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제 폐지 이후 흑인 집단 폭행에 나선 미국

흑인 투표 막기 위한 전방위적 폭력 자행

2024-04-30     로이크 바캉 | 사회학 교수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유가 ‘전 세계에 민주주의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인데 반해 남부에 거주하는 흑인에 대한 인종 차별은 그 이후에 나온 나치의 뉘른베르크 법(유태인 차별 법-역주)보다 더 치밀했다. 로이크 바캉은 자신이 집필한 저서 『짐 크로우 - 미국 내 계급에 기인한 폭력』에 대한 두 번째 글인 이 기사에서 1960년대까지 남아 있던 억압을 목적으로 한 정치 체계를 분석했다.

 

악명 높았던 짐 크로우 법, 흑인들의 정치적 저항 초래

미국 남부 흑인들이 소작농으로서 경제적 악습의 피해자라는 사실과 매일 마주치는 백인들로부터 받는 개인적인 학대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저항했던 첫 번째 행동은 당연히 선거로 정부에 압박을 가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서류상으로는 미국 연방의 수정 헌법 제15조에 따라 1870년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투표권을 얻었다 해도 현실에서는 남부 어떤 곳에서도 투표를 하지 못하고 조직적으로 내쫓겼다.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유권자 등록 규정과 주거 환경, 투표 참가비, 문맹 검사, 형사처벌 시 시민권 자동 박탈이라는 틀에다 지역 공무원의 억지와 강압적인 태도가 더해져 흑인은 정치에 일체 참여할 수 없는 좀비 시민이 되었다(1). 그렇게 정치 활동 제한에 대한 이의 제기는 모두 자체적으로 잦아들었다. “투표하지 않고, 투표할 수 없음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 것이 흑인 계급의 ‘위치’를 구성하는 요소였기 때문”이었다(2).

선거가 다가오자 백인 후보들과 언론은 백인 여성을 노리는 흑인 색마들이 저지른 소위 ‘파렴치한 행동’과 ‘능욕’을 개탄하며 인종 간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선거 기간 동안 이들은 투표와 강간, 흑인의 기표소 입장과 추잡한 짐승인 검둥이들이 정숙한 백인 여성의 성역인 침실에 난입하는 긴박한 상황 사이의 직접적 연관성을 암시하며 백인들에게 ‘국내 전선’을 지켜달라고 호소했다.

선거에 참여하고자 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아우성을 눌러버리기에 비공식적 압박과 폭력으로는 충분치 않음이 드러나자 구 남부 연합은 흑인들의 투표권을 무효화하기 위해 법적으로 흑인들을 막을 수 있는 술수를 동원했다. 이것과 관련해서는 다른 많은 경우에서처럼 미시시피가 좋은 예이다. 주를 상징하는 꽃이 ‘목련꽃’인 미시시피의 주정부가 무력과 부정을 저지르고 유권자 등록에 차별을 두고 협박을 가해 흑인 유권자의 수를 줄이자 피선거권이 있는 흑인의 비율이 1868년 96%에서 1892년 6% 이하로 급격히 떨어졌다. 그리고 1964년에도 여전히 그 비율은 7%밖에 되지 않았다. 1875년에 미시시피의 주도(州都)인 잭슨에서 열린 선거에서는 유권자 270명 중 단 한 명의 흑인만이 투표했다.(3)

 

‘할아버지 조항’, 흑인 투표를 막기 위해 등장

흑인이 선거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치밀한 법 작업이 시작됐다. 이제부터 투표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4개월 전에 선거인명부에 등록돼 있고, 미시시피 주에서 2년 이상, 지역구에서는 1년을 꽉 채워 거주하고(이주한 흑인의 선거 자격을 박탈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각종 세금과 선거세 연 2달러를 완납하고(현금이 거의 없는 가난한 소작농에게는 넘기 힘든 문턱이었다), 방화, 중혼, 사기, 단순 절도를 포함한 범죄 표에 속한 어떤 범죄도 저지르지 않아야 했다. 필요한 경우 마지막으로 주 헌법의 특정 조항을 읽을 수 있는지, ‘합리적인 해석을 도출해낼 수 있는지’와 같이 최대한 모호한 조건을 내걸어 흑인 지원자를 떨어뜨림으로써 유권자 명부 관리를 맡은 지역 책임자들이 백인 문맹자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남부의 다른 주들은 흑인들이 기표소에 가지 못하도록 하는 정식 조치들을 많이 만들기 위해 자신들의 주 헌법을 수정하며 지체 없이 미시시피의 행보를 따랐다. 그렇게 재산, 교육 수준, ‘특성’과 관련된 새로운 조건들이 보편화됐고, 흑인과의 충돌 없이 흑인을 확실히 배제하기 위해 각 행정 구역의 공무원들이 그 조건들을 조정하며 새로운 조치를 적용했다. 몇몇 주는 ‘할아버지 조항’을 적용했다. 그래서 1868년 선거 당시에 선거인명부에 등록했던 할아버지(1900년부터 1909년까지 압도적 과반수가 노예였다)를 둔 거주자만이 선거인명부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4).

방해 공작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투표하고자 하는 흑인들은 너무 어려운 등록 양식들을 받아 실수를 하기도 했는데 이는 등록 반려 사유가 됐다. 또한 그들에게 양식이 “더는 없다”라거나 재차 그리고 언제나 “다른 날 다시 오라”라고 말하기도 했고 그냥 단순히 그들을 무시하기도 했다. 공무원들의 경우 백인에게는 문맹 검사를 면제해 주었으나 흑인에게는 “단어 하나를 잘못 발음했다”라며 유권자 등록 자격을 박탈했다. 그렇게 빡빡하게 하면서도 언제나 흑인의 선거인명부 등록을 막는 새로운 규정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어떤 주도(州都)에서는 흑인이 등록을 하려면 선거인명부에 정식으로 등록된 백인 유권자 둘이 흑인 한 명의 등록을 인정하는 서명을 받아와야 했다.

사법 기관은 흑인들의 선거 참여를 법적으로 저지하는 백인들을 제재하며 기본권을 존중하게 하고 권한 남용을 제한하고 흑인을 향한 폭력을 예방할 힘이 있었다. 그렇지만 ‘짐 크로우’ 체제하에서 법과 정의는 흑인들을 책임지고 보호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억압하는 또 하나의 주체였다. 지역 경찰서, 법원, 징벌 기관 종사자들은 철저하게 인종적 우월성을 신봉하는 백인들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남부 법원, 미 대법원의 동의하에 흑인 권리 무시

경찰은 농장주, 고용주, 민병대원이 가하는 위협과 폭력을 지지하며 흑인이기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에 반하는 행동을, 사소한 행동까지 빠르게 진압했다. 버스 기사, 가스 회사 사원, 우체국 직원, 소방관, 세무서 직원 그 외 공공 기관의 말단 직원은 흑인이 반항할 기미를 조금이라도 보이면 이를 빌미로 경찰의 역할을 확장시켰고 강화시켰다. 학력 수준이 높지 않고 백인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계층 출신인 말단 경찰에게조차 모든 흑인 남성은 태생적으로 범죄자였고 모든 흑인 여성은 천성이 매춘부였다. 그리고 흑인들은 폭력이라는 언어만 이해했으며 엄격히 통제되어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경찰의 가혹 행위는 일상적인 작업 방식이었다. 폭행은 고문과 살인처럼 흔히 자행됐다.

남부 법원들은 미국 대법원의 동의하에 흑인의 권리를 무시했다. 대법원은 남부 법원에서 재판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인종에 따른 편향성을 계도하기 위해 개입할 수 있었지만 이를 수차례 거부했다. 구타와 고문으로 얻어낸 자백이 형사 재판에서 받아들여졌다. 판사들이 선입견을 가지고 편파적으로 말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백인 변호사가 흑인을 변호하는 경우 살해 위협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백인 변호사가 흑인 변호사로 대체되기는 어려웠다. 피고인 입장에서 흑인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는 일이 공공연히 벌어졌기 때문이다. (몇몇 주에서는 심지어 흑인 변호사의 재판 출석이 허용되지 않기도 했다). 그 결과 수많은 피고인들이 변호인의 조력을 받지 못한 채 재판을 받고 형을 선고받았다. 이런 행태는 1940년대까지 지속됐다. 미시시피에서는 살인 사건 재판이 많은 경우 반나절 만에 빠르게 처리됐다. 빠르게 판결을 내리면 피고인과 그 가족을 붙잡으려 하는 분노한 백인 무리가 법정에 난입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흑인 변호사는 거의 없었다. (시골에 흑인 인구가 집중됐는데도 대도시를 제외하면 흑인 변호사가 없었다). 흑인 변호사 대부분은 혼자 공부했으며 고객층은 가난했고 괴롭힘부터 배척까지 여러 어려움에 부딪쳤다. 어떤 행정 구역에서는 흑인 변호사의 법정 입장이나 선서를 금지했고 다른 구역에서는 복도에서 변호해야 했으며, 백인 판사와 백인 증인은 흑인 변호사가 반대 신문을 하는 동안 그들을 경멸하며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하고 욕설을 하기도 했다.

 

흑인 재소자 대여제도가 남긴 깊은 상처

처벌 정도는 인종에 따라 하늘과 땅 차이로 컸다. 예를 들어 조지아에서는 “가축 한 마리를 훔쳐 여러 해 수감된 흑인 남성이 흑인을 살해한 백인 남성보다 더 많다”라는 말이 흔히 통용됐다.(5) 게다가 법원은 백인을 상대로 흑인이 저지른 가장 심각한 범죄에 대해서만 역량을 드러냈다. 사소한 법 위반의 경우에는 보통 여전히 채찍을 쓰는 광산과 벌목장에서 사장과 농장주가 개인적으로 처리했다. 정리하자면 1890년 이후 흑인은 딕시랜드(남부의 여러 주를 의미-역주)의 시민일 때보다 노예였을 때 법의 보호를 더 받았다.

어떤 처벌은 짐 크로우 체제하에 있던 남부의 역사와 이미지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는데 그것은 바로 노동형을 선고받은 재소자를 ‘대여’해주는 것이었다(convict leasing). 1910년대에 이 처벌이 폐지되자 서로의 발이 사슬로 묶여진 죄수들(chain gangs)은 도로 한쪽에서 노역을 하거나 교도소 안에서 자갈을 깨는 일을 했다. 남북전쟁으로 많은 것들이 무너지고 기반시설들이 노후화되자 남부의 여러 주는 교도소 건설과 운영에 비용을 들이지 않으려 하며 철도, 제재업, 탄광 등의 분야 및 솜, 설탕, 담배 생산에 종사하는 기업과 농장주에게 재소자를 대여했다. 농장주와 기업은 주 정부에 재소자 당 (1890년대 조지아에서는 3달러, 미시시피에서는 1.1달러로) 계산해 매달 사용료를 지불했다. 그들은 재소자 감시, 식사, 관리에 드는 비용을 책임졌고 사망자가 속출하는 환경 속에서 재소자를 인부로 부려먹었다.

1880년대 미미시피에서는 임대 재소자의 연간 사망률이 6~16%까지 다양했다. 임대 재소자 중 거의 대부분은 흑인이었다. 그 결과 “임대 재소자 중 단 한 명도 10년 이상의 형기를 마칠 만큼 충분히 오래 살아남지 못했다(6)”. 게다가 여성 재소자는 교도관이나 다른 재소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8세 아동들이 임대 재소자로서 일하러 보내졌다. 납세자들은 교화 못할 범죄자로 취급받는 흑인 아동을 위해 나랏돈을 낭비하는 꼴을 보지 못했다. 임대 재소자들은 정기적으로 채찍질을 당했다.

 

거짓 죄명을 만들어 돈을 번 보안관들

1860년대 초 미시시피에서 재소자 대여가 생겨난 때부터 1920년대 말 앨라배마에서 사라질 때까지 이 행태는 여러 주 정부, 기업, 인력 사무소, 보안관에 상당한 이익을 가져다줬다. 테네시 주는 강제 노동형을 선고받은 수감자의 소변까지 지역 내 피혁 공장에 팔았고, 내슈빌 의대에 수습되지 않은 시신을 판매했다. 기업도 죄수들을 사용했으며 인력 사무소는 그들을 재대여했다. 보안관은 흑인을 대여 재소자로 만들기 위해 사소하거나 꾸며낸 죄명으로 흑인을 체포할 때마다 수고비를 받았다.

흑인을 천성이 충동적이고 폭력적이라고 본 까닭에 정부는 흑인들끼리의 폭행과 강간 등 여러 범죄가 일어나도 대개 모른 체했다. 이로 인해 흑인 사회에서의 폭력 발생률은 상당히 높았다. 그래서 당시 상황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었다. “검둥이가 백인을 죽이면 살인이다. 백인이 검둥이를 죽이면 정당한 살해다. 검둥이가 검둥이를 죽이면 검둥이 하나가 줄어든 것이다(7).” 그래도 농장주는 자기네 소작인이나 농사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개입했다. 교도소에 노동 인력을 뺏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흑인을 정치나 사법 체계에서 배제시키는 일은 함께 일어났다. 투표권 박탈로 인해 흑인은 배심원이 되지 못하는 동시에(배심원 후보 명단에 들기 위해서는 선거인명부에 이름이 기입됐어야 했기 때문이다.) 학교와 다른 공공 서비스 지원금에서 흑인에게 할당된 몫이 사라졌다. 반대로 사법 체계에서의 배제는 흑인이 투표권을 포함한 자신의 권리를 지키게 하는 데 법원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음을 의미했다.

흑인에 대한 폭력은 크게 세 가지 양상을 보이는데 숨 막히는 공포 속에서 흑인이 목숨을 잃도록 만든다는 목적에 집중했다. 일상에서 자행되는 협박과 폭력, 인간 사냥, 집단 폭행, 집단 학살 같은 폭력은 짐 크로우 체제에서 백인들 간 유대감을 형성시키는 데 쓰였다. 미시시피 출신의 소설가 리처드 라이트는 자전적 소설 『깜둥이 소년(Black Boy)』에서 “깜둥이로서 내 행동에 영향을 미친 일들이 내게 일어날 필요는 없었다. 내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그 일로 인한 영향을 모두 체감하는 데에는 그 일에 대해 듣는 것으로 충분했다. 사실 내가 목격하지 못했던 백인의 폭력은 내가 겪었던 폭력보다 내 행동을 더 효과적으로 제어했다(8)”라고 고백했다.

집단 폭행은 학술적인 만큼 대중적인 이미지로 짐 크로우 체제와 긴밀히 연결된다. 그렇지만 사법 절차의 법적 형식에서 벗어나 ‘공동체의 정의’의 형태로서 일어난 집단 폭행은 미시시피에서만 행해진 것이 아니며 흑인만을 대상으로 하지도 않았다. 미국 모든 지역에서 행해진 집단 폭행은 1880년대까지 특히 백인에게 영향을 미쳤다. 당시 집단 폭행의 속내가 갑자기 ‘새까매’졌다. 집단 폭행은 남부 연합파의 계급 권력에 있어 물질적이고 상징적인 도구가 됐고 과거 노예였던 자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시민적,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목적을 뒀다. 그렇게 1882년과 1968년 사이 남부 깊숙한 곳에서 집계된 집단 폭행의 피해자 90%가 흑인이었다. 서부의 산이 많은 주들과 캘리포니아에서는 5%였다(9).

 

빙산의 일각만 드러난 ‘흑인 사냥’

또 다른 오해는 흑인 남성들이 잠정적으로 혹은 실제로 저지른 성폭행으로 인해 주로 집단 폭행이라는 벌을 받았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1881년부터 1946년까지 조사한 집단 폭행 4715건 중 25%나 차지하는 원인은 백인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아 일어난 보복이었다(때로는 백인을 욕한 것 정도로 경미한 사안이었다). 즉, 집단 폭행의 이유를 비율로 봤을 때 백인에 대한 무례가 강간 및 강간 미수와 비슷했다.(10) 백인들이 봤을 때 전반적으로 저 흑인이 ‘uppity’해졌다(거만해졌다, 건방져졌다)라거나 뻔뻔해졌다는 인상을 받으면 그 흑인은 사형을 선고받을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백인들은 자신이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1915년부터 1932년까지 “집단 폭행 가해자와 구경꾼-구경꾼도 잘못이 없진 않았다-수만 명 중 49명만이 고발당했고 4명이 유죄 선고를 받았다(11).

그렇지만 흑인들을 죽게 한 집단 폭행은 폭행을 시도하고 폭행을 하겠다는 위협에 비하면 거대한 빙하 끝에 드러난 일부에 불과했다. 거기다 법원은 폭력을 예방한다는 구실로 사형과 중형을 상당히 많이, 신속하게 선고했다. 한쪽에서는 집단 폭행을 당한(터스키기 연구소에 따르면 1890년부터 1968년까지 최소 3446명이 집단 폭행을 당했다.) 흑인 수천 명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흑인 수천 명이 “교류가 활발하지 않은 행정 구역에서 조용히 살해당했고 시신은 강이나 개울에 던져졌다”. 흑인 사냥(nigger hunts)은 더 자주 일어났다. 흑인 사냥을 하는 동안 백인 무리(posse) 수십, 나아가 수백 명이 무기를 잔뜩 들고 흔히 만취한 채 시골을 돌아다니며,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가 있거나 고발당한 흑인을 쫓았다.

형식적 측면에서 인간 사냥과 맞닿아 있는 흑인 사냥은 백인 경비원과 민병대의 활동으로 남북전쟁 이후 남부에서 급증했다. 그중 가장 유명하고 가장 잘 조직된 단체가 ‘큐 클럭스 클랜(KKK)’이었으며 ‘화이트 리그’와 ‘나이츠 오브 더 화이트 카멜리아’도 세 손가락 안에 꼽혔다(12). KKK단이 창설된 당시 남북전쟁 이후 여러 해 동안 이 단체는 미국 재건을 방해하는 ‘악독한 것들’과 그리고 미국 인구에서 ‘잡종’이 많아짐으로 인한 남부 연합 사회의 ‘흑인화’처럼 자신들이 규탄하는 대상과 싸우는 데 목적을 뒀다(13). 단원들은 스스로를 늘어나는 흑인 가해자의 범죄를 저지하고 흑인과 (흑인 해방을 담당하는) 공화당 당원의 정치 참여를 억누르는 역할을 맡은 사법 기관이나 단체의 요원으로 생각했다. 연방 정부는 1871년 이 비밀 단체가 해산되도록 강제 조치를 가했다.

 

KKK단원들, 테러를 저지하는 위인의 전당에

1915년 창설됐으며 1926년까지 미국 전역으로 지부를 늘려나간 제2차 KKK단의 기본 신조는 ‘100% 미국의 정신’이었는데 여기에는 ‘백인 남성의 나라’로의 회복, 개신교 확립, 엄격한 가부장제 복원이 들어있었다. 제2차 KKK단원들은 흰 가운과 흰 복면을 걸치고 무장한 채 말을 타고 열을 지어 행진했으며 불타는 십자가를 세워뒀는데 이것이 그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복장과 의식은 D. W. 그리피스 감독이 촬영하고 1915년 개봉한 친남부 연합주의 및 인종차별주의 영화 『국가의 탄생』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들은 흑인뿐 아니라 유대인, 카톨릭 교도, 이민자, 성별에 따라 확립된 규범에서 벗어난 여성도 위협과 폭력의 대상으로 삼았다. 인종 간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흑인들이 일으킨 폭력, 총격, 농장 훼손 및 방화로 인해 단원들은 미국 내 테러를 저지하는 위인의 전당인 판테온에서 영광의 자리를 꿰찼다.

백인이 흑인을 집단 학살한 사건 중에는 1921년 (오클라호마 주) 털사시(市)에 있는 그린우드 지구를 대상으로 한 사건이 가장 심각했다. 그린우드는 ‘블랙 월 스트리트’로 알려진 곳이었다. 사건이 일어난 날 24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이곳에 거주하는 흑인 수백 명이 살해당했고 (정확한 숫자는 현재도 의견이 분분하다.) 천여 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흑인에 대한 공격(14)으로 번화한 집합 건물 35채가 불에 탔으며 주거지 1,300여 채가 파괴되고 상점 수십 개가 무너졌다. 이 ‘인종 전쟁’은 백인 여성 승강기 운전원을 성추행했다는 혐의를 받은 흑인 10대 배달원을 집단 폭행하려 한 데에서 시작됐다. 여기에 무장한 흑인 거주민들이 개입했다. 그러자 백인 무리들이 대응했고 지역 경찰과 국민군이 이들을 돕고 무기를 지원했다. 시 당국은 적극적으로 살인과 약탈, 방화를 부추겼다. 그리고 백인 시민 수백 명에게 배지, 무기, 탄약을 나눠주며 경찰 보조 역할을 맡겼고 흑인 약 6000명을 구류했다.

인종 살육을 야기한 이번 사건은 백인과 흑인 사이의 성과 관련된 행동거지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지만 상황이 걷잡을 수 없어지게 된 구조적인 힘에는 그린우드 거주자들이 차지한 값나가는 땅들을 탈취하고자 하는 털사시 내 산업체와 철도 기업의 욕망, 이 도시에 사는 흑인들의 경제적 풍요로움에 대한 백인들의 분노 그리고 자부심이 크고 번영한 흑인들을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미국 전역을 통틀어 유례없이 심각했던 폭동은 다음 메시지를 남겼다. 흑인이 경제·사회적으로 얼마나 성공을 이뤘든지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가 어느 때라도 사라질 수 있는 하류층에 속할 것이다.

그럼에도 짐 크로우 체제에서 가장 눈에 띄는 폭력의 형태는 공개 고문을 동반한 집단 구타다. 공개 고문의 역할은 대중의 볼거리를 제공하고 흑인을 희생양 삼는 것이었다. 물론 흥분한 군중 앞에서 죽이기 전의 고문과 죽인 후의 고인 모독이 포함된 ‘인종 측면에서 축제-이런 충격적인 표현을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같은’ 위 형벌은 문서에 기록된 전체 집단 폭행 중 10%에 조금 미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집단 폭행의 영향은 횟수와 전혀 관계가 없었다. 집단 폭행이 일어나면 민족과 인종에 관한 절대적인 힘의 메시지가 전달됐고 공포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입에서 입으로 그리고 백인의 상업 문화 속에서 신문 기사, 사진, 기념품, 한정된 기간 동안 특별히 인쇄된 엽서의 형태로 만들어진 방식을 통해 집단 폭행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15). 이런 ‘공동의 정의’를 보여주는 연출은 공들여 짠 시나리오에 따라 만들어졌다.

 

처참했던 공개 사형 집행, 백인 관객 수천 명 몰려 

흑인 피의자는 체포되든 (흔히 지역 보안관과 공모한) 교도소나 법원에 끌려오든, 소위 백인 피해자들에 의해 간략히 신원이 확인되고 구타를 당했으며 정식 재판이 아닌 모의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자백을 강요받은 뒤 전환을 상징하는 무덤, 도시의 중심지 가까이에 있는 참나무, 다리, 사거리 등 종교적, 정치적 의미로 인해 선정된 장소로 떠들썩하게 옮겨졌다. 화형이나 총살, 내장 적출, 익사, 교살, 교수형 중 처형 방법은 곧 시작될 공연을 볼 생각에 흥분한 ‘무리’의 투표로 결정되곤 했다. 때로는 군중이 이 공연을 더 잘 볼 수 있게끔 더 높은 연단이 설치되기도 했다.

여러 신문에 사형 일정을 게재하고 사형 집행이라는 볼거리에 열광하는 여행객들로 가득 찬 특별 소풍 열차를 대절해야 했기 때문에 사형 집행 의식 개최일은 여러 날 전 미리 계획됐다. 회사는 직원이 사형 집행이라는 축제에 참석할 수 있도록 외출을 허가했다. 학교는 시간표를 조정했다. 멀리서부터 백인들이 운전한 차로 인해 처형장으로 알려진 장소로 이어진 도로는 꽉 막혔다. 사형 집행일에는 관객 수천 명이 자리했다. 그 지역에 사는 수많은 백인이었다. 여기에는 나들이옷을 입은 아이들을 데려온 가족들도 있었다. 아이들은 소풍을 나와 즐거워했다. 관객들은 몇 시간 동안 흑인 사형수에게 (피부를 벗기고 가죽을 썰고 등유를 붓고 인두로 낙인을 찍고 양 귀를 뽑고 신체 일부를 적출하고 사지를 절단하고 내장을 들어내고 거세하는 행위를 혼합한) 가학적 신체 훼손 행위를 가하고 약한 불로 서서히 태운 뒤 끝에는 ‘나쁜 검둥이(bad niggah)’를 교수형이나 총살로 처형하는 장면을 보며 즐겼다.

그가 죽으면 제일 담력이 큰 구경꾼들이 열정적으로 뒤엉켜 사망한 흑인에게 몰려들었다. 그의 신체 일부(손가락이나 발가락, 치아, 부러진 뼈, 잘린 간, 잘리고 불에 그을린 심장), 교수형에 쓰인 밧줄이나 나뭇가지 일부같이 귀중한 기념품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그 기념품을 소장하거나 가까운 이들에게 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화형대나 교수대 앞에서 사진을 찍히기 위해 빠르게 달려갔다. 현장에서 휴대용 인쇄기로 만들어지는 엽서에 나오기 위해서였다. 팔다리가 절단되고 해체되고 불탄 희생자의 나체는 흑인에게 정의를 구현하는 가공할 힘을 보여주기 위해 시각적으로 참혹한 모습을 보여주고자 나무나 전봇대에 올려 몇 주 동안 줄 끝에 매달린 채 방치됐다. 지역 신문은 이 ‘검둥이들의 바비큐’에서 느꼈던 사육제 분위기를 유려한 문체로 다뤘다.

짐 크로우 체제하에서 흑인 대상 폭력에 대한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했다. 처형 방법은 보통 여러 가지가 합쳐졌다. 흑인 피해자 한 명을 먼저 약한 불에 산 채로 태운 뒤 목을 매달고 마지막으로 리볼버나 소총으로 수백 발을 몸에 관통시켜 죽일 때도 있었고, 먼저 목을 매단 뒤 신체 일부를 절단하고 불에 태우기도 했다. ‘넥타이 파티’라 부르는 의식을 할 때는 여러 피해자의 목을 한 나무에 한꺼번에 매달기도 했다. 1911년 켄터키 주에서는 백인에게 총을 쐈다는 이유로 체포돼 처벌을 받은 흑인을 리버모어 오페라 극장에 데려가 무대 위에 묶어뒀다. ‘심판관’ 백여 명이 그에게 총을 조준해 그의 몸이 총알투성이가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발코니석 입장권으로는 총알을 한 발 쏠 수 있었다. 오케스트라 가격을 지불하면 총알이 소진될 때까지 쏠 수 있었다(16).

 

짐 크로우 체제, 세계에서 가장 야만적 인종 차별 정책

이런 계급과 관련된 분노의 축제는 하류층에 속한 가난한 백인 시골뜨기(peckerwood)에게 처음으로 역할을 부여한 공동체 행사였지만 마을의 유력자(white quality)가 참석하는 행사이기도 했다. 이들은 오랜 기간 교회의 암묵적 지원을 받았으며 공권력이 보인 태도와 정부가 부여한 면책 특권으로 공개 지지를 받았다. 사실 집단 폭행 사진에는 보안관과 판사, 지역 경찰이 등장한다. 집단 폭행 사진은 이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20세기 초 만든 엽서와 사진 컬렉션의 형태로 널리 알려졌다. 법의학자들 사이에서는 남부에서 통용되는 인종적 규범에 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벌어진 이런 살인을 기술하는 관용구가 있다. “피해자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손에’ 사망했다(17)”라는 것이다.

개인과 민병대는 되는 대로 무력을 써 재산을 몰수하고 지속적으로 위협하고 난데없이 흑인을 내쫓고 폭행과 살인을 저지르지만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사법 기관은 법을 불법적으로 적용했다. 공개 고문과 집단 폭행, 폭동이 일어났다. 백인들은 필요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자기네 ‘검둥이들(darkies)’을 바닥에 붙여 놓고 백인의 우월함에 대한 흑인들의 동의, 더 나아가서 승낙을 억지로 얻어내기로 결의했다. 당연히 흑인들은 새로운 남부에서의 자유로운 삶이 노예 시절보다 ‘더 끔찍하다’고 생각했다(18).

평화의 시기에 속한 현대 역사를 봤을 때 인종 분리 정책을 펼친 나라 중 어느 곳도(남아프카공화국이 탄생한 1910년부터 아파트르헤이트라는 인종 차별 정책이 사라진 1991년까지 반투족과 관련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나치가 반유태인 법을 처음 도입한 1933년부터 정복 전쟁에 돌입한 1939년까지의 독일에서도, 독립하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불가촉천민인 달리트에 대해 인도에서도, 도쿠가와 시대인 1603년부터 1867년까지 신분제 최하층이었던 부라쿠민에 대해 일본에서도) 미국 남부의 짐 크로우 체제만큼 신체를 야만적으로 구속하고 사망에 이를 수 있는 폭력을 자행한 곳은 없었다.

 

 

글‧로이크 바캉 Loïc Wacquant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사회학 교수, 파리 유럽 정치 및 사회학 연구소(Centre européen de sociologie et de science politique) 객원 연구원. 주요 저서로 『짐 크로우–미국 내 계급에 기인한 폭력(Jim Crow. Le terrorisme de caste en Amérique』이 있다. 본 기사는 이 책의 일부를 발췌해 편집했다.

번역‧김은혜
번역위원


(1) V. O. Key, 『Southern Politics in State and Nation 주와 국가에서 남부 정치 체계』, Knopf, New York, 1983 (1re éd. : 1949).
(2) John Dollard, 『Caste and Class in a Southern Town 남부 도시에서 계급과 계층』,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Madison, 1989.
(3) Neil R. McMillen, 『Dark Journey. Black Mississippians in the Age of Jim Crow 어두운 여정. 짐 크로우 시대에 미시시피에 살았던 흑인들』,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Urbana, 1990.
(4) Michael J. Klarman, 『From Jim Crow to Civil Rights. The Supreme Court and the Struggle for Racial Equality 짐 크로우부터 시민권까지. 대법원과 인종적 평등을 위한 투쟁』, Oxford University Press (OUP), 2006.
(5) Leon F. Litwack, 『Trouble in Mind. Black Southerners in the Age of Jim Crow 심적인 고충. 짐 크로우 시대의 남부 흑인들』, Knopf, 1998.
(6) David M. Oshinsky, 『Worse Than Slavery. Parchman Farm and the Ordeal of Jim Crow Justice 노예제보다 더 심했던 짐 크로우 체제. 파슈만 농장과 정의의 시련』, Free Press, New York, 1997.
(7) Edward L. Ayers, 『Vengeance and Justice. Crime and Punishment in the Nineteenth-Century American South 복수와 정의. 19세기 미국 남부의 범죄와 처벌』, OUP, 1984.
(8) Richard Wright, 『Black Boy. A Record of Childhood and Youth 흑인 소년.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의 기록』, Library of America, Washington, DC, 2020 (1re éd. : 1945).
(9) Orlando Patterson, 『Rituals of Blood. Consequences of Slavery in Two American Centuries 피의 의식. 미국에서 2세기 동안 노예제의 결과』, Civitas Books, New York, 1998.
(10) Jennifer L. Ritterhouse, 『Growing Up Jim Crow. How Black and White Southern Children Learned Race 짐 크로우 체제에서의 성장. 흑인과 백인 아이들은 어떻게 인종을 배웠나』,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UNC Press), Chapel Hill, 2006.
(11) Arthur F. Raper, 『The Tragedy of Lynching 집단 폭행의 비극』, UNC Press, 2017(초판 편집 1933).
(12) ‘화이트 리그’는 남북전쟁에서 남부가 패배함으로써 갖게 된 쓰라린 경험과 흑인의 투표권을 찬성하는 공화당 지지자들을 억압하고자하는 마음이 동력이 되어 1870년대 동안 활동한 군대식 단체였다. ‘나이츠 오브 더 화이트 카멜리아’는 남북전쟁 이후 창설된 비밀 민병대로서, ‘인종의 혼합’을 저지하는 테러가 주요 목적인 단체였다. 
(13) Elaine Frantz Parsons, 『Ku-Klux. The Birth of the Klan During Reconstruction 쿠 클럭스. 미국 재건이 실시될 동안 탄생한 클랜』, UNC Press, 2015.
(14) 집필진 각주. 공격은 지상과 공중에서 일어났으며 비행기가 송진을 채운 폭탄을 투하했다.
(15) 제임스 알렌이 쓴 『Without Sanctuary : Lynching Photography in America 피난처의 부재: 미국 내 집단 폭행 사진』 (Twin Palms, Santa Fe, 1999.)에서 일부 확인할 수 있다.
(16) Philip Dray, At the Hands of Persons Unknown : The Lynching of Black America 모르는 이의 손에서: 검은 미국의 집단 폭행, Modern Library, New York, 2007. 프랑스에서는 해당 집단 폭력 장면이 1911년 5월 7일 자 <르프티 주르날>의 부록 표지 그림으로 게재됐다. 삽화 제목은 ‘극장 무대에서 총살당한 검둥이’였다. 
(17) 흑인에 대한 일반적인 집단 폭행과 그와 다른 집단 살해 이후 제시된 포괄적 문구에 따르면 그와 같다.
(18) Neil R. McMillen, Dark Journey…, op. c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