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로 치닫는 이노센스

제노사이드와 이스라엘

2024-05-31     프레데리크 로르동 | 철학자, 경제학자

때때로 예상치 못한 진실의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생선은 머리부터 썩는다.” 맹목적인 이스라엘 지지 진영인 시앙스포(Sciences Po, 파리정치대학)에서 최근 일부 학생들이 학교 대강당을 점거하고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를 벌인 사건을 비난한 가브리엘 아탈 프랑스 총리의 발언이다.

평소 허위사실이나 노골적인 거짓말만 늘어놓던 그의 입에서 진실이 흘러나오다니 기적 같은 일이다. 생선은 머리부터 썩는다는 그의 말은 심지어 중의적 진실을 담고 있다. 은유적 의미로 볼 때, 머리는 지도자, 보다 일반적으로는 지배자로 해석할 수 있다. 이 경우 부패는 이미 도처에 퍼져있다. 환유적 의미에서 보면, 머리는 사고하는 방식, 사고의 작동을 뜻하기도 한다. 이 경우 사고 작동의 부패, 즉 사고의 작동을 지배하는 규범이 붕괴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고의 작동 체계가 이처럼 붕괴된 것은 (좋은 가설을 제시하는 경우가 드문) ‘순수한’ 어리석음 때문이 아니라 이해 당사자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물질적 이해관계는 광범위한 매개를 거쳐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석돼도 특정한 방식으로 사고하고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에서 생선의 썩은 머리는 자신들의 사고 양식을 강요(환유)하는 부르주아 전선의 폭력(은유)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세제나 노동시간 문제에서조차 이처럼 격한 반응을 보인 적 없는 집권 부르주아가 이번에는 왜 이토록 발끈한 것일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진 이번 사태가 어찌하여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에 이토록 강력한 반향을 일으켰을까?

그 이유는 서구 부르주아는 본능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상황이 자신들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고 생각한다. (최초의) 창업국가(start-up nation) 간 친밀감 같은 사회학적 단순함을 훨씬 뛰어넘는 반(半)의식적 연결고리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상 속 연결고리의 기저에는 절대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없는 지배와 인종차별에 대한 공감이 깔려있다.

인종차별은 가장 순수한, 따라서 지배자들에게 가장 매력적인 지배 형태다. 지배와 인종차별에 대한 공감은 지배가 위협받을 때 더욱 강해진다. 자본주의의 유기적 위기나 팔레스타인 식민지화의 위기, 즉 피지배민들의 봉기에 맞닥뜨린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지배를 ‘재확인’하기 위해 봉기를 진압하려 나서는 상황이 좋은 예다.

그러나 서구 부르주아에게는 이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고 매혹적인 부분이 있다. ‘이노센스’라는 결정적인 단어를 통해 이점을 꿰뚫어 본 상드라 뤡베르에게 경의를 표한다. 서구 부르주아에게 이스라엘이 매혹적인 이유는 이 나라가 “순수한” 지배의 형상, 즉 ‘현실화된 환상’의 이미지를 부여하기 때문이다.(1) 악이 깃들지 않은 지배는 지배자의 궁극적인 환상이다. “순수한 상태로 지배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불가능한 일을 해낸 이스라엘은 서구 부르주아에게 본보기를 제시했다.”(2)

“실제로 유대인들은 가해자이기 전에 피해자, 그것도 인류 박해 역사의 정점을 기록한 피해자였다. 하지만 아무리 큰 희생을 감수했다고 해서 ‘영원히 순수’할 수는 없다.”

피에르 골드만(1969년 두 명의 약사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프랑스의 극좌 운동가-역주)은 법정에서 “나는 순수하다. 존재론적으로 나는 순수하다. 당신은 이 사실을 바꿀 수 없다”라고 판사에게 외쳤다.(3)

전혀 다른 맥락이지만 골드만의 외침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유대인 대학살 이후 이스라엘은 존재론적으로 죄가 없는 피해자라는 인식이 확립됐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가해자이기 전에 피해자, 그것도 인류 박해 역사의 정점을 기록한 피해자였다. 하지만 아무리 큰 희생을 감수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영원히 죄없는 순수한 피해자’로 남을 수는 없다. 한때 피해자였기 때문에 지금도 순수하다는 추론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인정할 수는 없다.

서구 부르주아는 이 모든 상황에서 자신에게 편리한 것만 취하며 이스라엘처럼 순수한 지배자로 남고 싶어 한다. 물론 이스라엘만큼 쉽지는 않겠지만 본보기가 바로 눈앞에 있기에 서구 부르주아는 최면에 걸린 채 반사적인 연대에 사로잡힌다.

인간은 자신의 폭력을 직시하지 않고 다른 열망, 특히 지배에 대한 강렬한 열망에 몰두하면서 자신을 순수한 존재로 확립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갖고 있다. 첫 번째 방법은 지배의 대상인 다른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들에게 저지른 악행은 차악까지는 아니더라도 덜 악한 행동이 된다. 어쨌든 최악은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순수한 존재로 남을 수 있다.

가장 강력하고 가장 흔히 쓰이는 두 번째 방법은 부인하는 것이다. ‘테러리즘’이라는 개념이 계속해서 사용되는 이유가 바로 부인을 위해서다. 테러리즘은 특히 ‘이유없는 저항은 없다(ex nihilo nihil)’라는 생각을 억제하고 배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건은 없다. 폭력에는 일반적인 경제가 존재한다. 폭력은 부정적인 상호성, 즉 악은 더 큰 악을 불러오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라부아지에의 질량보존의 법칙을 변형해 설명하면 폭력은 갑자기 생기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되돌아올 뿐’이다. 거의 80년 동안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가해진 엄청난 폭력이 그렇다. 끝이 보이지 않는, 끊임없이 되돌아와 반복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비난이 유일한 지적 활동인 이들은 이를 사전에 예측하지도 사후에 이해하지도 못할 뿐이다. 그런데 때때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지성의 약점이 아니라 정신의 속임수, 더 나아가 절대적인 명령 때문인 경우가 있다.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이 속한 인과관계, 즉 자신이 그다지 순수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지금의 사태가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시작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일반적인 유형의 상황에서 나타나는 가장 악의적이고 가장 특징적인 지적 왜곡이라 할 수 있다. 존재론적으로 순수한 이들만이, 그리고 존재론적 순수를 부러워하고 원인 없는 결과를 믿고 싶어 하는 이들만이 이러한 지적 왜곡에 찬동할 수 있다. 지금도 이들은 수치심에 짓눌려 숨죽이고 있는 대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테러리즘이라는 단어를 환경 테러리스트나 지적 테러리즘 등에 갖다 붙이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지도 않다. 이들은 희생자를 기리고 그들의 대의를 지지하는 척은 하지만 희생자를 존중하지도 않는다. ‘테러리즘’은 서구 부르주아의 ‘순수’를 보호하는 방패다.

반(反)유대주의라는 단어가 사용되는 상황도 매우 유사한 맥락으로 분석할 수 있다. 현재 반유대주의라는 단어는 인과관계를 재확립하려는, 즉 이스라엘의 순수에 의문을 제기하는 모든 불경한 시도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데 오용되고 있다(모든 경우가 이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반유대주의는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머리부터 썩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사고의 작동이 (지켜야 할 것이 너무나 소중한) 이해관계에 의해 타락하는 것이다. 사고의 타락은 공개 토론의 쇠퇴, 더 나아가 실추로 이어진다. 썩은 생선이 아탈 프랑스 총리의 입을 통해 언급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공개 토론의 부재는 파시스트화 과정의 가장 전형적인 산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급진화된 부르주아의 지지를 등에 업은 마크롱주의는 프랑스를 파시스트화하고 있다. 파시스트화 과정은 거짓말, 발언의 조직적인 왜곡, 공공연한 허위정보, 심지어 노골적인 조작의 영향력 확산으로 드러난다. 모든 부르주아 미디어가 적어도 초기에는 응당 이에 동참했다. 토론의 방향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공개 토론을 장악하는 것 역시 파시스트화 과정의 일부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부정, 상징적 타협, 협박, 검열은 가자지구에서 밀려오는 현실의 파도를 막지 못할 것이다. 맹목적 지지 진영은 무엇에 연대하며, 연대의 대가는 무엇인가? 이들은 지배를 재확인하는 것에 집착하느라 더 이상 보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성을 완전히 상실하지 않고 충격 속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들의 눈에는 이스라엘 정부가 끝없는 이념적 타락에 빠져 생물학적 인종본질주의와 메시아 종말론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종말론적 정치 계획은 필연적으로 대량 학살을 수반한다는 것은 10월 7일 이전에도 우리가 알고 있던 사실이다.

진보 정치학자 일란 파페가 주장했듯이 정착촌 건설을 통한 식민지화의 속성은 점령당한 민족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즉, 추방이나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대량 학살을 통해 팔레스타인 민족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역사에 기록된 다른 사례와 마찬가지로 이번 사태에서도 상대에 대한 비인간화 시각은 팔레스타인 민족을 대대적으로 제거하는 행위를 정당화하고 허용하는 탁월한 수단으로 활용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발표에서 그 증거가 넘쳐난다. 잔혹 행위를 자랑스럽게 뽐내고 가학적인 환희에 취한 수많은 SNS 게시물도 마찬가지다. 순수의 가면이 벗겨졌을 때 드러나는 광경은 늘 그렇듯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다.

이러한 소멸의 광경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다. 바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동묘지 파괴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완전 박멸 계획을 가장 잘 드러내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이스라엘은 이 계획을 스피노자의 ‘추방문’(4) 문구를 연상시키는 상징적 소멸 수준까지 발전시켰다. 유대인들은 스피노자를 추방하며 “그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지워지길” 바랐다. 하지만 이들은 그때도 성공하지 못했고 이번 역시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스스로를 서구라고 부르며 문명의 독점권을 주장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원칙으로 포장된 폭력과 약탈을 일삼은 집단에게 상징적 심판의 시간이 곧 닥칠 것이다.”

이러한 모든 요소를 요약하면 하나의 그림이 완성된다. 그것은 도덕적 자살의 그림이다. 유대인 대학살 이후 유대인 기표(記標) 중심으로 구축된,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상징적 자본, 즉 이노센스가 이처럼 급속도로 낭비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모든 이들에게, 특히 스스로를 서구라고 부르며 문명의 독점권을 주장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원칙으로 포장된 폭력과 약탈을 일삼은 집단에게 상징적 심판의 시간이 곧 닥칠 것이다. 이미 가라앉고 있던 서구의 도덕성은 이제 바닥을 치고 있다. 몰락을 앞두고 있지만 이를 깨닫지 못한 채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지배자의 오만함이다.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공범으로 가담하고, 심지어 모든 사람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범죄를 부인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다. 전 세계가 가자지구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다. 전 세계가 가자지구를 지켜보는 서구를 지켜보고 있다. 그 어떤 것도 이 눈길을 피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독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에 대한 독일의 맹목적 지지는 정신착란에 가까울 정도로 무서운 수준에 다다라 ‘국가이성’(Raison d’Etat: 국가의 생존 강화라고 하는 큰 목적을 위해서는 권력이 법·도덕·종교보다도 우위에 서야 한다는 것-역주)이 됐을 정도다. 한 네티즌은 “정말이지, 대량 학살에 관한 한 독일은 항상 역사의 잘못된 편에 선다”라고 비아냥거렸다. ‘우리’ 프랑스가 독일보다 훨씬 더 낫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모두가 역사의 전환점에 서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리고 서구가 가자지구에서 마주하게 될 것이 바로 역사다. 만약 그것이 쇠퇴와 몰락의 역사라면 가자지구에서 세상이 뒤집혔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곧 올 것이다.

 

 

글·프레데리크 로르동 Frédéric Lordon 
철학자, 경제학자

번역·김은희
번역위원


(1) Sandra Lucbert, 대화 
(2) Id.
(3) Pierre Goldman, 『Souvenirs obscurs d’un Juif polonais né en France 프랑스에서 태어난 폴란드 유대인의 어두운 기억』, Paris, Seuil, 1975. Cédric Kahn, <Le procès Goldman 더 골드만 케이스> (2023).
(4) 스피노자는 유대인 사회에서 추방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