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혁명을 예고한, 아름다운 파업
프랑스 정부와 사측을 굴복시킨 생나제르 파업 노조와 시민들
프랑스 68혁명 1년 전인 1967년, 역사상 최대 파업 운동이 일어났다. 한 도시의 주민 6만 3,000명 중 약 5만명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또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생나제르의 모든 노동자들이 뭉쳤을 뿐만 아니라 시민까지 동참했던 강력한 연대가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이들의 공동 목적은 오로지 승리였다.
5월 1일, 한 여자아이가 사람들에게 은방울꽃을 나누어 주며 시위대 군중 사이로 돌아다닌다. 그리고 레오 페레가 부른 시인 아라공의 ‘붉은 포스터(L’Affiche rouge)’ 노래가 확성기에서 흘러나온다.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마르셀 트릴라는 고된 얼굴에 드러난 감동을 포착하여 흑백 영상에 담는다. 노동총연맹(CGT), 노동총연맹-노동자의 힘(CGT-FO), 그리고 민주프랑스노동연맹(CFDT), 이 노조 통일 전선이 70일간의 파업 끝에 결국 정부와 사측을 굴복시킨 역사적인 날이다.
이 역사적인 장소는 바로 프랑스 서부의 항구도시 생나제르이다. 조선소, 항공기 제작사, 선박 수리 회사인 포르즈 드 루에스트(Forges de l’Ouest) 금속 노동자들은 1967년 이곳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1936년 이래 최장기간 생나제르 공장들의 가동을 멈추었다.
파리에서 출발한 기차가 그해 5월 1일 오후 4시 23분 역에 들어서자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행렬이 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노조 대표를 환대하면서 은방울꽃을 선사하고 시청 광장 입구까지 동행했다. 광장에서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한 명씩 마이크를 잡았다. 이제 CFDT 지역 대표 루이 모리스의 목소리가 숨죽이고 있는 군중들 사이로 울려 퍼졌다. “사측은 우리의 저력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조직을 보강할 것이며 노조의 힘을 강화하여 사측을 압도할 것입니다”라고 비장한 어조로 외쳤다. 생나제르 조선소의 동료이자 CGT의 대표 장 르퀴르는 군중의 경외감 어린 눈빛을 바라보며 “여러분은 2달간 파업을 이끌며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진정 깨어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라고 찬사를 보냈다.
‘더 나은 삶’. 오랜 기간 바람에 나부끼는 현수막에 내걸렸던 이 표어는 당시 시대의 열망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수백만 노동자들은 전후 “영광의 30년”을 재건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여전히 고된 노동, 과중한 업무시간에 시달렸고 낮은 급여마저도 체불되기 일쑤였다. 국가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했음을 깨달은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정당한 몫을 요구했다. 북부, 동부의 철광 및 탄광 광부에 이어 베니시유에 있는 베르리에 자동차 공장 그리고 브장송 지역의 로디아세타 섬유 공장의 블루칼라도 사측에 유리한 편향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 조르주 퐁피두 정부에 항거하기 위해 파업에 돌입했다. 이미 몇 년 동안이나 임금 협상은 진척이 없었다. 노동자들의 분노가 차올랐다.
서부 지역의 경우 ‘월급제 노동자’에서부터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사무직원, 기술자, 설계사, 중간 관리직은 월급을 받는 ‘화이트칼라’ 신세대 노동자들로, 시급을 받는 블루칼라와는 달랐다. ‘월급제 노동자들’은 보상 없이 책임감만 가중되는 데 불만을 품어왔다. 결국 제자리걸음만 하던 이들의 급여 인상을 위해 CGT, CFDT, CGT-FO는 1966년 역사적인 협약서를 체결했다.
서부 금속가공업 노조 단체들은 위장도급 폐지, 최저임금 600프랑 보장, 시급제 노동자의 월급제 노동자 전환과 같은 내용을 담은 요구서를 작성했다. 더불어 파리 지역 노동자를 기준으로 체불된 임금의 인상을 요구했는데 당시 사측은 업무의 자동화, 현대화를 이유로 임금 지급을 미루어 1967년 월급제 노동자의 임금체불률은 16%나 되었다.
화이트칼라 노동자 95%의 파업에 블루칼라도 동참
이들의 요구에 반응이 없자 생나제르 월급제 노동자 노조는 1967년 1월 17일 경고의 의미로 첫 번째 ‘시한부 파업’(24시간)에 들어갔다. 하지만 조선소의 경영진들이 ‘부하’라고 칭했던 직원들이 근무지를 이탈하여 팡오에에 있는 작업장 앞을 점거하자 임원들은 황당하다는 듯 아예 귀를 닫았다. 그러자 노조는 그해 3월 1일 총파업을 시작했다. 조선소의 월급제 노동자 2천여 명은 작업장과 사무실을 떠났으며 항공기 제작사 쉬드 아비아시옹, 선박 수리 업체 포르지 루에스트, 그리고 생나제르 철판 제조 업체의 근로자 1천여 명도 뒤따랐다. 결국 생나제르의 월급제 노동자 95%가 파업에 동참했다.
같은 해 3월 20일 조선소 경영진은 강압적 수단을 동원하기로 결정하고 공장 폐쇄(lock out)를 공포했다. 사측은 6천여 시급제 노동자들의 근무를 중단시키고 급여도 지불하지 않았다. 시급제 노동자들을 경제적으로 압박하면 이들이 월급제 노동자들에게서 등을 돌릴 것으로 기대해서였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시급제 노동자들은 오히려 공장 폐쇄 기간을 공격을 감행하는 기회로 삼았다. 이제 블루칼라 대열이 한창 파업 중이었던 월급제 노동자들에 합류했다.
사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조선소의 화이트칼라는 주로 블루칼라의 아들, 딸이었다. 월급제 금속 노동자 CFDT의 대표 루이 모리스는 “우리는 노조가 익숙한 환경에서 자랐다. 특별한 분위기가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그는 어렸을 때 1955년 대규모 파업에 동참하고 금속 노동자들 사이에서 포악하기로 소문났던 경찰에 맞서 싸웠던 조선소 용접공 아버지를 존경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을 두려워했던 프랑스 정부는 생나제르에서 온갖 탄압적 수단을 동원했고 이 도시는 ‘폭력의 도시’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
노동자들의 저항이 거센 이 도시의 공장들은 매일 같이 가동이 중단되거나 설비가 파손되었다. ‘공장 가동을 막는 점유자, 파업을 일으키는 직원, 이들과 대치 중인 경찰’ 모두가 미움을 사기도 했다.(1) 당황한 프랑스 정부는 1967년 1월 골수 반노조주의자이자 전 파리 경찰서장이었던 모리스 파퐁을 항공기 제작사인 쉬드 아비아시옹의 파업 현장에 급히 보냈다. 모리스 파퐁은 1962년 노동총연맹(CGT)의 주도로 알제리 독립을 위한 행진 행사 중 샤론느 지하철 역에서 벌어진 경찰 살해 사건의 수사를 지휘했었다.
낭트에서 출발한 프랑스 국립 경찰(CSR)의 시위 진압 차량이 생나제르에 도착했을 때 언론들은 폭력적인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 예상하고 달려갔다. 그러나 예상 밖이었다. CGT의 회보에 인용된 한 기자의 증언에 의하면, “설계사, 금속 노동자들 사이에서 놀라운 전략가들이 나타났다. 워키토키로 파업 노동자들은 적의 무리를 교란시켰다. 마치 쥐를 잡으려는 고양이를 보는 듯했다. CSR은 그림자 뒤를 쫓다가 놓치고 허둥지둥하다가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거나 시위대 무리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껴 있기도 했다.”(2)
게다가 시민들이 연대하여 파업 시위자들을 경찰의 폭력으로부터 보호했다. 미용사들은 무료로 면도 서비스를 제공했고, 상점들은 외상을 주었으며 어부들은 생선을 나누어 주었다. 아울러 임대인들은 임대료를 분할 납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시의 공과금도 분할 납부가 가능했다. 브리에르 국립 공원에서 파업 노동자들을 위한 피크닉 행사를 열기도 했고, 카지노 앞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부르주아를 겁주며 놀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파업 시위대로 향한 감동의 후원 모금 행렬
그리고 일부 언론사도 파업에 동조하기도 했다. 그해 4월 12일 <르몽드>지는 “도시 전체가 조선소와 쉬드 아비아시옹 공장에 기대어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름 한 철 관광 수입이 있기는 하지만 미미한 수준이다. 게다가 봄철 어쩔 수 없이 영업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힘들고 긴 겨울을 견뎌야 할 것이다. 생나제르의 호텔 종사자, 카페 사장, 택시 운전기사 상인들은 이 상황을 잘 알고 있지만 그들의 영업장 앞으로 행진하여, 교차로를 점령하고 CRS와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파업 시위대의 정당한 권리에 대해 토를 달지 않는다.”라고 보도했다.
드디어 프랑스 전역이 점차 생나제르의 파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4월 11일부터 5일간 아브르, 루앙, 로안느, 캬오흐, 몽펠리에, 툴루즈를 거치며 후원 자금 모금을 위한 ‘프랑스 전국 투어’가 시작됐다. 여러 업체에서 이 모금 활동을 위한 차량과 운전기사를 지원했다. 물론 이런 지역 차원의 연대가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결국 280만 프랑을 모금했는데 파업 노동자 한 사람당 당시 타이피스트 한 달 월급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3) 그러나 데카즈빌의 광부들(몇 년 전 장기 파업 중 생나제르로 자녀들을 보내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한 바 있다)과 생테티엔의 공공임대주택 주민들은 이 ‘순례자’들에게 따뜻한 숙식을 제공했고 파업 시위에도 힘을 보탰다. 모니크 모리스는 “모금 투어를 떠났던 사람들은 모두 감동을 받고 돌아왔다”고 회상했다.
5만 명의 노조와 시민이 이루어낸 ‘인간 띠’ 행진
루이 모리스가 단상에 올라가 파업 시위대를 이끄는 동안 그의 아내는 작은 아파트에서 두 아이를 돌보고 살림을 꾸려야 했다. 그녀는 “물론 쉽지 않았다. 그러나 파업 지원 기금과 가족, 주변 상인들이 도와준 덕분에 극복할 수 있었다. 시위가 끝난 저녁에 이들이 문 앞에 닭을 한 마리씩 두곤 했다”라고 미소 지으며 추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모니크 모리스는 가족 인민 협회 소속 여성들과 함께 생활고를 겪는 가족들을 지원하고 파업 지지 시위를 주관했다. 그녀는 겸손하게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했다. 1967년 3월 21일 3천 명의 여성들이 노동자들의 박수 세례를 받으며 행렬했다. 그리고 4월 6일 행렬에 가담한 여성 수는 5천 명에 달했다. 80대의 나이에도 여전히 총명한 눈빛을 가지고 있는 모리스는 “생나제르는 그 어느 때보다 생동감 있었다”라고 회상했다.
물론 두려운 순간도 있었다. 루이 모리스가 협상을 위해 파리로 출장을 가서 집을 비웠던 어느 날 밤, 조선소 경영진이 보낸 엔지니어 한 무리가 찾아와 겁박했다. 아이들은 바로 옆 방에서 자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오히려 사측이 곤경에 처했다는 증거였고 이들의 약점을 드러냈을 뿐이었다.
경영진은 파업 52일째 날 임금 3.35% 인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파업 노동자와 공장 폐쇄로 무급 휴직 중이었던 노동자 87%가 이 제안을 거절했다. 노조는 16% 인상을 고수했으며 이 중 8%는 즉각 인상해 줄 것을 요구했다. 결국 파업은 루아르 아틀란티크 전역으로 번졌다. 4월 27일 노사 협상이 한창 진행되던 와중에 프랑스 언론은 생나제르 거리 곳곳에 나타난 ’인간띠‘를 보도했다. 약 5만 명의 사람들이 ‘샹젤리제만큼 긴 도로를 가득 메워’ 행진했다.(4)
“민초의 승리였다”
프랑스 정부는 노동자 저항 운동이 확산될까 우려했다. 결국 5월 1일 새벽, 40시간의 협상, 62일간의 파업, 그리고 43일간의 공장 폐쇄 끝에 노조와 사측은 합의에 이르렀다. 월급제 근로자는 임금 16% 인상을 위한 첫 단계로 연간 임금 인상률 7.35%와 직업전환 재교육 요구를 통과시켰다. 그리고 그 전날 생나제르의 조선소 시급제 노동자 노조는 월급제 노동자와 동일한 임금 인상, 근속 수당, 휴가 수당, 기본급에 상여금 추가(업무에 따른 인센티브)를 명시한 합의서를 체결했다.
노동자들이 역사적 진보를 이룬 날이었다. 다른 기업의 시간제 노동자들도 임금 인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급제 노동자와 월급제 노동자 간 지위 평등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고 4년 후 최종 합의를 도출했다. 또한 ‘부하’라는 용어를 폐기함으로써 앞으로 사주가 어떠한 야심을 품지 못하게 막으려 했다.
생나제르는 노조 통합 전선의 상징이 되었다. 루이 모리스는 그해 5월 1일 연설에서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우리의 힘을 증명했고 사측의 저항에도 굴하지 않았다. 우리가 장애물을 뛰어넘은 것이다. 경이롭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민초의 승리였다. 노조의 투쟁으로 사주를 굴복시키는 쾌거를 이루었다”라고 강조했다.
5월 4일 월요일 시민들의 환대 속에 파업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혁명가 ‘인터내셔널가(L’international)’를 부르면서 행진했는데, 이 노래는 마치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을 부르는 듯했다. 생나제르의 파업은 1968년 혁명을 예고하고 있었다. <프랑스 공영 방송국(ORTF)>은 마르셀 트리아와 위베르 크나프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생나제르에서의 1967년 5월 1일>의 상영을 금지했다. 금속 노동자의 승전 소식이 더 이상 퍼지는 것을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트리아는 윗도리에 필름을 숨겨서 몇 개 중요한 장면들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35년이 지난 2002년 생나제르로 돌아와 <프롤레타리아(les Prolos)>를 상영했다. 이제 ‘노동자 계급’은 사라질 것이라는 믿음이 만연해졌다. 그러나 그의 카메라가 선박 화물창 깊숙한 곳에서 이 노동자들을 꺼내어 보였다. 이 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임시직과 하청업자들이 겪는 참상을 목도할 수 있다.
“현대 대기업들은 이런 임시직과 하청과 같은 무기를 활용하여 요동치는 시장에 대처하고 노동자들이 쟁취한 사회 보호막을 무력화시켜버리고 있다.”
글·뱅자맹 페르난데즈 Benjamin Fernandez
저널리스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와 <프랑스 앵테르>, <RFI> 등에 기고하고 있다.
번역·정수임
번역위원
(1) Jean Peneff ‘Autographies de militans ouvriers 노동 투쟁가의 자서전’ <프랑스 정치학>, 29주년, 1호, Paris, 1979년.
(2) 생나제르 지역 노동자 운동 연구 협회에서 인용, 『Histoire ouvrière et mémoire populaire 노동자 역사와 인민의 기억』, 제5호, Editions du Petit Pavé, Brissac-Loire-Aubance, 2021년.
(3) ‘Un printemps sur l’estuaire. Saint-Nazaire, la CFDT au coeur des luttes. 1945~1975 강하구의 봄. 생나제르, 투쟁 중심에 있는 민주프랑스노동연맹. 1945~1975’, Éditions du Centre d’histoire du travail, Nantes, 2005년.
(4) 『Histoire ouvrière et mémoire populaire 노동자 역사와 인민의 기억』, op.c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