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과 공유' 새 시장 시스템

2012-07-10     조민

1. 21세기 벽두부터 수세기 동안 인류의 존재 양식을 규정해온 시장경제가 새로운 위기 국면에 부딪혔다. 시장경제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최근 건국대 최배근 교수가 펴낸 <시장시스템들의 붕괴와 대변환>은 이에 대한 본격적인 해명을 하고 있다. 이 책은 금세기 세계경제의 파국적 상황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통해, 혼돈 와중에 갈피를 잡지 못하는 우리에게 새로운 안목을 제시하는 명쾌한 논저다. 또 그동안 글로벌 경제의 현실과 미래 전망의 문제에 천착해온 저자의 고뇌 어린 연구의 중간 결산으로 보인다. 약간 두툼해 보이는 두께에도 불구하고 한 번 잡으면 손을 떼기 힘들 정도로 세계경제 분석에서는 긴박감이 넘치고, 동서양을 뛰어넘는 세계 경제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자칫 저자의 방대한 경제학 지식에 압도될 전도로 야심적인 역작이다.

방대한 저서를 관통하는 저자의 문제의식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는 '이행기 세계경제'에 대한 착안이다. 산업화는 서구 선진사회에서 이미 과거의 일이 된 지 오래되었다. 따라서 산업화 시대를 패러다임을 떨쳐버리고 새로운 단계로 진화해야 하는데, 세계경제는 아직 '신천지'를 발견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표류한다는 지적이다. 경제사적 차원에서 '이행기'라 부르는 일정한 과도기 상태를 극복하려면 세계경제는 새로운 산업 기반을 구축해야 하는데, 새로운 산업 체계는 '무형 가치'에 기반한 '지식 기반 경제'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 다른 하나는 '시장 시스템'에 착안해 다양한 시장 시스템의 특성과 독특한 발전 경로를 검토하면서 개별 시장 시스템의 고유한 발전 전망을 제시하는 점이 돋보인다. 이는 저자의 독특한 논지로, '시장'은 보편적이나 시장 시스템은 국가마다 서로 다른 전개 방식을 지닌 역사적 형성체라는 입장이다. 중세 도시의 '시장'들과 달리 사적 소유 및 자본­임노동 관계에 기초한 '자기 조정적 시장 시스템'은 국지적 교역과 장거리 교역의 분리를 계기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장거리 교역(원격 교역)이 근대적 시장 메커니즘의 발생 요인이라는 지적은 마치 1970년대 진보학계에 풍미했던,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 논쟁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와 함께 시장 메커니즘이 유럽에서 한정된 일부 지역의 역사적 산물로 보아온 서구 중심적 시각과 달리 중국의 중세 경제사 검토를 통해 '또 다른 시장 시스템' 존재 증명을 시도한 점이 주목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일반적인 '시장경제' 개념을 우회해 '시장 시스템(들)'을 키워드로 공간적(횡적)·역사적(종적) 접근을 통해 세계경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풀어내고 있다. 저서의 총 8장 가운데 '무형재 경제의 도래와 그 기원', '경제의 금융화와 금융위기' 그리고 '끝난 적 없는 위기'의 3장이 난파선 같은 세계경제의 현실을 말한다. 후반부에서는 영국과 미국의 시장 시스템의 발전 과정, 유로존의 실험, 네크워크 시장 시스템 일본 경제의 현주소를 지적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은 중국에 할애하고 있다.

2. 미국발 금융위기는 '다보스 포럼'으로 불리는 '2012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자본주의 실패' 논쟁을 촉발했다. 그러나 저자는 적절한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다보스 포럼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미국의 시장 시스템은 하나의 제도로서 더 이상 대다수 사회 구성원의 안정된 삶을 보장해주지 못했으며, 시장 시스템의 한계로 상호 연관된 고용 시스템,­ 사회보장 시스템,­ 주거 시스템,­ 금융 시스템, ­혁신 시스템 등이 모두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순간 미국 자본주의는 거덜나고 말았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한계와 실패는 제도와 시스템으로서 자본주의 혁신 역량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금융위기로 인한 시스템 붕괴는 산업체계의 다양화와 산업구조의 업그레이드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었다.

금융경제, 즉 '경제의 금융화'는 일찍이 세계 금융을 주무르던 앵글로색슨의 장기로, 국내 산업이 한계에 봉착한 미국이 세계경제를 주도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미국은 금융을 성장 동력으로 삼았으나, 이는 '고용 없는 성장'에 불과했다. '고용 없는 성장'이 일자리와 연계된 사회보장 시스템의 한계를 드러내자 일자리 만들기와 경기부양책으로 소비 부양과 통화완화 정책에 의존하게 된다. 이에 일자리 창출과 소비 부양의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전략이 소득층에 대한 주택 금융 지원으로 나타났고, 점차 서브프라임 모기지 형태인 '묻지 마' 대출로까지 치달았다. 더욱이 모든 금융기관이 파생금융상품을 쏟아내면서 월가는 '돈잔치'로 흥청망청거렸다. 자산 버블이 터지자 잔치는 끝났다. 미국 금융경제의 붕괴는 미국 사회를 해체시켰을 뿐만 아니라 선진 자본주의의 미래를 내다보기 어렵게 되었다.

세계경제에서 미국의 위상 추락과 함께 선진국 경제가 장기 저성장 국면에 진입함으로써 세계경제의 불확실성은 크게 증폭되었다. 최 교수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초국가 협력 리더십'을 요청한다. 지금 새로운 가치 창출 역량과 더불어 새로운 통치 구조 창출, 심지어 문명 진화까지 필요한 상황이다. 이를 위해 세계적 규모의 협동 관리 혹은 공동 통치를 위한 새로운 거버넌스 창출을 역설하고 있다.

3. "시장경제는 자본주의 전유물이 아니며, 사회주의도 시장경제를 실행할 수 있다." 이는 중국의 개혁·개방 노선을 추진한 덩샤오핑의 신념이었다. 저자는 중국의 사회주의적 시장 시스템의 주역으로 향진기업을 주목한다. 인민공사가 해체되면서 향진기업에 의한 농촌 공업화가 추진되면서 농촌의 과잉 노동력이 도시로 유출되지 않고 농촌 사회의 비농업 부문에 흡수되어 농촌 경제는 다산업 경제구조로 탈바꿈되었다. 중국 시장경제의 성장 발전은 과거와의 단절이 아닌 전통 사회의 생산력 특성과 진화 패턴의 '부활'로, 향진기업은 체제 전환 과정에서 생산력 향상과 함께 사회주의의 특성을 유지한 독특한 시스템이었다.

여기서 중국식 사회주의적 시장경제에서 개체 소유(사적 소유), 집체 소유, 국가 소유 등의 다원화된 소유 형태가 관심을 끈다. 저자는 향진기업은 개체의 자율성과 집단 이해가 조화를 이룬 기업으로, 전통 사회가 추구한 '개체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역설적 결합'으로 규정한다. 이는 '협조적 문화'의 유산으로 시장경제로의 이행에 정교한 사적 소유권의 확립이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아닐 수 있다는 주장으로, 우리에게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 북한의 공동체적 소유제도(협동적 및 국가적 소유)의 골간을 유지하면서 시장 시스템을 도입하는 방안을 시사해준다.

4. 인간과 자연을 분쇄시킨 '악마의 맷돌'이 주도한 문명이 시장경제였으며, 시장 시스템에 부합되는 법·제도·규범·관행의 발전이 근대 인류 사회가 걸어온 길이었다. 그런데 과연 인간과 인간을 하나로 묶고, 자연과 인간을 새롭게 통합시키는 시장 시스템의 출현이 가능할까? 이에 대한 대답으로 최 교수는 새로운 혁신과 가치를 창출하는 시장 시스템을 대안으로 제시했는데, 그의 '새로운 시스템'은 경쟁이 아닌 '협력', 사적 소유가 아닌 '공유', 그리고 '호혜성'에 방점이 찍혀 있다. 나아가 '개방형 협력 혁신' 모델로 협력과 공유가 가치 창출의 기반이 되는 시장 시스템의 도래를 예고한다. 시장경제가 국가의 역할 속에서 발전되어왔듯이, '협력과 공유'는 인간의 집단의지, 즉 또다시 정치의 역할을 요청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최 교수는 여러 노작을 통해 '협력과 공유'를 새로운 시장 시스템의 작동 원리이자, 21세기 세계경제의 실천적인 규범임을 역설해왔다. 금번에 출간한 이 책은 경제학의 전통적인 시각을 뛰어넘어 세계경제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크게 확대시킨 역작이다.

조민 (정정) 정치학 박사. 한반도 평화통일과 북한 정권진화 방향에 관심이많다. <한반도 평화체제와 통일전망> <남북 친화력 확대 방안> 등 다수 저서와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