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안의 인문학 서재] 지금의 정치 현실은 필연의 산물인가?

우연을 삶과 실천의 조건으로 맞이하자

2024-04-25     한성안 | 경제학자

내가 남해도 옆에 붙어 있는 창선도라는 깡촌 마을에서 자라 영산대라는 무명의 지방대학 교수로 된 것은 신의 섭리인가, 운명의 장난인가? 내가 살고 있는 한국 제2의 도시 부산이 ‘노인과 바다’의 도시로 전락한 것은 근대화의 법칙이 낳은 필연적 결과인가, 정보통신산업이라는 신산업이 갑자기 등장해 생긴 우연적 결과인가? 히틀러의 통치 아래서 독일이 민족사회주의(나치즘)로 변화한 것은 필연적 역사법칙의 결과인가, 예기치 않게 발생한 우연적 사건인가? 제2차 세계대전 후 대한민국이 남북으로 분단된 것은 ‘이성의 간계’인가, 인간의 맹목적 감성과 분출하는 의지가 우연히 폭발했기 때문인가? 마지막으로 오늘날 윤석열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이재명이 한국의 진보를 대표하게 된 것은 피할 수 없는 법칙적 산물인가, 아니면 황당하고 뜬금없는 사건 사고, 즉 예상치 못한 우연인가?

 

이재명

오래된 필연의 역사

필연과 우연! 우리의 삶을 직조해 내는 두 가지 씨줄과 날줄이다. 이 두 가지는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해 2천5백 년간 철학자와 역사학자들을 괴롭혀 왔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중세에서 모든 삶은 ‘신의 섭리’에 복속되었다. 그 결과 인간의 삶은 ‘필연’ 아래 통합되었고, 모든 우연은 필연이 구현되는 수단이었다. 우연으로서의 악은 필연으로서의 선의 완성을 도와주는 ‘필요악’으로 봉사하였다. 모기와 바퀴벌레도 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다.

근대에 이르자 인간의 이성이 찬양되었다. ‘과학’은 이성적 사유를 최고조로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필연적 법칙을 규명하고자 하는 과학은 우연을 점차 제거해 나갔다. 우연은 불완전하고, 비합리적이며, 지질한 쓰레기로 취급되었다. 헤겔만큼 ‘반(反)우연적인’ 철학자도 없을 것이다. 그는 우연을 숫제 경멸하며 혐오하기까지 했다. 헤겔에게 철학적 사유의 목적은 이 세계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로 파악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목적에 방해가 되거나 도움이 되지 않는 요소와 절차들은 철저히 제거되어야만 했다. 우연이 제거 대상 제1호가 되는 건 그에게 필연적(!)이었다.

그에게 우연은 주관적, 자의적, 비이성적이며, 감정과 충동에 휘둘리는 못 미더운 것이다. 우연은 개별적이어서 파편과 분열이다. 우연은 유한하기 때문에 일시적이며, 비자립적이며 불완전하다. 우연은 무상하다. 그래서 무의미하며 공허하고 무가치하다. 나아가 우연은 비법칙적이기 때문에 비본질적이고 불투명하며 혼탁하다. 마지막으로 우연은 심지어 부당하다. 그래서 우연은 비진리이며 악마성을 함축한다. 헤겔에게서 우연은 꼴도 보기 싫은 존재인 것이다!

 

지적 사기술로서의 이성의 간계

그러나 이 밉살스러운 우연이 엄연히 존재하는 게 숨길 수 없는 현실이다. 외면할 수 없는 우연은 어떤 방식으로든 처리될 필요가 있었다. 헤겔에게 우연은 ‘필연이 완성되는 징검다리’와 같아 보였다. 옳거니! 묘수가 떠올랐다. 우연은 필연적 이성이 부리는 속임수, 곧 ‘이성의 간계’다. 헤겔은 이로써 인간의 삶, 그리고 역사를 모조리 이성과 법칙, 그리고 필연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우연은 없다!

우연이 이성의 간계라니? 나는 이 용어를 대단히 싫어함은 물론 일종의 지적 사기술(!)로 여긴다. 도그마요 독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연과 필연에 관한 헤겔의 이 도그마는 마르크스에게 고스란히 전수되었다. 그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 안에서 우연은 단지 ‘필연성의 현상 형식이자 보완’에 불과했다. 가령, 우연적 사건들이 역사 과정에서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으로 보이지 않는 필연적 법칙에 의해 조정되고 통제될 뿐이다. 우연은 영원히 필연에 종속된다. 따라서 역사 발전 과정에서 우연적 일탈이 발생하더라도 공산주의는 필연적으로 달성된다! 더욱이 그 우연적 일탈은 변증법적으로 지양되어 필연을 풍요롭게 만든다. 여기서도 우연은 이성의 간계인 셈이다. 헤겔적 이성의 간계와 마르크스의 필연성은 우리나라 진보주의자들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이 필연주의적 역사철학은 중세 기독교가 믿었던 ‘신의 섭리’에 젖줄을 대고 있다. 필연적 역사법칙은 스콜라 신학의 관념론적, 유물론적 버전인 것이다. 우리나라 대다수 진보주의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역사관이기도 하다.

 

우연이 지배하는 인간의 역사

하지만 현대가 시작되면서 수많은 철학자와 역사학자, 그리고 자연과학자로부터 우연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세계는 온통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연은 그저 우연으로만 남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우연을 낳는 동시에 필연을 창조해 낸다. 우연은 이처럼 이중적이다. 곧, ‘우연의 이중성’ 때문에 필연은 우연을 만들고, 우연이 필연을 만들기도 한다.

나아가 우연은 도그마의 족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그 결과 우연 덕분에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자유는 우리에게 창조를 향한 문을 열어 준다. 그로 인해 우리의 ‘가능성’은 확대된다. 더욱이 우연은 우리의 신조와 이정표를 파괴해 버린다. 이제 우리는 우리 삶을 스스로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연은 인간에게 자율과 책임을 부여한다. 우연 덕분에 우리는 내 삶의 주인이 될 수 있거나, 적어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이처럼 우연을 맞이할 때 비로소 깨어있는 시민으로 거듭날 수 있다.

나는 필연의 존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열을 가하면 분자의 운동이 활발해져 필연적으로 부피가 커진다. 지구는 태양을 필연적으로 돈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변화하고, 생명체는 필연적으로 죽고 만다. 그러나 이런 자연의 필연적 법칙으로부터 역사법칙과 사회법칙을 직접 끌어내면서 우연을 그 부산물로만 치부하거나 필연의 종속물로 강등하는 사고방식은 ‘자연주의적 오류’에 지나지 않거나 근거 없는 독선이다. 실로 미신적이고 우스꽝스러운 생각이다. 인가의 역사는 우연의 역사다!

 

우연과 깨어있는 시민

필연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우연에 대한 근거 없는 혐오, 곧 신학적 사고를 이제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우연은 제거해야 할 쓰레기가 아니라 체계적으로 연구돼야 할 학술적 주제다!

『역사와 우연』(최성철, 2017, 도서출판 길)은 우연을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다. 나는 경제학파 중에서도 제도, 행위자, 혁신을 중시하는 제도경제학파에 속한다. 내 경제학 강의가 워낙 철학적 성격이 강해선지, 강의 때마다 적지 않은 수의 수강생이 ‘경제법칙’에 관한 제도경제학의 관점에 대해 질문을 해 오셨다. 즉, “신고전학파 경제학이 시장 ‘법칙’을 맹신한다고 비판하는데 제도경제학은 경제학에서 ‘법칙’의 존재를 어느 수준까지 허용하는가?” 따지고 보면 필연과 우연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다.

 

제도경제학은 역사법칙을 인정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우연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말할 것도 없이 우연은 ‘우연히’ 일어난다.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우연이 발생하는 또 다른 경로가 있다. 역사를 써 가는 인간들, 곧 수많은 행위자들이다. 그들은 그저 법칙에 순응하지 않는다. 그들은 법칙에 관해 성찰하면서 그 필연성을 따져 묻는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파괴하는 필연(!)에 저항하며 투쟁한다. 그들은 그 속에서 새로운 것들을 창조해 낸다. 그뿐이 아니다. 이들은 법칙을 거스르면서까지 서로 연대하고 사랑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스스로 도덕적 기준을 세워나간다. 이 모든 것은 필연이 예측해 내지 못한 우연이다. 인간의 역사는 이 행위자들의 우연에 지배된다. 이들을 우리는 ‘깨어있는 시민’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성의 역할을 중시한다. 그러나 극단적 이성주의, 곧 ‘이성만능주의’를 단호히 거부한다. 역사는 이성만큼, 아니 그보다 더 감성과 의지의 산물이다. 여기서 감성과 의지는 ‘우연의 샘물’인 셈이다.

별로 인기가 없을 것 같은 주제, ‘우연’을 평생의 주제로 집어 든 저자의 학문적 자세가 갸륵하다.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공부의 태도 역시 나를 능가한다. 덕분에 큰 도움을 받았다. 저자 최성철의 관심사는 역사에서 우연을 복원하며, 우연을 체계화하는 것이다. 때문에 과도하게 우연을 찬양한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은 행동과 실천을 외면하는 우리나라 ‘입진보(입만 산 진보주의자)’의 이성만능주의와 필연주의에 대한 해독제가 될 만하다.

이 책은 우리를 또 다른 성찰로 이끈다. 진정한 진보에 관한 성찰이 그것이다. 진실로 진보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깨어있는 시민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선 먼저 우연을 품에 안아야 한다. 이럴 때 비로소 우리는 작금의 대한민국 정치 현실을 올바르게 평가할 혜안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정치 현실은 믿고 따라야 할 필연이 아니다. 별 의미 없는, 그래서 바꾸어도 되는 우연일 뿐이다.

 

 


글·한성안


문화평론가. 경제학자. 영산대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좋은경제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집필, 기고, 강연 중이다.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통해 진보적 경제학을 주제로 시민들과 활발히 소통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