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로당, 불온한 이름

2012-07-09     안재성

7월 27일은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에 들어간 날이다. 지리산에서는 그로부터 2년이 더 지나서야 겨우 총성이 멎었다. 이데올로기의 난투장 속에 남북이 모두 모른 척 묻어버린 혁명가들이 있다. 역사가 그들의 비극을 위무할 날이 올 수 있을까.

한국전쟁 발발 3개월 만인 1950년 9월 15일, 맥아더가 이끄는 미군 제10군단 7만5천여 병력이 인천항에 상륙했다. 낙동강까지 내려온 인민군의 허리를 끊고 서울을 수복해 전쟁의 전환점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14일 전쟁'을 이끈 이승엽

인천에서 서울까지는 직선거리 20여km, 이 지역을 지키던 인민군 부대는 총 65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세계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는 해병대를 근간으로 한 미군이 서울을 수복하는 데 필요한 물리적 시간은 넉넉히 잡아 3~4일이면 충분해 보였다. 그러나 미군이 중앙청을 접수한 것은 상륙 후 14일째인 9월 28일이었다. 열 배가 넘는 병력에 막강한 화력을 가진 미군이 20여km를 전진하는 데 2주일이나 걸린 것은 현대 전쟁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이었다. 서울을 수복한 미군이 38선을 돌파해 압록강까지 수백km를 돌파하는 데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은 것과도 비교된다. 국방부의 <한국전사>는 이에 대해 인민군 정규군보다 토착 공산주의자들의 저항이 완강해 진군이 늦어졌다고 기술한다. 인민군 다수는 전쟁 후 남한에서 반강제로 모집한 젊은이들로, 군사 훈련은 물론 정신 무장도 되어 있지 않은 반면, 자생적으로 모인 의용군들의 전투 의지는 완강했다.

이때 의용군을 지휘한 이는 서울시인민위원회 위원장 이승엽(1905~54)과 남로당 지도자 중 한 사람인 김응빈(1914~?)이었다. 이들이 이끄는 서울시당 자위대는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미군에 맞섰는데, 변변한 무기조차 없어 긴 나무막대 끝에 뭉툭한 쇠붙이를 달아 창이라고 들고 다니고 깡통에 다이너마이트와 유리조각 등을 넣어 수류탄이라고 던지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신촌의 연희고지에서 미군을 4일이나 방어해 연합군을 놀라게 했다. 서울이 함락된 뒤에도 이승엽과 김응빈은 철원에 머물며 후퇴하는 인민군을 조직해 다시 남하시키는 일을 한다. 여기에는 남로당 경북도당 위원장으로 전쟁 전부터 빨치산 투쟁을 해온 배철(1912~?)도 있었다.

미군이 38선을 돌파하자마자 일찌감치 중국 땅 만주로 피신해버린 김일성은 이들의 공로를 치하하며 한껏 이승엽을 치켜세우는 연설도 했다. "영용무쌍한 우리 공화국 전사들이 철수투쟁을 성과적으로 조직할 수 있었던 데는 리승엽 동지의 영웅적 투쟁이 안받침되어 있었습네다."(1) 하지만 불과 2년 후, 영웅으로 칭송받던 이 세 사람은 미제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하고 만다. 특히 이승엽은 '개전 직후 서울에서 미국 관리를 만나 인천상륙작전을 제안했다'는 죄목까지 뒤집어쓴다. 가장 용맹하게 미군을 방어한 영웅이 인천상륙작전을 제시한 인물로 바뀐 것이다.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이승엽이 철원에 머물며 후퇴하는 인민군을 재조직해 빨치산으로 남하시킬 때 만들어진 가장 큰 조직은 이현상 부대였다.

전쟁 전부터 지리산 빨치산을 이끌어온 이현상(1906~53)은 인민군과 함께 북상하다가 철원에서 이승엽을 만나 800여 명의 대원을 증원받아 다시 남하한다. 이때 부여받은 부대명이 '남부군'으로, 종전 후까지 3년여 동안 지리산 일대를 휩쓸며 국군과 경찰을 괴롭힌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 무렵 북한에서 시작된 남로당 숙청 작업의 여파는 지리산에도 밀려온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될 무렵, 이현상은 남로당 종파분자라는 죄명으로 남한 유격대 총사령관직을 박탈당하고 산하의 각 유격대를 돌아다니며 자아비판을 하는 신세가 된다. 미제 간첩 이승엽의 지령에 따라 남부군을 결성하고 정규군식 부대 운영으로 대원들을 소모했다는 등의 죄목이었다. 평당원으로 강등되어 하산하라는 명령을 받은 이현상은 9월 18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총에 맞은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국군과 경찰은 서로 자신들이 쏘았다고 공로 다툼을 벌였으나 실제로 그를 쏜 증인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북한이 그를 암살했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전쟁 기간 중 평양에서 관리로 있던 박갑동은 남부군 간부던 조복애에게서 "상부에서 그를 죽이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한다.

이현상은 사후 15년이 지나서야 북한 당국으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아 평양 신미동에 조성된 애국열사릉에 가묘로 안치된다. 1990년대 발행된 북한의 한 잡지는 이현상이 지리산에서 싸울 때 '매일 북쪽 하늘을 향해 김일성 수령에게 절을 올렸다'는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실제 이현상은 전쟁 전 북한에 잠시 머물 때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에 반발해 북로당 간부들과 술상을 뒤집어엎으며 싸운 일이 있다고 전해진다. 그날 이현상은 "장차 조선을 이끌어갈 지도자는 김일성이 아니라 박헌영이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오명 쓰고 죽어 간 박헌영

박헌영(1900~55)은 일제 치하와 해방 공간에서 국내외 공산주의자들에게 부동의 지도자로 인정받던 인물이다.

1919년 3·1만세운동에 놀란 일제는 이른바 문화정책으로 선회해 민족주의자들을 포섭한다. 학교를 세우고, 공장을 운영할 권리를 주었다. 그러자 대다수 민족주의자들이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회피하고 민족개조 운운하며 준비론으로 돌아선다. 이때 등장한 것이 사회주의였다.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혁명에 고무된 수많은 조선의 젊은이들이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적극적인 항일투쟁에 나섰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해마다 수천 명씩 구속된 항일운동가 대다수는 사회주의자였다. 사회주의자들은 1925년 7월 조선공산당을 결성하는데, 박헌영이 이때부터 두각을 나타낸다. 조선공산당은 일제의 탄압으로 얼마 못 가 해산되었지만, 박헌영은 감옥과 지하에서 끊임없이 전국적 조직을 기도해 널리 알려졌고 해방 후 재건된 조선공산당은 압도적 지지로 그를 당수로 옹립했다. 하지만 미군정의 반공정책에 쫓겨 월북한 박헌영은 스탈린의 총애를 받는 김일성에게 밀려 큰 역할을 못하다가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체포되어 처형된다. 박헌영에게 뒤집어씌운 죄목은 일제 때는 일제의 간첩으로, 해방 후에는 미제의 간첩으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박헌영이 죽은 지 30년 후인 1980년대 남한의 운동권에서는 '박헌영은 왜 미제의 간첩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내용의 팸플릿이 등장해 대대적인 바람을 일으켰다. 최근 진보운동의 아킬레스건이 되어버린, 이른바 주사파의 출현이었다. 팸플릿을 쓴 당사자들은 훗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북운동의 선봉이 되었지만, 아직도 김일성주의의 미몽에 사로잡힌 이들이 남한의 진보운동까지 망치는 현실은 아이러니하다.

한국전쟁 종전 전후로 북한에서 행한 일련의 숙청 작업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통상 '남로당 숙청'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 사건을 남로당에 대한 숙청이라고 명명하는 데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남로당은 '부르주아민주주의 과제부터 수행하라'는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조선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의 세 당이 합당해 만든 통일전선 성격의 정당이었다. 나중에 김일성에 의해 제거된 이들은 그중에서도 조선공산당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더구나 박헌영이 월북한 후 남로당의 주도권은 김일성에게 옮아가 1948년 봄부터 사실상 김일성이 직접 지도했고, 1949년에는 공식적으로 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되어 이름조차 사라져버린 상태였다. 1953년 전후로 가한 대숙청 때는 남로당의 존재가 사라진 지 벌써 오래였다.

김일성은 왜 조선공산당 출신을 대거 숙청했을까? 해방 직후 재건된 조선공산당에는 3만여 당원이 가입해 있었는데, 대부분이 일제 때부터 철저한 공산주의자로서 항일운동을 해온 이들이었다. 전통적인 사회주의 이론에 밝은 이들은 지도자에 대한 개인 우상화와 김일성의 종파주의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박헌영의 이론적 동반자인 박치우(1909~49), 신남철(1903~?), 이강국(1906~55) 등이 일제시대에 만든 잡지에서 소련식 사회주의의 몰개인화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실은 점에서도 이 갈등의 원천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공산당의 또 다른 이론가인 김태준(1905~1949)도 소련의 일당독재와 대숙청, 지도자 우상화 등에 대해 고민하는 흔적을 남긴다.

김일성이 조선공산당에 이어 연안파를 숙청한 것 역시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일제 후반기 중국 내륙 연안에서 해방의 그날까지 2천여 무장대오를 이끌던 연안파들은 팔로군의 전통을 이어받은 이들이었다. 수십만 대군을 이끄는 총사령관이라도 계급장 없이 주머니에 자기 밥그릇을 넣고 다니며 사병들과 나란히 배식받던 팔로군은 인간평등 원칙에 충실한 이들이었다. 이들은 스탈린을 본뜬 김일성의 개인 우상화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김일성이 집단농장 등으로 경제를 파탄시키려 하자 투표를 통해 합법적으로 김일성을 축출하려다 실패해 대대적인 숙청의 칼날을 맞는다.

김일성은 얼마 후에는 자신과 함께 직접 만주에서 빨치산을 했던, 이른바 갑산파마저 모조리 숙청해버린다. 아마 자신의 과거를 잘 아는 그들의 존재가 자신의 신격화 운동에 방해가 된다고 여긴 듯하다. 위대한 한 명의 지도자가 혁명을 이끈다는 주체사상이 만들어지는 시기와 갑산파의 숙청이 이뤄진 시기가 비슷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그리하여 김일성 곁에는 일제 말기인 1941년 말 자신과 함께 소련으로 피신해 소련군에 소속되어 아무 전투도 하지 않은 채 해방을 맞은 극소수 소련파들만 남는다. 그리고 해방 후 김일성이 직접 임명한, 항일운동과는 아무 상관 없던 새로운 세대들이 이를 떠받쳐 오늘날까지 충성의 대열을 이어오게 된다. 또한 이런 역사적 진실을 모르는 남한의 일부 맹동주의자들로 인해 남한의 진보운동까지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누가 사회주의의 진정한 적인가

자신과 다른 정치적 의견은 철저히 말살하고 개인 독재를 누린 스탈린과 김일성은, 인간평등과 민주주의라는 사회주의의 대원칙에서 가장 먼 반동적 체제를 완성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항상 외치던 '사회주의의 적'이 있다면 바로 그들 자신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일제 경찰의 고문으로 죽은 조선공산당 간부의 수는 확인된 이들만 60명(2)에 이른다. 그들이 감옥에서 산 햇수를 합치면 6만 년(3)에 이른다. 남과 북에서 처형되고 숙청된 그들의 꿈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종전 60년을 맞은 지금도 그들의 존재는 짓밟히고 숨겨져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안재성 1960년생. 소설가, 노동운동가. 1989년 장편소설 <파업>으로 전태일문학상을 받았다. 식민지 운동가들의 삶을 그린 <경성트로이카>(2004)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1) 김성동, <현대사 아리랑>.
(2) 창작과 비평사, <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
(3) 박헌영의 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