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성의 시네마 크리티크] 납작한 어둠 <존 오브 인터레스트>

2024-06-10     정우성(영화평론가)

영화가 시작되면 꽤 오랜 시간 검은 화면을 비춘다. 이 어둠의 정체는 일종의 애도 혹은 앞으로 진행될 영화를 암시하는 장치로 읽을 수 있다. 홀로코스트를 묘사하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오프닝부터 검은 화면을 선언하듯 길게 보여주는 장면처럼 선명한 태도의 영화이다. 이 선명성은 단순한 개념적 구성에서 나온다. 소리만 들리는 검은 화면처럼, 영화 내에서 일어나는 핵심 사건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그것을 소리로만 전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검은 화면을 비추는 것은 아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바로 앞에 자리한 주택가의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면서 담벼락 넘어 벌어지는 끔찍한 학살을 보여주지 않고 들려주기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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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상태로 감상하기 시작했어도, 영화의 초반부가 지나면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곳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이며 그곳의 소장인 루돌프 회스(크리스티안 프리델)와 그의 가족에 관한 영화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영화가 의도하는 개념과 구성을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끊임없이 외화면에서 들려오는 총소리, 고함, 비명은 회스 가족의 일상적 풍경이 평범하지 않음을 감각적으로 이해시킨다.

즉 제노사이드의 참상을 소리로 들으며 지내는 평범한 가족의 하루하루를 보는 것은 그로테스크한 일이며, ‘악의 평범성’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개념처럼,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고 무관심한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구역질나는 것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영화 속에 나열되는 여러 에피소드는 이러한 의도를 반복하고 있다. 동생을 온실에 가두는 형의 모습, 밤마다 이상행동을 보이는 딸, 가족들 몰래 집으로 돌아가 버린 회스 부인의 어머니는 물론, 가까이서 비추는 꽃 이미지, 아름답게 가꿔진 정원과 담장 넘어 보이는 연기와의 대비, 기괴한 음악, 네거티브 필름룩 장면 속 소녀의 행동들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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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적으로 잘 배치된 깔끔하고 안정적인 화면의 미적 구성처럼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매우 투명하게 영화의 의도와 미적 전략을 드러낸다. 이것은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너무 납작하다. 선명한 것은 좋지만 그 투명함에서 발생하는 감흥과 감각이 단순하고 도식적이다. 모호하고 다층적인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빛 아래 모든 그림자를 지워버리듯 비정상적으로, 과도하게 선명하다.

예컨대 엔딩 시퀀스를 보자. 루돌프 회스가 구토를 하는 장면과 현재 시점에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주립 박물관을 연결시킨다. 루돌프가 왜 구토를 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죄책감 때문인지, 정말로 건강이 나빠졌는지, 거대한 프로젝트를 앞둔 긴장감 혹은 기대감 때문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저지른 범죄를 증명하는 박물관의 현재 모습이 나올 때 루돌프가 구토하는 행위의 원인은 더는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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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더 스킨>(2013)에서 인간 형태의 피부를 벗기자 검은 형체가 드러날 때 관객이 느끼는 당혹감과 다층적 감흥이 발산하는 것과는 반대로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검은 화면이라는 하나의 구멍으로 모든 것을 수렴시킨다. 어둠 위로 울려 퍼지는 충격적인 비명 앞에 모든 것은 중단된다. 이것은 단순히 홀로코스트라는 거대하고 민감한 소재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매우 복잡한 인간과 사회의 여러 모습을 비추는 역사의 비극을 개념적 틀로 단순화하여 발생한 문제에 가깝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아우슈비츠의 학살 행위를 시각적으로 재현하지 않고, 학살을 저지른 인간들의 일상만을 기계적으로 비추며 악의 평범성과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무관심한 인간의 한 면을 그리는 것은 그 자체로 괜찮은 아이디어다. 그리고 그것을 아이디어에 그치지 않고 기이함과 불쾌함을 전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시작부터 끝까지 말이다. 네거티브 필름룩의 장면들이나 붉은 화면과 같이 영화 속에 갑자기 출몰하는 장면들은, 영화 구조를 구성하는 한 기둥을 담당하는 역할이 아닌 앙상한 형식미를 조금이라도 가리기 위한 불필요한 장식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런 이 영화를 많은 이들이 그것뿐이어도 충분하다고 말하지만, 전혀 만족스럽지 않고 그저 영화의 단순함, 도식성, 납작함이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글·정우성
2021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받았다. 현재 예술강사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