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왕조, 요르단

2012-08-13     아나 자베르

요르단에서도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르웨입데에서 허름한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나데르는 평범한 식당 주인이 아니다. 그는 유명한 연극인이다. "자, 여기가 바로 문화를 잉태하는 곳이다. 코샤리(이집트의 대중 음식)를 팔아서 연극을 할 수 있으니까." 식당 안 분위기는 활기차다. 전 터키 대통령 벤 알리의 연설을 패러디한 연극 <이제 당신을 이해하겠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압둘라 2세는 몸소 이 연극에 참여했다. "압둘라 2세를 초대해 코샤리 한 접시 대접하세요, 아마 그를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데르에게 농담을 던진다.

"요르단 왕조는 압둘라로 시작해 압둘라로 끝날 것이다." 하심 왕권(1)에 대한 극렬 반대자들은 농담 삼아 이런 예언을 하곤 했다. 그러나 이들은 1999년 겨울 후세인 왕이 죽은 뒤 아들 압둘라 2세가 즉위하는 급작스러운 '사태'를 목도하게 되었다. 사실 예언은 후세인의 아버지이자 요르단 왕조를 창건한 압둘라 1세의 1951년 암살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지난 수십 년간 요르단 사회는 상대적으로 혼란이 줄면서 안정된 모습을 보여왔지만, 아랍 혁명에 즈음해 이 오래된 예언은 불길한 전조로 사람들 입에 다시 오르내리고 있다.

그간 압둘라 2세와 국민 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예상한 바대로 '서로에 대한 무관심'이라고 할 수 있다. 압둘라 2세는 즉위 이후 그가 영국식 교육을 받았다는 것, 대중과 친근하지 못하다는 것, 그의 대국민 발언은 대부분 세계은행이나 백악관의 입장을 그대로 따라가기만 하는 것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호전적 태도와 2003년 부시의 이라크전 때 보여준 편파적 친미 행보는 국민과의 거리를 더욱 멀게 만들었다. '이 왕은 이 나라에 사는 국민인 우리와 전혀 소통하지 않는다. 우리를 통해 미국인들에게 말한다'는 원성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요르단을 우선으로', '우리는 모두 요르단이다'와 같이 정권이 내세운 슬로건의 통합 효과는 전혀 왕에게 득이 되고 있지 않다. 게다가 왕이 횡령에 몰두하고 채무가 상당하다는 치명적인 소문이 돌고 있다. 사실이든 거짓이든 '사회적 상상' 속에서 사실처럼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요르단 사회의 위기는 왕이라는 개인 차원을 넘어선다. 왕조의 창건 이후 역사는 계속 반복되고 있다. 즉 지역 전쟁과 인구 충격, 그리고 인구 유입이라는 역사의 되풀이다. 1948년 이스라엘과 아랍 간의 1차 전쟁으로 요르단 서안과 예루살렘 동부의 병합이 있었다. 1967년에는 이스라엘이 이 지역을 탈환하면서 영토를 잃게 되었고, 수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유입됐다. 또다시 1990∼91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과 전쟁으로 수만 명의 팔레스타인 주민이 이라크에서 유입됐다. 2003년에도 역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있었고, 이로 인해 수만 명의 이라크인들이 요르단 왕국으로 넘어왔다. 1970∼71년 하심 정권과 팔레스타인 저항조직 간의 대치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도 빠트릴 수 없다. 요르단 정부는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매번 같은 식으로 대응했다. 위에서는 서방 및 걸프만 국가들로부터 왕실 생존에 필요한 국제 원조를 받고, 아래로는 가족 연대와 사회적 유대망, 지리적 접근성에 의존해 외부로부터의 변화를 최소화하려 했다.

이제 이런 식의 대응 수단은 유효하지 않다. 이전 후세인 왕이 국민 내의 간극, 특히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주민 간의 분열을 이용하고 요르단 남부의 불만을 잠재우던 수단으로 이용했던 국제 원조는 고갈됐다. 특히 걸프 지역 이주민들에 대한 지원금처럼 요르단 사회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계층(특히 팔레스타인 주민)의 삶을 보장하던 원유 수입은 값싼 아시아인 노동자가 아랍 이주민을 대체하며 바닥났다. 무제한적인 민영화, 특히 수도·통신·전기 분야의 민영화와 함께 요르단 여러 지역에서 면세지대가 생겨나면서 물가 상승을 부추겼다. 또 저렴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유입돼 지역 노동자들이 밀려나고 있다. 2003년 이후 부동산 투기 자본이 무분별하게 유입되면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함과 동시에 중산층을 피폐화했고, 상위 자본의 이익을 위해 주변부를 소외시켰다.

추락하는 권위

사회는 약화됐다. 그리고 '아랍의 봄'이 시작되기 전 이미 요르단의 사회 위기는 표출되고 있었다. 1989년 만(Mann)에서 시위가 일어나 전국으로 확산되자 군대법이 폐지되고 의회 및 지자체 선거를 시행하게 되었다. 또한 몇 년 전부터 검열에도 불구하고 권력 부패 사건이 주기적으로 공개되고 있다. 가장 최근에는 하자야 부족이 공동 소유하던 하자야 땅을 '재투자 설비'라는 명목으로 몰수해 왕 개인의 명의로 등기해 국민의 분노를 사고 있다. 이래저래 왕궁의 위신은 계속 추락하고 있다.

과거 하심 왕이 점유하던 요르단 남부, 특히 타필레·케락·만에 이르는 삼각지대는 이제 정권의 아킬레스건이 되었다. 두 개의 주요 반정부단체인 '36부족연합'과 '국가주도'(National Initiative)가 이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구속 사유가 될 수 있는 각종 회의와 시위, 공권력과의 충돌, 왕조 모독죄에 해당하는 반정부 활동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하자야 땅 반환이라는 36부족연합의 주요 요구는 '디완'(왕실을 일컬음)이 부족들을 무시한 데 대한 답이다. 타필레의 저항운동가 야세르 무하이센은 "지금은 민원을 넣으려면 부족장이 왕궁 앞에서 줄을 서야 한다. 후세인 왕 때도 이런 모욕은 없었다"고 말한다.

아랍 민족주의를 계승한 '국가주도'는 사회질서라는 명분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 따라서 교사 파업, 우체국 직원 파업 등을 주도한다.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해의 가성칼륨 공장 노동자들은 캐나다 기업의 공장 인수를 막기 위해 집결했다. 이 단체의 회원이자 변호사인 와다흐는 "아카바 면세지대는 우리의 이익을 위한 것이어야 했는데, 전혀 그렇지 못했다. 지금 그들은 케락 주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자리 창출원을 헐값에 넘기려 한다. 캐나다 공장이 우리 대신 아시아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것을 무슨 수로 막을 것인가?"라고 말한다.

부족들의 분노와 일부 트랜스 요르단 가문이 하심 정권에 갖고 있는 역사적 적대감과 함께, 좀더 북쪽에서는 '무슬림형제단'과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압력도 가중되고 있다.

주목할 점은 대부분 팔레스타인 주민이 살고 있는 마을들, 특히 피란민 캠프 등은 조용하다는 것이다. 한 여성은 이렇게 일축한다. "그건 요르단 사람들 문제죠.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이곳 사람들은 자신의 일이 아닌 역사에 대해 그저 구경꾼이다. 그들은 그 역사를 가까이서, 유심히, 비판적으로 따라가고 있지만 체념적이다. 그들은 튀니지와 이집트의 사건들에 대해 대리 승리감을 느끼고, 시리아의 진압과 가자지구 내 이스라엘군의 진압을 비교한다. "최악이지요. 바샤르가 자국민을 학살하다니 말입니다." 아부 아나스는 분노한다. 반면 그의 형제 아부 오마르는 이 혼돈 속에서 미국의 보이지 않는 손을 의심한다. "반군 세력이 카타르의 지지를 얻고 워싱턴의 인가를 얻는 혁명은 도대체 뭐죠?"

그러나 지배적 정치조직들에 대한 반감도 형성되고 있다. 심지어 시리아 봉기에 관해, 팔레스타인 하마스의 지도자 칼레드 메샬의 변절을 조롱하기까지 한다. 칼레드 메샬은 시리아 정권에 대한 신의를 확인시킨 뒤, 정작 카타르에 도착하자 정권과는 거리를 두면서 오히려 무슬림형제단의 입장에 줄을 섰다. 마찬가지로 요르단 압둘라 2세의 워싱턴 방문이 있은 지 며칠 뒤인 지난 1월 카타르가 보낸 특사와 메샬, 그리고 압둘라 2세 간에 이루어진 회동으로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요르단에 안착시키고 그 비용은 카타르가 부담하기로 한 결정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아부 오마르는 묻는다. "카타르가 보낸 특사와 요르단 왕을 만난 뒤 시리아를 떠나 가자로 들어가려는 정치 지도자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왕만 모르는 왕조의 위기

무슬림형제단은 불만이 팽배한 바닥 민심을 얻어 지배적인 정치세력으로 자리잡으려 한다. 이런 시도가 마찰이 없을 수는 없다. 정부, 각 부족들(특히 2011년 12월 마프라크의 바니 하산 부족과 마찰)뿐 아니라 다른 여러 반정부 단체들과도 마찰을 빚고 있다. '국가주도' 단체와 가까운 기자인 칼릴은 신랄하게 말한다. "그들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들은 민중의 요구를 가져가서 민중을 위한다고 떠들어댄다. 그러고 나서 말과는 다른 계획을 사람들에게 지시한다. 우리가 내무부 장관 앞에서 집회를 조직하면 그들은 같은 시각에 시리아 대사관 앞에서 다른 집회를 연다. 저항운동의 주도권을 가로채기 위해 공격하는 것이다. 그 목적이 이슬람주의자들의 권력 진출을 위해서라면 전혀 반갑지 않다." 40년간 변호사로 일해온 아셈은 같은 상황을 다르게 본다. "그 사람들, 이슬람주의자들을 잘 알고 있다. 나의 아버지도 이슬람주의자였다. 요르단에서 이들의 역사는 다른 나라들의 상황과는 다르다. 권력은 늘 이슬람주의자들을 기반으로 했고, 이슬람주의자들도 늘 권력과 연결돼 있었다. 반대의 자유 진영이 갖지 못한 지역적·국제적 역량을 이들은 갖고 있다. 결국 이슬람주의자들은 권력을 형성해야 하고, 그들은 성공하지 못한다면 도태될 것이다. 뭐가 문제인가?"

그러나 요르단 사회 전반에서 일고 있는 변화에 대한 열기와 미래에 대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불확실성은 여전히 높다. 왕실은 왕조를 위협하는 주요한 위험을 가장 의식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바로 분열이다. 고위 장성 3명과 함께 왕조 창건의 일원이던 자말은 몇 년 전부터 체제와 분쟁을 빚고 있다. 그는 요르단 전체를 누비고 다니며 모든 단체와 부족장, 국내 및 국제 정계의 유력 인사들을 만나고 있다. 국회가 정부를 지명하는 영국 왕실의 모델을 딴 헌법 개헌 논의에 참여토록 하기 위해서다. "국가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 국민에게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줘야 한다. 다른 해결 방안은 너무 많은 비용을 치를 것이다. 하심 왕족들이 점차 건전성을 잃고 있고, 왕은 주변을 거의 족벌체제로 만들어놨기 때문에 그를 다른 형제로 대치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중략) 공화국은 왜 해야 하는가? 왕조 안에 공화국이 존재한다는 개념은 국민을 안심시킨다. 시리아나 예멘과 같은 공화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라."

이런 와중에 요르단 왕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있지 못한 듯하다. 그는 약속한 개혁 시행을 늦추고, 정부와 의회, 사법부가 돌아가며 감추고 있으면서 부패의 실마리도 잡지 못하는 무능과 비효율이라며 매번 총리를 주기적으로 경질시킨다. 그는 시리아 체제의 운명을 곁눈질하며 저울질하고 있다. 그동안 석유와 전기 가격은 치솟고 있다.

처음 거리행진 때 시위자들에게 제공하던 커피는 이제 없다. 지금은 무엇보다 치안 문제가 최우선이다. 2011년 3월 25일 암만에서 공권력은 시위자들을 진압하고 심지어 병원까지 추적했다. 2011년 11월 람타에서 사건이 터졌다. 진압은 가혹했고, 이후 진압 체제는 더욱 강화됐다. 폭동을 진압하는 전경 수가 대폭 증가했다는 소식이다. 지난 5월 미국과 15개국이 합동해 벌인 '이거 라이온'(Eager Lion)이란 이름의 군사훈련은 군사력 증강의 시연장이었다. 군대와 정보기관 사이의 입장 차이에 대해서도 말이 나온다. 정보기관은 상대적으로 변화에 우호적이라는 것이다. 끊임없는 말과 말들. 그러나 말뿐인 약속으로는 더 이상 가망이 없음을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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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 자베르 Hana Jaber 콜레주 드 프랑스 아랍 현대사 석좌 연구원.

번역 | 박지현 sophile@gmil.com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위원. 남극보호연합(ASOC) 한국 어드바이저.

(1) 하심(Hachemite) 왕족은 헤다즈 출신의 가문으로 제1차 세계대전 뒤 대영제국이 트랜스 요르단과 이라크에서 왕으로 옹립했다. 이들은 이곳에서 왕국을 건설했다(1920~58).


요르단 왕실 약사

1946년 5월 영국 식민통치 종식. 요르단 하심 왕조 독립. 압둘라 1세 왕으로 선포.

1948년 요르단 서안 정복 뒤 왕조에 편입. 팔레스타인 난민 유입.

1967년 6월 이스라엘-아랍 전쟁. 이스라엘의 요르단 서안 정복으로 다시 난민들이 요르단 왕조로 유입.

1970~71년 '검은 9월단'. 팔레스타인 저항운동 진압과 축출.

1989년 4월 봉기가 일어나 전역으로 확대. 정치 자유화 요구.

1990~91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후세인 왕, 사담 후세인 지지. 팔레스타인 주민의 축출과 요르단으로 정착.

1999년 후세인 왕 사망. 아들 압둘라 2세가 계승.

2003년 압둘라 2세, 미국의 이라크 침공 지지.

2011년 2월 반정부 세력이 시위 조직.

2011년 3월 암만에서 시위자들에 대한 진압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