감만큼이나 큰 동기를 유발한다. 생계를 위해 돈을 벌 필요도 없고, 여행한 나라에서 습득한 지식을 굳이 활용해야 할 필요도 없는 이 여행객들은 깊이 있는 탐구 따위는 떨쳐버려도 된다. 유적지 관광이 지겨우면 카드놀이를 하거나 시골 나들이를 가고, 역마차가 오고 가는 모습을 구경한다. 방문해야 할 장소가 대충 정해져 있기 때문에 이들은 방문지에 되도록 최소한의 시간을 들이려 한다. 단기간에 아주 많은 것을 봤다고 말할 수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윌리엄 에드워드 미드는 1914년 서두름, 자질 부족, 무성의로 인해 젊은 여행자들이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발견은 상대적으로 한정돼 있다고 했다. "18세기 영국인들의 외국어 구사 수준을 관대하게 봐준다 쳐도, 늘 그랬듯 대부분의 여행자는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도 외국어로 식당에서 계산하거나 음식을 주문하는 것이 불가능했다."(4)

젊은 귀족들에게 방종과 일탈의 기회

여행은 가족의 제재에서 벗어나는 기회이기도 하다. 동기들과의 어울림, 연애, 도박과 술은 사회화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다. 제재에서 벗어난 신체 건강한 젊은이들이 겪는 연애와 성적 경험은 수없이 많다. 물론 이로 인해 영국으로 각종 성병이 유입될 위험과 윤리적 이유로 여론은 이런 여행에 적대적이다. 떨어져 있기 때문에 가족이 제재의 끈을 풀어두는 기회가 되므로, 가족 간에 감정적 충돌과 싸움을 피하는 기회도 된다. 집이었다면 용납되지 않을 일이 외국에 있기 때문에 눈감아주고, 가족도 이 덕분에 문제 만드는 것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여행경비와 청년 귀족의 방종 정도는 가족의 정치적 입지에 문제를 초래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학생 대부분이 사회 상류층에 속하는 시앙스포는1990년대 중반부터 해외 프로그램을 강화했다.(5) 전체 학생 7천 명(84%는 부모의 금전적 지원에 의존)(6) 가운데 외국인 학생 수가 2300명에 이르고, 전세계 300개 대학과의 교류망과 14개 언어 교육에 힘입어 시앙스포는 2000∼2001년 학기부터 3학년 과정을 인턴십이나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통한 해외 체류로 의무화했다.

에라스무스프로그램(유럽연합의 교환학생 프로그램) 내의 대학생이나 시앙스포의 학생이나 해외 체류의 목적은 비슷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 사이의 해외 체류를 통한 기대치는 확연히 다르다. 대학 졸업장의 사회적 활용 정도와 다를 바 없이 사회적·문화적·경제적, 그리고 가족이 가진 자원에 따라 학생이 해외 체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혜택은 차이가 있다.

해외 체류의 이점은 개방적인 태도를 습득하고, 일정한 관리하의 해외 체험을 바탕으로 변화에 대한 긍정적 시야를 갖게 한다는 것이다. 학생을 받는 담당기관이 방문하는 학생을 거의 전적으로 책임지기 때문에, 학생들의 숙소와 여가활동은 대체로 관리하에 놓인다. 해외여행에 익숙한 학생들은 나름의 노하우와 기준이 있다. 혈혈단신의 상황에 처했을 때조차 이들은 가족과 친구의 금적전·정신적 지원을 기대할 수 있다. 비록 고향에서만큼 쉽게 그런 지원을 얻을 수는 없지만 말이다. 해외 체류 경험은 나고 자란 지역에서 벗어난 적 없는 이들과 비교했을 때 국제적인 시야를 지닌 이들에게 자신감을 준다.(7)

여행, 이민자에게는 이중의 결핍

제도화된 해외 체류 프로그램 참가자들에게 숙소, 비자, 은행 등 행정 절차는 일반 이민자가 겪어야 하는 과정보다 간편하다. 참가자들은 외국의 생활양식에 적응해야 하지만 보통 보호를 받고, 사회적으로 유사한 위치에 있는 학생들의 생활양식을 접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외 체류자들에게 금전상이나 윤리적, 관습상의 어려움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이런 어려움이야말로 독립성을 키워주는 경험이 된다. 사회적으로 비슷한 위치에 있는 다른 나라 학생들과의 교제뿐 아니라 다른 사회적 지위에 있는 개인들과의 만남은, 특히 관리직이나 책임 있는 자리에 오르려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문화적 개방성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한다. '치밀한 계획'과 '비책', 외국 생활에서 겪는 예측할 수 없는 사태를 헤쳐나갈 실질적 지식이 각광을 받는다. 이것이야말로 학생들이 요령 있게 행동하고, 미처 대비하지 못한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는 능력을 키워준다. 하지만 학생들이 겪는 상황은 다소 왜곡돼 있는데, 제도상으로 일시적이고 사회적으로 보호받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여행이 청춘을 만든다.' 이는 옳은 말일 수도 있으나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은 아니다. 청년층에서도 종종 보이는 이민노동자와는 달리, 해외로 떠나는 시앙스포 학생들은 마치 이전의 청년 귀족들처럼 이중으로 보호받는 위치에 있다. 외국에서 관리와 보호를 받고, 돌아갈 집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사회학자 압델말렉 사야드가 제시했듯, 이민자는 이와는 달리 이중으로 외면받는 처지에 있다. 불확실한 전망이지만 돌아오겠다는 희망을 안고 떠났으나, 다시 돌아왔을 때 원래 자신의 자리를 되찾기 힘들다.(8) 금의환향은 착각에 그치고,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해도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간의 공백으로 과거에 이룬 인간관계는 이미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여행이 가치 있는 자산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원으로서 '국제화'라는 가치는 일정한 조건이 만족될 때만 얻을 수 있다. 한 나라의 사회질서를 존속시키는 조건 말이다.(9)

베르트랑 레오 Bertrand Reau <프랑스인과 휴가: 여가 관행과 여가 공급의 사회학>(프랑스국립학술연구원·파리·2011)의 저자.

번역김윤형 hibou98@naver.com 파리3대학 통번역대학원 졸.


(1) 노베르트 엘리아스, <문명화 과정 II>, 칼망레비, 파리, 1976.
(2) 마르크 브와이에, <관광 발견의 역사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p.41, 오브출판, 라투르데그, 2000.
(3) 프랜시스 베이컨, ‘교양과 도덕에 관한 수필 또는 충고’, 런던, 1625.
(4) 윌리엄 에드워드 미드, <18세기 그랜드투어>, 리버사이드프레스, 케임브리지, 1914.
(5) (6) 니콜라 캐차라, 장 쉬슈, 소피 모레, 뱅상 티베르, 안 뮈셀 공저, <시앙스포의 학생들: 사상, 가치,  
정치문화에 대해>, 시앙스포 출판부, 파리, 2004.
(7) 안 카트린 바그너, <세계화 속의 사회계급>, 라데쿠베르트, 르페르전집, 2008.
(8) 압델말렉 사야드, <이중으로 외면받는 그들: 이민자의 착각과 시련>, 쇠유, 파리, 1999.
(9) 안 카트린 바그너, 위 같은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