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과 희망이 교차하는 ‘세계 굴뚝’의 민낯

왕빙 감독이 그려낸 또다른 중국

2024-05-31     외제니오 렌지 | 영화평론가

2003년 다큐멘터리 영화 <철서구>로 존재를 알린 왕빙 감독은 중국의 노동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며 고유한 영화 세계를 구축했다. 일부 작품은 전작에 그 뿌리를 두면서 내용이 보강 혹은 보완되기도 하는데, 이들 작품을 통해 왕빙 감독은 오늘날의 중국을 살아내는 사람들에 대한 동족 의식을 기반으로 조국의 민낯을 그려낸다. 

 

왕빙의 작품에는 두 종류의 감독이 존재한다. 하나는 지리학자로서의 왕빙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학자로서의 왕빙이다. 전자의 경우, 옛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며 사막과 산천 등이 들어간 지도를 그려낸다. 후자 역시 작업은 옛 방식을 따른다. 불 곁이나 탈의실에서, 혹은 환자 머리맡에서 묵묵히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하나같이 중국이 표방하는 ‘사회주의 인민’은 찾아보기 힘든 공간이다.

작품을 거듭하면서 왕빙은 중국이란 나라를 관통하며 나아간다. 그 시작점은 중국 북동부로, 이곳에서 왕빙은 옛 소비에트의 자금으로 만들어진 철강 공장이 해체되는 과정을 지켜본다(<철서구, 2002>). 수도로 옮겨간 후에는 반(反)우파운동과 대기근 시기(1959~1961)에 대한 증언도 수집한다(<중국 여인의 연대기, 2007>, <바람과 모래, 2010>). 반우파운동은 1950년대 비판의 목소리를 잠재우기 위해 중국 공산당이 실시한 대중 정치 운동이었다. 이후 <세 자매, 2012>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2013>를 촬영하면서는 중국 남서부 지방도 누비고 다녔다.(1)

 

<세 자매>, 가난한 양치기 딸과 계절 노동자 아빠의 현실 조명

2014년부터 왕빙은 상하이 지역 방직 노동자의 삶을 담는 신작에 매진했다. 3부작으로 구성된 이 작품의 제1부인 <청춘>은 올해 1월 프랑스에서 개봉됐다. 왕빙 감독은 중국에서 체포될 우려가 있을 때마다 프랑스에서 지냈는데, 정식으로 활동 금지 처분을 받은 건 아니지만 위험이 감지되면 그는 즉시 프랑스로 건너가 몸을 피했다.

그는 프랑스에서 지내는 동안 <아르테> 방송사의 제안으로 <흑의인>을 제작했는데 이는 왕빙이 프랑스 현지에서 촬영한 첫 작품이었다. <흑의인>은 망명 작곡가 왕시린의 삶을 다룬 작품으로, 파리 부프 뒤 노르 극장 무대에서 촬영이 이뤄졌다. 두 작품은 2023년 칸 영화제에서 공개되어 차례로 대중 앞에 상영됐다. 이보다 앞선 2009년 파리 샹탈 크루젤 갤러리에서는 그의 작품 두 편이 몇 미터 거리를 두고 동시에 상영되기도 했다. 하나는 <중국 여인의 연대기>로, 한 여인이 거실에 설치된 카메라 앞에서 반우파운동 시기 동안 자신이 겪은 인생 여정을 털어놓는 작품이다. 다른 하나는 대사 없이 진행되는 작품 <이름 없는 남자>다. 영화에서 그는 이름도 없다.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다. 분변을 모아 퇴비를 만들고 밭을 일구며, 토굴에서 먹고 잔다. <이름 없는 남자>의 영상을 보는 동안 그 위로는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자는 남자가 몸으로 보여주는 것을 말로써 설명하는 듯했다. 각기 다른 내용을 다루면서도 서로 맞물려 있는 두 작품은 모두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청춘>과 <흑의인>은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이중주다. 둘 다 내용이나 형식 면에서 일견 유사성은 없어 보인다. <청춘>에 대한 기본 구상이 맨 처음 이뤄진 건 2011년 윈난성의 산악지대에서였다. 당시 왕빙은 중국 남서부 지방에 있는 한 시인의 묘지를 찾았다가 지쳐 있던 와중에 어느 양치기 소녀의 도움을 받는다. 어린 동생들만 데리고 지내던 소녀의 삶은 극심할 정도로 궁핍했다. 당시 소녀를 보면서 감독은 ‘이핀루씨(一贫如洗)’라는 말을 떠올렸다. 문자 그대로 옮기면 ‘씻은 듯이 가난하다’는 뜻으로, 가진 것 하나 없이 헐벗고 굶주린 극도의 가난을 의미한다. 

이 소녀와의 만남에서 탄생한 작품이 <세 자매>다. 그런데 이 작품을 촬영하면서 감독은 자매에게도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자매의 아버지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연안 지대 공장에서 힘들게 일하느라 몇 달씩 집을 비우고 있었다. 이는 비단 소녀의 집에만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 지역 마을에서는 일할 나이의 남녀가 타지로 일하러 떠날 때가 많았다. 계절마다 썰물 빠지듯 마을을 떠난 노동자들은 6월에 집을 떠나 2월 말쯤 다시 돌아왔다. 감독은 이 사람들의 움직임을 따라 영화를 찍기로 결심했다. 당시 <상하이의 청춘>이라 가제를 단 영화의 제작은 10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청춘>, 의류 공단 봉제 노동자들의 폐쇄 공간과 휴대폰

양쯔강을 따라 그 거대한 삼각지에 이르며 여느 지리학자 못지않게 곳곳을 누비던 왕빙 감독은 질리 의류 공장 지대를 발견한다. 수만 개 봉제 공장이 위치한 공업 지대로, 매일같이 새로운 기업들이 생겨나는 곳이었다. 각 작업장에서는 15~20명 정도로 구성된 작업팀이 공장을 가동하며 내수용 아동 의류를 대량으로 생산한다. 이곳 노동자들은 온종일 재봉틀 뒤에서 시간을 보낸다. 저녁때 술 마실 기운이 있는 건 젊은 친구들 정도고, 대다수는 낡고 더러운 숙소 침대에 가서 눕기 바쁘다.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했는데, 놀랍게도 청년들은 이러한 환경에도 그 나이대의 고민을 똑같이 하고 있었다. 즉 연애나 친구 문제로 속을 태웠고, 게임에도 열중했다. 아마도 이들에겐 가장 즐거운 순간들이었으리라. 이 대목에서 <청춘>은 젊은이들의 시트콤 같은 일상을 보여주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처한 사회적 현실을 외면하지는 않는다.

서방 기업과 교역하는 대규모 방직 공장과는 거리가 먼 이 내수용 봉제 공장들은 중국의 주류 경제로부터 외딴섬처럼 분리되어 있다. 일단 사장들 대다수가 전직 노동자 출신이고, 따라서 회사를 차릴 운영 자본도 없고 은행 대출도 못 받는다. 이에 각 거래처는 생산에 필요한 기자재부터 먼저 내어주고, 노동자들도 우선 일부터 진행한다.

사람들은 수개월 간 돈을 받지 못하며, 받을 돈이 정확히 얼마인지도 모른다. 대금 결제와 급여 지급이 이뤄지는 건 한 시즌이 끝날 무렵이다. 모든 상품이 다 판매되고 나면 그제야 사장은 정산 작업을 진행한다. 이러한 시스템이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생각보다 급여 수준이 그리 낮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영화의 주요 인물 가운데 하나가 여기에 도움을 준다. 숙소, 작업장 할 것 없이 곳곳에서 등장하는 휴대폰은 이 폐쇄적인 공간에서 살아가는 또 하나의 수단이다. 만일 휴대폰이 없었다면 젊은이들이 이 꽉 막힌 공간을 어찌 감내했을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흑의인>, 주인공 작곡가의 고꾸라지며 저항하는 몸짓

대상을 포착할 때 왕빙 감독은 항상 대상 전체를 카메라에 담아내려 한다. 그에게 있어 풀샷 이미지는 롱샷과 확연히 구별된다. 선전 목적에서 애용되는 롱샷은 그 안의 개별 요소를 지워버린다. 화면을 구성하는 각 개인과 이들의 삶, 그 여정들이 묻혀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왕빙 감독은 각 작품에서 이 같은 개인의 소멸을 막아내고자 한다.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건 중심에서 멀어지는 움직임 같은 특이한 궤적이다.

이는 각 신이나 시퀀스에서도 확인된다. 어떤 시퀀스에서는 걷고 있는 인물의 뒤를 감독이 말 그대로 뒤쫓아가기도 하고, 보다 관조적인 성격을 띠는 신에서는 한자리에 고정된 카메라가 인물의 자유분방한 움직임을 담아내기도 한다. 인물이 마음껏 앞으로 나아가며 자기 얘기를 풀어놓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을 통해 감독은 인물이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억압된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출하게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흑의인>에 등장하는 작곡가 왕시린의 궤적이다. 퍼포먼스 내내 알몸을 한 왕시린은 ‘이핀루씨(一贫如洗)’의 상태나 다름없다. 1부에서 왕시린은 그를 얽매는 무언가의 힘에 맞서려는 듯 네 발 자세로 몸을 쭉 내밀며 무대 위를 천천히 가로지른다.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던 왕시린은 이내 바닥에 주저앉고, 이어 다시 몸을 일으킨 그는 결국 똑바로 우뚝 선 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읊조린다.

2부 역시 퍼포먼스로 이뤄지지만, 이번에는 인물의 대사가 들어간다. 왕시린은 문화대혁명 때 자신이 겪은 일들을 상세히 털어놓고, 그의 입에서는 피아노 위를 연주하는 음표처럼 단어들이 쏟아진다. 그가 하는 말들이 관현악 연주에 묻혀 또렷이 들리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목소리는 하나의 악기로서 연주에 참여한다. <흑의인>의 이 교향곡과, <청춘>에서 노동자의 잡담이 재봉틀과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협주곡이 서로 닮아있다고 한다면 이는 과도한 해석일까? 하지만 왕빙 감독의 귀에는 이 둘이 서로 비슷하게 들리는 것 같다. 두 작품 모두에서 고통의 절규와 환희의 외침이 동시에 쏟아지기 때문이다.

 

 

글·외제니오 렌지 Eugenio Renzi
영화평론가

번역·배영란
번역위원


(1) DVD 출시작 : <바람과 모래>, <중국 여인의 연대기> - Capricci, 2012. <광기가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세 자매> - Arte Editions, 2015. <타앙 - 경계의 사람들> - Arte Editions, 2017. <비터 머니> - Arte Editions, 2018. <사령혼: 죽은 넋> - Arte Editions, 2019. <미세스 팡> - Potemkine Films, 2020. <철서구> - Ad Vitam,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