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지 않는 자유주의 군함
이라크전쟁을 지지하고 약물을 합법화하며 위키리크스와 국가의 개입을 비난하고 자유주의를 찬양하며 은행의 구제를 호소하는 것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이코노미스트>라는 잡지가 모두 옹호하는 입장이라는 점이다.
매주 한 번씩 런던에서 발행되는 이 잡지는 지배 계층의 기분을 띄워주는 거울 역할을 하고 있다.
지속적인 판매량 감소와 구독자 수 하락, 계속되는 광고수입 감소 등으로 종이매체들은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변화도 기대만큼 수익 효과를 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나 <이코노미스트>만은 예외다. 최근 판매량이 부진하다고는 하나,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다. 특히 독자 대부분이 집중된 미국에서 더욱 호조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무언가 수상하다. 2006년, 미국의 비영리 공영 라디오 방송 <NPR>는 '지루한 타이틀'에 '때때로 난해한 내용을 싣는' 잡지가 어떻게 전년 대비 독자 수가 13%나 증가할 수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최근에는 2010년 발표된 판매부수에 대해 여기저기 말이 많았다. 시기심 섞인 논평도 쏟아졌다. 발표에 따르면, 호당 142만 부가 팔렸고 그중 82만 부가 미국에서 판매됐다는 것이다. 이는 1982년 이후 미국 내 <이코노미스트>의 판매량이 약 10배 증가했다는 뜻이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마케팅 기법을 잘 활용한 덕분이라고 설명한다. 붉은색의 직사각형 바탕 위에 흰색으로 쓰인 깔끔하고 우아한 로고에 더해, <이코노미스트>는 상대적으로 높은 판매가를 책정했다. 이에 따라 이 잡지는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주는 일종의 표식이 되기도 하고, 돈 많은 독자, 혹은 그러길 바라는 독자에게 '엘리트 계층에의 소속감'을 나타내주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1) <이코노미스트> 역시 이런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 '정상은 외롭다. 하지만 적어도 무언가 읽을 건 있다'는 2007년 광고 카피가 이를 잘 보여준다.
부자와 엘리트들의 '명품 스카프'
고상함을 추구하는 소비자의 욕구를 집요하게 부채질하던 <이코노미스트>는 이미 1991년 <워싱턴포스트>의 빈축을 샀다. 제임스 팰로스 기자는 <워싱턴포스트> 지면을 통해 이 잡지가 "영국적 색채나 '옥스브릿지'(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축약어)식의 과장된 문체에 현혹되기 쉬운 독자들의 관심을 끌 만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고 비판했다.(2) 어느 정도 엘리트주의 냄새를 풍기는 게 과도한 전략은 아니었다. 자사 발표 수치에 따르면, <이코노미스트>는 미국 언론 가운데 가장 부유한 독자층을 보유한 잡지다. (<월스트리트저널> 독자의 평균연봉이 15만6162달러인 데 비해 이 잡지는 구독자의 연간 수입이 평균 16만6626달러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미국 가정의 중간층 소득은 4만5800달러다.) 이 독자층은 명품산업의 주요 타깃이 되는 고객층이다. 2007년 <이코노미스트>의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이 잡지의 구독자 20%가 빈티지 와인 셀러를 보유하고 있으며, 3천 달러 이상의 고가 손목시계를 사는 사람의 비율이 4.7%라고 자랑스레 떠벌렸다. 여느 명품 스카프와 동급이 된 <이코노미스트>는 거대한 대중사회 속에서 나를 구분해주는 하나의 표식으로 작용한다. 선진국의 주요 당국자들도 이 잡지를 펼쳐보고, 이 사회의 리더가 되길 꿈꾸는 학생들도 이 잡지를 펼쳐보며, 티파티 운동으로 대변되는 미국 보수 정치세력의 대표주자 세라 페일린 역시 이 잡지를 들춰볼 것이었다.
<컬럼비아 저널리즘 리뷰> 같은 다른 잡지나 신문들은 <이코노미스트>의 성공 이유에 대해 '기사가 세련되고 세계 뉴스를 잘 요리한다'는 점을 꼽고 있다. 그런데 비난의 목적에서든, 아니면 이 잡지처럼 되길 꿈꾸는 차원에서든 <이코노미스트>의 성공에 대한 해석은 대개 늘 같은 접근 방식을 취한다. 이 잡지의 독보적 성공에 대해 형식적인 측면에서의 설명만을 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코노미스트> 쪽이 그토록 자화자찬하는 바대로) 위기 상황에서도 발행부수를 늘릴 수 있는 능력은 단순히 문체의 문제라든가 마케팅 문제만으로 국한될 수는 없다. 이 잡지가 그런 능력을 보일 수 있었던 첫 번째 이유는 확고한 편집 방향 때문이다. 바로 '시장의 원칙'을 고양시키고, 모든 정치권력의 개입을 물리치는 것이다. 미국 매체들은 <이코노미스트> 스스로가 부여한 이미지를 더욱더 확인시켜주는 모습을 보인다. 극도로 중립을 유지하고 경제적 상식을 추구하는 매체로서의 이미지가 그것이다. 영국 보수층을 지지하면서도 이 잡지는 최근 발행호의 한 사설에서 '그 어떤 정당에도 결코 종속되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새삼 다짐했다. 아울러 '오랫동안 자유주의를 고집해온' 자신의 역사를 부각시켰다. <이코노미스트>의 이런 입장은 영국이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이던 시기인 1843년 이 잡지가 창간된 이후, 한 번도 바뀐 적 없이 고수되고 있다.
모자 제조상이던 제임스 윌슨이 곡물 보호주의 성향의 새로운 입법안을 저지하기 위해 창간한 <이코노미스트>는 언제나 자유무역의 수호를 위해 열심히 싸워왔다. 당시에는 1815년 곡물가 폭락 이후 의회가 제정한 관세에 대항해 맨체스터 상공업자들의 이익을 지키는 게 주목적이었다. 이들은 보복 조치로 타격 입을 수출 물량에 대한 우려뿐만 아니라 늘어날 인건비에 대해서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빵 가격이 오르면 직원들은 급여 인상을 통해 이를 보전하려 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법은 결국 1846년 폐지되고, 제임스 윌슨은 뿌듯해할 수 있었다. 첫 언론 광고를 시도해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다.
그 후임자인 월터 배젓은 신랄하기로 유명한 산문체에 고상한 옷을 입혀 꾸며줌으로써 독자층을 넓힌다. 배젓이 직접 기사를 작성하던 정치란은 그에게 영국 은행의 독립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발언대가 돼주었다. (토니 블레어에 의해) 이같은 요구가 실현된 건 1997년이었지만, 영국 은행의 독립에 대한 공로는 그보다 100년도 더 전에 목청 높여 이를 호소했던 배젓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이로써 <이코노미스트>는 스스로 그토록 귀히 여기던 명분 하나를 수호하는 데 또다시 성공한다.
이 회사의 지분 구조를 보면 그 제도적 성격이 확실히 드러난다. 피어슨그룹의 자회사인 <파이낸셜타임스>를 발행하는 회사 '파이낸셜 타임스 리미티드'가 지분의 50%를 보유하고, 나머지는 독립 주주들의 손에 있다. 캐드베리, 로스차일드, 슈로더 같은 기업들과 다양한 전·현직 편집위원들이 나머지 50%를 쥐고 있는 것이다. 169년의 역사 동안 편집장이 바뀐 것은 고작 16번이고, 1900년대 이후 편집국 직원은 거의 모두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 출신이었다. 편집 노선의 일관성에 기여하는 또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모든 기사에 기자 이름이 찍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외부 기고문이나 전직 동료들에게 전통적으로 할애되는 칼럼난을 제외하면, 기자 70명은 모두 바이라인(필자 표시) 없이 기사를 작성한다(그중 약 50명이 런던 본사에서 근무한다). <이코노미스트> 소속 기자들 가운데 일부 스타 블로거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 '무기명의 장막'이 근본적으로 걷히지는 않는다. 현 편집장 존 미클스웨이트는 "이에 따라 우리의 편집 과정은 이례적일 정도로 민주적 방식으로 이뤄져왔다"고 설명한다. 책임편집자 빌 에모트는 "기사 말미에 기자 이름을 쓰지 않을 경우, 기자들 간의 협력이 더 쉽게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3) 은근히 재미있는 대목이다. 150년 전부터 전세계 어디에서든 경쟁을 장려하는 데 기여해온 주간지가 정작 내부에서는 그와 정반대되는 '협력' 원칙에 기반을 두고 있으니 말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전통적으로 런던의 주요 신문·잡지사들이 몰려 있는 런던시티지구나 플리트가에서 벗어나 '세인트제임스'라는 세련된 동네를 선택한다. 프라이빗클럽에서 여유를 만끽하고 고급 와인을 마시며 현대미술 작품에 투자하거나, 아니면 고급 의상실에서 양복을 맞춰 입는 독자를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곳이다. 부자들이 담장을 높이 치고 고상하게 살아가는 이 동네의 한복판에 위치한 신(新)브루탈리즘(20세기 후반 건축의 한 경향. 가공하지 않는 비형식주의를 특징으로 한다) 양식의 본사 건물은, 1964년 건축 당시만큼이나 그곳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건축가들의 표현에 따르면 '고리타분하고 무미건조한' 이 본사 건물은 높이가 제각각인 3개의 고층 빌딩으로 이뤄졌고, 마치 주변의 화려함에 대해 야유와 경외감을 동시에 보내는 듯하다.
경쟁을 주장하기 위해 '협력'한다?
좁고 구불구불한 사무실 복도를 따라 지나가면 성지와도 같은 주간실로 이어진다. 이곳에서는 매주 월요일 편집위원들이 빼곡히 모인 가운데 대기 중인 기사 주제를 선별하고, 서로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며, 표지 이미지를 선정한다. 그날 편집회의 자리에 있던 40여 명의 기자 가운데 약 3분의 1이 여성이었고, 4분의 1 정도만이 30살 미만의 젊은 기자였다. '<이코노미스트>의 편집이 어린애들 손에서 이뤄진다'는 우스갯소리는 사실이 아닌 듯하다. 그 자리에 참석한 대부분이 중년의 나이대였기 때문이다. 이 잡지의 본사에서 15년을 근무하다 <파이낸셜타임스>로 자리를 옮긴 기디언 래치먼은 이게 최근의 변화된 양상이라고 강조한다. "1990년대 초반에는 미래의 포부에 찬 젊은 기자들이 <이코노미스트>를 플리트가(언론계의 중심)로 진출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오늘날은 그와 정반대의 상황이다. <이코노미스트>의 처우가 좋고 고용이 안정되자 경력 있는 기자들이 지원서를 들고 몰려온다." 편집국의 평균 연령대가 높다는 게 천편일률적인 기사를 양산하는 요인이 되지는 않을까? 래치먼에 따르면,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건 오히려 하나의 장점이 되기도 한다". 그만큼 전체 의견을 통일하기 쉽고 안정적 관점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끈기 있게 장수한다는 건 하나의 강점이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때 <이코노미스트>의 편집국에서 보여줬던 바와 같이, 끈기와 장수가 약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물론 <이코노미스트>는 평정을 잃지 않았다. 당시 미 재무장관 헨리 폴슨이 대통령에게 월스트리트의 구제를 간곡히 부탁했을 때, <이코노미스트>는 나름의 해법을 침착하게 하나하나 늘어놓았다. 부동산 시장을 수습하고 민간 대출과 개인 투자 부분을 구제하는 방법, 실업의 증가를 차단하고 국채 시장을 진정시키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코노미스트>가 자신의 처방전을 제시하던 차분한 어조는 가히 존경할 만했다. 사실 이 잡지는 그런 상황을 과거에도 지켜본 바 있었다.
창간 이후 100년 동안 이 잡지는 (1873~96년과 1930년대 등) 여러 번의 세계적인 경기침체를 지켜봤고, 1907년의 은행 위기와 1927년의 시장 붕괴도 겪어봤으며, 1931년에는 파운드화가 역사적인 가치 폭락을 경험하는 것도 지켜봤다. 가장 눈에 띄는 경제 붕괴 상황만 살펴보더라도 이 정도다. 이후의 시기라고 그렇게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붕괴됐고, 석유파동이 일어났으며, 지역 간 갈등이 불거지면서 1970년대 성장세가 꺾였다. 따라서 2008년 금융위기가 발생하기 직전, <이코노미스트>는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멀찌감치 떨어져서 무리를 관망하는 늙은 원숭이의 모습과 같은 초월자적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이코노미스트>의 해법은 현명함으로서도, 초연함으로서도 빛을 발하지 못했다.
"멀리 떨어져 무리를 관망하는 노회한 원숭이"
자유주의 신전의 수호자로서 <이코노미스트>는 교리상의 확고함이 놀라울 정도로 부족하다. 일관되게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독창적인 논리적 일관성도 발견되지 않는다.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몇 가지 도덕적 가치를 제외하고, <이코노미스트>는 일단 은행 구제책을 쌍수 들고 환영했다. "이제는 정치와 신념을 모두 옆으로 치워두고 실용적인 대책에 집중해야 할 때다. 이는 정부의 단기적인 개입을 의미한다. 납세자와 정치인, 혹은 자유무역 성향이 짙은 신문에서 평소 기대하는 것보다 더 지속적인 개입이 이뤄지는 것이다." 양심의 가책이 없는 투기꾼들에게 수천억 달러를 들이붓는 상황에서, 유권자들로서는 비난할 거리가 가득했다. 하지만 <이코노미스트>의 처지에서 봤을 땐 정부가 현명하게 대처했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정부의 개입으로 시민들은 1930년대처럼 은행의 도산에 따른 악몽을 피할 수 있었고, 빈민 구제 급식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늘어서는 기구한 상황도 면할 수 있었다. 2008년 10월 11일자 기사에서는 "그 어떤 나라도, 어떤 기업도 금융 부문의 심장 발작으로부터 무사할 수 없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로부터 석 달 뒤에는 정부의 개입이 꽤 심하다고 생각했는지, 이제 이 잡지는 경고 문구를 날린다. 은행을 국유화하는 것은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꼴이며, 정실 인사를 부추기고, 재산을 낭비하는 일이자 민간부문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2009년 1월 24일). 따라서 <이코노미스트>는 서로 상반되는 해법을 제시한 셈이다. 일단 이 잡지는 국채 위기로 상황이 번지는 걸 막고 은행을 구제하기 위해 협력 수위를 더 높이도록 요구했고, 특히 유로존 내부에서의 협력 강화를 부르짖었다. 그러면서도 국가에 반하는 투기를 일삼으며 이같은 위기를 부풀린 투자자를 억제하는 모든 조치에 반대했다(2010년 12월 9일). 예산 긴축이나 인건비 감축과 같이 <이코노미스트>가 늘 한결같이 부르짖는 덕목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일관된 제안을 하는 부분은, 마치 기적의 해법이라도 되는 양 걸핏하면 내세우는 유로본드(유로존 공동채권) 발행을 통한 유럽 부채의 상호부조다. 하지만 이는 2008년까지 마리오 몬티 현 이탈리아 총리가 주재하던 브뤼셀의 싱크탱크 브뤼셀연구소의 아이디어였다. <이코노미스트>는 독자들이 더 과감한 것에 길들여지도록 만들었다.
위기의 원인은 차마 건드릴 수 없는 성역이었다. 2010년 9월 20일 <이코노미스트>는 "우리가 비난해야 하는 것은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람들이지 시스템 자체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이보다 몇 달 전에는 미국의 정치적 난국을 언급하며 "시스템보다는 차라리 오바마를 비난하라"고 독자들에게 호소하기까지 했다(2010년 2월 18일). 구조가 면죄부를 얻고 개인이 해명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서 '누가 잘했네, 잘못했네' 하는 점수 배분이 분석을 대신한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전 총리에 대해서는 부패 행적을 문제 삼았고,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부진한 개혁을 나무랐다. 반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보여주는 냉철한 능력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냈다.
"자본주의는 잘못 없다, 오바마를 욕하라"
2008년 10월, 미국 뉴욕의 월가가 무너지고 며칠 뒤 <이코노미스트>는 "자본주의는 지금껏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의 경제 시스템"이라고 규정하며, "장기적으로 봤을 때 문제는 이런 참극을 불러온 게 누구 책임인지 알아보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지난 1월 <이코노미스트>는 금융 규제 완화를 위해 다시금 노래를 불러댄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폭격을 연상시키는 비행선들의 습격을 받는 런던의 모습으로 표지를 장식함으로써 <이코노미스트>는 세계에서 가장 큰 금융 중심가에 미치는 위협을 빗대었다. 따라서 2012년 1월 7일 발행호의 주요 제목은 영국 국가를 빗댄 '세이브 더 시티'(Save the City)였다. 영국 최대 금융지구인 런던시티지구를 구하자는 것이다.
<이코노미스트>를 읽으며 우리는 많은 걸 배운다. 창업자 윌슨은 기업가와 공직자가 원인을 알고 대처할 수 있게 확실하고 믿을 만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이 신문의 기능이라고 판단했나 보다. 따라서 <이코노미스트>는 처음으로 도매가 목록을 게재한 언론매체가 되었다. 지금도 <이코노미스트>는 전세계 거래량과 국내총생산(GDP) 성장 전망, 온실가스 배출량 등 각종 경제 및 금융 지표에 여러 지면을 할애한다.
<이코노미스트>는 국제적으로 기사를 다룰 수 있는 폭이 상당히 넓다는 특징도 있다. 중국 전자상거래 관련 기사와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공중에 뿌려지는 돈 얘기를 한꺼번에 다룰 수 있는 잡지, 중동 지역의 평화협상과 화성 탐사에 관한 기사를 모두 다룰 수 있는 잡지, 카타르에서의 새로운 미술관 개관 소식과 남아프리카의 어느 무지한 탐험가가 악어에게 잡아먹혔다는 이야기를 같은 발행호수에서 한꺼번에 전할 수 있는 잡지는 <이코노미스트>가 유일하다. 1845년 철도 붐을 계기로 줄줄이 늘여 쓴 부제 역시 이를 증명한다. '금융권 잡지이자 철도계 소식을 전하는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 정치와 문학을 모두 아우르는 종합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오랜 역사 중 상당 부분을 함께해온 이 부제는 잡지 자체만큼이나 길고도 길다. 1920년대에는 고작 50쪽에 불과한 분량이 1940년대에는 종이 기근 현상이 나타남에 따라 12쪽으로 줄어들었는데, 오늘날은 잡지 한 부가 100쪽 가까이 된다. 주제가 다양한 만큼 날림성 기사도 많다. 몇몇 특집 취재 기사를 제외하면, 기사는 놀라울 정도로 짤막하다.
몇 개 안 되는 단어로 늘어진 문장을 구사하는 이 잡지는 오만한 모습 또한 여과 없이 내보낸다. 특히 순수하고 강경한 자유주의에 대한 애정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미국의 유명한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대표적인 희생양이다. 반자본주의 진영의 대표 기수가 아님에도, 폴 크루그먼은 넘쳐나는 수식어의 표적이 된다. 그에게는 '조잡한 케인스주의자', '과격한 운동가', '상아탑에 갇힌 미 좌파의 대중적 영웅',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이클 무어' 등의 수식어가 붙었다(2003년 11월 13일). '어리석고 이기적'이며 '보호주의로써 신흥개발국을 가난하게 만들려는 시도'로 일축해버린 1990년대 말 세계무역기구(WTO) 반대운동과는 달리, <이코노미스트>는 '월가를 점거하라'(Occupy Wall Street)는 슬로건을 내건 월가 시위에는 관대함을 보였다. <이코노미스트>의 시각에서 봤을 때, 시위대의 불만은 사실 '정당하고 뿌리 깊은 것'이었다. 이들이 실질적으로 '과도한 국가'를 겨냥했으며, '경제를 자유화'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들을 만족시킬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월가 시위의 현장인 주코티 공원에서 진을 치고 있던 사람들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는 미지수다.
<이코노미스트>는 사회의 불만 세력이 거리를 장악하면 이를 청년들의 소요 사태가 갑자기 불거진 것 정도로만 생각한다. 튀니지 혁명 역시 그와 같이 다룬 것은 명백한 실수였다. <이코노미스트>는 소수의 학생과 노조원이 진 엘아비딘 벤 알리 대통령을 하야시킬 가능성은 전혀 없다며 다소 성급하게 결론지었다(2011년 1월 6일). 더욱이 벤 알리 대통령은 '평화적인 군중' 앞에서 크게 한발 물러선 것에 대해 치하를 받았으나, 시위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시위대 수는 이미 234명으로 집계된 상황이었다 (2011년 2월 26일).
재계 엘리트들이 선호하는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학계 엘리트에는 별로 호감을 못 느끼는 듯하다. 때로는 나름의 통찰력 있는 비판도 이뤄진다. 한 취재 기사에서 2010년 미 대졸자들의 취약한 상황을 조명했는데, 모교에서 이 학생들을 이용해 낮은 비용으로 '과시용'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했다는 내용이었다. 보고서에는 학교의 우수한 성적 비율이나 최근의 박사 연구 경향 등을 자랑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문제는 그에 따른 결론이, 고등교육 부문의 재정을 확보해 정식 임용직 수를 늘리는 등 해결책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박사과정 학생 수를 줄여야 할 필요성을 역설한다는 점이다(2010년 12월 16일). 그보다 4년 전에는 '데리다와 푸코의 후예들'에 대해 빈정댔다. '해체'라든가 '내적 기호작용'같이 '어두운' 주제를 미화하는 데 시간 낭비를 하지 않고 <이코노미스트>에 관한 연구를 양산했기 때문이다(2004년 12월 16일). <이코노미스트>에서 '반지성주의'는 확실한 가치로 남아 있는 듯하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에 관한 최근의 표현만 봐도 그렇다. 2010년 8월 12일자 기사에서 그의 삶과 작품은 단 한 문장으로 일축됐다. "아내를 죽인 미치광이 마르크시스트"라고.(4)
사라진 다원주의, 우파로의 복귀
미클스웨이트 편집장이 끊임없이 선전하고 다니는 바와 같이, <이코노미스트>는 진정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자유주의를 이상적으로 조합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는가? <이코노미스트>는 무역의 자유가, 사람들이 때로 무거운 대가를 치르며 얻어내야 했던 사회·민주적 자유에 선행한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듯하다. 그리고 <이코노미스트>가 그토록 내세우는 자유무역이란 건 늘 경제를 더 효율적으로 만들지도, 더 인간적으로 만들지도 못했다. 창업자 윌슨은 흑인 노예제를 지지하는 지역과의 교역 금지에 반대했다. 그같은 조치가 노예뿐 아니라 영국 소비자에게도 피해를 입힐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어 그는 기근에 시달리는 아일랜드를 구제하기 위해 자유무역의 확대를 권고했다.(5) 이같은 해법이 실패로 끝나자 <이코노미스트>는 아일랜드의 배은망덕함을 맹렬히 비난하며 더 엄격한 탄압을 제안했다.
자유주의 철학이 아무런 제약 없이 경제를 지배해야 한다고는 하나, 그럼에도 정치면에서는 몇 가지 예외를 허용한다. 배젓은 1851년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를 환영했는데, "쉽게 흥분하고 변덕이 심하며 피상적이고, 심할 정도로 논리적인데다 합의를 끌어내기 어려운" 프랑스 국민성이 영국식의 매력적인 의회제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6) 프랑스에 대한 이같은 경계심은 지금까지도 그 맥이 이어진다. 2012년 봄 프랑스 대선 기간 중, 사회당 후보 프랑수아 올랑드에 대해 이 잡지가 '위험한 인물'이라고 묘사했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올랑드가 재계에 대한 심각한 적대심으로 움직인다고 지적하며, 늘 개혁되지 않는 사회당이 독일과의 단절로 나라를 이끌어가길 꿈꾼다고 주장했다.(2012년 4월 28일).
배젓은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동일한 통찰력을 보여줬다. 전쟁에의 개입으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으나, 그는 일단 1861년 남부의 독립 선언을 환영했다. 아울러 노예제가 당시의 갈등 상황에서 일정 부분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부인하고, '덜 공격적이고 덜 오만하며 덜 성가신' 둘로 나뉘는 것을 기뻐했다. 그렇게 남과 북으로 나뉘면 특히 맨체스터 방직공장에 더 저렴한 면화를 파는 게 가능해진다.(7)
자유주의 신조를 몇 번 어긴 적이 있긴 해도, 19세기 내내 <이코노미스트>는 세 가지 기본 원칙을 충실히 고수한다. 바로 △자유무역을 요구할 것 △혁명의 열기를 유지하기 위한 몇몇 사회 개혁을 수용할 것 △대륙의 평화를 확보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부터는 사상적 기반을 재정비해 복지국가의 이념을 수용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친다. 윌슨식 자유주의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1943년 창간 100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기고문집에서 당시 편집장 제프리 크라우더는 타협적 입장을 보인다. 그에 따르면, 경제적 방임주의는 불평등과 불안정을 양산하고 오로지 공적 개입만이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이코노미스트>가 사회주의식 관점을 채택한 건 아니었다. 이는 사회주의 진영에서 내세우는 '목적 때문이 아니라 여기에 도달하기 위해 내세우는 수단 때문'이다.(8) 이같은 교리적 관대함에 따라, <이코노미스트>는 더 폭넓은 재능과 견해로 한층 더 풍부해질 수 있었다. 반나치 망명인들이 다수 편집국에 합류했고, 그 가운데는 두 명의 마르크스주의 지식인, 아이작 도이처(사학자)와 다니엘 싱어(작가)가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이코노미스트>의 다원주의적 성향은 1960년대부터 사라지고 다시 원래의 우파 노선으로 회귀한다.
오늘날에는 전후 사회주의적 모델이 성장의 걸림돌로 여겨지고, 따라서 이는 퇴출해야 할 대상이다. 그 첫 번째 타깃이 바로 노조다. 2011년, <이코노미스트>는 공무원들의 정년퇴임 연한을 늦추고 이들의 연금을 축소하는 것만으로는 영국의 재정 적자를 상쇄하기에 역부족이라고 설명했다. '공공노조와의 전쟁'은 추가적인 생산성 향상과 함께 탄력적인 노동계약이나 시간제 노동을 요구했다(2011년 1월 6일). 50년 전에는 이같은 문장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코노미스트>의 오락가락하는 태도 변화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바로 외교정책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이코노미스트>가 대영제국을 지지한 건 국수주의 때문이라기보다 신중한 행동노선 때문이었다. 때로 <이코노미스트>는 로디지아(오늘날의 짐바브웨)를 세운 세실 로즈나 후일 영국 총리가 되는 네빌 체임벌린과 맞서 싸우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이들에 대해 <이코노미스트>는 식민지에서의 지출로 나라를 망친다고 비난했다. 1919∼39년 <이코노미스트>는 독일, 소련, 미국과 함께 국제연맹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끊임없이 설파했다.(9) 이 잡지의 노선 변경은 1956년에 이뤄진다. 영국과 프랑스의 수에즈운하 침공을 비난한 것이다. 이는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 다툼에 대한 반발이라기보다 파병을 반대하는 미국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다.(10)
이제는 미국 뒤로 줄을 서는 게 대세인 상황이다. 베트남에서든, 이라크에서든, 옛 유고슬라비아에서든, 아프가니스탄에서든 <이코노미스트>의 책임자들은 하나둘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작전을 환호하고 나선다. <이코노미스트>는 오바마의 행적에 대해 카불에 원군을 보내거나 파키스탄에 무인정찰폭격기를 파견했을 때만큼 호의적인 태도로 기사를 다룬 적이 없었다. 이란과 북한 문제에 대해서도 소심하고 관료적인 유엔에 불만을 나타내면서 미 행정부의 강경 노선을 지지한다. 남미 관련 취재에서도 여전히 편견 어린 시선을 유지한다. 좌파가 이끄는 나라에 대해서는 그 경향이 더 심한데 베네수엘라가 대표적이다. 1988년 이후 베네수엘라를 이끌고 있는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참관인이 보더라도 만족스러운 상황에서 치러졌던 14번의 국내 선거 중 13번을 승리했다. 하지만 <이코노미스트>는 '베네수엘라가 점점 독재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불안감을 부추기는 데 여념이 없다(2010년 9월 23일, 2012년 1월 5일). <이코노미스트>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실패로 돌아간 2002년 쿠데타에서 미국을 등에 업고 이를 조장했던 야당과 사설 매체들이 그 소스를 제공해준 게 아닐까?
미국에 줄 선 자유주의의 수호자
<이코노미스트>가 미국의 외교 노선을 따라가고 있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위키리크스의 폭로와 줄리언 어산지 사건에 대한 이 잡지의 반응이다. 자유주의 논리로 봤을 때는 이를 기회로 삼아 정보의 자유를 주창할 법도 한데, 그러기는커녕 <이코노미스트>는 이들이 '디지털 시대의 자코뱅당' 같은 사이비 종파든 아니든 일단 미국의 비밀을 폭로한 이들에 대한 워싱턴의 처벌권을 옹호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코노미스트>가 초창기 자유주의로 되돌아간 것일 수도 있다. 정부의 역할과 시장의 완벽한 지혜, 저항의 위험성 등 오늘날 <이코노미스트>가 취하는 입장은 빅토리아 시대의 위대한 논설기자들이 고수했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오늘날에는 그런 입장이 더 간접적으로 표현된다는 점이다. 미국의 이해관계와 긴밀한 동맹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자유주의는 달라졌다. 국수주의를 추구한다는 오명에서 벗어난 <이코노미스트>는 오늘날 군사작전에 환호하고 있으며, 인도적인 것이든 애국적인 것이든 혹은 경제적인 것이든 그 명분은 대영제국 시절이라면 크게 회의적이었을 것이다. 미 금융가 출신의 현 편집장은 기존 자유주의 색채와 오늘날의 변질된 자유주의가 뒤섞인 새로운 편집 문화의 순수한 산물이다. 창간 이후 169년이 지난 지금, 주류 경제의 첨병인 <이코노미스트>는 아프리카를 제외한 세계 모든 대륙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하고 있다. 어쩌면 선조보다 훨씬 더 넓은 지역에서 제국을 건설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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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알렉산더 제빈 Alexander Zevin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LA 캠퍼스(UCLA) 교수·역사학
번역 | 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미래를 심는 사람> 등이 있다.
(1) ‘The Economist Tends its Sophisticated Garden’, Jeremy W. Peters, <뉴욕타임스>, 2010년 8월 8일. 오늘날 프랑스에서 <이코노미스트>는 5.80유로에 판매되고 있으며, 동급의 다른 잡지들은 판매가격이 3.50유로다.
(2) ‘The Economics of the Colonial Cringe’, <워싱턴포스트>, 1991년 10월 6일.
(3) <리베라시옹>에서 인용, 2003년 8월 8일.
(4) 루이 알튀세르(1918∼90)는 1980년 자신의 아내를 교살했다.
(5) Ibrahim Warde, ‘자유무역이 아일랜드를 굶주리게 했을 때’(Quand le libre-échange affamait l’Irland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6년 6월호.
(6) <Collected Works of Walter Bagehot>, Oxford University Press, London, 4권, p.81, 1986.
(7) 1861년 1월 19일, 1861년 6월 29일, 1861년 9월 28일, 1863년 7월 11일 발행호 참조.
(8) <The Economist, 1843∼1943: A Centenary Volume>, Oxford University Press, London, pp.13∼15, 1943.
(9) 같은 시기, <이코노미스트>는 더 나은 공동안보와 군비경쟁 중단을 요구하는 기사를 약 150편 내보냈다. Graham Hutton, ‘The Economist and Foreign Affairs’, <이코노미스트>, 1843∼1943, op. cit.
(10) 1956년 10월 6일 발행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