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 공산주의의 쓰라린 추억

2014년 서방 연합군의 아프간 철수를 앞두고

2012-08-13     크리스천 패런티

카불 주재 러시아 대사는 2014년으로 예정된 서방 연합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계획에 대한 질문을 받고 1980년대 옛 소련이 겪은 비슷한 경험 혹은 실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30년 전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의 자생적 공산주의 운동세력을 지원했다. 소련은 고분고분하지도 않고 내적으로 분열돼 있던 그들과 함께 유혈 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카불 시내를 걷다 보면 찻집이나 가게 진열대에서 이따금 둥근 얼굴에 콧수염을 기른 엄격한 표정의 사진을 보게 된다. 아프가니스탄의 옛 공산주의 정권의 마지막 대통령 모하마드 나지불라다. 1960년대 말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에 입당한 그는 오랫동안 비밀경찰을 이끌다가 1986년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1989년 소련군이 철수한 뒤에도 3년을 더 버티다 자리에서 쫓겨나 1996년 탈레반에 붙잡혀 처형됐다.

카불 주민들에게 그의 얼굴 사진이 인쇄된 포스터나 엽서를 지니고 있는 이유를 물어보면 대부분 비슷한 대답이 돌아온다. 어떤 이들은 그가 "강한 대통령이었다. 우리는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회고한다. "당시는 모든 게 잘 돌아갔다. 카불은 깨끗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한 찻집 주인은 "나집(나지불라의 애칭)은 파키스탄과 싸웠다"며 한마디로 정리한다. 그들에게 나지불라는 공산주의자라기보다- 대부분의 아프간인들에게 공산주의라는 말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다- 근대화를 추진한 애국자로 기억에 남아 있다.

나지불라가 이런 이미지를 얻게 된 이유를 이해하려면 역사 속에서 아프가니스탄과 옛 소련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살펴봐야 한다. 소련은 냉전시대 이전부터 아프가니스탄에 관심을 보였다. 소련은 1920년대부터 중앙아시아의 국경지대에 출몰하는 무슬림 반군들과 전투를 벌여오던 터였다. 1930년대에는 아프간 왕실이 파견한 군대의 도움으로 바스마치(터키어로 '폭도'라는 뜻)들을 진압하는 데 성공한다. 소련의 처지에서는 아프가니스탄의 안정은 중앙아시아 지역의 안보를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1950년대 초반부터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에서 가장 많은 지원을 받는 4개국 중 하나가 되었다.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 기술자들을 파견하고, 수천 명의 아프간 학생과 기술자, 군인을 초청해 교육했다.

처형당한 나지불라에 대한 향수

1950년대 말부터 미국 역시 아프가니스탄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경쟁관계가 된 두 강대국은 앞다퉈 더 많은 지원을 베풀었다.(1)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남부 불모지에 물과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헬만드강에 댐을 세웠다. 소련은 북부와 남부를 잇는 살랑터널-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터널 중 하나- 을 팠다. 미국은 전기·통신 시설과 카불 공항의 레이더 등을 제공했고, 소련은 인프라 구축을 도왔다.

놀랍게도 이스마일 칸 같은 초기 무자헤딘(반소련 게릴라 단체) 지도자들은 소련에서 교육받은 군인 출신이었다. 반면 하피줄라 아민처럼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공산주의 활동가가 되고, 훗날 정부 요직을 차지하게 된 이들도 있었다.

1978년 발생한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는 간접적으로 그전에 발생한 봉기의 영향을 받았다. 아프가니스탄은 1969년부터 수년간 가뭄과 기아에 시달렸다. 4년 뒤, 중부의 고르 지역에서는 사람들이 말 그대로 굶어죽는 지경에 이르렀다. 무함마드 다우드는 사촌 자히드 샤 국왕을 내쫓고 군주제를 폐지한 뒤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렇게 그는 1973년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다우드는 정권을 잡자 당시 널리 유행하던 경제 운영 방식을 채택했다. 경제계획을 수립하고 공공투자를 통해 민간산업과 국내 시장을 육성하는 방식이었다. 정치적 반대파- 서로 대립관계에 있던 이슬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 에 대해서는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사용했다. 정부에 대한 반감은 날로 커져만 갔고 아흐마드 샤 마수드,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같은 이슬람주의자들은 파키스탄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급조된 사건' 공산주의 쿠데타

정권의 폭압은 1978년 사태의 원인이 되었다. 조너선 스틸은 이를 '급조된 사건'이라고 묘사했다.(2) 4월 17일 인민민주당의 유력 인사였던 미르 아크바르 카이바르가 백주에 암살되는 일이 발생한다. 이틀 뒤 인민민주당이 주도한 항의집회에 1만5천 명의 시위대가 운집했고, 주요 인사들이 경찰에 줄줄이 체포됐다. 이 사건이 본격적인 탄압의 서막이 될 것을 두려워한 공산주의 활동가들은 대통령궁으로 진격해 다우드 대통령을 살해하고 권력을 잡았다.

소련의 지도자들, 특히 카불 주재 국가보안위원회(KGB) 책임자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그들은 아프가니스탄이 사회주의 국가가 될 만큼 성숙하지 않았고 인민민주당도 권력을 잡을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당시 인민민주당 내부에서는 두 개의 정파가 다투고 있었다. 쿠데타를 주도한 급진 성향의 다수파는 '대중파'(Khalq)로 불렸다. 얼마 전부터 일자리와 교육 기회를 얻기 위해 도시로 이주한 파슈토어 사용 인구들의 지지를 받았다. 온건 소수파인 '깃발파'(Parcham)는 다리어를 사용하는 도시 중간층이 지지 기반이었다.

대중파는 정권을 잡자마자 피비린내 나는 숙청을 감행했다. 전직 총리 2명을 포함해, 다우드 밑에서 일하던 군대·정치 지도자 40여 명이 즉결 처형됐다. 투옥되거나 살해된 인물들 중에는 이슬람주의자, 마오쩌둥주의자뿐 아니라 깃발파 소속도 있었다. 소련은 새 정권의 폭력을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바라봤다. 아동결혼 금지, 지참금 부담 경감, 농촌의 집 담보 대출 탕감, 문맹 퇴치 캠페인(남녀 분리된 그룹), 농지개혁 등 진보적인 개혁정책이 시행됐지만 운영상의 미숙으로 일부 주민들의 극심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3)

스틸은 영국 런던의 한 허름한 아파트에서 한때 공산주의자들을 이끌었던 살레 무함마드 제아리를 만났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초반에는 농민들이 행복해했다. 그러나 우리가 공산주의자라는 사실을 알고부터 태도를 바꾸었다. 전세계가 우리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들은 우리가 이슬람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우리는 여성을 과중한 지참금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우리가 자유연애를 옹호한다고 말했다." 역시 런던에 자리잡은 또 한 명의 인민민주당 출신 인사는 집권 인민민주당 지도자들이 "5년 내에 문맹을 퇴치하고자 했다"고 회고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농지개혁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들은 자칭 혁명적인 조처를 추진하면서 강제로 밀어붙였다. 그러나 아프간 사회는 충분한 준비가 돼 있지 않았고, 정부는 인민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급하게 마련된 인민민주당의 개혁안들은 아프간 사회에 예전부터 존재하던 도농 간 대립이라는 장벽에 부딪혔다. 고등교육을 받은 도시의 젊은 이상주의자들은 농촌 사회를 이해하지 못한 채 개혁을 밀어붙이려 했다. 흙벽으로 지은 집에 사는 농촌 주민들은 도시의 관료주의에 전혀 호감을 갖지 않았다. 이들 개혁의 사회·문화적 측면이 물라(종교지도자), 말리크(촌장), 대지주들의 비난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그들의 기득권에 위협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건한 농민들마저 경제개혁 프로그램의 진보적 측면을 거부한 것은 참으로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농민 지지 획득에 실패한 공산주의 개혁

1970년대 아프가니스탄은 비록 가난하고 불평등했지만 혁명 전야의 중국이나 멕시코처럼 토지 독과점에 따른 갈등이 크지 않았다. 스틸은 당시 농민들이 "지주와 종교, 부족, 가족 관계를 맺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권위에 도전할 생각이 없었다"고 설명한다. 또한 카불로부터 어느 정도 자율성을 보장받아온 농촌 사회는 위협감을 느꼈다. 농민들은 점점 더 무력투쟁 쪽으로 기울었고, 다우드 정권의 탄압으로 인해 파키스탄으로 근거지를 옮긴 이슬람 정당들과 손을 잡기 시작했다.

몇 가지 기술적 오류 또한 인민민주당의 상황을 악화시키는 요인이 됐다. 카불의 공산주의자들은 서둘러 농민들에게 땅을 재분배하면서도 농업용수 문제를 방치했다. 지역 농업에 대한 그들의 무지를 보여준 사례였다. 그들은 불공정한 은행 대부 제도를 폐지했지만 사정이 급한 농민들이 돈을 마련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주지 않았다. 소련은 그들대로 카불 정권이 추진하던 급진적인 개혁을 포기하거나 연기하라고 끊임없이 압박을 가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근대화를 추진하다 벽에 부딪힌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처음은 아니다. 1919년 영국인들을 내쫓은 '붉은 군주' 아무눌라 왕은 그로부터 10년 뒤 그의 케말식 근대화 정책에 반대하는 부족의 반란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난다. 아무눌라는 최소한의 농지개혁을 추진했고, 여성에게 투표권과 교육받을 권리를 주었다. 지방 엘리트들은 길을 새로 포장해주는 것은 반겼지만 그것을 위해 세금을 더 내는 것은 싫어했다. 농민들은 농업 생산력 향상과 교육 기회 확대를 환영했지만, 가부장제에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뒤 인민민주당은 이번엔 종교적 저항이라는 벽에 부딪혔다. 공산주의자들은 갑자기 모스크에 다니기 시작하고 기도를 올리며 신앙심을 증명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미 늦었을뿐더러 그것만으로 충분치도 않았다. 1979년 3월 헤라트의 이슬람주의를 신봉하는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란 혁명에서 영감을 받은 게 분명했다. 한 달 전 샤는 이란을 탈출하고 루홀라 호메이니가 테헤란에 입성한 터였다.

당시의 반란과 소련 전투기가 투입된 진압 과정은 흔히 알려진 것만큼 희생자가 많지 않았다. "언론과 서구의 몇몇 역사학자들은 반란자들이 헤라트 거주 소련인들을 100여 명 학살했다고 주장한다." 로드릭 브레스웨이트의 설명이다. "그러나 소련 쪽 피해자는 3명을 넘지 않은 것 같다." 당시 공산주의 정권이 헤라트에 공습을 가했을 때도 수천 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다.

헤라트가 진압된 뒤에도 다른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소련은 새로운 고문관을 파견하는 대신 지상군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여름부터 미국은 파키스탄에 근거지를 두고 정부군과 국가 기간 시설에 대한 공격을 준비 중인 무자헤딘에 자금과 무기를 제공하고 있었다. 그사이 인민민주당의 내부 분열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달았다. 개인적·이데올로기적 충돌은 대중파와 깃발파 사이뿐 아니라 대중파 내부도 갈라놓았다. 1979년 9월 누르 무함마드 타라키 대통령은 침대에 포박된 채 베개에 눌려 살해됐다. 대중파 내에서 그의 동료이자 경쟁자인 하피줄라 아민 총리가 모의한 일이었다. 정파 간 대립 속에서 그가 가장 유연한 인물이라고 판단했던 소련의 지도자들은 이 사건으로 큰 충격에 휩싸였다. 크렘린에서는 미국이 보낸 요원의 소행이 아닐까 하는 편집증적 추측까지 제기됐다.

정파 대립으로 대통령까지 암살

좀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1960년대 뉴욕의 컬럼비아대학 박사과정 학생이던 아민은 아프간 학생회를 이끌고 있었다. 그때부터 이미 그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끄나풀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스틸에 따르면, 아민은 혁명 전에 미국의 비밀정보기관에서 돈을 받은 적이 있음을 시인했다. 브레스웨이트는 미 대사 아돌프 덥스가 아민을 여러 차례 만난 뒤 CIA 쪽에 그가 프락치인지를 물어봤다는 일화를 전한다. 가장 그럴싸한 설명은, 아민 역시 대부분의 아프가니스탄 지도자들이 걸어간 길을 따랐다는 것이다. 강대국들의 다툼 사이에 낀 나라를 다스리려면 양 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게 필요했을 것이다.

1979년의 위기 동안 아프간 공산 정권은 13차례에 걸쳐 소련에 군사개입을 요청했다. 그러나 소련은 갖가지 핑계를 대며 지상군 파병을 거절했다. 당시 소련의 한 책임자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보냈다. "우리는 모든 측면에서 주의 깊게 파병 가능성을 검토한 뒤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가 만약 군대를 파병할 경우 귀국의 상황은 개선되기는커녕 더 악화될 것이다." 그러나 타라키 대통령이 살해돼자 상황이 급변했다. 붉은 군대 제40여단이 아프가니스탄으로 파견됐다. 1979년 12월 도착한 군인들의 임무는 아민의 보호가 아니라 제거였다. 같은 달 27일 소련의 특공대원들이 대통령궁에 침투해 대통령직에 오른 지 104일밖에 안된 아민을 사살했다. 소련이 선택한 새 대통령은 인민민주당 내 온건파인 바브락 카르말이었다. 변덕쟁이에 편집증 환자였던 그는 무능한데다 음주벽까지 심했다.

불가피했던 소련군의 아프간 진주

소련에서 파견된 기술자와 고문관의 도움에도 지방 무슬림의 호감을 얻는 데 실패한 카르말 정권은 행동반경에 제한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1979년 7월부터 미국은 인민민주당에 극렬하게 저항하는 무자헤딘 7개 정파에 무기를 공급해오던 터였다.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넉넉한 자금을 제공했고, 미국 정부는 CIA의 주도로 은밀하게 무기를 제공했다. 이 모든 과정은 파키스탄 정부의 통제하에서 진행됐다. 당시 소련과 미국은 군사개입이 6개월 안에 끝나고 아프간 국민이- 최소한 도시에서만이라도- 아민의 통치가 종식된 것을 축하하고 소련군을 반길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소련은 그 뒤 9년 동안 지속된 전쟁 속에 휩쓸리고 만다.

대부분의 소련군 병사들은 자신이 '국제적 의무'를 수행 중이라고 믿었다. 마치 자신의 임무를 테러리즘의 위협에 놓인 후진국을 구원하는 것이라고 믿는 아프간 주둔 미군들과 비슷했다. 현재의 미군들과 마찬가지로 당시 파병된 소련군 병사들은 대부분 시골이나 소도시 출신의 공장 노동자였다. 반면 전투기 조종사, KGB 요원, 군의관들은 그들보다 상위 계층 출신이었다.

제40여단의 진짜 목표는 아프간 인민의 지지와 호감을 얻는 것이었다. 하지만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다. 소련과 아프간 육군은 적의 공격을 받고 어려움에 처하면 공군과 포병에 지원을 요청했다. 무자헤딘이 마을 안에 숨어 소련군을 공격하면 소련군은 공습을 퍼부어 마을을 파괴해버렸다. 브레스웨이트는 소련군이 화학무기와 장난감 폭탄을 사용했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1980년대 언론들의 보도와 달리 아프간 민간인에 대한 소련군의 폭력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소련이 선택한 정책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그 결과는 불가피했고, 예측 가능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는 말이다. 소련 정부는 강간, 살인, 마약 복용, 절도, 폭력 등의 범죄를 저지른 병사들을 처벌했다. 그러나 아프간 비밀경찰(Khad)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주었다. 그 결과 8천 명의 아프간인들이 인민민주당에 의해 처형됐고, 수천 명이 감옥에 갇히거나 폭행을 당했다.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 자리에 오른 뒤 아프가니스탄 철수론이 제기됐다. 파병 군인 가족, 참전 용사, 심지어 현역 장교들까지 반전 여론에 가세해 소련 정부를 압박했다. 소련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4)가 추진됐고,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나지불라 대통령이 점점 마르크스-레닌주의로부터 멀어지면서 실용적인 민족주의 노선을 추구했다. 1988년 나지불라는 인민민주당을 조국당(Watan)으로 개명했다. 임기 말기에는 심지어 마수드 반군 사령관에게 국방장관직을 맡길 계획까지 세웠다.

미국 강경파의 득세

카르말의 하야, 나지불라의 집권으로 시작된 방향 전환은 공식적으로 '국민적 화해'라고 불리는 정책으로 발전했다. 역사학자 아트미 칼리노프스키는 자신의 책 <긴 작별인사>(A Long Goodbye)에서 이 시기 안정화 노력의 외교적 측면을 분석한다. "1985~87년, 소련의 대아프간 정책은 패배하지 않고 전쟁을 끝내려는 의지 속에서 추진됐다. 고르바초프는 전직 서기장들과 마찬가지로 소련군이 아프간에서 성급하게 철수할 경우 제3세계 동맹국들 사이에서 권위를 잃게 될까봐 걱정했다. 그럼에도 그는 종전을 위해 노력했고 공산당 정치국도 그의 결정을 지지했다. 소련군 철수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체제를 세우려면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했다."(5)

'국민적 화해' 정책이 성공하려면 무자헤딘의 최대 지원자인 미국의 협조가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 레이건 행정부는 강경파와 협상파로 분열돼 있었다. 소련과 아프가니스탄의 처지에서는 안타까운 일이었다. 협상파의 핵심 인물 조지 슐츠 국무장관은 소련과 타협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입장은 단순했다.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면 미국은 무자헤딘에 대한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CIA 내부와 미 상원 로비스트들 사이에 많았던 강경파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미국의 무자헤딘 지원 중단 조건으로 소련에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모든 형태의 지원 중단을 요구해야 한다고 버텼다. 이 대립은 결국 강경파의 승리로 끝났다.

1989년 2월 소련군의 마지막 전차가 아무다리아강 북쪽 우정의 다리를 건너갔다. 그러나 소련은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지원을 계속했다. 1989년 3월, 이제 홀로 싸움을 계속해야 할 처지가 된 나지불라 정권은 파키스탄 국경 인접도시 잘랄라바드의 무자헤딘 근거지를 기습 공격한다. 이 도시가 반군의 수중에 있는 한 카불이 넘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무자헤딘의 7개 정파는 나름 훌륭하게 싸웠지만 서로 분산된 채 전략적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소련군의 철수와 나지불라의 몰락

브레스웨이트에 따르면, 전쟁에서 패한 최초의 소련 외무장관이라는 불명예를 원치 않았던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는 나지불라 정권에 대한 지원에 열성적이었다. 그는 소련이 지속적으로 석유와 무기를 공급하면 나지불라 정권이 전쟁을 계속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로 나지불라는 3년을 더 버텼다. 그러나 고르바초프 대신 옐친이 권력을 잡고 소련이 해체된 뒤부터 나지불라에 대한 지원은 뚝 끊기고 말았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듯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패배가 소련의 해체를 앞당긴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소비에트 체제는 주요 인사들이 자신의 특권을 사유재산으로 만들어서 이득을 챙기기로 결심했을 때 붕괴했다"고 주장했다.(6) 옐친 정권하에서 이루어진 이 과정이 나지불라 정권의 몰락을 앞당긴 것이다. 브레스웨이트는 옐친이 고르바초프 하야 이전부터 이미 무자헤딘과 비밀스런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소련의 지원이 끊기자마자 나지불라 정권의 군사 지휘관이던 압둘 라시드 도스톰은 반군 편으로 돌아섰다.(7)

나지불라 정권은 결국 1992년 4월 무릎을 꿇고 만다. 이슬람 혹은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다양한 정파 소속 병사들이 카불에 입성했다. 연정은 금세 붕괴됐고 정파 간 싸움이 본격화됐다. 인민민주당의 잔당 세력은 해외로 망명하거나 지하로 잠적했다. 모스크바로 피신하려던 나지불라는 도스톰의 병사들에 의해 공항에서 붙잡혔다.

광장에 매달린 처참한 주검

그 뒤 4년 동안 카불은 야만의 도시였다. 무자헤딘 정파 간 내전은 나라 전체를 암흑 속으로 몰아넣었다. 비유적 의미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 그랬다. 가로등과 전기버스 전선이 파괴됐고, 공공서비스가 중단됐다. 각 도시는 내전으로 황폐화됐고, 사망자 수는 10만 명을 헤아렸다. 그중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 나지불라는 유엔이 마련해준 은신처에서 버티다가 1996년 카불을 점령한 탈레반에 체포돼 고문과 폭행을 당하고 거세된 뒤 총살됐다. 그의 주검은 대통령궁 근처 광장에 매달렸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군대가 점령한 카불 시내 거리를 걷다 보면 여전히 나지불라의 초상화를 걸어놓은 곳들이 눈에 띈다. 왜일까? 예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전쟁은 단지 점령자와 아프간인들만을 대립시키지 않는다. 아프간인들 사이에도 대립은 존재한다. 도시민들은 (강요된 방식일지라도) 근대화를 원하지만 농촌 사람들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각 세력이 서로 다른 외국의 동맹 세력으로부터 지원을 받는다는 점도 예전과 비슷하다. 냉전 시기 소련은 카불 정권을 지원했고, 미국과 파키스탄은 반군을 지원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은 카불의 재건을 위해 일하려는 이들(대부분 예전에 나지불라를 위해 일했던 사람들)을 지원하고 나선다. 반면 미국의 상징적인 우방이자 동맹국인 파키스탄은 이슬람과 전통을 고수하는 반군 세력들에 대한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

아프간의 도시민 계층 중에는 '이데올로기 따위에는 관심 없고 언제쯤 전기가 들어올까'를 걱정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예전부터 카불의 영향력을 농촌으로 확대하려고 애썼지만 1920년대부터 주기적으로 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들은 차례로 입헌군주제, 대통령제 공화국, 소련식 사회주의, 나지불라의 민족주의를 거쳐왔다. 그리고 현재는 NATO에 의해 강요된 엉성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경험하고 있다. 과거의 공산주의자들이 여전히 근대화의 주역으로 대접받는 것은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아프간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다.

이상이 카불 시민들이 여전히 나지불라의 초상화를 걸어놓는 이유다. 그는 문제가 많은 인물이었지만 최소한 국민에게 전기를 공급하려고 애썼다. 문제는 전쟁이 전기를 공급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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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패런티 Christian Parenti 언론인. 이 기사의 다른 버전이 <네이션> 2012년 4월 17일자에 실렸다.

번역 | 정기헌 guyheony@gmail.com

(1) René Vermont, ‘소련과 미국을 마주한 아프가니스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67년 8월호, 1954~2011년 기사 수록 DVD, www.monde-diplomatique.fr/t/dvdrom.
(2) 1988~92년 모스크바 주재 영국 대사 로드릭 브레스웨이트의 저서 <Afgantsy: The Russians in Afghanistan, 1979~89>(Oxford University Press·뉴욕·2011), <가디언> 기자였던 조너선 스틸의 <Ghosts of Afghanistan: The Haunted Battleground>(Portobello Books·런던·2011)에 수록된 자료를 참조했다. 두 저자와 관련된 인용은 모두 이 두 저서를 참조했다.
(3) Jean-Alain Rouinsard & Claude soulard, ‘아프가니스탄 사회주의의 첫걸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79년 1월호, 같은 DVD 자료.
(4)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개혁정책을 통칭, 글라스노스트(개방): 같은 시기 도입된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책.
(5) Artemy Kalinovsky, <A Long Goodbye: The Soviet Withdrawal from Afghanistan>, Harvard University Press, 2011.
(6) ‘The long life of Homo sovieticus’, <The Economist>, 런던, 2011년 12월 10일.
(7) Selig S. Harrison, ‘파편들 위에 세워진 아프가니스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2년 1월호, 같은 DVD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