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두 사랑, 로사와 룩셈부르크

연극 <단순 과거>

2024-05-31     크로스토프 고비 | 작가

“나에겐 두 사랑이 있다. 로사와 룩셈부르크.” 하얀색 민소매 티셔츠 차림에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쓴 파코는 이렇게 흥얼거렸다. 그는 마르세유의 선박 수리 회사 레파(Répa)에서 해고된 전직 금속가공 기술자이다.

현실에서 파코의 본명은 제라르 지오반젤리이다. 실제 존재와 허구의 조각들로 자신의 분신이자 혈육인 파코를 창조했다. 1950년대에 태어난 그는 청소년기에 68혁명을 온몸으로 맞이했다. 그는 마르세유 블랑키 거리에 위치한 아파트 거실에서 연극을 공연했다. 그는 정확한 마르세유 사투리와 표현들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과하진 않았다. 그는 라디오를 듣고 거짓말쟁이라고 불평했다. “수치스러운 기자들!”

그는 과거, 결혼, 거처, 노조 지부에서 만난 로사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서대와 정어리 떼가 가득한 부두 위에서 올린 결혼식은 마르세유인들의 꿈이었다. 로베르 게디기앙의 결혼식처럼 말이다. 노래를 불렀다. “붉은 깃발(Le Drapeau rouge), 몽테위스의 노래 청년 근위대(la Jeune Garde).” 그러면서 미구엘 알메레이다가 조직한 무장 근위대에 대해서 생각했다. 미구엘 알메레이다는 무정부주의자들의 리더였고, <라 게르 소시알>지의 기자였으며, 전쟁 바로 직전에는 카멜롯 뒤 루아(극우 왕당파 조직 : 역주)와 싸웠었다.

민중가요 랑테르나시오날(L’Internationale)은 우리를 위한 미사였다. 이 노래는 시위나 장례식에서만 불렸다. 춤을 출 때에는 프랑스 가요와 미국의 유행가를 틀었다. 여흥을 즐기기에는 성모 찬송가보다 나았다. 파코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제라르는 레파 회사에 다니던 시절 정치적 경험을 쌓았기 때문이다. ‘1968년 크리스티앙 가르니에와 함께 티에르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17살의 나는 마오주의-자발주의자(Mao spontex)였다.’ 최근에 고인이 된 크리스티앙 가르니에는 마르세유에서 유명한 활동가였다. 그도 노동자 계급의 대표적인 활동가였다. 제라르는 약간 묘했다.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 진학에 성공했지만, 본인이 어디 출신인지 기억하는 사람.

파코는 60m 높이의 청동으로 된 선박 추진기에 대해서 열성적으로 이야기했다. 청동세공인, 용접공 모두 지루한 작업을 반복해야 하는 직업이다. ‘우리는 전성기를 지나 녹슨 나이였지만 존중받았다.’ 우리는 30m² 규모의 1층에서 작업하다가, 갑자기 선창 아래로 떨어졌다. 라이베리아 유조선 Olympic Honour호에서 참사가 일어났다. 당시 작업장에서 31명이 부상당하고 7명이 사망했다. 우리에게 극우 정당 국회의원이 된 아들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었다.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 소속인 가스통 데페르가 시장으로 선출된 마르세유에서 극우 국회의원이 된 것은 정당과 노동총연맹(CGT)의 멤버 모두에게 수치였다. 부에나벤투라로 불리던 아들이었다. 1936년 마드리드 근처에서 살해당한 스페인 혁명가 부에나벤투라 두루티처럼 말이다. 

그 아들이 반대 진영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파코는 아들을 노동자 조직에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아들은 파리 억양을 쓰고, 부르주아와 교류하며 완전히 배신했다. 아들은 법을 전공했고, 우파가 되었다. 파코는 스탈린의 독재체제에 대한 비판을 피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과연 항구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파코는 학교에 다니지 못한 프롤레타리아를 옹호했지만, 사람들은 헨리 크라수키의 말투를 비웃었다. 1924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헨리 크라수키는 1928년 프랑스로 이주했다. 그는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적도 있고, FTP MOI(공산주의 레지스탕스 부대 : 역주)의 레지스탕스였고, 노동총연맹(CGT) 사무총장을 지냈다. ‘그가 왜 수용소를 떠나기 전에 불어 동사 변화표와 불어사전을 가져오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68혁명을 겪은 세대답게, 제라르도 노동총연맹(CGT)의 선배들, 레지스탕스 선배들과 대립했다. 두 세대는 공동의 적이 있음에도 서로 대립했다.

 

과거와 현재의 사회정치적 문제들을 연결하는 진정한 가교

어느 날 갑자기, 현금인출기 앞에서 가방을 뺏기고 로사가 사망했다. 파코의 인생은 달라졌다. 그는 강도가 아니라 돈을 탓했다. 이 모든 비극의 책임자는 본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현금인출기와 은행의 현금수송차량을 공격했다. 재판에서 관대한 판결을 받아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유세프를 만났다. 유세프와 그는 친구가 되었고, 유세프는 우리에게 도시에서 아랍인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이야기했다. woke(‘각성한, 깨어있는’라는 단어로, 인종차별 등의 사회적 불의를 인식하고 있다는 의미. 현재 보수 진영서는 조롱의 의미로도 쓴다-역주)에 대해서도 피상적으로 이야기했다. “각성, 될 대로 되겠지”라고 농담도 했다. 이 희곡은 과거와 현재의 사회정치적 문제들을 연결하는 진정한 가교이기 때문이다. 그는 몇몇 표현들을 후회했다. ‘이 표현들이 결국은 누군가를 아프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좀 더 완곡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우리는 수다쟁이가 아니다...’ 노동자 문학인 이 희곡은 사회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그리고 제라르는 바다 위의 튜브와도 같은 말장난을 사용했다. 반인종차별 이야기는 더 이상 반파시즘 난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독일, 영국, 이탈리아의 크루즈 관광객들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피임법까지 이야기가 나왔다. 중·고등학생이나 할 법한 농담이지만 여전히 마르세유에서는 통한다. 제라르 지오반젤리는 이 희곡을 15일 만에 썼다. 1968년 이후, 그는 6년 동안 항구에 있는 레파 회사에서 일했다. ‘레파가 은신처였다.’ 노조는 CGT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은 혁명비밀행동위원회 멤버였다. 그는 ‘작업장보다는 부두에서 주로 일했다. 녹초가 되면 밧줄에 묶인 채 한숨 잤다.’ 그는 수당이 올라가는 몇 시간의 야간작업을 선호했다. 석유파동이 일어나고 회사가 모든 노동자를 해고했을 때, 그는 체제 속에서 망가진 이들을 모두 고용하며 동화시키는 책임자가 되었다.

모든 올바른 활동가들에게 헌정하기 위해 제라르는 노동자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이 희곡을 썼다. 그는 그들이 풍자의 대상이라고 말했다. 아들이 티에르 고등학교의 우수한 학생이었는데도, ‘나는 네가 넥타이 맨 모습을 보지 못했다.’라고 그의 코르시카인 아버지는 고백했다. 엔지니어가 되기로 했던 약속과 정치적 유산이 그를 민중 속으로 보냈다. 그것은 핏줄? 유산일까? 희곡을 공연하면서, 그는 즐기고 감동하며, 잊지 않는다.

 

 

글·크로스토프 고비 Christophe Goby
작가

번역·김영란
번역위원


※ 마르세유의 한 아파트에서 극작가 제라르 지오반젤리가 크자르와 함께 연극 <단순 과거(Un Passé Simple)>를 공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