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테르니히 외교 술수에 나폴레옹 굴복

나폴레옹, 프오러 3국 동맹에 패전… 엘바섬 귀양과 탈출

2009-02-02     김승웅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회장

외교와 외교관-5

 

나폴레옹의 첫 패전을 흔히 워털루 전쟁으로 지목해 온 사가(史家)들의 관전은 그런 면에서 틀린 것이다. 라이프지히 전투에서 프랑스 군이 기록한 사상자는 7만 3천여 명, 오스트리아-프러시아-러시아 연합군 측은 5만 4천여 명으로 나타나 있다.
 이 전투에 동원된 나폴레옹 군은 17만 7천명인 반면에 3국 연합군은 25만 7천명에 달한다. 우선 병력면에서 나폴레옹이 열세였고 무엇보다도 탄약 부족이 주요 패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던 것은, 2년 후 치른 워털루 전투에서 병력면에서 우세했던 나폴레옹 군이 영국의 웰링턴 군한테 패한 걸 보면 알 수 있다.
 나폴레옹의 이번 패전은 유럽 전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번 패전은 나폴레옹을 견제하기 위해 뭉친 오-프-러시아 3국 동맹이,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 동맹의 그물망을 짰던 오스트리아 외상 메테르니히의 '외교전의 개가'를 뜻하기 때문이다.

 전후 비엔나 회의 '춤출뿐, 진행 안돼'
 외교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싸움이었다. 이 싸움을 계기로 나폴레옹은 마침내 권좌에서 물러나 지중해 상의 외딴 섬 '엘바 섬의 황제'로 전락한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 유배되어 있던 11개월 동안 유럽은 많은 변화를 겪는다. 무엇보다 먼저 유럽의 실권이 파리의 수중을 떠난다.
 유럽의 모든 중심이 승전국 오스트리아의 수도로 옮겨져, 비엔나가 마침내 파리를 제치고 유럽의 정치 군사 경제 문화 그리고 외교의 집결지가 된다. 그리고 '포스트 나폴레옹'(나폴레옹 이후)의 유럽 재편을 다진다는 미명하에 그곳에서 세계 외교사적으로 한 획을 긋는 '비엔나 회의'가 열렸다는 점도 빠뜨릴 수 없다.
 이 회의를 기점으로 싸움에 이긴 유럽 절대왕조의 보수 회귀가 이뤄지고, 지금도 곧잘 학술적으로 거론되는 소위 유럽의 집단안보 내지 세력균형(Balance of power) 체제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회귀를 제국(帝國)의 왕들은 "하나님의 뜻"이라고까지 규정, 막판에는 그 회의에 '신성동맹(Holy Alliance)이라는 이름까지 넉살좋게 붙게 된다.
 명칭은 이처럼 화려하고 거창했지만 따지고 보면 (나폴레옹한테) 빼앗긴 땅을 한 치라도 더 되찾아 내기 위해 3개 전승국들이 패전국 프랑스를 상대로 벌이는, 얼르고 벼르고 당기는 물밑 흥정이었다.
 외교사 교과서마다 빠뜨리지 않고 거론하는 이 '비엔나 회의'가 열리는 동안, 회의장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궁(宮)은 매일 밤 불야(不夜)의 향연장으로 바뀐다. 매일 밤 오스트리아 왕정 오케스트라의 왈츠 리듬 속에 무도회가 끊이지 않았고, 낮이 되면 언제 그랬냐 싶게 권모와 술수가 판을 쳤다.
 전형적인 궁정외교(宮庭外交)의 비리를 놓고 후세 사가들이 "회의는 춤출 뿐 진행되지 않는다"(Le congres danse, mais ne marche pas)라고 뼈있는 촌평을 남긴 건 정곡을 찌른 레토릭으로 보인다. 이 회의의 제작과 연출 그리고 효과까지를 모두 메테르니히가 맡았던 것은 불문가지다.
 
 메테르니히…'황비 배신' 조종
 유럽은 하루 아침에 메테르니히의 세상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모두가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치러진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관심을 끄는 대목은, 비엔나 궁중에서 이렇게 밤낮으로 치러지는 바쁜 일정 중에도 메테르니히가 나폴레옹에 대한 경계와 견제를 결코 풀지 않았다는 점이다. 경계를 풀기는 커녕, 두발 두 손 다 묶인 나폴레옹을 향해 최후의 일격을 가하는 절호의 찬스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나폴레옹 황제와 그의 아내 마리 루이스 황비(皇妃)를 갈라놓음으로써 보나파르트 가문의  손(孫)을 끊어 놓는, 당시 유럽 전역에 전횡하던 궁정외교(또는 '파리외교'라고도 부른다) 특유의 외교 지략을 발휘한 것이다. 전회에서 설명했듯이 황비 루이스 마리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시스의 딸이다. 첫 황비 죠세핀이 아들을 못 낳는데 초조해진 나폴레옹은 마침내 그녀를 황비에서 폐위, 당시 유럽의 대표적 다산계(多産系) 집안으로 지목돼 온 오스트리아 프란시스 황제의 딸 마리 루이스와 결혼하여 두 번째 황비로 삼은 것이다. 오스트리아 프란시스 황제는 일약 나폴레옹의 장인이 된 것이다.
 이 모두가 외상을 맡고 있던 메테르니히의 작품이었다. 정략 결혼을 성사시킴으로써 조국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의 군화 발에 밟히는 걸 피했던 것이다.
 그 천하의 나폴레옹이 지금은 패장으로 바뀌지 않았는가! 메테르니히의 외교도 함께 바뀐다. 메테르니히는 엘바 섬으로 유배 간 나폴레옹한테 가족 동반이 허락되지 않도록 꾸미는 한편, 한걸음 나아가 황비 마리 루이스를 비엔나에 있는 친정 합스부르크 궁(宮)으로 불러들이도록 주군(主君) 프란시스 황제를 조종한다. 나폴레옹의 유일한 혈육으로, 일찍이 '로마 왕'으로 책봉됐던, 당시 세 살 박이 아들도 어머니 손에 붙들려 비엔나로 불려왔다.
 일단 모자를 불러들인데 성공한 메테르니히는 둘 사이마저 떼어 놓는다. 나폴레옹 아들을 합스부르크 궁으로 불러들여 할아버지 프란시스 황제의 그늘 밑에 두는가 하면, 어미 마리 루이스는 아무리 주군의 친 딸이라 해도 일단 적장의 아내였던 만큼 입궁(入宮)할 수 없도록 배후 조종, 모자를 마침내 분리시킨 것이다.
 메테르니히는 혼자 사는 마리 루이스한테 경호 겸 시종으로 나이페르크(Neipperg) 백작을 붙인다. 나이페르크 백작은 반은 오스트리아, 반은 프랑스계로, 전쟁에서 한 눈을 잃은 탓에 해적처럼 눈 한쪽에 노상 검은 비단 안대를 차고 다니던 귀족이지만, 매너가 부드럽고 특히 노래 부르듯 감칠맛 나는 목소리의 소유자임을 감안, 일부러 마리 루이스의 최측근에 붙인 것이다. 그녀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함락시키라는 밀명과 함께.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그해 8월, 황비 마리 루이스는 스위스로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에는 물론 시종 나이페르크 백작도 동행했고, 휴일을 맞아 첫 기착지였던 스위스 오버란트에서 하루 밤을 묵은 다음 날부터 마리 루이스는 나이페르크의 정부(情婦)가 된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나 마리 루이스는 거처인 오스트리아 거처인 쇤부른으로 돌아왔고, 엘바 섬에 갇힌 채 그토록 상봉을 그리워하던 남편 나폴레옹한테 정기적으로 보내던 편지는 물론이고, 다음 해(1815년) 정초의 새해 편지마저 끊기게 된다.
 나폴레옹이 아내의 변심을 알게 된 것은 '오버란트 정사'가 있고 나서 한 달 뒤였다. 나폴레옹의 전기 작가 뱅상 크로냉(Vincent Cronin)이 쓴 <나폴레옹>은 당시 나폴레옹이 받은 충격을 측근에서 감시한 영국 해군제독 캠벨 장군이 남긴 기록을 인용,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는 어마어마한 슬픔에 빠져 들었다. 만사 무위로 돌아간 듯 무기력한 상태로, 침대에 누운 채 7~8시간을 꼬박 뜬 눈으로 지새기 일쑤였다. 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결코 아내를 원망하지 않았다. 원망의 대상은 아내가 아니라 장인 프란시스 황제였다. 유럽 전역을 자신의 발아래 두던 시절 나폴레옹은 정복자로서 비엔나에 두 번이나 입성, 그 위세에 눌린 프란시스 황제가 마침내 나폴레옹의 청혼까지 받아들여 놓고도, 이처럼 배신을 하다니... 나폴레옹은 바로 그 배신을 미워한 것이다."
 


 나폴레옹 엘바섬 탈출
 나폴레옹의 일기에 일일이 기초를 두고 기록된 이 전기는 또한 나폴레옹이 마리 루이스를 얼마나 사랑했는지에 관해 둘이서 치른 첫 날밤까지를 속속들이 기록하고 있다.
 그가 마리 루이스를 아내로 맞은 것은 41살. 아내는 열여덟 살 때로, 예쁜 고양이 눈에 평소 겁 많은 마리 루이스였지만 타고난 다산형임은 감출 수 없었던 듯 하다. 그녀는 신혼 첫날 밤을 치른 후 남편에게 "한 번 더!"소리를 지를 만큼, 육감적이었던 여성으로 묘사되어 나타나 있다.
 나폴레옹은 평소 독립심과 자유 의식이 흘러넘쳤던 전처 조세핀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여성상'에 눈을 떴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훗날 남대서양의 외진 섬 '세인트헬레나'에서 여생을 마감할 때까지 나폴레옹은 아내 생각을 단 하루도 거른 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있다. 그리고 그가 11개월의 유배생활을 청산, 엘바 섬을 탈출해 파리로 재입성한 배경도 따지고 보면 아내 마리 루이스에 대한 미련과 연민, 다시 말해 빼앗긴 아내를 되찾겠다는 집착 하나만으로 마지막 전투인 '워털루 격전'장을 향해 몸부림 쳤다는 생각이 든다.
 나폴레옹은 1815년 2월 28일 엘바 섬을 탈출, 프랑스 깐느(Cannes)에 닿아 파리를 향해 진군을 시작한다. 이 소식이 비엔나에 닿을 당시 메테르니히는 한창 궁내에서 무도회를 베풀고 있던 무렵이었다. 그날 무도회에는 러시아의 알렉산더 황제와 (나폴레옹 휘하의 외상을 맡다 그의 실각 후 루이 18세 쪽에 붙어 배신한)프랑스 외상 탈레랑, 그리고 특별 게스트로 당시 스페인 전쟁에서 이겨 귀국한 영국의 귀족 웰링턴 장군이 참석하고 있었다. 참석자 모두가 왈츠 춤에 젖어 있던 중, 급보를 접한 메테르니히의 사인에 따라 궁중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멈췄다. 이어 곧바로 회의가 열리고 다음과 같은 결의가 도출된다.
 "나폴레옹의 불법 탈출로 이제 세계평화는 깨뜨려졌고, 그는 유럽에 복수하기 위해 스스로를 공적(公敵)위치에 올려놓았다. 이에 영국,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그리고 러시아 4국은 이 같은 보나파르트의 만행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기에 15만 병력을 출병키로 합의한다"
 
 <다음 호에 계속>

 


 

*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시사저널 워싱턴 특파원을 지냈으며, 주요 저서로 <파리의 새벽, 그 화려한 떨림>, <모든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 <DJ를 평양에 특사로 보내시오>, <실록 김포국제공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