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스탕스 시인 데스노스와 마누치앙, 비밀 시집 『시인의 명예』

2024-04-30     콤 레마리 | 기자

2024년 2월 21일, 외국인 출신의 레지스탕스 시인 미삭 마누치앙(1906~1944)이 프랑스 몽 발레리엥에서 총살된 지 80년 만에 아내 멜리네 마누치앙과 함께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이 공식 행사를 계기로 문학의 길을 따라 역사의 기억을 되새겨 볼 수 있다. 1943년 비밀리에 출판된 시집 『시인의 명예』가 길잡이 역할을 할 것이다.

 

1940년 10월, 에드몽 기야르는 옛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 <트레(Traits)>라는 잡지를 창간했다. 제자 가운데는 발행인 프랑수아 라슈날과 편집장 장 데쿨레도 있었다.(1) 이들 스위스 작가 세 명은 프랑스 정부가 패주하고 프랑스군이 붕괴한 가운데 자국의 사회 지도층 사이에서 번지는 열병에 맞섰다. 전쟁의 바람이 사회 중추 세력을 뒤흔드는 듯이 보였다. 스위스의 은행가, 산업가, 정치 엘리트들이 ‘새로운 질서’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이 잡지에는 1941년 말에 피에르 에마뉘엘과 피에르 세게르가 쓴 레지스탕스 운동의 초기 시들이 익명으로 실렸다. 프랑수아 라슈날은 스위스 공사(외교 사절)로 임명돼 비시로 이주했고, 외교관의 권한을 활용해 연합국 일부의 이익을 대변했다. 특히 스위스로 오가며 프랑스 지하 언론의 출판과 인쇄를 도왔다. 세게르, 폴 엘뤼아르, 장 레퀴르와 비밀리에 미뉘 출판사(Éditions de Minuit)에서 발행한 여러 시를 모아 프랑스에서 재인쇄하기도 했다. 시인 22명은 시집 『시인의 명예』를 지원했다. 출판사는 “나치가 점령해 자유가 억압된 1943년 7월 14일, 애국적인 애서가들의 후원으로 출판됐다”라고 밝혔다.

 

“시가 아니라 시인이 자유로워야 한다”

로베르 데스노스는 기고 시의 제목을 단도직입적으로 <전쟁을 증오했던 이 심장>이라고 지었다. “시가 아니라 시인이 자유로워야 한다”라고 믿었던 작가 데스노스는 패전 이후 레지스탕스에 합류했다. 초현실주의자이자 무신론자, 무정부주의자였던 그는 프랑스 공산당(PCF) 입당을 거부하고 독일 당국의 엄격한 감시를 받는 파리 신문사 <오주르뒤(Aujourd’hui, 오늘)>에서 일했다. 그러다 기고하던 칼럼과 문학 칼럼에서도 밀려났지만, 그림과 글을 통해, 때로는 가명까지 사용해 끈질기게 정치적인 자유를 주장했다.

데스노스는 아내 유키(뤼시 바두)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이렇게 밝혔다. “전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모든 행복을 끌어내기로 했어. 그건 바로 건강과 젊음의 증거, 그리고 히틀러를 괴롭히는 무한한 만족감이지.” 데스노스는 비밀 활동에 나날이 더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신문에서 수집한 정보를 영국 정보국과 연계된 아지르(AGIR) 조직망에 전달했다. 그 밖에도 유대인과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위해 위조 서류를 만들고, 열정적으로 시를 써서 『시인의 명예』에 작품을 실었다. 그뿐만 아니라 훨씬 더 폭력적인 행동도 감행했다.

<환전교의 감시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나도 적을 죽였다. 그자는 개울에서 죽었다. 이름 모를 그 적은 히틀러의 동족인 독일인이자 증오받는 자다.” 비시 경찰은 1943년 초에 아지르 조직망에 침투해 1944년 2월 어느 날 데스노스를 체포했다. 데스노스는 심문을 받고 일드프랑스 발드마른주 프렌 감옥에 수용됐다가 프랑스 북부 콩피에뉴 수용소로 이송됐다.

데스노스는 그곳에서 시 낭송회를 조직했다. 그는 깊은 신념을 가지고 수감자들이 손에 거머쥔 미래를 시로 낭송했고, 결연한 삶의 의지가 다른 이들의 마음으로 전해졌다고 한다. 감옥 밖에서 아내 유키는 끈질긴 노력 끝에 독일행 수송 열차 탑승 명단에서 데스노스의 이름을 지울 수 있었다. 

하지만 데스노스는 결국 1944년 4월 27일에 수송 열차에 실려 아우슈비츠를 거쳐 작센주의 플뢰하로 이송됐다. 나치에 동조한 작가 알랭 로브뢰의 밀고 때문이었다. 그는 파시즘과 나치즘을 두루 동경했고 데스노스를 특히 증오해서 점령군과 비시 정부에 데스노스를 추방할 것을 직접 건의했다.(2) 데스노스는 1945년 6월 8일 테레지엥슈타트에서 탈진으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밀고자 로브뢰는 1968년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에서 자연사했다. 그는 1947년 궐석 재판으로 사형 선고를 받고 스페인으로 도피한 바 있다.

 

“정의를 향한 유일한 소망이 삶을 메아리친다”

팡테옹에 안장된 마누치앙 부부의 삶은 암흑기 파리 역사와 어떻게 맞닿아 있을까? 미삭 마누치앙은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생존자이자 고아였다. 쿠르드 가족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고, 아르메니아 공동체를 통해 레바논의 인도주의 보육원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미삭은 목수가 되었고 규율에 반항하며 시를 썼다. 이후 미삭은 형과 함께 마르세유로 갔다가 파리로 올라가서 공장 노동자가 됐다. 그는 소르본 대학 강의를 청강하고 생트주네비에브 도서관을 자주 찾았으며, 시와 문학 잡지를 창간하기도 했다.(3)

멜리네 수케미안(아사두리안)도 아르메니아 대학살에서 살아남아 그리스의 보육원에 들어갔고, 이후 마르세유의 아르메니아 학교에서 공부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문제아’로 낙인찍혀 파리로 전학했고, 속기 타이피스트가 됐다.(4) 미삭 마누치앙은 1934년 2월 6일에 프랑스 공산당(PCF)에 가입했다. 그해 벨빌에 있는 아르메니아 구호 위원회에서 멜리네를 처음 만났다. 이후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세간에 잘 알려져 있다.

전쟁, 비밀 활동, 폭탄 테러, 의용유격대 이주노동자 조직(FTP-MOI), 붉은 포스터 사건(Affiche Rouge, 나치가 붉은 포스터에 체포된 레지스탕스 대원들의 얼굴을 담아 거리에 붙이고, 범죄집단으로 규정한 사건-역주), 체포, 고문, 미삭이 멜리네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등의 사건들이다. 미삭과 다른 사형수 22명은 눈가리개 착용을 거부하고 똑바로 앞을 응시한 채 비시 경찰에 의해 총살됐다.

미삭 마누치앙도 로베르 데스노스처럼 시인이자 레지스탕스였다. 두 사람 모두 같은 노선을 걷다가 목숨을 잃었다. 시인 폴 엘뤼아르는 헌정 시에서 두 사람 간의 두 번째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엘뤼아르는 1945년에 데스노스의 유골을 몽파르나스 묘지에 안장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데스노스의 시는 용기의 시입니다(...). 그는 아무런 의심 없이 사랑과 삶, 죽음을 향해 나아갑니다.” 1950년에는 마누치앙과 의용유격대 이주노동자 조직 대원에게 헌정하는 시를 썼다.(5)

 

군단

오늘날 프랑스어로
나의 슬픔과 희망을
말할 권리가 있다면

나의 분노와 기쁨이
가려지지 않았다면
우리의 거대한 꿈과
우리의 지혜를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지금도 외국인이라 불리는
그들이
바로 여기에서 굳건히
정의를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피에는
동지의 피가 흘렀다
이 외국인들은
자기 조국이 어디인지 알았다.

한 민족의 자유는
모든 민족을 이끌고
쇠사슬에 묶인 무고한 자는
모든 사람을 사로잡고
자기의 마음을 멀리하는 자는
자기만의 법을 다스린다
우리는 심연을 극복하고
해충을 무찔러야 한다.

이곳에서 온 이 외국인들은
불을 선택했으니
벽에 걸린 이들의 초상화는
영원히 살리라 
기억의 태양이
그들의 아름다움을 비춘다
그들은 살기 위해 죽였고,
복수를 외쳤다.

움직이지 않는 거울의 한복판에서
그들은 삶으로 죽음을 멸했다
정의를 향한 유일한 소망이
삶을 메아리친다
그리고 이 땅에서
오직 그 목소리만 들리고
아무도 죽이지 않을 때
그들은 복수를 완수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정의가 될 것이다.

 

세 번째 연결고리는 데스노스가 직접 만들었다. 시인은 팡테옹에 대해 알았고, 사후 80년이 지났을 때도 마누치앙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데스노스는 『시인의 명예』에 <전쟁을 증오했던 이 심장> 외에도 <군단>이라는 시를 실었다. 그는 ‘국민혁명(Révolution nationale, 1940년 필리프 페탱이 비시 정권 출범 당시 수립한 공식 이념-역주)’과 페탱 정권에 빅토르 위고가 이용되는 것에 반대했다.

 

대문호 위고여, 여기 이 벽에 당신의 이름이 있습니다!
팡테옹 깊숙한 곳에서 돌아누워
누구의 소행인지 보소서 
누가 한 짓이요? 그들이오!
그들은 히틀러이자, 괴벨스이며... 몹쓸 무리이오.

라발, 페탱, 보나르, 브리농이라는 자들
배반할 줄 아는 자들이자 호의호식하는 자들,
응보를 받을 운명의 이 자들은
그저 하찮은 세력일 뿐

저들은 영혼이 가난하고 문화가 천박하여
더러운 수작에 대한 변명이 필요하오.

그들은 말했네. “노인은 죽었어. 죽음이 정복했지.” 

그렇소, 그 영감은 죽었소. 하지만 그는 공증인 앞에서
어떤 유산을 남기길 원하는지 분명히 밝혔지
공증인의 이름은 프랑스며, 그 유산은 자유라네.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은 극우의 표를 얻어 이민법을 통과시킨 지 두 달 만에 이민자 출신 공산주의 저항 투사(그중 한 명은 무국적 상태로 사망) 두 명을 자국의 위인들을 기리는 사원에 안장했다.(6) 그들의 유산의 불꽃은 팡테옹의 그늘에서 변치 않고 길이 남을 것이다.(7)

 

(...)
(적은) 믿음이라는 가면을 쓰고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어
무지와 타락의 독을 주입하기도 하고,
간사한 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인종에 관한 거짓말을 내뱉고
무감각한 군중의 사악한 열정과 충돌하게 만들기도 한다.

부디 양심의 횃불이 우리의 뜨거운 영혼을 밝히기를
피로의 잠이 잠시도 우리의 영혼을 삼키지 않기를
우리의 적은 매 순간 모양과 색을 바꾸면서
그 탐욕스러운 입으로 우리를 집어삼키기 때문이다.
(...)
깨어 있으라, 미삭 마누치앙(1934년 3월 28일).
 

 

 

글·콤 레마리 Côme Leymarie
기자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François Lachenal, 『트로아 콜린 출판사, 제네바와 파리 사이(Éditions des Trois Collines, Genève-Paris)』, IMEC Éditions, Paris, 1995.
(2) Pierre Berger, 『로베르 데스노스(Robert Desnos)』, Seghers, Paris, 1949.
(3) 『노력(아르메니아어: Tchank)』, 아르메니아계 프랑스 시인 세마(케그함 아트마지안) 공저.
(4) Mélinée Manouchian, 『마누치앙(Manouchian)』, Éditions Parenthèses, Marseille, 2024.
(5) Paul Éluard, 『작품 전집』, 제2권, Gallimard, Bibliothèque de la Pléiade 총서, Paris, 1968.
(6) 멜리네는 1946년이 돼서야 프랑스 국적을 얻었다.
(7) Missak Manouchian, 『자유라는 꿈에 취하여(Ivre d’un grand rêve de liberté)』, 프랑스어, 아르메니아어 판, Points,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