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위기, 자본주의 광풍에서 벗어나야
생태 파시즘과 탄소 파시즘 사이에서
두바이에서 열린 세계기후회의는 ‘탈 화석연료’ 전환을 실행하고, ‘적응’ 정책을 실시하자는 다소 밋밋한 합의를 맺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프랑스에서는 이 ‘적응’ 개념이 5개년 계획으로도 추진 중인데, 다음으로 연기된 3차 수정안은 모호한 성격 탓에 많은 이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지난해 크리스토프 베슈 프랑스 생태전환부 장관은 “프랑스가 기후 4도 상승 변화에 대비해야 한다”는 발언을 해 많은 이들의 우려를 자아냈다. 그런데 이번에 또다시 제28차 세계기후회의에서도 똑같은 상황을 재현했다. 2023년 12월 19일 베슈 장관은 기후변화 적응 계획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기후 4도 상승 경로는 결코 비관주의가 아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2.8~3.2도, 프랑스의 경우 4도에 달하는 기후 상승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예측되는 상황에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나 국제연합(UN)의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의견과도 일맥상통한다.”
실용주의라는 허울 좋은 미명을 내세운 이러한 접근법은 사실상 앞으로 국제협정을 따르지 않을 것이고, 온실가스 감축을 통해 기후 온난화를 충분히 ‘완화’할 뜻이 없음을 시사한다. 끊임없이 적응을 앞세운 전략은 정치적 타격이 불가피한 기후 완화 정책을 무기한 연기할 수 있게 해준다는 장점을 누린다. 오늘날 기후변화 완화 및 적응 정책은 두 관에 담긴 액체가 서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고안된 흡사 U자형 연통관처럼 소개된다. 한 마디로 적응 정책이 완화 정책의 부족한 부분을 단순 보완해줄 수 있다는 상당히 순진무구한 견해에 입각한다.
은밀하고도 허약한 가설
이러한 전략은 이면에 은밀한 가설을 감추고 있는데, 몇몇 명백한 진실에 비춰보면 그것이 얼마나 허약한 가설인지 금세 드러난다. 일단 이러한 전략은 그때그때 벽돌을 한 줄 더 쌓는 식으로 제방의 높이를 높이는 방식으로 기후변화의 영향에 적응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정작 점점 더 많은 제약에 직면한 경제, 산업, 정치 구조가 이전에 경험해본 적이 없는 규모로 와해될 위험이 커지는 가운데, 둑을 쌓을 수단을 구하기가 점차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사실은 외면한다.
물론 IPCC 제2실무그룹(영향, 적응, 취약성)은 정치적, 경제적 안정성을 갖춘 연구 가설을 활용하고 있다. 하지만 기후 1.5도 이상 상승에 대한 적응 시나리오는 어쩔 수 없이 규정하기 힘든 문제에 대한 사변적 대응에 입각한 미래 예측일 수밖에 없다는 한계점을 암묵적으로 인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제2그룹 공동대표인 한스오토 포르트너와 데브라 로버츠도 4도 이상 기후 상승에 적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재차 주장하는 것이다.(3) 하지만 동시에 IPCC는 비정치적인 견해를 자처하지만, 사실상 모든 위기의 가능성이 단순 배제된 ‘지속 가능한 개발’의 관점에서 영속성 있는 경제 모델에 입각한 견해를 주장하며, 정책입안자들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의 총체적 문제를 다수의 독립적이면서도 지엽적인 기술적 문제들로 나눠버리는 단순무식한 적응 전략이 성행하고 있다. 심지어 제28회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가 도출한 가장 기본적인 수준의 최종 협정조차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전략인지 지적하고 있는데 말이다.
“기후변화의 영향은 종종 초국적인 성격을 띠며, 연쇄적 위험을 내포한다.”
사실상 우리는 전 세계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상호 영향을 소홀히 다룰 수 없다. 또한 비선형적 영향을 무시할 수 있다는 생각도 환상이다. 가령 대형 산불의 증가는 토질 악화를 초래해, 빗물을 저장하는 토양의 역할을 저해한다. 그 결과 최근 더 잦아지고 있는 이상 고온 현상은 한층 더 수자원 부족을 심화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고, 결국 인류가 환경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물론, 기술은 일부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로지 기술적 측면만을 고려한 단순 추론은 이미 50년 전 로마 클럽이 진단한 것처럼(4), 각종 시스템적인 이유에서 더 이상 인류가 탐욕적인 경제 성장에 맞추어 물리적 세계를 제어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문제점을 은폐한다. 더욱이 유럽 광물 자원 연구 네트워크 ERA-MIN 소속 지질학자 올리비에 비달의 설명처럼, “육상광물이나 에너지 자원의 가용성은 에너지 전환을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 에너지 전환은 그 자체로 대대적인 자원 투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어느새 어디를 가든 도처에서 기술해결주의(technosolutionnisme)를 권하는 세상이 됐다. 가령 베슈 장관도 ‘기술적 기준이나 표준 혹은 규제’에 대해 논하자고 제안한다.(5) 하지만 그것은 결국 어디까지나 규제를 완화하자는 주장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지난 역사만 되돌아봐도 기술적 해법으로 인한 피해가 낙관주의라는 미명 하에 도외시되는 일은 부지기수였다. 사실상 기술적 해법이 인간사회와 환경에 요구하는 적응은, 결국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는, 역시나 복잡한 기술들을 동원해야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원자력일 것이다.
다윈식 적응, 지구온난화 관련해 언론에 단골로 등장
적응이란 용어가 순식간에 미디어에서 오용되면서, 윤리적으로 용인하기 힘든 지구공학(인류의 필요에 맞게 지구 환경을 대규모로 변화시키는 공학기술을 의미-역주)의 제안들이 매우 합리적인 대안으로 둔갑하고 있다. 가령 한 영향력 있는 단체는 파스칼 라미 회장을 필두로, 각종 정치계 출신 구성원들이 누리는 명성을 이용해, 태양복사선관리(SRM) 기술에서 기대되는 이익과 관련한 논란에 불을 지폈다. 이 압력단체는 “예측 불가능하거나 혹은 원치 않는 잠재적 영향을 초래할 수 있는 매우 불확실한” 기술이라며 각국의 SRM 기술 활용을 ‘유예’해야 한다고 요구하면서도, 정작 이 주제에 대한 연구나 규제에 대한 논의를 심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 기술해법주의 추종세력들은 과학적으로 근거가 빈약한 각종 충격적인 사실을 퍼뜨림으로써, 사실상 우리 사회가 기술적으로도 실현 가능하고, 사회적으로도 정당하고 윤리적인 해법으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기후변화와 연계된 지구공학의 등장으로, 1977년 자크 엘륄이 말한 ‘기술 시스템’은 어느새 단순한 인간의 영역을 넘어 그 위상을 확대하고 있다. 이제는 생물만이 아니라 비생물학적 측면까지 모든 환경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단순히 인간사회, 경관, 하천, 생물계를 인위적으로 가공하는 수준을 넘어서, 이제는 대기의 ‘온도를 조절’함으로써, 인간의 요구에 ‘맞는’ 기후를 만들어내려고까지 한다.
현시대를 오롯이 보여주는 징후라고 해야 할까. 과거 작가 페요가 <레인, 레인 스머프 어웨이>(1969년)(편리 스머프가 기후 조절 기계를 발명해내면서 겪게 되는 일화를 다룬 스머프 시리즈 – 역주)에서 인공적인 기후 조절과 관련한 갈등을 보여주며, 인류에게 던졌던 경고는 깨끗이 잊혔다. 기술 시스템은 어느새 자율화, 외부화됐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 새로운 현대판 리바이어던에 순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적응 정책의 이면에 자리한 것은 물리적 세계를 철저히 장악하려는 계획이다. 말하자면 기술 진보를 신봉하는 프로메테우스적 전통에 깊이 뿌리 내린 인류의 오만함이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상 이런 인류 진화의 길을 닦아온 것은 계몽주의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가 될 수 있다”고 한 데카르트의 말을 왜곡한 결과 이런 식의 진화를 이룩해왔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자본주의와 각종 사회주의 실험들은 채굴주의(extractivism)를 토대로 삼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자연을 금전적 가치를 지니는 외적 자원으로 간주하게 된 것이다. 가령 숲은 더 이상 생명을 결정짓는 생·물리·화학적 균형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생태계가 아니었다. 대기 중의 탄소를 저감할 수 있는 잠재력을 제공하는 존재로 인식됐다. 일례로 대규모 식수 사업(지금부터 2030년까지 프랑스에 나무 10억 그루를 심기로 한 계획 등)은 탄소 배출 ‘보상’ 메커니즘에 의거해, 항공 산업 등 일부 산업을 지원하는 명분이 됐다.
다윈식 적응이라는 모호한 개념은 인간사회의 복종을 얻어내는 데 활용됐다. 생물학에서 적응은 다양한 개체 사이의 능력 차와 그리고 그것이 빚어낸 결과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특정 환경에서 우월한 기질들이 획득해낸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최근 극우파가 지구온난화에 인간이 적응하는 능력을 다윈식 적응에 비유하면서, 다시 이 개념이 언론의 단골 주제로 등극했다. 물론 과거 인류는 우월한 유전자의 선택이나 혹은 표현형 가소성(어떤 생물의 형태나 행동, 생리 등 표현형이 특정 환경에 반응하여 변화하는 것-역주)에 힘입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나긴 시간의 차원을 적용할 때의 이야기였다. 어떤 종이 특정 환경에 존재한다고 해서, 그 종이 최적의 적응 상태에 있다는 뜻은 아니다. 생존은 결코 안락함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저들이 말하는 고통과 죽음의 계획을 순순히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20세기, 다윈식 적응은 바르바라 슈티글러가 말한 것처럼, 일종의 신자유주의 만트라(주문)로 강림했다.(7) 하지만 본래 자유주의자들이 생각한 환경이란 결코 물리적, 생물학적 세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산업사회의 세계를 뜻했다. 인간종이 그러한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파한 신자유주의자들은 공공정책이나 ‘여론조작’을 동원해 인간에게 적응을 강제했다. 역사학자 장바티스트 프레소는 1970년대 이후 “산업국들이 어떤 이야기도, 논의도 없이, 성장과 온난화의 길을 택하고, 적응에 돌입”했다고 지적했다.
생태파시즘과 탄소파시즘 사이에서
산업사회라는 압축롤러가 마주한 것은 그것을 가로막을 힘이 전혀 없는 자발적 복종뿐이었다. 결국 두 경계가 무너졌다. 인간사회와 총체적인 물리적, 생물학적 세계가 끝내 기술시스템의 부정적 외부효과(negative externality)로 전락했다. 이렇듯 완전히 역전된 종속관계는 지구의 모든 ‘영역’을 철저히 정치적으로 장악하며, 결국 자본화된 이득을 보장하기 위한 신자유주의 계획을 완성했다.
전혀 놀랍지 않은 사실이지만, 생태계, 더 일반적으로 말해, 환경의 파괴는 인간사회의 능동적 저항을 동반한다. 그 결과 곳곳에서 환경운동가들은 탄압의 표적이 되고 있다. 제랄드 다르마냉 프랑스 내무부 장관이 저항운동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사법 제도를 오용한 사례처럼, 때로는 정신적 탄압에 시달린다. 그런가 하면 2014년 10월 시뱅 혹은 2023년 3월 생솔린느의 사례처럼 공권력에 의해 실제로 목숨을 잃거나 다치는 신체적 탄압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들은 환경 악화와 사회적 저항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산업사회가 지속적인 번영을 구가하기 위해 택할 수 있는 길이 강압밖에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특히 물리현상에 빗댄 비유는 흥미롭다. 전체 에너지가 증가 중인 열역학 시스템에서 엔트로피(무질서)의 증가를 막으려면 압력을 높여주면 된다. 이는 곧 권위주의 행보가 적응 계획을 더욱 손쉽게 실행하게 해줄 수 있다는 말을 뜻한다.
정부는 기후온난화를 인류가 적응해야 할 숙명으로 간주함으로써 기후 논쟁이 정치화되는 것을 막고, 불가피한 환경 악화를 자본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방식으로 관리할 수밖에 없는 인류의 미래를 예언하고 있다. 이러한 접근법은 생태파시즘과 탄소파시즘 사이에서 유일한 대안으로 간주되고 있다. ‘생태파시즘’이란 집단 생존주의의 발현을 의미하는 한편, ‘탄소파시즘’은 아르헨티나의 하비에르 밀레이 혹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로 대변되는 환경파괴를 일삼는 우파 포퓰리즘 경향을 뜻한다.
사실상 후자는 앞으로 적응 능력을 갖추지 못한 한 사회의 몰락을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사실 이것이 그리 먼 미래의 이야기도 아니다. 이미 프랑스의 일부 과학자가 추진 중인 ‘생태 전환 맨해튼 프로젝트’가 바로 이런 권위주의의 예고편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까? 핵폭탄 개발 계획을 연상시키는 호전적인 명칭, 인류 공동의 미래를 민주주의의 통제를 벗어난 자칭 엘리트를 자처한 소수 계층이 주무른다는 사실, 모든 복잡한 지식을 전문가들의 손에 통째로 맡겨야 한다는 사실 등 이 프로젝트는 모든 점에서 우려스럽기만 하다.
권위주의 위협에 직면한 IPCC 제1그룹의 공동대표 발레리 마송델모트는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실현가능하고 바람직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런 대안은 이미 존재한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찾아낸 실현가능한 ‘긍정적인 적응’의 메커니즘들이 수두룩하게 존재한다. 가령 재조림 사업은 이산화탄소 배출을 저감시켜줄 수 있고, 도시녹지화는 대기의 온도를 낮춰줄 수 있으며, 농생태학은 생태계를 보존해줄 수 있다. 이러한 메커니즘들은 파멸의 시간을 한참 늦춰줄 수 있다.
우리는 지금보다 더 대담해질 수는 없는 것일까?
4도 기후 상승 ‘경로’에 관한 추론은 치명적인 정치, 이념적 선택에 근거하고 있다. 사실상 환경 악화를 일상화하거나 외부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사회와 자연의 대립에서 벗어나자는 일부 존재론적 입장에도 역행한다. 점점 커지는 환경의 압박은 물론 새로운 적응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우리가 만일 경제의 초월적 위상을 거부할 수만 있다면, 자본주의 광풍의 포기라는 보다 긍정적인 적응 모델을 선택하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가령 ‘지구의 반란’과 같은 저항운동이 이러한 긍정적 적응의 모델을 구현한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해로운 측면을 해체하고, 사적 이익이나 전문가들의 손에 장악되지 않은 새로운 미래를 다시 써내려가자고 제안한다. 이러한 제안은 현재까지 자기실현적 성격을 띠었던 권위주의 공고화에 대한 미래 예언을 마침내 무효화할 수 있으리라.
글·파비엔느 바라토 Fabienne Barataud, 로랑 위송 Laurent Husson, 스테파니 마리에트 Stéphanie Mariette
저항 과학자 단체의 구성원들. 각각 국립농업식량환경연구소(INRAE) 리서치엔지니어로 활동 중인 지리학자, 프랑스국립과학연구소(CNRS)에서 지구과학 리서치디렉터를 맡고 있는 지구물리학자, INRAE 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인구유전학자.
번역·허보미
번역위원
(1) <France Info>, 2023년 2월 22일.
(2) <Le Monde>, <Météo France> 주최 컨퍼런스 ; 유튜브에서 시청 가능. http://www.youtube.com/watch?v=8mevzIuB6B0
(3) <Le Monde>, 2023년 6월 12일.
(4) ‘En 1972, l'avertissement du Club de Rome1972년 로마 클럽의 경고’, <마니에르 드 부아르>, 제167호, 2019년 10월.
(5) 기후변화 적응을 위한 기준 기온 상승 경로(TRACC), 생태전환 및 국토통합부, 2023년.
(6) ‘Réduire les risques de dépassement climatique 기후 과잉상승 위험 해소’, 기후과잉상승 위원회, 2023년 9월.
(7) Barbara Stiegler, 『Il faut s'adapter 적응해야 한다』, Gallimard, coll. <<NRF/Essais>>, Paris, 2019년.
(8)Walter Lippmann, 『Public Opinion 여론』, Harcourt, Brace and Company, 1922년.
(9) <Le Monde> 2023년 9월 25일자 칼럼.
(10) ‘Les quatre degrés de l'apocalypse 지구기온이 4도 상승한다면, ‘악몽의 시나리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3년 12월·한국어판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