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복도에서 마주친 ‘중국의 변신’
‘중소도시와 광활한 농촌 지역을 먼저 장악한 뒤 대도시로 진격하라.’ 한마디로 주변을 통해 중심을 변화시키라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결정한 중국 개혁주의자들이 이 마오주의 원칙에서 영감을 얻고 있다.
마치 에펠탑에 온 듯하다. 관광객들이 몰려와 사진을 찍어댄다. 제네바에 있는 세계무역기구(WTO) 본부, 윌리엄래파드센터 앞. 대부분 중국인 관광객이다. 유독 중국인이 많은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중국이 현재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WTO와 자국의 발전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6년 '4인방'(1)이 몰락한 뒤 중국의 정치권력은 계급투쟁을 단념하고 '4대 현대화'(산업·농업·국방·과학기술)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은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1980년대 초반 중국의 지도자들은 실천적으로나 의식적으로나 이미 계획경제에 익숙해 있었다. '4인방'에 반대한다고 해서 계획경제를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처음 도입한 지도자들마저 부정하는 듯한 인상을 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변화에 저항하는 편을 택했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이들은 WTO 가입으로 개방을 자극하고 개혁을 가속화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WTO에 가입하려면 무역 분야의 국제 법규를 준수해야 한다. 즉, 낡은 것으로 간주되는 중국 내 법령을 철폐해야 한다는 말이다. 국제 법규는 이미 마련돼 있으므로 새로운 법령을 제정할 필요 없이 그대로 도입하면 그만이다. 개혁파들은 이런 식으로 외부의 힘을 빌려 국내의 변화를 꾀하려 한다.
1986년 중국이 WTO 가입을 결정한 이후부터(2) 그 중요성에 대한 홍보가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텔레비전, 신문, 인터넷, 공산당과 중앙정부의 발표 문건들이 동원됐다. 이런 노력이 장장 10년 넘게 계속됐다. 고등교육기관의 연구소에서는 1천 명이 넘는 연구자와 교수들이 WTO 연구에 몰두했다. 하지만 대부분 WTO의 자료에 의존했을 뿐 현장에서 실무를 익힐 기회는 없었다. 연구자들은 WTO와 관련해 수많은 기사와 보고서, 책을 썼다.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대학에서 거의 유행이 되다시피 했다. 이 기간에 WTO 가입을 위한 노력은 중국인들에게 일상이 되었다. 공산당과 언론은 WTO라는 이름을 알파벳 약자 그대로 사용했다. 워낙 자주 접하다 보니 이 명칭을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WTO가 무엇의 약자인지 묻자, 시각장애를 가진 물리치료사의 입에서 '세계무역기구'라는 대답이 곧바로 튀어나온다.
10년 넘게 매일같이 언론에서 선전하다 보니 WTO는 중국의 정치·경제 발전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중국인들의 눈에 윌리엄래파드센터가 에펠탑보다 더 중요한 관광지로 보이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2001년 12월 마침내 WTO 회원국이 되자마자 중국 정부는 1951년 이후 제정된 법령을 분류하고- 그중 2천 개 정도가 수정됐다- 행정 서비스의 상당 부분에 대한 구조조정을 감행했다. 중국의 한 저명한 법률가는 "이런 식으로 가다간 WTO 법이 우리 헌법보다 상위법이 되고 말 것이다"라고 우려를 표했다. 2002년 2월, 중국 정부는 모든 정부부처 책임자와 지역 관리를 모아놓고 WTO 법규를 교육했다. 고위 공직자들이 WTO 가입에 따른 변화에 신속하게 적응하도록 돕는 게 목적이었다. 몇몇 지방정부에는 심지어 WTO에 특화된 홍보·자문 기구가 신설됐다.
슬슬 말하기 시작한 중국 대표들
WTO 가입 이후 중국의 회원 자격은 옵서버(2002~2003), 협력회원(2003~2007), 정회원(2007~현재)의 3단계를 거쳤다. 기존 회원국들은 거대한 코끼리 같은 중국이 들어오면 균형이 무너져버릴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이 신입 회원국은 덩치에 비해 조용한 편이었다. 회의가 열리면 중국 대표단은 말을 아꼈다. 마치 '도광양회'(韜光養晦·재능을 감춘 채 참고 기다림)하라는 덩샤오핑의 가르침을 받드는 것 같았다. 초기에 그들은 다른 국가 대표단이 하는 말을 경청했다. 예를 들어 2005년 홍콩에서 열린 회의에서 주최 쪽은 중국 대표들에게 일일이 회의에서 오가는 대화 내용을 설명해줘야 했다. 중국 대표도 발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베이징에서 준비해온 원고를 그대로 읽었다. 하지만 그의 말을 귀기울여 듣는 이는 거의 없었다.
반면 분쟁이 발생했을 때 직설적으로 의사를 표명하는 게 중국의 스타일이다. 국제무역 분야의 관례에 비쳐봤을 때 이는 거의 욕이나 다름없다. 중국은 회의에서 각국이 표명하는 입장과 겉으로 제시하는 의견 뒤에 숨은 진짜 이유를 이해하는 데 첫 1년을 보냈다. 그러고 나서야 중국 대표단은 회의장에서 입을 떼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1년이 지나서야 능숙하게 발언했다.
WTO에 가입하기 전부터 중국은 무역 분쟁을 해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어려움은 하루아침에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중국에는 국제법과 경제학 관련 전문가들이 부족했다. 통상부 내에 전문가가 부족해 외국 업체에 의뢰해야 할 때도 있었다. 중국이 WTO에 가입한 뒤 WTO 문화에 익숙한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가입 초반에는 되도록 분쟁을 합의로 해결하려는 태도가 강했지만, 오늘날 WTO 법규를 잘 아는 중국의 전문가들은 소송까지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WTO를 통한 분쟁 해결 방식은 회원국에 어른스럽게 갈등을 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2009년 한 콘퍼런스에서 중국 통상부 대변인이 한 말이다. 중국이 이제 스스로를 WTO의 성숙한 회원으로 간주한다는 의미다.
지난 수년간 중국은 국제질서에 도전하거나 그것을 바꾸려 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피력해왔다. 그러나 현재 중국과 서구 국가들은 동일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중국의 이런 입장은 여전히 유효한가?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국가가 국제 무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국은 변화를 위해 WTO를 이용했다. 이제 WTO를 이용하기 위해 그것을 변화시킬 차례인가?
글•화차이 Hua Cai 이 글은 마르크 아벨레스 편, <WTO의 인류학자들>, CNRS Editions에서 발췌했다.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1) 중국 공산당 내 문혁파로 불리던 급진파 지도자들. 1976년 체포됐다.
(2) 1986년 중국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에 가입 신청을 했고, 1995년 GATT가 WTO가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가입 노력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