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승학의 시네마 크리티크] 자기 완성의 새로운 관계: 영화 <챌린저스>(2024)

사랑으로서의 아곤(경쟁, agon)에 관하여

2024-05-13     지승학(영화평론가)

인간들의 사랑

언뜻 보기에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영화‘들’에서 묘사되는 게이를 포함한 연인관계는 항상 끊임없이 서로를 원하고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거기에는 전통적인 로맨스물에서의 사랑과 다른, 아니 어쩌면 그 사랑의 개념을 훨씬 뛰어넘는 어떤 특별한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 왔다. 특히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의 그 유명한 마지막 장면, 엘리오(티모시 샬라메)의 얼굴 클로즈업은 엘리오의 얼굴이, 그 눈망울이 끝끝내 분출해 내고야 마는 그 절제된 눈물로써 어떤 말로도 절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정확히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거기서 엘리오의 얼굴은 자기 가슴에 화살을 쏘아 영원히 지워내지 못할 사랑의 아름다운 상처를 남기고만 큐피드에 가까웠다. 그때 새삼 나는 배우의 위대함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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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본즈 앤 올>에 이어 <챌린저스>를 보면서 나는 사랑을 훨씬 뛰어넘는 어떤 특별한 무언가가 이 영화에서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나름의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그것에 대해 말해 보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 이야기를 이해하기에 앞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본즈 앤 올>을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진 않다. 어차피 모든 영화는 인간들의, 아니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구조 1: 나와 너

<챌린저스>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경쟁이라는 사랑에 대하여'라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의 경쟁이 그 경쟁이 아니고 여기서의 사랑이 그 사랑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두 단어가 지닌 의미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시작은 관계의 구조에서 가능하다. 여기서 관계의 구조란 남자-여자, 남자-남자를 의미한다. 앞서 ‘사랑’ 이야기를 먼저 꺼냈으니, 이 관계의 구조에 의미있게 접목할 수 있는 사랑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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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랑의 신파를 제외하면 남는 건 사랑의 관계적 구조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두 사람이 동시에 서로를 사랑하게 되는 일을 특별한 일처럼 묘사하지는 않는다. 현실에서는 상당히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의 작품 세계에서는 사실상 그 드문 일이 흔하게 일어나다 못해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의 관계에서 꼭 필요한 요소, 즉 사랑을 시작하는 ‘주체’(나)가 있고, 그 사랑에 대하여 자기의 감정을 밝혀야 하는 ‘타자(他者)로서의 주체’(너)가 있기 마련인 그 관계마저 전부 전제된 것으로 치부하진 않는다. 근본적인 그의 질문은 바로 두 요소(나와 너)를 향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세계관이 갖는 특별함이 불거진다. 그 특별함은 시작 자체가 드문, 즉 동시에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를 전제로 하되 바로 거기에서 더 나아가면 어떤 관계적 구조를 갖게 되는가? 라는 질문에서 나타난다. 사랑보다 더한 사랑, 사랑을 넘어서는 사랑, 사랑을 극복하는 사랑이라는 초라한 싯구(詩句)와 같은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이름을 쓰고는 있지만 사실 그 단어가 품지 못하는 그  관계의 원형은 어떤 구조를 갖느냐, 아니 무엇이냐는 것이다. 

 

사랑의 구조 2: 세속적인 사랑

파격적인 연출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원형적 관계에 접근하기 위해서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영리하게 끌어들인 것은 바로 ‘스포츠’다. 영화 <챌린저스>에서 ‘테니스’라는 경기 종목은 이를 특정하기에 가장 좋은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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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시작하는 ‘주체’와 그 사랑에 대하여 자기의 감정을 밝힐 것을 요구받는 ‘타자(他者)로서의 주체’와의 관계 반응. 테니스는 그런 관계의 구조를 은유적으로 잘 보여준다. 물론 이 설명은 아트(마이크 파이스트)와 패트릭(조쉬 오코너)의 관계만 상정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타쉬(젠데이아)를 포함한다면 조금 더 본질적인 관계의 원형이 드러날 여지가 생긴다. 타쉬가 아트와 결혼하고 그의 훈련 코치까지 기꺼이 되어 준 일이 곧 ‘사랑’의 완성을 의미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타쉬와 패트릭과의 부적절해 보이는 관계가 아트와의 사랑을 망친다고 보아서도 안 된다. 타쉬가 아트와 패트릭 모두에게 질투를 유발하는 악녀라고 보아서도 안 된다. 

 

사랑의 구조 3: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는...

여기서 나는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다른 영화, <본즈 앤 올>이 <챌린저스>의 적절한 주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본즈 앤 올>에서 등장하는 남자주인공 리(티모시 샬라메)와 테일러(매런 이얼리)의 식인성(食人性)은 본질적 관계에 대한 응답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일단 <본즈 앤 올>에서 리와 테일러는 서로의 체취로써 사랑에 빠지게 된다. 동시에 사랑하게 되는 드문 일은 이런 영화적 상황을 통해 정당하게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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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본즈 앤 올’, 영화에서는 ‘뼈까지 남김없이 모두 먹어치우는 행위’로 해석되는 그 희열을 통해 테일러는 리가 되는 기적을 경험한다. 식인성이 윤리적 물음을 초월하여 사랑에 응답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는 네가 된다’임을 이 영화는 그렇게 보여준다. 테일러는 리가, 리는 테일러가 된 것이다.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라는 제목의 문장도 같은 의미를 갖는다. '너의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라는 요청, 아니 어쩌면 명령은 '나는 네가 된다'는 의미의 연장선에 있다. 하지만 <본즈 앤 올>에서 리를 모두 먹어버린 테일러의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한가지 이유 정도는 어렵지 않게 유추해 볼 수 있다. 리의 살과 뼈를 모두 먹어치운 테일러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의도와는 다르게 포식자(捕食)와 피식자(被食)의 관계, 즉 위계, 종속, 지배, 배제로 국한되는 관계의 삭막함만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관계에 있어서 무엇을 회피하고 무엇을 강조하려 하는지 조금은 엿볼 수 있다.

 

사랑의 다른 의미: 자기 완성의 공유

앞서 밝혔다시피, 사랑은 사랑을 시작하는 ‘주체’와 그 사랑에 대하여 자기의 감정을 밝힐 것을 요구받는 ‘타자(他者)로서의 주체’와의 관계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가 더 나아가면 어떤 관계적 구조를 갖게 되는가?”를 밝히는 것이 이 글의 요지였다. 거기에 대한 답으로 “나는 네가 되는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이때 이 말 뜻은 사랑을 욕망이라고 할 때 흔히 말하는 일종의 결여, 즉 나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한 일종의 소유욕과 관련이 있는 결여의 인지와 다르다. 소유욕이라는 욕망이 틈타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네가 되는 일'은, 아트와 패트릭의 관계로 미루어 볼 때, 결여의 인지가 아니라 어떤 '완성의 공유’에 더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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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다시 <챌린저스>의 아트와 패트릭 그리고 타쉬의 관계로 돌아가 보자. “내가 네가 되는 일”이라는 완성의 공유는 <챌린저스>에서 어떻게 재현되는가. 모르긴 해도 이 일은 ‘경쟁’ 관계로 대체되어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경쟁을 통해 자기를 완성해 간다는 의미에 빗대어 보면 완성의 공유는 자기 완성의 공유라는 맥락으로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트와 패트릭 그리고 타쉬의 관계

아트와 패트릭이 서로에게 품은 감정이 무엇인지는 사실 불분명하다. 그 둘의 감정은 호기심과 동질감 사이에서 애매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분명했던 아트와 패트릭의 감정은 타쉬의 등장과 부상으로 일단락된다. 사실 이때도 타쉬가 지닌 아트에 대한 감정이 분명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타쉬는 아트에 대한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 감정을 소모하지 않는다. 타쉬는 그저 아트가 원래의 기량을 회복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어느 날 밤 타쉬와 패트릭의 은밀한 만남은 오히려 타쉬의 감정은 패트릭을 향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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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서사 진행은 타쉬를 세속적인 불륜녀로 만든다. 하지만 타쉬의 그 행동은 아트와 패트릭과의 관계를 통해서 다르게 판단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진정한 관계의 발견

과거 아트와 패트릭은 자신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암호를 만든 적이 있다. (테니스공을 테니스 채 중앙에 가까이 가져가는 행위) 그건 타쉬와의 섹스 유무를 알리는 신호였다. 당시 이 암호는 은밀한 그들만의 치기 어린 장난이었으나, 영화 마지막 패트릭이 보낸 그 사인은 그들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애매함에 숨어 있던 둘의 진정한 관계를 비로소 읽어낸 신호로 보인다. 그러면 아트가 내보인 옅지만 또렷한 미소는 관계 회복보다 진정한 의미의 발견을 나타내는 징후일 수도 있다. 그러면 클럽에 온 듯한 경험을 주는 강렬한 비트로 마지막 테니스 장면을 연출한 감독의 의도 역시 미세하지만 가장 강력한 이 메시지를 폭발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뒤이어 나타나는 지독한 경쟁의 끝을 보아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 그들이 뒤엉키는 모습은 ‘내가 네가 되는 일’을 직접 보여주는 몸의 언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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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과할 수 있는 이런 해석은 이후 타쉬의 환호를 결정적으로 설명해주므로 타당할 수 있다. 아트와 패트릭이 ‘내가 네가 되는 일’을 실현한 것이 곧 그 둘의 완벽한 경쟁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녀는 자기 완성을 공유한 아트와 패트릭의 진정한 경기를 마침내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타쉬는 자기 완성의 공유가 실현된 경쟁관계(아트와 패트릭)로써 ‘내가 네가 되는 기적’을 또 다른 형태로 경험한 것이나 다름 없다는 뜻이다. 영화 마지막, 타쉬의 포효는 그 경험에 대한 환희를 상징한다.

 

경쟁에서 아곤(agon)으로

'경쟁이라는 사랑'이란 바로 ‘내가 네가 되는 기적’에서부터 출발한다. 이것은 상대방을 자기화하려는 욕망과 다르다. 이 해석이 과도하지 않은 이유는 경쟁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아곤’(agon)의 전복적 해석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아곤’을 자기완성의 과정에서 친구와 적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을 없애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상적인 경쟁 관계는 공동의 목적과 그것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공동의 기쁨(자기 완성의 공유)을 전제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아트와 패트릭 그리고 타쉬의 삼각 관계는 이런 의미에서 니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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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셋의 관계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경직된 위계관계, 종속과 배제를 반복하는 예속의 관계에서 벗어나 자기를 완성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은 상대방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관계, 어쩌면 사랑이 조건도 수단도 되지 않는 관계를 의미하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이렇듯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세계관을 게이 문학이라는 틀에서 꺼내어 사랑이라는 렌즈로 들여다보면 니체가 피 토하듯 주장한 우정(Die Freundschaft)의 그 순수한 관계가 이미 들어차 있음을 알게 된다. 

 

 

글·지승학
영화평론가. 문학박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홍보이사, 201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으로 등단. 현재 고려대 응용문화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