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위험을 과장하는 서구
러시아가 나치라고?
우크라이나에서 공세를 강화하는 러시아, 의회에 계류 중인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안, 고립주의 회귀가 예상되는 백악관의 상황 등, 유럽은 최근 우크라이나에서 위기가 고조됨에 따라 더욱 강경한 태도로 나가고 있다. 유럽의 지도자들은 막대한 국방비 지출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금의 러시아를 과거 나치의 위험에 빗대고 있다. 다른 역사의 교훈은 모조리 무시한 채로 말이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전세는 우크라이나 정부와 서방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우크라이나 군대는 러시아 침략 이후 막대한 군사·경제 지원(2024년 2월 중순 1,600만 유로(1))을 받고도 여전히 많은 어려움에 처해 있다. 우크라이나 군대는 2023년 여름 반격에 실패한 이후로 돈바스 지역의 도시인 아우디이우카에서 퇴각해야 했다. 반면 러시아 군대는 야금야금 영토를 넓혀가는 중이다.
서방 군대의 기술적 우위도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무엇보다 우크라이나는 탄약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설상가상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안이 의회 통과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한동안 사태가 장기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우크라이나 문제를 ‘24시간’ 내에 해결하겠다는 공약을 내건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는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우크라이나에는 “단 한 푼”도 재정을 지원할 생각이 없다고 으름장을 놨다.
한편 두 나라의 ‘화력 격차’도 점차 심해지고 있다. 각종 추산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1발당 러시아는 5~10발의 포탄을 쏟아붓고 있다.(2) 한편 우크라이나는 인구 차이로 인한 여파도 심각하게 체감하고 있다. 전 우크라이나군 사령관 발레리 잘주르니 장군은 이에 앞서 2023년 11월 1일자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머지않아 (...) 우리는 단지 전투를 치를 인력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라고 우려한 바 있다.
유럽은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전략적 변화를 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2월 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오히려 전선과 워싱턴 정가에서 들려오는 좋지 못한 소식을 빌미로 똑같은 전략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심지어 그는 한 단계 선을 넘어섰다. 2월 26일 프랑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동맹국 정부 및 국가수반 21명이 모인 파리 회의에서 ‘지상군’ 투입 가능성을 발표했다. 마크롱의 선언에 많은 유럽국 정상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극도로 과민한 서방, 호전적인 발언 이어져
지상군 투입은 핵 시대가 열린 이래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매우 특수한 상황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과거 베트남에서는 미국 병사들이 소련이 제공한 무기를 든 적군과 맞서 싸웠다.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소련군은 미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탈리반 세력과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두 핵 강대국이 직접 제3국의 영토에서 얼굴을 맞대고 충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호전적인 수사는 극도의 과민 상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미 대러시아 제재 조치의 역풍으로 어려움에 처한 유럽은 이번에는 미국 군사 지원의 배턴을 고스란히 이어받아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게다가 지칠 대로 지친 국민들에게 우크라이나 지원을 지속해야 할 필요성을 설득하기 위해, 과연 러시아의 임박한 패배가 아닌, 다른 논리를 동원하는 것은 적절한 것인가?
어느새 연설 속에 등장하는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수렁에 빠진 ‘국내총생산(GDP)이 스페인과 동급’(3)인 나라가 아니다. 프랑스의 국익을 직접 겨누는 ‘존재론적인 위협’에 해당하는 동시에, ‘멈출 수 없는’(4) 팽창주의 세력으로 간주된다. 코민테른 시절과 마찬가지로, 러시아는 정치적 영향력을 이용해 나머지 유럽국에 자신의 체제를 강요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내부의 적’이란 테마의 새로운 버전이라도 되는 것일까. 가브리엘 아탈 프랑스 총리는 지난 2월 26일 의회 연설 도중 국민연합(RN) 소속 의원들을 버젓이 나치 점령군에 비유했다.
러시아는 수데텐을 침공했던 나치와 달라
러시아의 위협은 의도적으로 과장된 측면이 있다. 현재 서방에서는 프랑스 외무장관을 비롯해(5) 많은 이들의 입에서 오로지 현 러시아는 단 하나의 대상에 비교될 뿐이다. 그것이 바로 1938년 9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소수민족인 독일인의 보호를 명분으로 수데텐(주데텐란트)을 침공한 나치 독일이다. 다른 역사적 사건은 모두 제외한 채 이처럼 오로지 공론장에서는 나치 독일만이 끝없이 회자될 뿐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영토 부족을 이론화한 교리를 표방하는 히틀러의 ‘레벤스라움’(Lebensraum, 국가와 민족의 생존과 발전에 필요한 공간적 영역을 뜻하는 지정학 용어로 나치 독일의 이념적 바탕이 된 개념-역주)과는 다른 나라다. 게다가 러시아의 유럽 팽창주의의 동인은 전통적으로 안보적 측면의 위기의식과 관련이 깊었다. 러시아 군사문제 전문가 이자벨 포콩이 지적한 것처럼,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공격적 행위에 대한 깊은 방어 본능에 부응”(6)해왔다.
20세기 후반의 역사는 러시아 행동 양식에서 변하지 않는 불변의 요소를 잘 보여준다. 히틀러의 위협이 점증하는 가운데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1939~1940년)한 것은 옛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해당하는 레닌그라드의 방어를 강화할 목적으로 ‘예방적’ 차원의 합병을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모스크바의 입장에서 독소불가침조약도 동일한 안보 목표를 추구했다. 말하자면 독일 제3제국의 다음 타깃이 되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던 소련은 자국이 배제된 뮌헨 협정에 조응하는 협정을 맺기를 원했던 것이다. 또한 발트해 연안국과 폴란드 동부 지역을 잠재적 침략에 맞선 ‘완충지대’(원문은 ‘글라시스(glacis)’. 요새나 보루 전면의 비스듬한 제방을 의미하는 말로, 자국 방어를 위해 확보한 땅을 지칭하는 지정학 용어로도 쓰인다-역주)로 삼음으로써, 독일군이 옛 수도나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속도를 늦추고자 했던 것이다.(7)
소련이 강구했던 안전보장 방안들
1945년 막대한 민간 및 군사적 피해를 초래한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 모스크바는 서방의 잠재적인 새로운 침략에 맞서 삼중의 보호막을 갖췄다. 소련은 독일의 절반을 점령하는 한편, 폴란드와 루마니아, 발트 3국, 체코슬로바키아 등 병합한 영토들을 1939~1945년 소비에트화하고, 여러 우호적인 공산정권을 수립했다.
독일이 군사 강국으로 재부상하는 상황은 당시 소련뿐 아니라, 소련의 영향력 아래 있던 많은 동유럽 국가들에게도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이는 동유럽 국가들이 소련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요인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소련은 자국 군대의 철수와 안전보장을 연계한 이론을 구상해냈다. 1952년 이후 스탈린은 독일 땅에서 모든 외국 군대를 철수하고,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는 한편, 군사적 중립성(1955년 마지막 남은 소련군이 모두 철수한 오스트리아 모델을 따라)을 유지하겠다고 약조하는 조건으로, 독일의 통일을 제안하는 ‘노트’를 서구에 전달했다.(8)
하지만 서구의 국가들은 독일이 중립국이 되는 순간 소련의 영향력에 취약해질 것을 우려해 소련의 제안을 거절했다. 소련은 1955년 5월 독일연방공화국(FRG, 서독)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에 대해, 서구가 독일을 재무장시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흑심을 여실히 보여준 증거라고 비난했다. 더욱이 독일연방공화국(FRG)이 독일과 폴란드 간 국경인 오데르나이세선을 인정하지 않는 것 역시 소련의 불안을 더욱 가중했다. 소련은 결국 자국을 보호하는 완충지대와 전후 영토들, 한 마디로 당시 ‘1945년의 현실(realities of 1945)’이라고 불리던 상태를 유지하기로 결심했다.
30년 뒤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극심한 경제난 속에서 중대한 전략적 후퇴를 수용했다. 다시는 옛 독일민주공화국(DDR, 동독)의 영토에 외국군을 주둔시키지 않겠다는 구두 약속을 대가로, 독일의 통일과 NATO 가입에 찬성한 것이다.(9) 이처럼 ‘독일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면서, 소련 진영의 옛 군사 동맹인 바르샤바 조약이 해체됐고, 이어 소련도 붕괴됐다. 불과 3년 만에 소련은 완충지대를 잃었고, 구소련국가들이 줄줄이 독립함에 따라 자국 영토의 17%를 ‘상실’하게 된다.
러시아의 보수주의 엘리트층, 특히 군인들에게 이는 고배를 마신 듯 쓰라린 고통을 남겼다. 러시아인(이 단어가 지닌 인종적 의미에서) 2,500만 명이 신흥 러시아연방의 국경 지대 밖 거주자로 전락했고, 때로는 자동적으로 누리던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고르바초프를 몰아낸 보리스 옐친과 함께 크렘린궁을 장악한 자유주의 세력은 서방과 진정한 협력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러시아가 곧 다른 유럽 국가들과 대등한 국가로 대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다음 일어난 일은 모두가 익히 아는 대로다. 북대서양 동맹은 계속 존속했고, 2004년 러시아 국경에 바짝 다가설 정도로 확장을 거듭했다.
“러시아는 NATO가 자국 안보 이익에 반드시 불리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10)고 이자벨 포콩은 지적했다. 서구가 내놓은 위로금(1997년 러시아 G7 참여, 2002년 나토·러시아위원회(NRC) 설치)도 러시아의 생각을 바꾸지 못했다. 오랜 기간 프랑스와 독일은 미국의 대러시아 봉쇄정책을 완화하기 위해 부지런히 뛰어다녔다. 프랑스 외교계는 1997년 5월 체결될 나토-러시아 간 관계 개선에 관한 ‘기본 의정서’ 작성에 큰 힘을 보탰다. 새로운 나토 회원국의 영토에 외국 군대의 영구 기지를 설치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내용이 골자였다.(11)
한편 독일은 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에너지 협력(노르트스트림 1, 2)에 앞장섰다. 그런가 하면 독일과 프랑스는 2008년 우크라이나의 가입 희망국 지위 부여에 반대했다. 여러 유화책에도 불구하고, 유럽 인근의 안보 상황은 나날이 악화됐다. 사실상 폴란드와 발트해 연안국이 큰 혜택을 누린 북대서양연맹의 팽창은 러시아 정부가 또 다른 인접국을 향해 반격에 나서도록 만들었다.
NATO의 팽창에 맞서, 러시아 정부는 2008년 조지아에 이어 2014년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예방적’ 차원을 자처한 군사 개입에 나서는 것으로 맞불을 놨다. 매번 러시아가 미국의 군사적 압박으로 간주하는 행위가 미칠 수 있는 간접적 영향을 해소하기 위해 유럽에서는 특사가 파견됐다. 가령 프랑스 전 대통령 사르코지는 2008년 푸틴 대통령이 트빌리시에서 철군하도록 설득한 일로 의기양양해했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의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과 독일의 앙겔라 마르켈 총리도 크름반도 병합 때문에 불거진 러우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2015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민스크 협정의 보증인 노릇을 했다.
협상을 거부한 우크라이나, 유럽에 막대한 피해 초래
2022년 4월까지 러시아 정부의 요구사항 대부분이 독일 통일을 다룬 소련의 제안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듯 보이는 것은 단순히 우연일까? 더욱이 2022년 3월 벨라루스에 이어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열린 협상의 중요한 축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그해 4월 7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사상 처음으로 우크라이나 측이 비핵, 비동맹, 중립국을 선언하는 한편, 러시아 연방을 포함해 향후 조약의 모든 보증자들이 승인하는 경우가 아닌 한, 결코 자국에 외국 군대를 주둔시키거나 혹은 자국 영토에서 외국 군대와 합동 훈련을 벌이지 않을 의지가 있음을 문서화했다”고 만족해했다.
물론 당시에도 일부 입장 차이는 존재했다. 우크라이나는 제3국의 ‘자동적인’ 안전보장을 기대했다. 그런가 하면 러시아는 미래 조약의 보증자로서, (비우크라이나 군대가 참여하는 모든 군사 개입과 관련해) 거부권을 갖기를 희망했다. 심지어 2022년 4월 초 러시아군의 부차 학살이 드러난 뒤에도, 대화는 지속됐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정부가 서방의 대량살상무기 지원을 약속받은 뒤 대화는 돌연 중단됐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훗날 유리한 고지에서 다시 회담장에 복귀할 수 있으리라 확신하며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나갔다.
현재 이러한 서구의 도박 행위는 우크라이나인과 유럽의 안보에 막대한 피해로 되돌아오고 있다. 서방의 포위에서 벗어나는 데 혈안이 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개입으로 안보 상황이 더욱더 악화됨에 따라, 우크라이나 영토 점령에 이전보다 더 열을 올리고 있다. 가령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이 확대되는 한편, NATO와 등을 맞댄 러시아의 국경선이 더욱 늘어났다. 설상가상, 러시아 정부는 2022년 10월 우크라이나 4개 지역의 병합 사실을 헌법으로 명문화하면서 더욱 사태를 악화시켰다. 외교적 상황도 상당히 복잡해졌다. 이제는 더 이상 ‘철군’을 담보로 ‘안보’를 요구하는 협상은 통용되지 않는다.
2023년 여름 만족감에 도취된 서구처럼, 이번에는 러시아가 새로운 영토를 양보받기 위해 우크라이나 정부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기를 원한다. 유럽의 지원은 러시아 정부가 기존에 생각한 협상 대신 사태 악화만 부채질하고 있다. 왜냐하면 프랑스와 독일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을 자신들이 추구한 유화 정책을 저버리는 행위라고 생각하지, 결코 미국의 도발이 초래한 극단적 결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독일은 서로 라이벌 관계임에도 미국의 지원을 함께 대체해야 한다는 데 서로 뜻을 같이한다.
냉전시대 위기사태 해법을 참고해야
가령 지난 2월 유럽연합은 우크라이나와 양자 간 장기 안보조약을 체결하는 한편, 4년간 500억 유로의 기금을 지원하기로 잠정 합의했다. 유럽은 대러시아 제재의 여파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고,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도 이미 증액한 바 있다.(12) 이런 상황에서 또다시 미국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완전히 대체하려면, 2024년 군비 지원의 규모와 횟수를 지금보다 훨씬 더 확대해야 할 것이라고 킬 세계경제연구소는 평가한다. 만일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으로 이듬해부터 미국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완전히 발을 빼기라도 한다면, 과연 지금처럼 유럽이 러시아와 대립하며 온 부담을 떠안는 전략을 계속 고수할 수 있을까?
어떤 쪽이든 전선이 무너지는 순간, 확전의 위험이 커질 것이다. 우크라이나가 전쟁에 진다면, 현 분쟁은 엄청난 규모로 러시아와 NATO 회원국 간 국경을 따라 더욱 확대될 것이다. 반면 러시아가 크름반도에서 패한다면, 이번에는 핵 충돌 위기가 증가할 것이다.(13) 그렇다면 이제 또다시 새로운 베를린 위기가 찾아오는 것일까? 1958년 유럽은 이미 핵전쟁 위기에 휩싸인 바 있다. 당시 간신히 재앙을 피한 유럽은 군비 축소를 위한 대대적인 대화에 물꼬를 텄다. 어쩌면 냉전 시대의 수많은 위기 사태는 사실상 1938년 사태에 빗댄 프랑스 대통령의 도덕 수업보다 훨씬 더 유익한 가르침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글·엘렌 리샤르 Hélène Richard
언론인
번역·허보미
번역위원
(1) Ukraine Support Tracker, 2024년 1월 15일 현황, Kiel institute for the World Economy, www.ifw-kiel.de.
(2) Jack Watling, ‘Ukraine must prepare for a hard winter’, Royal United Service Institute, http://rusi.org.
(3) 유럽연합 내수시장 담당 집행위원, Thierry Breton의 인터뷰, <RTL>, 2022년 3월 1일.
(4) 2024년 3월 5일 프라하 방문 때 했던 프랑스 대통령의 연설
(5) <La Tribune du dimanche>, Paris, 2024년 3월 10일.
(6) Isabelle Faucon, ‘La menace militaire russe : une évaluation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 : 평가’, <les Champs de mars>, 제29호, Paris, 2017년.
(7) Gabriel Gorodetsky, ‘Un autre récit des accords de Munich1938년 뮌헨협정의 이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한국어판, 2018년 10월호.
(8) Walter Schütze, ‘De la note Staline à la conférence “2 + 4”. La réunification en perspective 스탈린 노트에서 2+2 회담까지. 통일의 전망’, <Politique étrangère>, 제1호, Paris, 1991년.
(9) Philippe Descamps, ‘L’OTAN ne s’étendra pas d’un pouce vers l’est 나토, 1인치도 동쪽으로 가지 않겠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18년 9월.
(10) Isabelle Faucon, ‘La menace militaire russe : une évaluation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 : 평가’, 위의 책.
(11) Amélie Zima, ‘Sommet de l’OTAN à Varsovie : un bilan 바르샤바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담 : 평가’, <Politique étrangère>, 제4호, 2016년.
(12) Neïla Beyler, ‘Guerre en Ukraine : l’Europe devance les Etats-Unis dans l’aide internationale à Kiev 우크라이나 전쟁 : 우크라이나 국제 지원에서 유럽이 미국을 앞서다’, <Les Echos>, Paris, 2024년 2월 20일.
(13) David E. Sanger, ‘Biden’s Armageddon moment : When nuclear detonation seemed possible in Ukraine’, <New York Times>, 2024년 3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