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개혁 반대 1년, 이기려면?

2024-05-31     필리프 푸투 | 자동차공장 전 노조 대표

모든 것은 순조롭게 흘러가는 듯했다. 2023년 1월부터, 프랑스에서 연금 수령 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늦추는 연금개혁안에 반대하는 강력한 사회적 운동이 이어졌다. 몇 개월 동안 노조는 단합이 잘 되었고, 대중의 지지도도 높았다. 그러나 파업은 오래가지 못했고, 결국 ‘개혁안’은 통과됐다. 왜 이렇게 됐을까? 열정적인 활동가인 동시에 전 노조 대표인 필리프 푸투는 이러한 상황에서 과연 어떤 교훈을 이끌어 낼 수 있을지를 고민해봤다.

 

속설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사회적 투쟁, 심지어 강력한 사회적 투쟁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언제나 승자는 같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프랑스 대통령이 승리했다고 해도, 이 문제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여당은 대규모 시위로 인해 거대한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의회에서 과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하고, 여론의 뭇매를 맞고, 그 어느 때보다 신뢰를 잃었으며, 힘은 약해지고, 때로는 웃음거리도 되었다가, 결국에는 반민주적인 조항인 프랑스 헌법 제49.3조까지 들먹이기에 이르렀다.

이전 경우에서보다 더,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시위가 성공한 것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만족스럽지 않은가? 이러한 성찰은 숙명론이 그대로 자리를 잡는 것을 막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노조와 좌파 정당은 이번 대규모 사회적 갈등이 남긴 교훈에 관해 사회적인 토론을 이끌어냄으로써, 우리의 강점과 약점을 이해하고 경험 이상의 무언가를 얻어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흐지부지 끝나버린 마지막 시위 

마지막 시위인 줄 몰랐지만 마지막이 되어버린 시위와 함께, 반대 운동이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흐지부지 끝나는 것을 보는 일은 괴롭다. 실제로는 투쟁이 멈추었지만, 투쟁은 곧 다른 형식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부르짖는 공허한 목소리를 듣는 일도, 그리고 다음에 대한 준비 없이, 다른 주제로 그토록 쉽게 넘어가는 모습을 보는 일도 괴롭다.

그러나 퇴직연금 개혁 반대 시위는 이전에 있었던 ‘노란 조끼 운동’(2018년부터 2019년까지의 몇 개월)과 2016년 노동법 개정 반대 시위(6개월)와 함께 노동자들도 파괴적인 자본주의에 반기를 들 능력이 충분히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번 시위는 그 위력으로 보나 참여자들의 다양성으로 보나 실로 놀라웠다. 2023년 1월에 시위는 정부의 퇴직연금 개혁안에 대한 강한 반발심을 바탕으로 시작됐다. 사실 우리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퇴직연금 개혁은 프랑스 정부가 준비하고 있던 일련의 개혁안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2019~2020년에 잠시 조용했을 뿐이었다. 마크롱 지지자들은 오만한 공격과 발언을 계속해서 쏟아냈다. 계층 간의 갈등, 계속되는 억압 속에서 프랑스 국민은 쌓인 분노를 표출할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노조 연합에 의해 시작된 시위는 거세게 이어졌다. 프랑스 전역에서 시위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국민의 확신, 다시 찾은 희망, 만족감을 대변했다. 수많은 군중이 집권당에 대한 증오를 소리 높여 외쳤고, 우리는 마치 거대한 회의가 열린 듯이 거리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다.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는 사실 외에도, 여론 조사 결과는 국민의 상당수가 프랑스 정부에 반대하고 있음을 보여줬다(약 70~80%).

게다가 정부는 불이 붙은 시위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프랑스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이 등장할 때마다 정부는 그들을 경멸하고 증오하는 모습을 보였다. 정부에 반대하는 자는 무조건 억눌러야 했다.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은 무조건 통과되어야 했다. 한두 걸음조차 절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협상의 여지는 전혀 없었으므로, 프랑스 민주노동동맹(CFDT)과 같은 가장 덜 호전적인 노조조차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1) 융통성 없는 방식, 그것이 마크롱 정부의 스타일이었다.

정부의 이러한 입장 앞에서 노조 연합은 결집했고, 반대 운동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시위와 파업이 탄력을 받자 노조는 이 기세를 이어가려 했다. 그때 처음으로 이 운동을 확대하고 파업으로 전국을 마비시키자는 주장이 나왔다. 이에 우리는 이번만큼은 승리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힘을 잃은 사회운동, 쪼개진 노동운동 

여러 분야에서 갱신 가능한 파업을 선언했다. 철도원, 전기 기술자, 가스 관련 직종, 정제 기술자가 파업에 동참했다(BFMTV의 칼럼니스트는 제외). 특히 파리의 도로 청소부들이 장기 파업으로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높았는데, 거리의 쓰레기 더미는 사람들의 눈에 굉장히 잘 띄기 때문이다. 이는 정부에게도 참을 수 없는 상황일 터였다. 거리에 굴러다니는 쓰레기, 불타는 쓰레기통, 보안 기동대(CRS) 건물 앞에 쌓인 쓰레기봉투의 이미지는 강력했다.(2) 그러나 이 소동은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의 힘과 노동자들의 사회적 역할을 증명했다. 그들이 일을 멈추면 사회는 마비되고 정지된다. 우리가 자신감과 공동의 신뢰를 가져도 되는 이유이다.

정부는 한층 더 강경해지고 무례해져서, 그 유명한 프랑스 헌법 제49.3조를 들먹이며 노조 연합과 투쟁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부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반대 운동이 더 격렬해지고 더 과격화하게 된 것이다.

언론도 논조를 바꾸었다. 초기 몇 주 동안은 가장 우파에 속하는 논설위원조차 시위가 이처럼 광범위한 대중으로부터 호응을 얻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서 이를 신중하게 다루었다. 거리에서의 대치 장면, 파업 현장, 우왕좌왕하는 공권력의 모습을 연달아 보여주는 뉴스 채널을 우리는 오랜만에 즐겁게 감상했다. 불과 1년 전 대선 때 인종차별적이고 반동적인 발언을 내보내던 언론에서, 이제는 이러한 영상이 나왔다. 물론 이러한 발언들은 ‘이민법’ 개정안 발표와 함께 1년 만에 부활했다.

그러나 이 모든 갈등의 변곡점이기도 했던 제49.3조가 나온 뒤로, 기대했던 파업 확산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동안 시위를 이끌던 분야들은 힘을 잃었다. 철도원, 정제 기술자, 에너지 분야 노동자들은 과거에 장기 파업이 있었을 때마다 늘 시위에 앞장섰었다. 그러나 한 번 사기가 떨어지자 되돌릴 수 없었다. 다른 분야들, 특히 민간 분야는 아예 파업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반대 운동은 일부의 참여로는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이전 시위(2010년, 2016년 등) 때 전면 파업이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는 위축된 노조 연합이 이를 촉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노조 연합은 갱신 가능한 파업을 분명히 선언했다.

 

사회 운동이 힘을 잃은 원인들

그럼에도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왜일까? 사회 운동이 힘을 잃은 이유를 설명해주는 몇 가지 객관적인 이유가 있다. 우선, 경제 위기의 여파이다. 대량 해고, 공장 폐쇄, 공공 서비스의 붕괴, 전력 기업 EDF 주요 지점과 우편물 분류 센터의 폐쇄는 노동 계층의 약화를 가져왔다.(3) 노동 조건의 악화, 노동 형태의 개편, 격화, 고통, 개인화, 그리고 재택근무와 우버와 같은 공유 경제 시스템의 등장까지, 최근의 모든 새로운 상황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노동자들의 저항의 의지를 약화하고 분산시키고 있다.

또한 민간과 공공 분야 모두에서 대기업이 줄도산하면서 노조, 정치적 조직, 네트워크, 보루가 사라졌다. 게다가 사르코지 대통령(노동법 개정), 올랑드와 마크롱 대통령(노동법, 산업간 전국 협약(ANI : Accord National Interprofessionnel), 마크롱 대통령(행정명령)을 거치면서 노동자의 권리와 노조의 권리도 서서히 축소됐다. 그만큼 노동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방어 도구도 줄었고, 이는 힘의 관계를 또다시 불균형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노동계가 파편화하고 정계와의 연결고리도 끊어지면서, 착취자에 맞서 공동의 이익을 쟁취해야 한다는 노동 계층의 의식도 옅어지고 있다. 체념의 분위기에 개인주의까지 가세한 형국이다. 물론 이러한 연결고리는 언젠가는 다시 회복되겠지만, 빠른 시일 내에는 불가능해 보인다. 우리와 같은 활동가들은 일자리를 방어하고 공공 서비스를 수호하는 과정에서 이를 이미 체감하고 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노동자들이 노조 담당자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관망자의 입장만 취하고 있으며, 이는 공동의 자신감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된다.(4)

1936년 6월의 노동자들과 1968년 5월의 노동자들은 이제 없다. 1995년 11~12월의 노동자들도 없다. 노동 조건과 착취 관계는 계속해서 변화하면서 우리의 투쟁 조건을 바꾸어 놓는다. 논리적으로 보았을 때, 가장 핵심적인 무기인 전체 파업은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지난해에 갱신 가능한 파업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고 해서 올해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각각은 다른 사건일 뿐이다.

1936년과 1968년에 일어난 전국적인 전체 파업은 노조 지도부가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공장, 기타 노동 현장, 노동자 구역 등 아래에서부터 일어난 파업이며, 활동가들의 네트워크 덕분에 광범위하게 확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기운이 올라오는 시기가 분명히 있다. 현재와 과거는 다르다. 과거와의 비교는 우리가 현재의 문제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지만, 과거의 결과만 가지고 현재의 게임이 승산이 없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투쟁 현실을 비판적이고 명확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왜 이리 어려울까? 아마도 투쟁을 주도한 사람들, 노조 및 정치적 지도부의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누군가는 지적해야 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모든 것이 폭발할 것이고, 노동자들의 염증이 표출될 것이고, 상황이 급변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구시대적인 사회적 대화에 너무 매달려

그러나 ‘노란 조끼 운동’이나, 전국적으로 확산되지는 못했지만 2023년 6~7월에 서민 지역의 10대들이 인종차별에 반대해 벌인 폭력 시위와 같이, 폭발 자체로는 충분하지는 않다. 우리는 좀 더 조직을 잘 갖추고, 서로 좀 더 잘 조율할 필요가 있다. 노동 현장이나 지역 간에 활동가들의 네트워크를 재정비하고 서로 간의 접점을 늘려야 하는 이유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조직은 노동자를 결집하고, 교육하고, 계층적 인식을 높이고, 무엇보다도 자가조직을 원활하게 할 것이다.

이러한 민주적인 도구들을 우리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오늘날의 노조나 좌파 정당은 현실과 다소 동떨어져 있다. 그들은 지나치게 무기력하고, 오래전에 사라져버린 사회적 대화의 루틴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지배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를 지나치게 존중한다. 지나치게 관료화된 나머지 현장의 활동가들과는 소통하지 않는다. 그 결과, 반대 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똑같은 실수를 저지른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말하기는 쉽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일은 훨씬 더 어렵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투쟁에 적합한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중요한 소명이 있다. 페미니즘 운동과 환경보호론자 운동이 이미 그런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평균연령이 더 젊고, 더 역동적이고, 때로는 더 과격한 이 활동가들은 오늘날의 현실에 맞추어 조직 형태와 투쟁 방식을 재창조해냈다. 자본주의 시스템의 잔혹함, 전체주의, 기업과 행정기관을 비롯해 사회 전체에 만연해 있는 억압행위에 맞서서, 스스로를 방어해야 할 시기가 아닐까?

 

더 과감한 투쟁으로, 더 호소력 있게 시위해야 

그렇다면 폭력 문제에 관해서도 이야기해보자. 시위, 파업, 기타 전통적인 활동들이 무조건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화적이고 통합적인 방식뿐만 아니라, 좀 더 과격한, 심지어 좀 더 폭력적인 투쟁 방식도 고려해보아야 한다. 생트-솔린의 환경보호론자들(또는 사보타주를 실천하거나 기계를 불태우는 사람들), 페미니스트들의 콜라주(공공장소의 벽면에 페미니스트 문구를 부착하는 활동-역주), 환경보호구역(ZAD) 수호자들과 거주권(DAL) 협회의 점거 시위 등이 그 예이다.

결국, 우리 삶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고 거대 자본이 빼앗아간 부를 되가져오려면 공격적인 투쟁으로 회귀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 뒤에는 권력의 문제, 누구를 위한 권력이며 왜 그 권력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숨어있다. 우리가 가진 힘에 관한 신뢰가 높을수록 우리의 요구와 목표는 과격해질 수 있다. 2023년 1월과 4월 사이에 모두가 목도한 바와 같이, 시위대의 숫자가 증가할수록 행동은 더 단호해지고(전기와 가스의 불법적인 공급 중단) 대담해진다. 최근에 있었던 농민들의 시위에서도, 분노와 확신이 상대와의 대치 상황, 심지어 정부와의 물리적인 대치 상황에서도 뒷걸음치지 않는 과감한 행동을 통해 표출될 때, 조금 다른 힘의 관계가 생겨나고 또한 정부를 몇 걸음 물러서게 만드는 승리를 거둘 수 있음을 우리는 확인했다. 비록 농업 자본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이번 운동의 목표와 이데올로기가 우리가 추구하는 방향과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한 번쯤 생각해볼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과격성은 하나의 행동 양식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동이 목표하는 그 자체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연금개혁 반대 투쟁은 안타깝게도 마크롱의 ‘개혁안’만을 문제 삼는 제한적인 범위에서만 이루어졌다. 그보다는 자본주의자들에 맞서 경제에 대한 지배력과 권력을 회복한다는 원칙 아래, ‘사회보장 100%(100% Sécu)’, 사회보장제도의 확대, 부의 재분배, 평생 급여, 노동 시간 단축을 수호하고, 실업과 빈곤 문제를 더 적극적으로 요구하면서, 더 일관적이고, 더 호소력이 짙은 투쟁을 했었어야 했다.

간단한 일은 아니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사람들은 우리에게 언제나 말했었다. 그러나 우리는 오래전부터 방어적인 투쟁만을 하고 있다. 연금수령 개시 연령 64세에 대한 반대 투쟁은 대중들 사이에서나 법적으로나 결국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지금 우리가 위기 상황에 놓여있다 해도, 목표를 높이고, 요구 사항을 더 강력하게 주장하고, 우리의 조직을 과격한 행동도 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꾼다면, 강력한 정치적 의식을 가지고 다시 힘을 합쳐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한 마디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글·필리프 푸투 Philippe Poutou
블랑크포르 포드 공장의 전 노조 대표
반자본주의신당(NPA) 후보로 2012년, 2017년, 2022년 대선에 출마

번역·김소연
번역위원


(1) 프랑스 민주노동연맹 (CFDT : Confédération Française Démocratique du Travail)
(2) 공화국 보안 기동대(CRS : Compagnies Républicaines de Sécurité)
(3) 프랑스 전력 공사(EDF : Électricité de France)
(4) Philippe Poutou 필리프 푸투, ‘Chronique d’un combat contre le fatalisme 포드를 이긴다고 끝난 게 아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한국어판 2019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