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삼성의 역설

2012-07-09     김진철

"위기다. 글로벌 기업이 무너지고 있다. 삼성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10년 내 삼성의 대표 제품들이 모두 사라질 수 있다. 다시 시작하자. 앞만 보고 가자."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은 '위기론'이 트레이드마크다. 2010년 경영에 전격 복귀하면서도 '다시 시작'하는 당사자가 임직원들에게 '위기'를 들먹였다. 그는 삼성 비자금 수사를 받으며 물러났다 이명박 정부의 유례없는 단독 특별사면을 받은 뒤 경영에 복귀하는 길이었다.

25년 전 삼성그룹 회장직을 승계한 뒤로 '제2창업'을 선언한 때부터 이 회장은 때마다 '위기'를 외쳐왔다. 이 회장은 2007년에도 공식 석상에서 "한국 경제가 심각하다"고 위기론을 설파했고, 2010년 미국 라스베이거스 소비자가전전시회에선 "삼성도 까딱 잘못하면 10년 후 구멍가게가 된다"고 위기를 '조장'했다. 올해 새해 첫 일성도 또다시 '위기'였다. 그는 2012년 삼성그룹 신년하례회에서 "앞으로 예상하지 못한 변화들이 나타날 것이며, 기존 사업은 성장이 정체되고 신사업은 생존 주기가 빠르게 단축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위기론, 전가의 보도

그의 위기론에 대한 화답은 주로 언론을 통해 나온다. 위기론에 대한 미디어의 해석은 천편일률적이다. 대개 '위기를 내세워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는다'는 식이다. 위기를 강조하면서 임직원들의 긴장감을 고조시켜 느슨한 조직을 다잡는다는 뜻일 것이다. 늘 위기를 예감하고 걱정하는 선지자 같은 '오너' 아래서 월급받는 임직원들은 틈만 나면 나태에 빠지는 철부지인 것일까. 다소 전근대적인 조직 운용 방식인데도 삼성그룹 안팎에서 토를 다는 이는 거의 없다.

위기론에 흠집을 내기 부담스러운 것은 아마 삼성의 실적이 그만큼 뒷받침되기 때문일 것이다. 반도체 세계 1위인 삼성은 최근 애플의 아이폰까지 따라잡아 스마트폰 세계 1위의 놀라운 성과까지 거뒀다. 반도체나 스마트폰 같은 천문학적 투자를 필요로 한 사업 분야에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오너'의 신속하고 과감한 의사결정이 먹혀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 때문인지 삼성은 경제위기 상황에서 다른 재벌그룹들이 '위기'를 맞을 때도 나 홀로 호황을 구가하는 예외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면에서 최근 이 회장의 막말 공방은 상당히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막말 공방의 포문은 이 회장이 먼저 열었다. 지난 2월 중순 이 회장의 맏형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 등이 이 회장을 상대로 유산 관련 소송을 제기한 지 두 달여 만의 일이었다. 4월 중순 이 회장은 형 맹희씨 등을 '수준 이하'라고 표현하면서 "한 푼도 내줄 수 없다"며 소송에 대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맹희씨는 육성 녹음 파일까지 공개하면서 "건희가 어린애 같은 발언을 하는 것을 듣고 몹시 당황했다. 건희는 형제간 불화만 가중시켜왔고 자기 욕심만 챙겨왔다"고 비난했다. 이 회장은 다시 맹희씨에 대해 '퇴출된 양반'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극한 감정을 드러냈다. 이 회장은 "이맹희씨는 감히 나보고, '건희, 건희' 할 상대가 아니다"라며 "나를 포함해 누구도 (이맹희씨를) 장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이 회장의 이런 발언에 대한 비판 여론은 주로 외신을 통해 보도됐다. <한겨레>가 '막장 드라마'에 가까운 재벌의 행태라고 보도한 이래,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평소 말을 아끼기로 유명한 이건희 회장이 요즘 완전히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다"면서 삼성가의 재산분쟁이 텔레비전 통속극처럼 벌어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파이낸셜타임스> 역시 "막장 연속극 수준으로 가고 있다"고 비판했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양쪽의 추악한 다툼이 더 가속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역린(逆鱗), 황제의 분노

이 회장의 거친 비난에서 비롯된 삼성가 2세들의 막말 공방은, 그야말로 삼성 '위기'의 단면을 보여줬다. 무엇보다 이 회장의 거친 막말이 여과 없이 언론에 공개된 것 자체가 삼성의 문제를 여실히 방증한다. 글로벌 삼성의 1인자 입에서 나온 거침없는 표현도 충격이었지만, 그런 발언을 자제하거나 거를 수 있는 시스템이 삼성에 없다는 것이 더욱 여론을 경악하게 했다. 이에 대해 삼성 안팎에선 이 회장의 발언을 제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반응이 많다. 당시 삼성그룹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의 작심 발언이라 어쩔 수 없다. 다소 흥분하신 것 같다"며 당황스러워했다. 재계 관계자는 "황제나 다름없는 회장의 발언에 대해 가타부타 의견을 전달하는 것 자체도 거의 있을 수 없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이 회장을 움직인 건 삼성 내부의 시스템이나 이른바 '가신 그룹'의 조언이 아닌, 정치권의 경고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 내부 사정에 밝은 한 재계 인사는 "정부 고위 관계자가 '경제가 안 그래도 나쁜데 대기업이 집안 싸움을 하는 건 보기에도 안 좋고 경제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뜻을 삼성가에 전달했다"고 말했다. 청와대 쪽 입김이 전달됐다는 얘기도 여러 재계 관계자에게서 나왔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삼성가의 상속재산 소송 문제와 막말 공방이 최대 이슈로 떠오르면서 (정부가 주도하는) 주요 이슈들이 묻혀버린다는 힐난이 청와대에서 나왔다"며 "신속히 조용히 (소송을) 해결하라는 요구가 양쪽에 들어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악화된 여론의 영향도 적잖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성그룹 고위 관계자는 "이건희 회장은 신문 안 보시나, 텔레비전도 다 보신다"며 비판 여론에 영향을 받은 '사과'임을 내비쳤다.

이 때문에 막말 공방 직후 이 회장은 이른바 '유럽 출장'을 떠났다. 예정에 없던 4주간의 유럽 출장을 떠나며 이 회장은 '대국민 사과'까지 하게 된다. 이 회장은 "저번에 사적인 문제로 개인 감정을 드러내서 국민 여러분께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다"며 "앞으로 소송 문제에 대해서는 일절 관여하지 않고 전문가한테 맡기고 나는 삼성그룹을 키우는 데만 전념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다 불경기이지만 특히 유럽이 문제가 많아서 그 상황을 직접 보고 들으러 간다"고 말했다. 20여 년간 반복적으로 위기론을 설파해온 이 회장 자신이 이번에는 위기의 진원지였던 셈인데, 정작 이런 위기를 제어한 것은 삼성 내부가 아닌 외부였다는 얘기다.

'복심'의 운명

이 회장의 유럽 출장 이후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의 전격 교체는, 이 회장이 강조해온 위기론을 작동해온 배경이 매우 전근대적 문화였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난 6월 초 삼성그룹의 2인자던 김순택 미래전략실장(부회장)이 전격 경질됐다. 이때도 삼성은 미래전략실장 교체의 열쇳말을 '위기'로 제시했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유럽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미래전략실장을 최지성 삼성전자 부회장으로 교체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제2의 신경영'에 준하는 조처라고까지 덧붙였다.

그러나 미래전략실장 교체의 핵심 원인은 삼성가의 유산소송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더 많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유산소송에서) 타협하자는 주화론과 주전론이 부딪혔는데 주화론이 밀린 것"이라며 "김순택 전 실장은 유화적인 해결책을 내놨다가 이 회장한테 강한 질책을 받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복수의 재계 관계자들도 "소송 결과에 따라 삼성의 후계 체제까지 흔들릴 수 있는 상황에서 이 회장의 위기감이 상당히 높은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미래전략실장은 삼성의 2인자다. 이 회장을 대신해 삼성의 사령탑을 지휘하고 계열사 사장단 인사까지 좌지우지해온 막강한 자리로 여겨왔다. 이름은 비서실장, 구조조정본부장, 전략기획실장 등으로 바뀌어왔지만 핵심 역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 회장의 독주가 아닌 '회장-비서실-전문경영인'이라는 이른바 '3각 편대 경영'은 그동안 삼성의 주요 성공 비결로 꼽혀왔다. 다만, 이번 미래전략실장 전격 교체에서 볼 수 있듯, 2010년 다시 위기론을 들고 이 회장이 경영에 복귀한 이래 비서실의 위상은 크게 약화됐다. 그럼에도 현재 삼성 미래전략실장은 과거 왕조 시대의 재상을 일컫듯, '일인지하 만인지상'으로 불린다. 이런 막강한 자리가 이 회장의 말 한마디에 추풍낙엽처럼 날아가버릴 수 있다는 것은 삼성의 총수 체제가 얼마나 봉건적인지 보여주기도 한다.

이 회장이 삼성 회장 자리를 이어받은 이래로 25년간 삼성의 2인자는 7명이다. 최지성 새 미래전략실장을 제외한 6명 중 순탄하게 자리를 떠난 사람은 거의 없다. 가장 안 좋게 물러난 실장은 누구보다 이학수 전 전략기획실장이 꼽힌다. 이학수 전 실장은 재무통으로 통한다. 특히 1998년 외환위기 때 삼성의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마쳐, 이후 글로벌 삼성의 토대를 닦고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무엇보다 삼성의 3세 승계를 사실상 마무리한 주요 인물이다. 삼성에버랜드 등을 활용해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이 세금을 내지 않고 경영권을 물려받게 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그래서 이 전 실장은 이 회장의 '복심'으로 통했다. 이 전 실장이 삼성 2인자 자리를 14년이나 지킬 수 있었던 배경이다.

그러나 '복심'도 버림받을 수 있다. '주군'의 한마디가 곧 법인 체제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이 전 실장이 자리를 잃게 된 때는 2010년 11월 중순이었다. 삼성 비자금 사건으로 경영 퇴진 중이던 2008년부터 경영 복귀를 단행한 2010년까지 2년간, 이 회장은 모종의 심경 변화를 겪은 것으로 알려진다. 삼성의 전직 고위급 임원은 "이 회장은 물러나 있는 반면, 이 전 실장은 고문직을 맡고 있었지만 오히려 힘이 더 세졌다"며 "이런 상황을 전해 들은 이 회장은 심기가 매우 불편했고, 주변에서 이런 상황을 더 부추겼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이 2011년 삼성의 내부 비리와 부정 척결을 강조한 것은 이 전 실장을 겨냥한 것이라는 해석도 적지 않았다. 이때부터 최근까지 김순택 전 실장이 2인자 역할을 하는 동안, 이른바 '이학수 라인'에 대한 대대적인 '청소'를 했다. 이학수 체제를 지탱하던 최고경영자급 인사들은 줄줄이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들 중 일부는 삼성 고위 임원들이 퇴직 이후 2~3년간 급여, 사무실, 차량을 제공받는 예우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때부터 이 회장은 2인자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 상당히 커진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이유로 재계에서는 최근 김순택 전 실장의 경질이 그리 큰 사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분위기다.

자기 왕조의 아킬레스건

이 회장이 줄곧 꺼내드는 '위기론'과 영욕이 극단적으로 교차하는 삼성 2인자들의 처지 모두 '총수 지배 체제'가 얼마나 봉건적인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는 총수가 곧 황제와 다름없는 한국 재벌의 특성과, 이 회장의 은둔형 경영 스타일이라는 삼성의 특징이 결합된 산물이다. 아울러 과거 왕조 시대에 왕권 계승이라는 목표를 위해서라면 공신은 말할 것도 없고 부모형제까지 가혹한 죽음을 당하던 봉건 질서의 이면과 비교 대상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2인자마저 한순간에 버림받을 수밖에 없고, 위기를 외치면서도 정작 자신이 위기임을 알아챌 수 없는 총수 지배 체제의 위험성이다. 스마트폰과 전기자동차가 상징하는 최첨단 시대에, 정작 최첨단 제품을 만들며 세계적 위치에 오른 기업에 봉건적 질서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역설적이다. 총수의 한마디가 기업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하는 것처럼, 총수의 단 한 번의 실수가 커다란 기업집단을 거꾸러뜨릴 수도 있다. 삼성 계열사의 한 고위 임원은 "미래전략실이 그룹의 사령탑 구실을 제대로 못하고 회장의 눈치만 본다"고 말한다. 그 누구도 감히 회장에게 진언할 수 없을 정도가 된 '자산 280조 원'의 삼성이라면, 그 자체로 한국 경제의 비극이다.

김진철 <한겨레> 경제부 산업팀 기자. 삼성그룹과 엘지그룹 담당. <내 돈을 지키는 경제학> <대한민국 불공정 경제학>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