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결별하려면…
EU법에 흔들리는 회원국들의 정체성
지난 수년간 우파는 유럽인권재판소(ECHR)와 유럽연합사법재판소(CJEU)를 거세게 비판해왔다. 반면 좌파는 유럽공동체 판례가 프랑스의 공공 정책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유럽에서 사회개혁 정책을 실행에 옮기려면 이런 현실과의 충돌은 불가피할 것이다.
1989년 6월 30일 파리 팔레루아얄 광장에서 과들루프 고지에(Gosier)의 시의원 라울 조르주 니콜로가 국사원(프랑스의 최고행정법원) 행정소송부에 행정소송 청구서를 제출했다. 이에 앞서 그해 6월 18일 프랑스 국민은 유럽의회 의원을 선출했다. 이 당시 니콜로는 유럽 대륙에 거주하지 않는 해외 영토 유권자들이 해당 투표에 참여한 것이 부적절했다고 주장했다. 한 장짜리 문서에 담긴 이 주장에 재판관들은 무척 당혹스러워했다. 이 특이한 행정소송은 유럽 통합에 관한 가장 결정적인 판례를 만들었고, 역사의 흐름을 바꾼 중대하고도 정치적인 전환점이 됐다.(1)
1951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조약에 따라 유럽사법재판소가 창설됐다. 유럽사법재판소는 회원국 간의 분쟁을 해결하는 역할을 하지만, 유럽연합법이 국내법보다 우위에 있지는 않다. 프랑스는 국제법 분야에서 1920년대부터 이른바 ‘마테르 원칙(파기원 재판관 마테르의 이름을 딴 신법 우선의 원칙)’에 따라 국내법 이후에 비준된 국제 조약에 한하여 우선권을 부여해왔다. 이것이 바로 법률 차단막 원칙(la loi écran)이다. 국제 조약을 포함한 그 어떤 규범도 일반의지(장자크 루소가 저서 『사회계약론』에서 제시한 개념으로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적 의지를 일컫는다-역주)를 표현하는 법률을 거스를 수 없다. 헌법은 법령 체계의 최상위 규범이다.
제5공화국, 마테르 원칙 명문화하여 국내법 우선시
1954년 프랑스 의회가 유럽방위공동체(EDC)를 거부한 후 1957년에 체결된 로마 조약의 주된 목적은 자유무역 촉진이었다. 유럽경제공동체(EEC) 출범 이듬해인 1958년, 프랑스 제5공화국은 헌법 제55조에 마테르 원칙을 명문화했다. 이에 따라 이론적으로 프랑스 국내법은 로마 조약의 원칙에 우선할 수 있게 됐다. 이 접근법은 초국가적 법질서를 구축하려는 유럽위원회의 접근 방식과 배치된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와 유럽경제공동체의 초대 집행위원장을 지낸 독일 기독민주당 출신 발터 할슈타인은 조약이 헌법과 같은 역할을 하는 법적 연방주의를 주장했는데, 이는 다음의 세 원칙에 기초했다.
첫째는 직접효력의 원칙으로, 가능한 한 회원국 의회가 별도의 입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공동체의 규범이 적용되어야 한다. 둘째는 우위성의 원칙으로, 유럽연합법이 회원국의 국내법과 충돌하는 경우 유럽연합법이 항상 우선한다. 셋째는 통일성의 원칙으로, 유럽연합법은 모든 회원국에 같은 방식으로 적용되어야 하며, 그 해석은 유럽사법재판소에 맡긴다는 것이다.
1962년, 네덜란드 운송회사 판헨트엔로스(Van Gend en Loos)가 유럽경제공동체 조약 위반을 이유로 네덜란드 관세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자 네덜란드 법원은 선 이송 소송제도를 통해 유럽사법재판소에 판단을 요청했다. 1963년 2월 5일 판결에서 유럽사법재판소는 회원국 간의 새로운 관세 도입을 금지한 로마 조약 제12조가 회원국에 구속력이 있다고 결론 내렸다. 즉, 이 조항이 직접효력을 가지므로, 유럽연합 시민이라면 누구나 조약의 적용에 대해 법원의 판단을 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1년 후, 이탈리아 시민 코스타(Costa)가 전력회사 에넬(Enel)의 국유화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사건에서, 유럽사법재판소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유럽사법재판소 재판관들은 “유럽경제공동체 조약이 일반적인 국제 조약과 다른 독자적인 법질서를 구축한다”라고 보았다. 유럽위원회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조약에 따른 권리가 그 공동체적 성격을 유지하는 한 그 어떠한 국내법도 유럽연합법을 거스르지 않는다”라고 판단한 것이다.
최고행정법원과 사법법원 사이에 드러난 판례법 모순
이런 판결에도 불구하고, 초국가주의자들은 정치권력(특히 샤를 드골 시기의 프랑스)뿐 아니라 사법부와도 계속해서 마찰을 빚었다. 프랑스 법체계에서는 세 개 기관이 상호 위계 없이 최고법원 역할을 한다. 행정 영역에서는 국사원이 행정기관과 국민 간의 분쟁을 다루고, 사법 영역에서는 파기원이 민사와 형사 등의 분쟁을 다루며, 헌법재판소는 법률의 합헌성을 심사한다. 그러나 이 세 기관은 1960년대 샤를르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추진한 국가 주권 우선 정책에는 제동을 걸지 않았다.
당시에는 유럽사법재판소의 판례를 따르는 국가 법원이 소수에 불과했다. 1967년부터 파리 항소법원은 유럽연합법에 대한 초국가적 관점에서 다수의 판결을 내렸다. 파리 항소법원 재판관 아돌프 투페는 유럽 공동체에 대한 신념을 감추지 않았다. 유럽 공동체를 지향했던 피에르앙리 테이장(전 기독교 민주당 의원)은 1965년 파리 법대에 유럽 공동체의 경제 및 법률 활동에 대한 연구만을 전담하는 최초의 대학 연구소를 개설했다.
그 후 몇 년간 여러 프랑스 지방 대학에 유럽연합 문헌 센터가 들어섰다. 이런 움직임은 프랑스 차세대 엘리트들이 유럽연합법의 우위를 받아들이는 밑바탕이 됐다. 테이장은 회고록에서 “유럽 공동체라는 대의를 지키는 데 있어 아마도 나는 의회 토론장보다 대학에서 더 유용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며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2) 같은 시기에 국립행정학교(ENA)는 유럽사법재판소 재판관 앙리 마이라스가 담당하는 유럽 공동체 법학 과정을 신설했다.
1968년에 아돌프 투페가 파기원 재판관으로 임명되었다. 3년 후, 투페는 차석 검사로서 네덜란드의 판헨트엔로스(Van Gend en Loos) 무역회사 사건과 상당히 유사한 사건을 맡았다. 당시 자크 바브르(Jacques Vabre)라는 커피 회사는 로마 조약을 근거로 1966년에 입법부가 도입한 프랑스 관세법 조항에 이의를 제기했다. 투페는 평결에서 “유럽연합법의 우위를 인정하는 판결은 프랑스의 국경 너머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재판부에 유럽연합법 우선권 적용을 촉구했다.(3) 1975년 5월 24일, 파기원은 법률 차단막 원칙을 포기하고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은 법조계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으며, 행정법원과 사법법원 사이의 모순을 드러냈다. 국사원과 헌법재판소는 ‘유럽연합법은 전통적인 국제법에 속한다’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법학 교수 자클린 뒤테이 드라로셰르는 최고행정법원과 사법법원 사이의 판례법 모순이 염려스러운 상황을 만들고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만약 국사원이 유럽연합법에 반하는 판결을 내릴 것이 자명하다면, 여론의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의회는 유럽 공동체의 뜻에 어긋나는 법안을 제출하게 될 수 있습니다.”(4)
미테랑 정권, 친 EU 인사들을 헌법재판소 요직에 임명
이런 우려는 기우에 그쳤다. 1981년 프랑수아 미테랑, 1982년 독일 헬무트 콜의 선거 승리는 오히려 유럽 통합의 재출발에 도움이 됐다. 프랑스 사회당은 유럽연합 통합에 더 우호적인 새로운 인사들을 헌법재판소 요직에 임명했다. 이들은 1986년 9월 3일 외국인의 프랑스 입국 및 체류 조건에 관한 결정에서 “국제조약의 적용을 감독하는 것은 각 국가 기관이 자신의 권한 범위 내에서 수행해야 한다”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국사원에서 파기원의 판례를 따를 것을 암묵적으로 요구했다.
같은 해에 단일 유럽의정서(Single European Act, SEA)가 체결돼 1992년 12월 31일을 기점으로 단일 시장을 출범한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1987년 마르소 롱은 국사원 부의장이 되었고, 1988년 미셸 로카르 총리는 그에게 국내법, 국제법, 유럽연합법 간의 관계에 관한 연구를 요청했다. 로카르 총리는 연구 과제 요청서에서 “공동시장 완성을 위해서는 특히 국내법 체계를 유럽 공동체의 요구에 맞춰나가야 하며 노력을 확대해야한다”라고 강조했다.
국사원은 본질적으로 국가주권 문제에 더욱 민감했기에 파기원이 이룬 성과를 행정부에서 적용하기를 오랫동안 꺼려왔지만, 더 이상 유럽 통합에 우호적인 정치 상황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유럽연합법을 교육받은 신세대 고위 공무원과 변호사들이 대부분 유럽사법재판소의 원칙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라울 조르주 니콜로가 제기한 이례적인 행정소송은 판례를 뒤집는 계기가 됐다. 판사들은 1977년 프랑스 선거법을 로마 조약에 비추어 검토하였고, 그 선거법이 유럽연합 조약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청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1989년 10월 20일에 내려진 이 판결은 대대적인 관심을 받았다. 마르소 롱 국사원 부의장은 직접 유럽부 장관 에디트 크레송을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이 판결문을 보냈다. 1989년 11월 13일, 미셸 로카르 총리는 서면으로 축하 인사를 보냈다. “유럽연합 이사회 의장국 프랑스의 주도로 단일 유럽연합법이 시행되는 이 시점에 매우 시의적절한 결정입니다. 이 역사적인 결정은 유럽 건설에 대한 프랑스의 불가역적인 헌신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사례일 것입니다.”
파기원과 국사원은 판례를 변경했지만, 기존 법질서를 그대로 유지했고 규범 위계의 핵심적인 측면은 바꾸지 않았다. 프랑스 법관들에게는 헌법이 여전히 유럽연합법에 우선했다. 니콜로 판결 3년 후, 프랑스는 프랑을 단일 유럽 통화로 대체하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에 서명했다. 헌법위원회는 1992년 4월 9일 결정에서 비준을 위해 미묘한 구분을 두었다. 조약은 그 자체로 위헌이 되는 주권의 이양이 아니라 권한의 이양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헌법재판관들은 이런 ‘자발적인 동의’에 의한 권리 이양을 구체화하려면 헌법을 개정해야 하며, 유럽연합에 관한 제15장을 추가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럽의회, 유럽연합법 우위의 원칙 재확인
이후 몇 년에 걸쳐 헌법재판소의 판례는 이 추가 조항의 결과를 명확히 보여줬다. 헌법재판소는 이제 ‘유럽연합 지침을 국내법에 반영하고 그 법을 준수해야 하는 헌법의 이중 요구’에 직면했다고 봤다. 헌법은 여전히 ‘국내 법질서에서 최상의 위상’을 차지하지만, 그 헌법 조항은 “유럽연합법이 프랑스 헌법적 정체성의 규칙이나 원칙에 어긋나는 경우에만” 우위를 점한다.(5)
2006년 8월 1일의 결정으로 ‘헌법적 정체성’이라는 개념이 도입된 지 18년이 지났지만 그 정의는 여전히 모호하기만 하다. 일부 법학자들은 이 명제에 해당하는 원칙을 들 때면 세속성을 언급한다. 그러나 프랑스 헌법 제1조에 언급된 공화국의 사회적 소명은 유럽연합이 부과한 자유화에 걸림돌이 된 적이 없다.
경제적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정치 집단은 이런 프랑스 법원의 해석을 좋아한다. 프랑스 우파는 유럽연합법의 우선권을 점점 더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있지만, 주로 안보, 이민, 환경 분야에서만 문제를 제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우파가 내세우는 입장은 유럽연합법의 여러 측면을 회피하려 한 일부 동유럽 국가들(헝가리와 2023년 10월까지의 폴란드)의 입장과 맥을 같이한다. 이에 따라 유럽 의회는 2023년 결의안에서 유럽연합법 우위의 원칙을 재확인하기에 이르렀다.(6)
이런 법적 상황에서 좌파 진영은 다른 성격의 문제를 지적해야 한다. 유럽 공동시장의 매우 자유주의적인 조항들이 법적 구속력을 갖는 상황에서 어떻게 생태적, 사회적 변혁을 위한 공약을 총선에서 내세울 수 있을 것인가? 집권 후에는 해당 공약을 어떻게 이행할 수 있을 것인가? ‘불복하는 프랑스(LFI)’는 ‘유럽연합에 불복종’하는 전략을 제안했고, ‘프랑스 공산당(PCF)’은 ‘프랑스 국민의 민주적, 사회적, 경제적 이익에 반하는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7) 이런 입장들은 정치적 의지를 보여주지만, 법적 근거는 빈약하다.
국사원, “행정법원은 EU법의 관점에서 국내법을 해석해야”
극좌파 정당인 ‘불복하는 프랑스’는 유럽연합이 때로는 자체 규정을 위반하기 때문에, 회원국도 유럽연합법을 위반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장뤼크 멜랑숑은 2022년 공약집 ‘공동의 미래(L’avenir en commun)’에서 지난 20년 동안 공공부문 적자 3%라는 ‘황금률’을 위반한 사례가 171건 있었고, 독일은 그중의 일곱 건을 위반했지만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는 ‘불복종이 필요하고 합법적’이라고 주장했다.(8) 그러나 유럽연합이 과도한 적자를 눈감아줄 수 있다고 해서 회원국이 조약의 조항, 지침 또는 규정의 적용을 일방적으로 거부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게다가 프랑스에서는 국내 법원이라는 첫 번째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가령 철도 운송이나 전력에 대한 공공 독점으로의 회귀와 자본 유출 방지와 과세를 위해 자본이동을 통제하는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조치는 특히 2007년 10월 23일의 철도 부문 자유화 지침, 1996년 12월 19일의 전력 부문 경쟁 도입 지침,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에 대한 장벽을 금지하는 유럽연합 운영조약(TFEU) 제63조~제66조에 저촉된다.
1960년대에 유럽사법재판소는 초국가주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프랑스 최고법원들은 자국 법질서의 주권을 옹호했지만, 최근 법원은 이 문제에 마침표를 찍었다. 국사원은 웹사이트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내놓았다. “행정법원은 유럽연합법의 일반법원으로서 무엇보다도 유럽연합법의 관점에서 국내법을 해석해야 한다. (...) 따라서 법원은 유럽연합의 규범과 상충하는 법률의 적용을 배제해야 한다. 행정 행위가 유럽연합법에 어긋나는 입법 조항에 근거한다면, 그 행위는 법적 효력이 없기에 취소돼야 한다. 이 요건은 긴급심리 재판에도 적용된다.”(9)
그 영향을 가늠하기 위해, 가상의 정치 시나리오를 생각해보자. 프랑스에서 어떤 정당 혹은 연합이 생태적, 사회적 변혁을 목표로 야심 찬 공약을 내걸고 집권에 성공한다. 정부는 여론의 지지와 상원과 하원에서의 압도적 다수를 확보해 선거 공약에 부합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자본 통제 법안을 마련한다고 생각해보자. 이 법안은 일정 금액 이상, 특정 유형의 자금 흐름에 대해 행정 당국의 허가를 받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익명을 요청한 국사원 소속 두 명을 포함한 여러 법률가가 이 시나리오 내용을 검토해 보았더니 의견이 하나로 일치했다.
정부는 먼저 자본 통제 법안을 국사원에 보내 자문 의견을 구할 것이다. 부정적인 의견이 나오겠지만, 행정부는 그 의견을 무시하고 의회에 법안을 제출할 수 있다. 하원과 상원에서 법안이 통과되면, 60명의 하원의원이나 상원의원이 헌법 소원을 제기할 수 있다. 만약 헌법재판관들이 통상의 원칙을 따른다면, 프랑스의 국제 조약 준수 여부가 아니라 오직 합헌 여부만을 심사할 것이다. 예외적 상황에서 판례 변경이 일어나지 않는 한,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의 자본 통제법 공포를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법이 발효되기 위해 시행령(법령, 명령, 심지어 훈령 등)이 필요한 경우, 채택 후 2개월 이내에 제3자가 국사원에 이를 다툴 수 있다. 반면 별도의 시행 조치가 필요없다면, 해당 법으로 인해 피해를 봤다고 여기는 개인, 단체, 기업은 행정법원에 직접 제소할 수 있다. 이런 제소에 앞서 가처분 신청을 할 수도 있다. 가처분 재판관은 48시간 내에 재판하고, 위법 소지나 조약 위반 소지가 있다고 판단되면 본안 심리가 있을 때까지 집행을 정지시킬 수 있다.
이 법에 따라 불이익을 받는 자본 소유자는 누구든 법을 무효화 할 수 있고, 거의 즉각적인 집행 정지도 가능하다. 의회 승인을 받아 위임명령으로 통치할 때도 마찬가지다. 명령이 추인되면 행정법원이 유럽연합법 준수 여부를 심사한다. 유럽사법재판소에서 긴 소송을 할 필요는 없다. 단시일 안에 사안은 모두 국사원으로 넘어갈 테고, 국사원은 자본 통제가 불법이라 판단해 입법을 저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수단으로 정부가 이런 사법부의 결정들을 모두 무시하고 직접 행동에 나설 수 있을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원칙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상상하기 어렵다. 법치주의에 어긋날 뿐 아니라 민주적이지 않으며 정치적으로도 위태로운 상황이 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자본 통제는 정부 기관들이 관여해야 하지만 이 기관들은 판례에 따라 EU법을 어기는 조치는 할 수 없다. 법원의 결정을 거스르는 행동은 행정적이고 정치적인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냥 포기하는 수밖에 없는가? 아니면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유럽 조약의 변화를 기다리거나 유럽 연합에서 완전히 탈퇴하는 방법을 택해야 할까? 선출된 정치권력이 유럽 위기를 초래할 각오를 하고 일방적 조처를 통해 대안을 모색할 수는 없을까? 마지막 선택지에는 가능성이 열려 있지만, 근본적인 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법관들의 법 해석이나 법 자체의 변화가 필요하다.
프랑스 의회, EU의 자유주의 정책과 결별하려면…
1970~1980년대 사례에서 보았듯이 판례는 시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프랑스 사회가 더 많은 공공 규제, 더 적은 자유주의 정책, 더 나은 부의 분배를 요구하고, 이런 요구를 이행할 준비가 된 의회를 구성한다면, 법관의 판단도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작업은 범위가 막대할 것이고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하다. 반세기 넘게 구축된 판례법 체계 전체를 법안과 사건마다 재구성해야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유주의 정책과의 결별을 앞당기고 싶다면 프랑스 의회에는 또 다른 선택지가 있다. 유럽연합법에 여전히 우선하는 유일한 법인 프랑스 헌법을 개정하는 것이다. 2019년 국회 법사위원회의 전 부위원장 마리프랑수아즈 베슈텔(공화국 시민운동, MRC)은 이런 취지에서 ‘헌법에 공공 서비스를 명시할 것’을 제안했고, 그러려면 ‘국영 사업자의 공적 소유권’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10)
1946년 제정된 프랑스 헌법 전문 제9항에는 “국가 공공 서비스 혹은 사실상 독점의 성격을 지니는 재산이나 기업은 모두 공동체의 소유가 되어야 한다”라고 이미 명시돼 있다. 하지만 이 조항은 너무 모호하여 민영화를 막는 데 효과적이지 못했다. 공공 서비스를 보다 명백하게 정의한다면 공공 서비스는 프랑스의 ‘헌법적 정체성’의 한 요소가 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프랑스 법원은 판례를 뒤집게 될 것이며, 유럽연합 지침이나 조약을 들어 철도나 전력 부문의 공공 독점으로 회귀하는 법에 더 이상 반기를 들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이 헌법 개정은 공공 서비스 분야에만 영향을 미칠 수 있겠지만, 같은 논리에 따라 다른 국가적 예외 사항이 추가될 수도 있다.
다른 대안으로, 헌법을 개정이나 새로운 헌법을 채택해 특정 조건에 따라 법률 차단막 원칙을 재도입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다. 경제와 사회 영역 같은 특정 권한 범위나 특별한 정당성이 부여되는 국민투표 등이 그 조건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프랑스는 국내법에 따라 합법적으로 자본을 통제하고, 사회 정의와 환경 정의를 폭넓게 지향하는 여러 가지 법을 제정할 수 있다. 유럽연합의 분노, 유럽사법재판소의 법적 조치, 비난이 뒤따르겠지만, 프랑스 내의 법적 장벽은 허물어질 것이다. 그리고 유럽연합과의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될 것이다.
글·오렐리앙 베르니에 Aurélien Bernier
작가. 『La gauche radicale et ses tabous. Pourquoi le Front de gauche échoue face au Front national 급진 좌파와 금기 사항. 좌파 연합이 국민 전선에 패하는 이유』(Seuil, Paris, 2014)의 저자.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Patrick Frydman, ‘Il y a 30 ans, l’arrêt Nicolo : petite histoire d’un grand’arrêt 30년 전, 니콜로 판결: 중대한 판결의 작은 역사’, 2019년 10월 14일 강연, www.conseil-etat.fr
(2) Pierre-Henri Teitgen, 『Faites entrer le témoin suivant. 1940-1958. De la résistance à la Ve République 다음 증인을 부르세요. 1940~1958.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레지스탕스 운동부터 제5공화국까지』, <Ouest-France>, Rennes, 1988.
(3) Karen J. Alter, 『Establishing the Supremacy of European Law: The Making of an International Rule of Law in Europe 유럽연합법의 우위 확립 과정: 유럽 내 국제적 법치주의 실현』,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4) Jacqueline Dutheil de la Rochère, ‘L’application du droit communautaire en France 프랑스에서의 유럽 공동체 법 적용’, <Revue générale de droit>, 제13권 2호, Ottawa, 1982.
(5) ‘Quel rapport à l’Europe fixe la Constitution ? 프랑스 헌법은 유럽연합과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하는가? ‘, www.conseil-constitutionnel.fr
(6) Cyrus Engerer et Yana Toom, ‘Rapport sur la mise en œuvre du principe de la primauté du droit de l’Union 연합법의 우선 원칙의 이행에 관한 보고서’, No. A9-0341/2023, 유럽 의회, 법률 위원회 및 헌법 위원회, 2023년 11월 7일, www.europarl.europa.eu
(7) 프랑스 공산당 전국 회의(Conférence nationale du PCF), ‘Faire entendre la voix de la France pour une Europe de peuples libres, souverains et associés, 자유롭고 주권적이며 협력하는 국민의 유럽을 위해 프랑스의 목소리를 높이다’, 2023년 10월 15일.
(8) ‘Les plans de l’avenir en commun. Notre stratégie en Europe 공동의 미래를 위한 계획. 유럽연합에 관한 우리의 전략’, https://melenchon2022.fr
(9) Conseil d’État 국사원, ‘Le juge administratif et le droit de l’Union européenne 행정사법부와 유럽연합법’, 주제별 보고서, 2022년 3월 10일, www.conseil-etat.fr
(10) Marie-Françoise Bechtel, ‘Inscrire les services publics dans la Constitution 헌법에 공공 서비스를 명시할 것’, <Marianne>, Paris, 2019년 6월 28일~7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