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의 ‘아전인수’격 역사 왜곡

2024-04-30     브누아 브레빌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마치 다른 그림 찾기 같지만 정반대다. 거의 똑같아 보이는 두 개의 그림에서 서로 다른 부분을 찾아내는 대신, 전혀 다른 이미지들에서 공통점을 찾아내야 한다. 디테일을 좀 더 들여다보면 몇몇 유사한 부분을 찾아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공통점 찾기는 특히 전쟁 시기와 잘 맞아떨어진다. 그래서 정치 전문가들과 지도자들은 과거 역사에서 현재 상황과 조금이라도 유사한 사건은 없는지 추적한다.

2년째 이어지는 우크라이나 전쟁은, 진흙 참호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제1차 세계대전과 비교할 수 있고, 핵전쟁 위기로 인류를 위협했다는 점에서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와 유사하다. 또한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의 해외 군사 개입(1953년 베를린, 1956년 부다페스트, 1968년 프라하, 1979년 카불), 이란과 이라크 두 이웃 국가의 전쟁(1980~1988), 세르비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했던 코소보의 전쟁 등과 비교된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홍보 전문가들은 ‘같은 그림 찾기’ 실력이 뛰어나다.

1933년 대기근, 스탈린의 대숙청, 아프가니스탄 분쟁, 체첸 분쟁, 시리아 분쟁, 심지어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까지,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모든 역사적 비극에서 자국 침략을 떠올린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런 이야기를 청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도 잘 안다. 미 의회에서는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과 알카에다의 9.11 테러를 언급했고, 벨기에 의원들 앞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이프르 전투를, 마드리드에서는 스페인 내전 중 발생한 게르니카 학살을, 체코에서는 ‘프라하의 봄’에 대해 이야기했다.(1)

사건이 극적일수록 비유 효과는 커지고, 빠르게 공감을 일으켜 더욱 쉽게 지지를 얻어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단연 비유 목록의 제일 위에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을 뜻하는 “위대한 애국 전쟁”을 내세우며, 모든 적을 ‘나치’로 간주한다. 그러나 정작 아돌프 히틀러에 비유되는 건 러시아 대통령 자신이다. 마리우폴 전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크름반도 병합은 나치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수데텐란트 병합과 유사하다.

프랑스 제3공화국과 영국이 독일의 팽창주의적 행보에 제동을 걸고자 체코슬로바키아의 이 지역을 나치 독일에 양도한 1938년 9월 뮌헨 협정은 끝없이 언급된다. 히틀러의 야욕을 막지 못하고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이 협정은 비겁함과 배신의 대명사로 불리며, 전쟁이 확산하는 상황에서 최소한의 타협이라도 하자는 ‘유화 정책’ 옹호자들 즉, 1956년 프랑스-영국의 수에즈 전쟁 개입, 1960년대 베트남 전쟁, 1990~1991년 걸프전에 반대했던 사람들을 비난하는 데 쓰여왔다. 알제리와의 휴전을 결정한 1962년 에비앙 협정에 서명한 샤를 드골 장군마저 ‘뮌헨주의자’ 취급을 받았다.

이러한 수많은 비유는 단지 표현으로서의 효과만 지니는데 그치지 않고, 전략적 결정 자체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정치학자 유엔 풍 콩은,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정치 지도자들의 생각에 뮌헨 협정의 기억이 어떻게 스며들었는지를 설명했다. 뮌헨 협정은 지도자들의 연설에만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과 토론에도 영향을 미쳤고, 베트남에 군사적으로 개입해야 할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데까지 쓰였다.

 

“정치가들은 형편없는 역사가들”, 잘못된 사례 반복

만일 그들이 1950년대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 경험했던 일들이나 프랑스군의 디엔비엔푸 전투 패배를 떠올렸다면, 베트남을 난공불락의 국가로 여겨 더욱 신중하게 행동했을 것이라고 정치학자는 지적했다. “그러나 정치 지도자들은 형편없는 역사가들이다. (…) 그들이 아는 역사적으로 유사한 일들이 많지 않다 보니 결국 잘못된 사례를 선택하고 적용한다(2).”

사실, 뮌헨 협정은 공개 토론에서 수없이 인용되는 것에 반해 실제 사건들과의 연관성은 크지 않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유럽에서 침략 전쟁이 다시 발발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이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르다. 우선 군사력에서 차이가 난다. 나치 독일은 현재 러시아와는 다르게 단 몇 달 만에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네덜란드, 벨기에 그리고 프랑스까지 점령할 수 있을 정도의 군사력을 보유했었다. 그러나 푸틴의 군대는 2년 넘게 이어진 전투에도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함락에 실패했고, 어떻게 전선을 확대해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맞설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다음으로, 전략적 목표에도 차이가 있다. 나치 독일의 영토 부족을 이론화한 히틀러는 푸틴과 반대로, 적대적 군사 동맹의 위협을 받지 않았다. 그 무엇도 독일 총리의 영토 확장 열망을 가로막을 수 없었고, 이를 완벽히 이해한 에두아르 달라디에 프랑스 총리는 1938년 뮌헨 협정에 서명하며, 자국 군대가 전쟁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고자 노력했다. 달라디에 총리의 이런 결정은 당시 프랑스에서 공산당 의원들과 사회당의 장 부에 그리고 우파 국회의원인 앙리 드케릴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정치 계층의 지지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국제 정세다. 1938년과 달리 오늘날 세계는 훨씬 상호 의존적이며, 힘의 균형이 핵 위협에 크게 흔들리기도 한다.

이런 모든 차이를 고려하면, 현재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뮌헨 협정을 들여다보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러나 역사를 비교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차이점을 쉽게 간과한다.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의 글에 따르면, “많은 이가 놓치고 있지만, 비교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차이점에 대한 인식이다. 차이를 인식하면, 사회 시스템들의 특징을 가늠하고, 그 차이점들을 분류하며, 본질을 깊이 꿰뚫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3).” 이렇듯, 유사성은 각자의 특수성에서 보편적 규칙을 찾아내게 한다.

그러나 비교법에는 엄격함과 세심함이 요구되는데, 정치 전문가들에게서는 찾기 힘든 덕목이다. 이들은 언론에서는 과도한 활동을 벌이지만, 역사는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차이를 인식하고, 분쟁의 다양성을 고려하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고, 특정 현상들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지도자들은 자신과 다른 의견을 비난하고 거부하지만, 훗날 역사는 그 의견이 옳았음을 증명한다.

또한, 모든 위기를 “실존적”인 것으로 특징짓는 경향과 적을 악마라고 규정하는 일, 제재 정책의 비효율성 등이 반복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국제 분쟁에서 의무적으로 언급되는 제2차 세계대전은 기준이 아닌 예외로 고려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잘못을 저지른 이들이 여러 진영으로 나뉘어 있지 않았고, 한쪽만 완벽히 장악했으며 세계 정복의 계획과 패자들에 대한 완전한 진압, 주요 전범자들의 자살 혹은 처형이라는 명확한 결말이 있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그와 같은 분쟁은 드물다. 군사 개입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런 극단적 흑백논리는 훌륭한 무기가 되지만, 이들의 비교는 편향된 시각을 지녔다.

전쟁은 어느 한 사람 혹은 한 국가의 행동이 아닌 여러 주체의 상호작용으로 발생하는 만큼 책임이 분산된다. 누구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은, 정치적 선전이 끝나고 수십 년의 연구가 이뤄진 후에야 밝혀진다. 독일 역시 오랜 기간, 제1차 세계대전의 유일한 가해자로 비판받아 왔다. 군비 경쟁을 가속화 했고, 사라예보 암살사건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를 공격하도록 부추겼으며, 벨기에를 점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르비아의 민족주의를 조장했던 러시아 제국도 전쟁에 일부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이는 없다. 프랑스 역시, 1870년 전쟁에서 패배하고 알자스로렌 지방을 독일에 빼앗긴 이후, 많은 정치인이 보복을 원했기 때문에 전투에 마음이 기울었다. 역사학자 게르트 크루마이히는 독일이 “도화선에 불을 붙인 것은 맞지만, 독일 혼자서 화약고를 채운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4).

 

완전한 승리는 없어…협상에 나서야 할 때

대부분의 분쟁 상황도 마찬가지다. 정치학자 아나톨 리벤은 “현재 우리는 모두가 이 전쟁의 주된 책임이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 정부에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5) 하지만 미래의 역사학자들도 모든 책임을 러시아에 전가할까? 우크라이나를 서방에 통합하려는 미국과 NATO의 시도가 러시아인들과 윌리엄 번스 현 CIA 국장을 포함한 많은 서방 전문가의 눈에는 중대한 이익 침해로 비쳤는데도 말이다.”라고 지적했다. 미래의 역사학자들이 얼마나 진지한 태도를 보일지 두고 볼 일이다.

또한, 전쟁은 어느 한쪽의 전멸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완전한 승리를 꿈꾸는 전쟁 당사국들의 바람과 달리 현실은 타협을 통해 특정 요구사항을 포기한 채 엉성한 평화 협정에 서명하게 하며 당사자 모두에게 실망을 안긴다. 사실, 완전한 승리를 위한 열망은 종종 전략적 교착 상태로 이어지기도 한다. 어느 한쪽이 눈앞의 승리에 취해, 무조건 밀고 나아간다면 역풍을 맞기도 한다. 1950년 한국 전쟁에 참여한 미국은 북한군의 진격을 막고, 이들을 38선 이북으로 격퇴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목표를 쉽게 달성하자, 미국은 자국의 보호 아래 한반도를 통일시키려는 계획을 고려하는 단계까지 갔다. 이에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병사들은 북으로 전진했고, 이번에는 이들이 한계선을 넘어 중국 국경까지 올라갔다. 그러자 중국이 무대에 등장했고, 150만 지원군을 전장에 내보냈다. 몇 주 후, 공산주의자들은 서울을 탈환했고, 전쟁은 2년간 교착 상태에 빠졌다가 전쟁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과 이란-이라크 전쟁 역시 대표적인 원점 복귀 사례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8년이나 지속됐지만, 승자 없이 100만 명의 사망자만 낳고 끝이 났다.

서방국가 총리들의 지지를 받는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 군대의 약점이 드러나자 정치적, 군사적 목표를 확대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미래의 자유”가 달렸다고 말하는 조지프 바이든 미 대통령과 함께 젤렌스키 대통령은 “완전한 승리”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돈바스에서의 반격에 실패한 우크라이나는, 유럽과 미국 군대의 투입 없이는 크름반도 탈환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유럽과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한다면, 전 세계는 더욱 심각한 위기에 빠질 것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가까운 시일 내에 협상에 나서야 한다. 다른 나라들도 불에 기름을 붓지 말고, 이 두 나라를 협상 테이블에 앉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수년간의 분쟁이 다시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다.

 

 

글·브누아 브레빌 Benoît Brévill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번역·김자연
번역위원


(1) Matej Friedl, ‘War in Ukraine as the Second World War : How is Zelensky shaping the perception of war through historical analogies’, Adapt Institute, 2023.8.2, www.adaptinstitute.org
(2) Yuen Foong Khong, 『Analogies at War. Korea, Munich, Dien Bien Phu, and the Vietnam Decisions of 1965』,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2.
(3) Marc Bloch, 『Histoire et historiens 역사와 역사학자들』 중 ‘Comparaison 비교’항목, Armand Colin, Paris, 1995.
(4) Gerd Krumeich, ‘Le débat sur la responsabilité de la guerre à l’ombre de Versailles, 1919-1933 베르사유 궁전 그늘에서 벌어진 전쟁 책임 논쟁’, <Revue d’Allemagne et des pays de langue allemande>, vol. 52, n° 2, Strasbourg, 2020.
(5) Anatol Lieven ‘Ukraine’s war is like World War I, not World War II’, <Foreign Policy>, 2022.10.27, www.foreignpolic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