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과 정치, 두 세대의 공통된 전선

2012-08-13     알랭 비키

앙골라의 수도 루안다에서 시민사회와 쇠락해가는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산투스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많은 앙골라 국민들은 총선 전야에 지난 10년간 국가 재건에 큰 영향을 준 야만적 자본주의에 대해 씁쓸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루안다의 소리를 듣고 싶을 때 아를린두 바르베이투스(71)는 읽던 책을 덮고 엘리베이터가 늘 작동이 안 되는 낡은 건물 계단을 내려와, 루안다의 말랑가 구역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차들은 막혀 있고, 빌딩 공사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파헤쳐진 도로 위의 택시버스('칸돈게이로스'라고 불리는 앙골라의 대중교통 수단)에서는 대중음악 쿠두루의 마지막 소절이 흘러나오고 있다. 중국인 노동자들은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유럽의 경제위기 탓에 과거 식민지였던 앙골라에 온 포르투갈 젊은이들의 모습도 보인다.(1) 전체 인구 4분의 1이 거주하는 앙골라의 수도 루안다에서는 2002년 내전이 끝난 이래 재건 사업이 한창이다. 앙골라가 1975년 독립한 이래 사실상 계속됐던 앙골라해방인민운동(MPLA)과 앙골라완전독립민족동맹(UNITA) 사이의 내전이 2002년에 비로소 끝났다. 그럼에도 바르베이투스는 최근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낀 민심의 변화를 이렇게 전했다. "한 아주머니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항상 MPLA를 지지했다. 하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그들에게 투표하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그들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독일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옛 제자인 앙골라의 지성 바르베이투스는 해방전쟁에 참전하고 퇴역했다. 그런데 MPLA의 동반자였던 그 역시 대화를 나눈 아주머니와 다를 바 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는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나는 MPLA를 위해 싸웠던 건 아니다. 더 정의로운 앙골라를 위해 싸웠을 뿐이다. 내가 토마스 홉스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경제적 정의를 필요로 한다는 그의 이론에는 동의한다. 우리나라엔 이런 정의가 아직 없다." 지난 5월 27일, 그와 만나기 몇 시간 전에 바르베이투스는 아직 보도되지 않은 군인들의 시위 광경을 루안다 거리에서 목격했다. 이 시위는 1975년부터 2002년까지 앙골라 정부군(FAA)으로 내전에 참전하고 퇴역한 4천여 명의 군인과 병사, 소속 하사관이 미지급된 연금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장교와 전쟁 상해자와는 달리, 이들은 매달 지급돼야 하는 연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아무런 사회수당도 받지 못하는 그들은, 정부가 10년 전 내전이 끝났을 때 약속한 제대수당 역시 받을 수 있길 원한다. 바르베이투스는 분노했다. "정말 화가 난다. 그동안 옛 군인 관료들은 5만 달러짜리 시계를 차고 으스대며 언론 앞에 섰다. 하지만 나 역시 퇴역 군인이다!"

UNITA 소속 퇴역 군인들 중 대다수가 1992년부터 정부군으로 재편입됐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거리에 나와 8월 31일로 예정된 총선을 방해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 이번 총선은 독립 이래 세 번째로 치르는 선거다. 2010년 마지막 헌법 개정에 따르면, 최고 득표율을 기록한 정당의 당수가 대통령과 행정수반으로 임명된다. 늘 그렇듯 UNITA보다 더 많은 표를 얻게 될 MPLA에서 지도자가 선출될 것이다. 또한 1979년 이래 권좌에 오른 69살의 조제 에두아르두 두스산투스 대통령이 재선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고 나서 그는 자기 진영의 2인자이자 소난골 석유공사의 전 회장 마누엘 비센테에게 자리를 넘겨줄 것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2008년 87.36%를 기록했던 투표율을 다시 얻기는 어려워 보인다. 앙골라에서 평화는 2008년까지 단지 6년간만 지속됐다. 런던대학 아시아·아프리카학 대학원의 저스틴 피어스는 이렇게 말한다.(2) "과거가 되살아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앙골라 국민은 과거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을 더 선호한다." 모든 것을 재건해야 했다. 1980년대에 거의 모든 것에 홀로 맞섰던 나라, 20세기 말 세계에서 잊힌 나라 앙골라는 폐허 속에서 해저석유 사업을 통해 일어섰고, 국가 재건을 위해 전세계의 기업들이 몰려드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2008년 9월 총선에서 MPLA는 81.64%의 표를 얻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경제 위기가 앙골라 남부의 폭풍우처럼 닥쳐왔다. 작업장의 공사는 중단됐고, 외국 투자자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앙골라의 화폐 콴자는 큰 타격을 입었고, 달러 대비 25%나 평가절하됐다.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개인사업을 하는 루안다의 소규모 중산층은 이자율이 6%에서 25%로 뛰는 것을 보았고, 망명자들이 정착한 탈라토나 남부 교외에서 살려는 그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많은 젊은 기업가들이 파산했다.

제국주의에 휩쓸려간 다문화 조국의 꿈

앙골라는 2009년 새로운 혼란을 겪게 되었다. 이번에는 예견된 것과 달리 경제적 혼란이 아니라 정치적 혼란이었다. 대통령 선거가 3년 미뤄진 것이었다. 정부의 한 측근은 이렇게 털어놓았다. "이때부터 MPLA의 일부 군간부들조차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보기에도 산투스 대통령이 선을 넘은 것이었다. 산투스 대통령이 2008년 퇴임했다면 UNITA와의 전쟁 승리자로서, 또한 국가경제 재건 추진자로서 고개를 높이 들고 떳떳하게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루안다 시민들은 반만 남은 잔이 아니라 반이나 채워진 잔을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가 돼버렸다."

중·장년층이 즐겨 추는 키좀바와 셈바 음악에 전자음악 리듬을 섞어 만든 새로운 음악 장르인 쿠두루는 젊은 층이 그들의 원기왕성함을 표출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다.(3) 임시 개인 스튜디오에서 작곡돼 택시버스의 스피커를 통해 여기저기서 방송되는 이 음악은 1990년대 중반에 출현했다. 당시 앙골라를 초토화한 2차 내전으로 인해 피란민들이 대거 유입돼 무세크 지역의 인구가 폭발했다. 게토에 사는 아이들은 쿠두루 음악에 의지하며 궁핍한 생활과 통금으로 제약받는 일상을 잊곤 했다. 쿠두루는 리스본과 요하네스버그에 거주하는 포르투갈어 사용자들에게도 퍼져, 그 도시의 토착 음악을 모두 흡수해버렸다. 내전이 끝나자 상업적인 테크노 음악과 남아프리카의 크웨이토, 레게, 랩, 콩고의 크와자-크와자의 영향을 받은 쿠두루는 루안다에서 제 목소리를 잘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음악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독일의 음악학자 스테파니 알리쉬는 루안다에서 연구를 하며 최근 앙골라 집권 여당을 지지하는 쿠두루 음악이 처음으로 루안다에 퍼지고 있다고 단언했다.(4) "무세크 지역에서 쿠두루 음악을 하는 세 인기 그룹이 시다델라 경기장에서 개최한 콘서트 내내 두스산투스의 거대한 초상화가 내걸렸다." 그러나 2000년대 말까지만 해도 쿠두루의 사회적 역할은 권력과 동떨어졌고, 쿠두루에서는 기껏해야 화려한 주법의 전자기타 연주나 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2000년대 말 이후 문화부에서 쿠두루를 장려했고, 두 개의 국영 방송사가 이 음악을 대거 내보내기 시작했다. 쿠두루의 또 다른 전문가인 프랑스계 미국인 디스크자키 벤자민 르브레이브(5)는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지난 3년 동안 쿠두루 음악에서 창조성이 많이 사라졌다. 정치권력과 결탁하면서 당략적이고 보여주기식의 음악이 돼버렸다."

또한 영국계 포르투갈인 디스크자키 페드로 코크나오는 이렇게 말했다. "앙골라에서는 돈으로 뭐든 살 수 있다. 다소 반동적이라고 여겨지는 음악가들을 포함해서. 하지만 젊은이들은 더 이상 이러한 사회구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바티다그룹 사장인 그는 '사운드웨이' 음반사를 통해 <의식 있는 쿠두루>라는 이름으로 최근 첫 앨범을 발매했다. 그는 앨범을 통해 일부 루안다 젊은이들의 욕구불만을 드러내주고 있다. '센트럴 앙골라'나 기자이자 인권운동가인 라파엘 마르크 드 모레스가 이끄는 반부패 사이트 '마카 앙골라'(6)와 같은 인터넷 포럼 사이트나 블로그에 접속하는 루안다 젊은이들 말이다. 코크나오는 이렇게 묻고 있다. "공식적으로 내전이 끝난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망명자들과 달리 앙골라 국민 대다수는 경제 재건의 붐을 통해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게 말이 되는가? 나는 아고스티뉴 네투(앙골라 초대 대통령)의 전기를 여러 번 읽었다. 제국주의로부터 앙골라의 다문화주의를 보호하려는 그의 꿈은 사라져버렸다.

바티다의 앨범에 수록된 곡인 <바주카>는 루안다의 거리에서 시위하는 퇴역 군인들의 요구에 호응하는 것 같다. 또한 이 곡에는 앙골라 정부군에서 퇴역한 군인인 한 젊은이의 신랄한 코멘트가 들어 있다. 머리에 포탄을 맞고서 제대한 이 젊은이는 조나스 사빔비(UNITA 창설자, 2002년 사망)와 두스산투스 대통령을 모두 지지하지 않는다. 이 코멘트 부분을 통해 <바주카>는 재해석된다. 이 곡은 카를로스 라마르틴느가 부르고, MPLA 해방군을 지지하기 위해 독립 이전에 만들어진 셈바 음악의 악기들로 연주된다. 1960∼70년의 격동기에 '엔골라' 음반사가 결성한 많은 전자음악 그룹들이 사실상 '음악을 통한 평화적인 반란'을 꾀했다. 앙골라 대중음악의 신화적 선구자 엔골라 리트모스 밴드의 멤버 아마두 아모림의 말을 빌리면 이는 "5세기에 걸친 식민지 기간 동안 잠들어 아무것도 믿지 않던 앙골라인들의 의식을 깨우기 위함"이었다. 앙골라 음악과 정치관계 전문가인 미국인 역사가 마리사 J. 무어맨은 과거의 저항 노래, 그리고 코크나오와 괴짜 나스티오 모스키토가 제작하는 지금의 랩 음악 사이에 강한 조응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바티다에 소속된 여러 음악 그룹들은 정치권력과 대립관계에 있다. 이코노클라스타의 <물리쳐야 할 놈>은 작가 조제 에두아르두 아구알루사가 작사한 곡으로, "앙골라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현재 싸우고 있는 모든 이들처럼"이라는 가사를 포함하고 있다. 두스산투스 대통령에 대항해 2011년 3월 루안다에서 400여 명의 사람들이 벌인 첫 번째 시위 이래, 이코노클라스타는 모든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시위자들은 '앙골라의 봄'이 만발하길 희망했다. 경찰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민병대원들에게 협박을 당하며, 시위행진을 마친 뒤 폭력을 당한 이 그룹의 젊은 랩가수는 특히 정치권력에 눈엣가시였다. 그 이유는 그가 두스산투스 대통령의 작고한 친구이자 1990년대 동안 두스산투스 재단의 이사장이던 호아우 베이라우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코노클라스타는 이렇게 분석하고 있다. "MPLA의 역사에는 잊지 못할 좋은 점이 많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진 더러운 면도 많이 있다. 역사가들이 좋게 평가할지 나쁘게 평가할지 모르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자신들의 시대가 지나가버렸다고 받아들이길 거부하는 당원들은 MPLA를 탈퇴하는 걸 결정하거나 사람들의 압력으로 떠나게 될 때 보통 쓰라림과 나쁜 추억만을 남기고 떠난다. 이건 모든 직업에서 같다. 축구 선수들을 보라!"

젊은이들에게 투쟁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앙골라 독립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루치우 라라의 아들 파울루 라라는 "이코노클라스타가 매우 용감하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루안다가 앙골라인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내전은 앙골라에 큰 후유증을 남겼지만 유권자들은 여전히 '반이나 채워진 잔'이라는 긍정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1972년 16살에 게릴라전에 참여한 파울루 라라는 1975년 졸병으로 시작해 육군의 참모부에 소속되기까지 했다. 40년간의 군생활을 마친 뒤 퇴직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신세대들은 전쟁이라는 과거와 전쟁을 벌인 사람들을 잊길 원한다. 그러나 젊은이들에게 지나온 길을 떠올리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이 우리의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해 보인다." 이런 사명감 때문에 현재 치웨카협회의 조정자 역할을 맡고 있는 라라는 아버지가 참전한 전쟁을 기리며 앙골라가 독립하는 데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사람들의 증언을 수집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정치적 견해나 국민성, 종교의 제약 없이" 말이다. 이 원대한 프로젝트는 앙골라 독립 40주년을 맞이하는 2015년에 완성될 예정이다.(7)

*

| 알랭 비키 Alain Vicky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 | 변광배 프랑스 인문학연구모임 '시지프' 대표. 주요 저서로 <존재와 무: 자유를 향한 실존적 탐색> 등이 있다.

(1) ‘포르투갈을 구제하는 앙골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5월호 참조.
(2) ‘앙골라: 10년간 평화에는 얼마가 들었나?’, www.bbc.co.uk, 2012년 4월 4일 참조.
(3) ‘계급의식을 자극하는 앙골라 쿠두루 음악’, <에코 다프리크>, blog.mondediplo.net, 2008년 9월 25일 참조.
(4) 스테파니 알리쉬와 나딘느 시에게르트, ‘쿠두로에 나타나는 앙골라의 국가 정체성’, norient.com, 2011년 6월 6일 참조.
(5) www.akwaabamusic.com.
(6) makaangola.org.
(7) projectotrilho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