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갈망하는 낙원 아르카디아의 열 가지 얼굴
고대 동양에서 신선들이 노니는 낙원을 '무릉도원'이라 불러왔듯이 서양에서는 이러한 낙원을 '아르카디아'라 불러왔다. 아르카디아는 그리스 남부에 실존하는 지역의 이름으로 실제로 그곳은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않는 삭막한 땅이었다.
그러나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와 오비디우스가 서사 문학 속에서 상상 속에 존재하는 풍요와 평화의 땅을 묘사하며 이를 '아르카디아'라 칭한 이후로 아르카디아라는 이름은 슬픔이나 죄악, 파멸이 없는 아름다운 낙원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아르카디아는 문학과 예술에서 영감의 원천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낙원은 예술작품 속에서 무한히 반복하여 재현되었는데, 그 모습은 각 시대마다 달랐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가지는 의미는 늘 동일했다. 고대에서 중세로, 다시 근대로 이어진 이상향으로서의 낙원의 이미지는 현대에 이르러 기계화된 노동 속에 갇혀 숨이 막힌 도시인들의 가슴 속에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현대의 화가들 역시 이 시대의 낙원의 이미지를 각자의 화폭에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서건 문학과 예술 속에 묘사된 낙원은 그 표면에 나타난 아름다움과 달리 언제나 풍요로움이나 행복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름다운 이야기와 그림의 이면에는 낙원의 풍요로움만을 누리려는 게으른 욕심 또는 지나친 쾌락에 대한 경고 역시 담겨 있었다.
바로크 시대의 거장 니콜라 푸생은 아르카디아의 풍경을 작품의 소재로 자주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들을 통해서 목가적이고 평화로운 낙원 풍경의 전형이 만들어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푸생의 작품 <아르카디아의 목자들>은 아르카디아를 소재로 한 그의 작품 중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이 그림에서 목가적 전원 풍경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 이면에 대한 경고를 담아내고 있다.
평화로운 풍경 속, 세 목자가 가리키고 있는 묘비에는 "아르카디아에도 내가 있다.(Et in Arcadia Ego)"라고 적혀 있다. 이것은 낙원에도 죽음과 그에 따르는 슬픔 역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틴어로 "메몬토 모리(Memo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라"는 명제는 이 시대 예술 작품의 주요한 주제였다. 당시의 아름다운 풍경화와 정물화 속에는 늘 그 이면의 죽음과 슬픔을 경고하는 메몬토 모리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것은 비관적 의미 보다는 인간이 어디에 있든, 함께하는 사색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지금 이 시대에는 더 많은 예술가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본 낙원의 모습을 그려내며 그 이면에 담긴 이야기들을 읽어내고 있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프랑스 국립 퐁피두센터 특별전 - 화가들의 천국>에서는 현대미술의 거장들이 그려낸 천국과 낙원의 이미지들을 만날 수 있다. 퐁피두센터의 부관장이자 수석 큐레이터인 디디에 오탱제가 기획한 이번 전시는 황금시대, 아르카디아, 쾌락, 풍요, 되찾은 낙원, 조화, 허무, 암흑, 풀밭 위의 점심식사라는 열 가지 소주제를 통하여 현대의 화가들이 그려낸 열 가지 모습의 낙원에 대해 이야기 한다.
전통적인 낙원
- 황금시대, 아르카디아, 풍요, 조화
현대의 화가들은 낙원에도 존재하는 죽음에 대해 경고한 푸생보다 더욱 넓은 시각으로 다양한 이미지를 내어 놓고 있다. 전시장 입구를 들어서면 관람객을 맞이하는 양떼들의 모습은 지금부터 평화로운 낙원의 모습이 전개될 것이라고 예고하는 듯하다. 그리고 이어지는 피카소와 피카비아의 봄의 이미지, 보나르가 그린 아몬드꽃이 만개한 나무는 우리에게 전통적인 낙원의 이미지를 상기시켜 주며, 브라크와 마티스가 보여주는 풍요로운 테이블과 방의 모습은 물질적 풍요로움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대변하고 있다.
또한 본래 낙원이란 다툼이나 죄악이 없는 조화로운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마음을 안정되게 해주는 호안 미로의 이지적 푸른빛, 그리고 평화로운 남국의 바다와 하늘을 묘사한 마티스의 푸른 색종이 그림들 속에서 우리는 지극히 평화롭고 조화로운 낙원을 그대로 만날 수 있다.
현대인의 낙원
- 풀밭 위의 점심식사, 되찾은 낙원
그렇다면 현대인의 낙원은 어떤 것일까? 현대인들은 삭막한 도시 생활에 지쳐 언제나 목가적 풍경에 대한 열정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 완전한 원시 상태로서의 자연으로 돌아가길 원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대부분 레제의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표하는 경의>나 알랭 자케의 <풀밭 위의 점심식사>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물질적 풍요와 쾌락, 현대적 유행이 모두 충족된 전원에서의 여흥일 것이다. 그들의 그림이 고전의 모티브에서 왔듯이 풍요와 조화, 쾌락을 원하는 갈망은 여전히 낙원에 대한 열정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한편으로 정신적 성숙을 이룬 현대인들은 물질적 풍요보다 정신적 풍요를 더욱 갈구하곤 한다. 그러한 이들은 페노네의 <그늘을 들이마시다>와 같은 자연의 숭고함이나 고요한 정적 속에서 정신적 만족을 느끼며 남들과는 조금 다른 낙원을 찾기도 한다.
낙원의 이면 -
쾌락, 허무, 암흑
또한 어떤 이들에게는 낙원이 무한한 쾌락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예술가들은 그러한 이상향으로서 관능적 여인의 모습을 작품 속에 즐겨 표현하였다. 피카소 역시 육감적인 여인의 모습을 낙원의 한 모습으로 그려냈다. 관능적이기도 하면서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기도 한 이 여인의 모습은 낙원이 가지는 쾌락의 의미를 극대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물질적 풍요와 시각적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쾌감을 가져다주지만 때때로 인간은 이것을 과하게 사용하거나 그 이면을 깨닫지 못하여 화를 입기도 한다. 키리코의 <오후의 우울>이나 미로의 <어둠 속의 사람과 새>와 같이 짙고 어두운 색으로 낙원의 이미지를 표현한 화가들은, 마치 푸생이 우리에게 "죽음을 기억하라"고 경고했듯이, 풍요롭고 아름다워 보이는 낙원의 한 꺼풀 아래에는 슬픔과 허무, 암흑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고 조심스레 경고하고 있는 듯하다.
이처럼 우리가 갈망하는 낙원의 이미지는 한 가지 얼굴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아름답고 행복한 낙원의 모습을 상상하지만 각자가 느끼기에 따라, 또 이를 어떻게 이용하는지에 따라서 낙원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화가들이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듯이 때로는 꿈꿔왔던 아름다운 세계의 본질이 허무와 암흑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낙원을 좇는 것은 인간의 숙명과도 마찬가지이기에, 풍요와 쾌락을 그저 외면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에 앞서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것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지금 이 순간 당신 앞의 낙원은 레제가 보여준 풍요로움이나 미로가 제시한 이지적 조화로움일 수도, 아니면 피카소의 쾌락이나 다른 무엇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바라보고 있는 그것의 표면처럼 그 이면 역시 풍요롭고 아름답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인가? 아르카디아의 열 가지 얼굴을 기억하며 다시 눈을 뜨고 직시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