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전시, 박람회장의 제국주의
백인 중심의 ‘문명과 야만’
박람회는 산업의 디스플레이인 동시에 제국의 디스플레이였다. 박람회가 근대국가 입장에서 볼 때 최대 축전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던 1851~1940년 동안, 이 공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되면서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교묘히 대규모로 '전시'되었다. 식민지가 어떤 의미에서 '근대의 실험실'(Laboratories of Modernity)이었다면, 식민지와 동떨어진 근대의 담론이란 있을 수 없기에 박람회에서도 제국과 식민이란 관점은 중요한 것이다.
제국과 식민 디스플레이의 표본인 '인간전시'
'인종전시'(Ethnological Expositions)로 명명되는 인간동물원(Human Zoo)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화에 대한 정당화 논리를 가장 집약적·효과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이었다. 19세기 초 '호텐토트의 비너스'(Hottentot Venus)라 불린 남아프리카 여성을 유럽에서 전시한 이래 인간동물원은 박람회에 단골로 등장했다. 과학적 인종주의와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저주받은 인종' 전시는 박람회의 '인기 품목'이었다.
서구인에게 식민지는 애국적 자부심의 원천이 될 수 있었다. 1874년 프랑스 경제학자 폴 르로이볼리외는 "식민지를 가장 많이 만든 민족이 최고의 민족"이라고 말했다. 1899년 파리 만국박람회가 열리던 해 출간된 <아기 애국자를 위한 ABC>란 책에서는 좀더 호전적 분위기로 "'C'는 식민지를 뜻한다"고 선언했다. '아기 애국자'에게 식민지가 무엇이며, 그 복종적인 주민들이 어떻게 보이는지 좀더 잘 이해시키기 위해 원주민 전시가 흔하게 열린 것이다.
만국박람회는 관람객에게 전세계에서 모여든 전시품을 구경할 수 있는 쉽지 않은 기회를 제공했다. 이국적 취향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으나,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서 자신들과 이해관계가 있는 아시아·아프리카·오세아니아 국가의 전시품이 전시되자 열기가 더해졌다. 그런 전시를 통해 제국적 성취물이 주창되었다. 1851년 런던 만국박람회에서는 영국 식민지에서 나온 다이아몬드가 거대한 제국 전시의 일환으로 조직되었으며, 인도 전시관을 본 관중은 인상적인 수공업 기술과 물질적 풍요로움에 혼을 빼앗겼다. 런던 만국박람회에서는 제국의 각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고향의 동식물군 사이에서 전시되었다. 에스키모는 북극곰과 나란히 섰고, 아프리카인은 침팬지와 함께 전시되었다.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영국은 제국을 지탱하고 끊임없이 공급되는 원자원을 강조하는 거대 전시를 기획했다. 그해의 주최국으로서 프랑스는 자연스럽게 식민전시를 했으며, 분리된 제국 전시관을 지었다. 파리와 미국의 박람회처럼 영국 박람회에도 '인간전시'가 도입되었다. 이때 큰 역할을 한 것이 흥행사 임레 키랄피이다. 그는 1895년 '런던박람회 주식회사'를 만들어 점차 대두되기 시작한 박람회의 오락화 경향을 최대한 밀고 나갔다. 그가 착수한 박람회는 1895년 이후, 1910년대까지 런던에서 열린 박람회 대부분이 포함될 정도이다. 그 가운데 1908년 불-영 박람회 때부터 박람회 화젯거리로서 식민지 주민의 '민족학적 전시'를 포함한 것이다.
'인간전시'는 세계박람회가 처음부터 내포하고 있던 정치기술론의 하나로, 극단적 형태를 의미했다. 인간전시는 예전부터 런던이나 파리의 가설무대에서 곧잘 열리던 방식이며, 조직적인 예는 런던의 이집트홀에서 볼 수 있었다. 비(非)서구세계를 사회진화론적 계제(階梯) 속에서 자리매김하려는 인류학적 시도였다는 점, 그 '미개사회'의 스펙터클적 전시를 국가가 스스로 맡았다는 점이 이전 가설무대에서 행한 쇼와는 질적으로 다른 사건이었다.
인류학의 부상과 박람회장의 원주민 촌락
식민지 전시로의 축 이동은 상당 부분 인류학과 민족학의 부상에 힘입었다. 백과사전적 정의처럼 박람회는 인류의 삶에 목적을 두었으며, 세계에 대한 종합적이며 열정적인 관점을 창조하려고 했다. 사회진화론에 대한 점증하는 학문적·대중적 관심은 인간전시의 다른 차원을 열어주었다. 원주민의 외양과 행동은, 인류는 진화 과정에서 엄격한 차이가 있다는 증거로 채택되었다. 1900년 파리박람회에서 식민지 전시는 좀더 확장되었으며, 전체 전시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곳이 되었다. 에펠탑 아래 제국의 다른 사람을 긁어모음은 프랑스의 식민지에 대한 우월적 권력을 부여했으며, 프랑스인들에게 제국정치를 열광시켰다. 그러나 그런 전시는 관람객에게 지적인 면보다는 이미지로 호소했다. 이국적 구조물 색색의 조합 속에서 사람들은 보는 즐거움을 만끽했고, 비유럽 세계의 소리와 냄새를 즐겼다.
867년 초반, 주전시관 주변 공원에 화려한 전시관이 들어섰다. 관람객은 튀니지와 알제리 카페에서 먹고 이집트 시장에서 쇼핑했다. 북아프리카에 대한 특별함은 연이은 박람회에서도 벌어졌다. 1878년의 카이로 거리를 재현한 1889년 전시에서 식민지 연출은 더욱 중요해졌다. 1889년 파리박람회는 회장 내에 식민지촌을 재현하고, 끌고 온 원주민을 전시했다. 원주민에게 필요한 음식과 생활용구를 제공하고, 몇 개월에 걸친 박람회 기간 중 낮이고 밤이고 울타리로 둘러싼 마을 안에서 생활전시를 했다. 원주민, 가족 단위로 끌려왔는데 각 가족이 같은 부족에 속해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문화적 전통이 다른 부족 출신자들로 각 부락이 구성되었다. 그들은 하나의 '미개인'으로서, 사실 자신들에게는 낯선 의례와 행동을 관객 앞에서 연기하도록 강요받은 셈이다. 유럽인 입장에서 보면, 식민지주의적 시선에 적합할 것 같은 '이종'의 '열등성'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민족학적 '실물 전시'를 통해 '야만'이 새삼스럽게 '발견'되는 것이다.
인종전시는 미국에서 한결 붐을 이루었다. 1893년 시카고만국박람회에서는 다양한 원주민촌이 있었는데, 1867년 파리만국박람회에서 모델을 빌려왔다. 아프리카·아시아·아랍·남극 원주민과 알래스카 사람이 등장했다. 미국의 뛰어난 민족학자 중 한 사람이 이 전시의 책임을 맡았으며, 미국의 진보는 이들처럼 야만적인 비백인 국가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과학적 사고에 기초했다. 다호메이(Dahomey) 촌락 전시처럼 거주자들은 야만적 카니발로 묘사되었으며, 대중적 인종차별을 부추키는 데 사용되었다.
정작 미국의 흑인 집단은 화려한 화이트 시티에서 보이지 않았다. 백인 문명의 승리에 관한 강조는 아메리카 원주민에 초점을 맞추었다. 북미 원주민은 원시 종족으로 취급되었으며, 거주지에 살면서 의례적 제의를 하도록 강요받았다. 박람회장 바로 바깥에는 버팔로빌을 만들어 원주민 생활상을 공개했다.
1893년 시카고에서 벌어진 원주민촌은 본 전시장까지 1마일에 걸친 유흥구역인 미드웨이 플레잔스에서 벌어진 광범위한 오락거리 중 하나였다. 이 구역에서 호랑이와 코끼리, 베두인 부족 간의 사막전투, 에로틱한 댄스를 즐기거나 대회전차를 탔다. 이 박람회장의 매혹거리는 다음 박람회에서 강화되었으며, 독립적인 놀이공원으로 발전했다. 이 박람회의 주 섹션에서 관중의 관심은 교육적 콘텐츠보다는 즐거운 가치에 의존하게 되었다.
미드웨이는 식민 풍경이 가장 잘 드러난 곳이었다. 아프리카 다호메이 부족 100여 명이 발가벗겨진 채로 전시되었다. 동물원의 동물 같은 인종전시였다. 화이트시티의 정결한 백인문화와 민속촌의 '야만적 풍경' 사이에는 인종의 우월성과 차별성이 존재했으며, 안내서에도 화이트시티를 보고 난 다음에 민속촌을 보아야 감상을 제대로 했다고 할 정도다.
1901년 판아메리칸박람회 기획자들은 필리핀 섬사람을 전시장 복판에 끌어들였으며, 쿠바·푸에르토리코·알래스카·하와이 사람 등이 같이 전시되어 정복의 정당성을 강조하고, 새로운 식민제국의 존재를 과시했다.
미국 루이지애나박람회는 그 어떤 박람회보다 강력한 인류학적 전시를 보여주었다. 박람회 기획자는 인류학자에게 가장 원시적인 인종 혹은 종족 그룹을 위한 대안을 요구했다. 가령 필리핀 촌락은 공식적으로는 필리핀 보호구역으로 알려졌는데, 필리핀 초대 총독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박람회에 기금을 댔다. 연방정부는 전시를 적극 지원했으며 우드로 윌슨을 우두머리로 정했다.
박람회는 유럽의 '문명화 정책'이 낳은 혜택을 과시하는 증거였다. 로마시대 이래 모든 유럽 제국이 벌인 모험은 바로 이런저런 변장을 한 '문명화'와 '문명'을 목적으로 삼아왔다. 그 역사적 궤적을 박람회는 유감 없이 보여준 것이다.
박람회장의 흑인과 유색 인종들
미국 내부의 식민지라 할 수 있는 흑인도 박람회에 선보였다. 인디언처럼 노골적이지 않으나 노예 취급을 받았다. 흑인들은 독립 100주년 기념 박람회인 필라델피아박람회(1876년)에서 여성보다 더 심한 냉대를 받았다. 남북전쟁을 통해 시민권을 획득한 역사적 경험을 거친 흑인들은 노예의 과거를 정리하고 미국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기회로 필라델피아박람회에 참가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박람회에서 흑인의 이미지는 예외 없이 노예 이미지로 나타났다. 만국박람회에서의 흑인 소외는 20세기 들어와서도 계속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1867년 파리세계박람회에서는 중국 사람도 '중국의 거인과 소인'이라는 주제로 전시되었다. 부채를 들고 만주식 변발을 한 장신의 사내가 서 있고, 난쟁이 사내가 대조를 이루었다. 인종을 소개하고 인종의 특이함을 강조하는 것이 이 시대 분위기였다면, 익히 알려진 '황인종' 중국으로서는 거인과 소인을 주제로 인간을 전시물로 내세웠을 것이다.
1904년 세인트루이스박람회장에서 펼쳐진 중국과 일본에 대한 미국인의 태도를 검증해볼 필요가 있다. 중국이 정부 차원에서 공식 참여한 박람회였지만 미국 시민들에게 엄청난 조롱을 당했다. 박람회에 참가한 평범한 중국인은 박람회 관람객이나 세인트루이스 시민과 마주칠 때마다 조롱당하거나 심지어 물건을 투척당하는 시련을 겪어야 했다.
반면 일본은 세인트루이스박람회에서도 놀라운 준비와 추진력을 바탕으로 미국인의 존경을 얻는 데 성공했다. 단기간에 이룬 일본의 발전과 서구화에 대한 긍정적 인식, 서양의 기준과 가치가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증명했다는 믿음으로 미국은 '동양의 양키', 혹은 '아시아의 서양 파트너'로 일본을 인식했다. 그럴수록 중국은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남루하고 조잡한 이미지로 간주되었다.
인류학자 윌리엄 존 맥기는 우생학적 입장에서 일본인의 피가 복잡성을 지녔다고 한다. 그는 복잡한 피를 지닌 민족이 더 강하다는 신념을 표했다. 일본 인류학자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일본은 앵글로색슨처럼 동양에서 가장 복잡한 피를 가진 인종이라고 했다. 맥기는 아이누 원주민을 8명 데려다 전시하면서 일본인이 왜 그들을 지배할 수밖에 없으며, 또한 아이누를 지배함으로써 일본인은 동양에서 가장 우수한 민족이라는 사실을 다중에게 전달하려 했다. 아이누인은 집에 갇힌 채 손노동에 종사하면서 관람객에게 동물처럼 전시되었고, 그 전시가 흥미를 끌수록 일본은 문명국가로 승격되었다. 그런데 일본인이 제 대접을 받으면 받을수록 중국인은 상대적으로 멸시당했으며 3류 인간으로 취급받았다.
그렇다면 한국인은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서구인의 타자 시선에 들어온 조선의 전시 문화는 실제 활기와는 무관하게 문명과 야만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만국박람회에서 연출된 타자의 시선법은 대체로 문명과 야만의 잣대로 이루어졌으며, 한국인에 대한 시각이라도 별 다를 것이 없었다. 망해가던 대한제국기에 참여한 박람회에서 무슨 대접을 기대할 수 있었으랴. 종내는 1905년 외교권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일-영 박람회에 강제로 참여해 조선은 본격적으로 식민 나라로 세계에 널리 '전시'되었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여수세계박람회를 개최하고 있다.
글•주강현 민속학자, 제주대 석좌교수. 최근 <세계박람회 1851~2012>를 펴냈다. <유토피아의 탄생: 섬 이상향 이어도의 심성사>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