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한 방울만 섞여도 흑인이다!

미국 민주주의가 인종 테러를 자행하던 시절

2024-06-28     로이크 바캉 |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 사회학 교수

노예제 폐지로 백인과 흑인 간 평등이 명백히 확립된 나라에서 어떻게 인종차별 제도가 유지됐을까? 아래에 소개하는 로이크 바캉의 저서 『짐 크로우-미국 내 계급에 기인한 폭력』을 보면 권리와 정책이 잔인한 지배를 보장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민주주의의 천국인 척했던 나라에서 말이다.

 

 

‘짐 크로우’라는 표현은 당시 미국뿐 아니라 영국에서도 가장 사랑받는 코미디언 토머스 다트머스 대디 라이스(Thomas Dartmouth “Daddy” Rice)가 부른 1832년 댄스곡 제목에서 유래됐다. 민스트럴 쇼는 대농장에서 일하는 흑인의 특징을 희화화한 코미디 풍 공연으로, 짐 크로우는 이 쇼를 대표하는 캐릭터가 됐다. 이곳저곳 깁고 쭈글쭈글해진 옷을 입은 짐 크로우는 모자를 쥔 채 손짓을 하고 몸을 배배 꼬며 웃음을 유발했다. 또한 자칭 ‘에티오피아풍’으로 자신의 상황에 만족하는 노예의 노래를 불렀다.

 

짐 크로우 체제, 가장 폭력적인 ‘인종 격리’의 시기

미국 역사에는 대법원이 미국 남부에서의 합법적 ‘인종’ 분리 정책을 인정한 1896년부터 이 정책에 위헌 판결을 내린 1954년까지로 구분되는 ‘격리의 시대’가 있었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지칭할 때 ‘짐 크로우’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따라서 ‘짐 크로우’는 전쟁이 없던 근대에 가장 폭력적인 인종 지배 체제를 가리킨다.

짐 크로우 체제는 그 체제가 들어선 시기(20세기 격변기), 주도적으로 꽃피운 시기(1~2차 세계대전), 그리고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점진적으로 해체된 시기(2차 세계대전 이후 2세기)를 따라 변화해 갔다. 아메리카 연합(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링컨이 대선에서 승리하자 미국 남부의 6개 주가 연방 탈퇴를 선언하고 수립한 정부로 1861년 남북전쟁을 일으켰다-역주)에 속했던 12개 주에서는 버지니아(동부)와 북 캘리포니아(서부)에서 중요시했던 ‘예절’과, 미시시피(남부)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난 ‘폭력’이 극단적으로 드러났다. 플로리다(남동부), 조지아(남동부), 아칸소(남부) 같은 주는 앞서 특징이 두드러졌던 주들의 영향을 받는 정도가 각기 달랐다.

 

핏방울 규정, 노예 제도 폐지 이후에도 살아남아 

백인이 지배하는 이 체제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 체제의 기초가 된 분류 체계를 알아야 한다. 노예제 폐지 후 미국 남부에서는, 같은 흑인이라 하더라도 피부색의 밝고 어두운 정도가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개별적 특성들이 증명하듯 노예 신분하에 일반적이었던 혼혈에도 불구하고, 법과 상식선에서 사람을 백인과 흑인(순수 흑인이든 혼혈이든) 두 가지로만 분류했다. 다른 인종으로 구성된 부모의 자녀는 외모, 지위, 다른 조상들의 인종적 정체성과 상관없이 자동으로 열등하게, 즉 흑인으로 분류됐다.

19세기 중반, 혼혈에 대한 반감이 집단 히스테리로 바뀌자 “핏방울”로 불리는 본 규정은 더 견고해졌다. 따라서 미국 남부 전역에 혼혈을 증오하는 민병대와 단체들이 조직됐다. 남부의 15개 주 중 14개 주는 핏방울 규정에서 변형된 규정을 기초로 ‘검둥이’의 인종적 지위를 확실히 정의하는 엄격한 법규들을 빠르게 채택했다.

플로리다에서는 주 헌법에 따라 흑인 피가 16분의 1이라도 섞이면 흑인으로 규정했다. 메릴랜드주와 미시시피주에서는 8분의 1, 켄터키주에서는 어느 정도든 “확인 가능한 양”의 흑인 피가 섞인 경우 흑인으로 정의했다. 아칸소주에서는 “혈관에 검둥이 피가 있는 자는 누구든” 그 사람에게 ‘검둥이’라는 단어를 적용했으며 앨라배마주에서는 흑백 혼혈을 검둥이로 분류했다.

그렇지만 이 방법은 혼혈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 자신들 고유의 인종적 정체성에 거의 확신하지 못했던 백인들은 (『팔월의 빛』과 『압살롬, 압살롬!』 같은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이 다룬) ‘드러나지 않는 검은색’에 대해 집착하게 됐다. 걱정이 너무 심해진 나머지 피부색이 어떻든 그 사람이 노예의 후손과 사귀었으면 아프리카계 조상이 있다는 증거가 없어도 흑인(이나 하얀 검둥이)으로 분류됐다. 1920년대부터는 인간이란 넘을 수 없는 피의 장벽이 나눈 백인과 흑인이라는 두 부류로 분리됐는데 그것도 남부의 여러 주에서는 아주 철저하게 적용됐다.

미국은 전 세계에서 핏방울 규정으로 흑인을 정의하는 유일한 나라가 됐다. 그런데도 흑백 이원론의 기저에 자리 잡은 피부색의 밝기 정도는 흑인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서 1940년대 미시시피의 여러 소도시에서는 밝은 피부가 경제, 사회, 성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미의 기준은 흰 피부였고 사회적 성공을 거둔 남성들은 ‘피부가 밝은’ 여성과 결혼하려고 애썼다.

노예제를 강화하기 위해 구상 및 제정한 핏방울 규정은 1865년 노예제가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백인은 흑인들의 몸, 그들의 충동, 실체, 체액에 수준이 낮아지는 본성이 있다고 믿었는데, 피의 순수성에 대한 절대성은 그러한 믿음 안에 뿌리를 내렸다. 노예제와 흑인의 특성을 연관 지어 만들어진 믿음이었다. 남북전쟁(1861~1865) 이후 백인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흑인이 노예 상태로 있을 때 이롭다고 판단되는 여러 제약에서 벗어날 경우 흑인은 야만적이고 짐승 같은 상태로 돌아갈 것이고, 그 결과 그들과 뒤섞이는 것은 문명사회에 있어 실존하는 위협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사납고 음란한 악마 같은 흑인의 이미지는 “흑인 노예제 지지자들의 상상에서 시작됐으며 그 상상 속 흑인 남성은 노예일 땐 온순하고 사랑스럽고, 자유민일 땐 사납고 위험하다는 두 가지 본성을 가진 사람이었다(1).”

그런데 이것이 다가 아니다. 흑인들은 특별히 질병에 취약하다고 여겨졌다. 그들은 도처에 있지만 보이지 않는 감염 보균자일 테니 그들과의 친밀한 관계는 필연적으로 백인들을 ‘인종적 자살’로 이끌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흑인이라는 인종은 전문가들이 말하는 ‘상당한 쾌락 추구와 방탕’, ‘소독과 위생 규정에 대한 완전한 무시’로 인해 특별히 질병에 걸리기 쉽다고 여겨지기도 했다. 위생에 대한 위협을 저지하기 위해 혈통을 철저히 통제하고 인종 분리 조치를 취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에 대한 악의적인 표현은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됐다. 그래서 1940년대 미시시피주에 거주하는 백인들은 “흑인은 열등한 생명체이고, 생물학적으로 백인보다 원시적이며, 정신 연령이 낮고 감정적으로 덜 발달했다. 흑인은 고통에 둔감하고 학습 능력이 없고 동물에 가까운 행동을 한다.”라고 생각했다(2). 흑인은 태생이 게으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하게 하려면 힘으로 구속할 필요가 있다, 어린애 같고 우스꽝스럽고 태평한 성격이다, 시간관념이 없고 따라서 욕구 충족을 미루거나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자기네 무리의 본능에 복종하며 자기 처지가 개선되길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백인들에게 지시와 명령받는 것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백인들은 흑인 “천 명 중 한 명도 독립적인 삶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백인들은 흑인들을 불신했다. 흑인은 태어나길 거짓말쟁이에 도둑이고 불안정하며 거의 신뢰가 가지 않고 천성이 남을 쉽게 믿기 때문에 ‘외부 선동가들’의 꼬임에 쉽게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백인들이 생각하는 선동가 중에는 공산주의자도 있었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 이후 짐 크로우 체제에 대한 흑인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남부 백인들은 이들의 항거를 ‘흑인 소비에트’ 수립 시도라며 규탄했다.

 

공포의 대상이었던 큐 클럭스 클랜(KKK)

노예제 폐지 이후 옛 노예였던 흑인들이 가장 고대했던 바람은 경작할 땅을 받아 경제적 독립을 보장받음으로써 개인 재산을 보유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40 에이커와 노새 한 마리’라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3) 백인 지주들은 노동력으로 써먹었던 흑인들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도록 막으며 이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다른 직업을 구하는지 예의주시했다. 몇몇 주에서는 남북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흑인 노예법을 공포해 흑인의 경작지 소유를 금했다. 다른 주에서는 큐 클럭스 클랜(KKK)의 폭력적인 기습으로 흑인 농부들이 공포에 떨었다. 어차피 흑인 대부분은 경작지를 임대하거나 살 돈이 없었다. 그렇게 흑인 대다수가 ‘소득의 반을 벌기 위해’ 일하는 소작농이 됐다. 자신이 노예로서 일했던 농장에 고용된 머슴이나 1년짜리 농부가 된 것이다.

아메리카 연합에서는 옛 주인이 흑인에게 소작을 시키듯 백인도 소작 일을 했다. 그렇지만 백인 주인과 흑인 농민 간 대립의 경우 노예제가 있던 시절부터 이어진 인종 분리와 연결돼 흑인을 경제적으로 착취하는 주된 동기처럼, 상징적 지배의 전환점같이 기능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하고 이들의 경제적 의존성을 강화시킴으로써 지속적으로 명예롭지 못한 삶을 살게 했다. 게다가 백인에게 소작농이라는 지위는 한시적인 반면 흑인의 경우에는 대개 확정적이었다.

소작농의 가족은 노동력을 제공하고 지주는 땅, 종자, 농기구, 짐 운반용 가축 그리고 창도 없고 편하지도 않은 임시 오두막을 제공했다. 또한 지주는 최소한의 금액만 현금으로 가불해 주거나 농장 내 상점에서만 사용 가능한 쿠폰을 줬다. 그리고 수확 때까지 6개월간 최소한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다. 대가족으로 유지되는 부계 가족은 목화솜 채취에 있어 기본적인 농업 집단이었으며 경제적 지속성은 주로 가족 구성원의 수에 좌우됐다. 따라서 겨우 7살 난 아이들도 땅을 갈고 목화솜을 채취했으며 12세 이상인 사내아이들은 쟁기질을 했다.

수확이 끝나면 일꾼들은 지주와 체결한 계약에 따라 수입의 1/3이나 1/2를 가져갈 권리가 있었다. 지주는 목화솜 판매와 전년도에 승인한 가불금 계산을 동시에 관리했다. 그런 지주들이 정산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손대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수확 철이 지난 뒤 농민들은 가까스로 수익을 내거나 최악의 경우 미납금이 발생했다.

그러면 지주가 부정직하다는 사실과 상관없이 농민들은 보다 나은 조건을 소망하며 옆 농장으로 이사해 정착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거나 빚을 갚기 위해 계속해서 일하도록 강요받았다. 1930년 즈음 미시시피주 인디애놀라 시에 있는 소작농 80% 이상이 채무 변제를 하지 못했으며 조지아 주 메이컨 시에서는 소작농 중 91%가 적자 상태였다(4).

많은 소작농이 겨우내 농장에서 살기엔 너무 가난한 나머지 부모 집으로 가거나 다음 농번기 때까지 할 일을 찾아 옆 마을로 이주해야 했다. 본인 소유의 땅이 있어 정해진 임대료를 받고 땅을 빌려줬던 흑인 농민들도 수입이 좋았던 적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주에게서 구걸한 우유와 빵으로 끼니를 때웠으며 과거 노예 시절 먹었던 음식보다 적은 양에 만족해야 했다.

농사에 대한 ‘정산’에 그저 이의만 제기해도 백인 농장주가 벌컥 화를 내는 상황이라 흑인 소작농들은 백인 농장주들의 조직적 사기에 더욱더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백인 농장주는 흑인 소작농들이 비대칭적 정산을 따르게 하기 위해 사정없이 사적 폭력을 행사하거나 법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지주는 책상 의자에 앉아 있다. 그 옆에는 45구경 리볼버가 있다. …… 소작농은 정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랬다간 지주가 총을 쥐고 싸우겠냐고 묻는다. 싸움이 일어나면 탕 탕 소리가 난다.”(5)

흑인이 가불받은 금액에 대해 자세한 내역이나 관련 문건을 요구하면 백인 농장주로부터 폭행을 당하거나 채찍을 맞았으며, 그 시에서 쫓겨나거나 살해당했다. 백인 가해자는 그리 대단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 흑인에게 거짓말쟁이나 도둑 취급받는 것은 백인 농장주에게는 흔히 ‘정당화된 살인 동기’로 여겨졌다. 폐쇄적인 시골 지역에서는 사실 흑인의 목숨값을 그리 대수롭지 않게 매겼다. 이는 남부에서 통용되는 “노새를 죽이면 다른 노새를 사고, 검둥이를 죽이면 다른 검둥이를 고용하라”라는 말로 알 수 있다.

흑인 농부 및 소작농이 ‘뻔뻔’해지지 못하도록, 즉 이들이 경제적 빚에 항의하지 못하도록 위협을 가하는 것은 백인 지주의 일상이었다. “백인 지주의 정산에 의문을 제기한 흑인 농부는 항상 ‘못된 검둥이’로, 농장 시스템 작동 자체에 대한 위험인물로 여겨졌다. 그런 흑인은 다른 흑인들을 물들이기 전에 일반적으로 농장에서 쫓겨났다.”(6) 미시시피의 어떤 시에서는 지주가 ‘채찍 파티’에 다른 지주들을 초대해, 여러 흑인 소작농 앞에서 경고의 의미로 고분고분하지 않은 흑인 소작농을 고문하는 일이 흔히 일어났다.

일꾼과 소작농이 처지 개선을 위해 조직을 결성하려 할 때마다 폭력이 더해졌다. 당시 여러 민병대가 서둘러 노조 설립 시도를 막았다. 주동자로 추정되는 인물들은 폭행을 당하거나 거세되거나 살해됐다. 대부분의 주에서 소작 계약서를 보면 소작농이 계약을 따르게 하기 위해 민사가 아닌 형사 재판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특별한 내용이 있었다. 몰래 도망간 흑인 소작농은 민사 재판이 아닌(손해배상해 줄 재산이 없어서) 형사 재판에 넘겨져 형을 산 뒤 고용주에게 넘겨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고된 일을 했고 어떤 때는 노역 일꾼으로서 다른 고용인에게 대여됐다.

 

흑인과 백인은 사형 교수대마저 달라 

백인 경찰은 흑인들에게 사소한 법 위반이나 ‘공공질서 위배’, ‘길거리 배회’, ‘방랑’ 같은 구실로 신속하게 과도한 벌금과 과태료를 부과했다. 이는 ‘흑인을 희생시킴으로써 형사 처벌을 영리 활동으로 활용해’ 지방의 경찰이나 법원 예산에 들어갈 자금을 모으기 위함이었다. “백인 고용주에게 일꾼이 부족할 때 이를 보안관에게 알리면 보안관은 느닷없이 방랑과 관련된 법과 같이 애매한 법을 적용해 땅을 경작할 일꾼들을 강제 동원했다.(7) 일단 감옥에 갇히면 흑인 재소자들은 백인 지주가 노동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일에 자신들을 사용하고, 가두고, 도망하면 잡아서 데려오는 데 사용될 비용을 월급에서 제하는 것까지 허용하는 계약서에 서명해야 했다.

‘농부의 도주’를 중대 범죄로 만드는 법과 일꾼 스카우터들의 활동을 도시 임금 노동 지원자에 한해 찾도록 한 행정 명령이 여럿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경제적·법적 압박이 현실로 나타나면서, 결국 여러 방면에서 아주 짧고 더 안 좋았던 노예제 대신 인권 운동가 윌리엄 에드워드 버가트 듀 보이스가 명명한 ‘빚의 노예 제도’가 등장했다.(8) 소수의 흑인은 송진 채취장이나 제재소, 탄광 산업 및 도시에서 일을 찾으며 대농장의 마수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그러고 나서야 자신이 살던 곳에 있을 때 가장 불쾌하고 가장 위험한 ‘검둥이의 일’에 자신의 경제적 시야가 갇혀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불쾌하고 위험한 일들은 흑인에게 맡겨졌다. 백인 일꾼보다 낮은 임금에 더 혹독하게 대하며 더 강도 높은 노역을 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 미시시피의 한 포장 회사 사장은 “몽둥이를 들고 검둥이 두, 세 명을 마구 패면 상황이 즉시 정상으로 돌아간다”라면서, 게으름뱅이들과 여러 노조 선동가에 비해 흑인 노동자의 효율성이 크기 때문에 흑인 노동자 고용을 선호한다고 말했다.(9)

한편 흑인 여성의 경우, 가난한 집을 제외한 모든 백인 가정이 가정부를 고용하기 때문에 요리, 청소, 빨래, 아이 돌봄 같은 집안일을 하며 수입을 얻는 일을 꽤 쉽게 구했다. 이들은 낮은 임금으로 장시간 일했다. (20세기 초 미시시피주에서는 하루 14시간, 주 7일 근무했다.) 또, 백인 남성들이 성적으로 희롱하거나 성폭력을 가할 위협이 있었지만 이들은 제대로 말도 못한 채 일해야 했다.

짐 크로우 체제하에서는 관습, 법, 폭력이 결합돼 양측 간 계약을 강력하게 제한했고 두 인종을 분리하는 제도를 체계적으로 실행했다. 이에 따라 각 기관에서는 공공이든 민간이든 백인 전용(“Whites only”)과 흑인 전용(“Colored only”) 통로가 생겨났다. 백인 전용 통로는 지배층의 길이었으며 흑인 전용 통로는 2등 시민에게 주어진 길이었다. 이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열등함과 자격 미달을 의미했다.

남부인들 스스로 쓰고 역사가들이 되풀이해 사용하는 ‘격리’라는 현지 용어가 바로 이 ‘인종 분리 제도’를 가리킨다. 사실 ‘격리’는 적절한 용어가 아니다. 짐 크로우 체제하의 흑인들은 (‘다크타운’으로 알려진) 낙후되고 분리된 거주지로 몰아넣는 데서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흑인들은 공공시설과 쇼핑센터, 대기실과 화장실, 엘리베이터와 공중전화 부스, 트램과 버스, 술집과 영화관, 공원과 해변, 병원과 우체국, 보육원과 양로원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서 분리됐다. 인종 분리 제도는 심지어 감옥, 영안실, 묘지에도 적용됐다. 플로리다주에서는 백인과 흑인의 사형 집행에 쓰이는 교수대도 달랐다.

 

강요된 공손함과 온순함… 존엄성은 장벽에 막혀

과거 노예였거나 노예의 후손들인 이들은 백인과 같은 학교에 들어갈 권리 또한 없었다. 그리고 백인 교회에서는 기껏해야 그들에게 2등석 자리에 앉을 지위를 부여하는 정도였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흑인 교회를 설립하고 발전시켜야 했다. 백인 위주의 병적인 사회 공학을 정당화시키는 논리는, 백인과 흑인을 제도적으로 분리하지 않으면 남부에서 문명의 정점에 도달한 백인종에게 ‘흑인종이 병균을 옮기고 이들을 뒤떨어지게 만든다’라는 것이었다.

1901년부터 1920년까지 20년 동안 미국 남부의 실제 모습을 보면 여러 도시에 벽과 칸막이가 설치되고, ‘백인 전용(Whites only)’과 ‘흑인 전용(Colored only)’ 안내판과 커튼이 부착됐다(예를 들면 백인 또는 흑인 전용 식수대와 대기실이 있다). 인종을 분리하는 비공식 게시문이 전파되고 공공건물 및 상업 시설의 입구가 2개씩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인종에 따른 공간 분리는 자애로운 백인 주인과 만족해하는 흑인 하인이라는 가공의 두 가지 역할로 지어낸 이야기를 주변에 새기는 데 기여했다. 그렇지만 이런 엄격한 인종 분리 정책에도 예외는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백인들의 공간에 들어가는 것이 허용된 흑인 하인들이었다.

앨라배마주 버스 회사들은 ‘금속이나 나무, 단단한 옷감, 그 외 두 공간에서 서로 시선이 마주치지 못하게 하는 재료로 만들어진 칸막이로 분리된 백인 및 흑인 전용 대기실을 각각 만들어야 했다. 아칸소주의 경우 열차에서 백인과 흑인을 분리하지 않은 채 운행한 경우 한 대당 벌금 500달러가 부과됐다. 조지아주에서는 흑백 분리 규정을 어긴 흑인 승객을 즉시 내쫓지 않은 직원에게 경범죄 처벌이 내려졌다.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는 백인 또는 흑인만 싣는 시내 전차가 해가 진 뒤 300피트 떨어진 곳에서도 어떤 손님을 태우는지 확실히 보일 수 있게 ‘백인’과 ‘흑인’이 표시된 전광판을 달아야 했다. 어떤 인종의 승객을 태울지 선택하는 것은 철도 기관사의 소관이었지만 기관사가 ‘의도치 않게 실수를’ 저지른 경우 회사는 모든 법적 책임에서 보호됐다.

흑인이 백인을 대면할 때 그 자리에서 가혹한 대우를 받고 사적 보복 또는 공적 제재를 통해 바른 길을 가도록 계도 받고 싶지 않으면 특히 온순하고 공손하게 행동해야 했다. 게다가 흑인들은 인사와 관련된 예법을 받아들이고 자발적이고 기쁜 마음으로 그 예법을 따라 ‘Ma’am(부인)’, ‘Sir(나리)’ (또는 ‘captain(대장님)’, ‘boss(사장님)’)라는 표현을 사용해 백인에게 말을 걸어야 했다.

반면 백인은 흑인의 나이나 상황과 상관없이 이름을 부르거나 ‘boy’, ‘girl’, ‘auntie(아줌마)’라고 불렀다. 백인과 흑인 사이의 소통과 관련된 금기와 제재는 상대방의 인종을 파악하는 데 실질적인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화 시에도 적용됐으며, 신문 기사와 재판에서 판사와 변호사가 백인 또는 흑인에게 쓰는 언어 표현에서도 통용됐다.

미시시피주 델타 지역의 한 도시에 있는 우체국에서는 흑인 거주자의 편지 봉투에 적힌 ‘Mr’와 ‘Mrs’를 지우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다른 곳에서는 백인 우체국 직원이 흑인의 손에 우편물을 건네는 대신 바닥에 던져야 했다. 백인과 대화 시 백인이 주도권을 갖고 대화를 이끌며 자신의 관점을 강요하는 것은 의무에 가까웠다.

 

흑인 운전자들에게 몰아친 가혹한 백인 폭력

흑인들이 길을 걸을 때 뺨을 맞거나 도로로 떠밀리거나 경찰에게 위협받거나 체포되지 않으려면, 인도에서 백인을 마주쳤을 때 재빨리 도로로 내려가 백인에게 충분한 공간을 제공하고 백인과 부딪치거나 통행을 방해하지는 않는지 살펴야 했다. 매장이나 사무실에서는 모든 백인 손님의 볼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뿐 아니라 뒤로 물러서 문을 잡아줘야 했다. 옷이나 모자, 신발을 착용해 보는 것도 금지됐다.

마찬가지로 관례상 흑인 오토바이 운전자가 백인이 운전하는 차량보다 우선권을 갖거나 그 차를 앞지르는 것도, 도시의 중심 도로변에 주차하는 것도 금지됐다. 백인 운전자와 사소한 교통사고가 일어났을 때 운전자가 분노를 퍼부으며 대응하는 경우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흑인은 고가의 차량을 보유하지 않는 것이 신상에 이로웠다. 백인들이 ‘감히 건방진 흑인 따위’로 봤기 때문이다. 몇몇 시골 도시에서는 흑인이 그저 운전만 해도 폭력적인 응징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조지아주의 작은 도시에서 백인들이 흑인 농부와 딸에게 차에서 내리라고 강요한 뒤 차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그들은 “너희 검둥이들이 이 도시에서 계속 살고 싶으면 지금부터 걸어서 오던지 이 늙은 노새를 타고 와”라고 말했다. 옷을 말쑥하게 입는다던지 주중 어느 날 장을 보러 도시에 오는 경우 예의를 갖춰 대우받고 싶다는 흑인들의 잠재적 바람을 밖으로 드러내면 혹독한 질책을 받았다. 경찰에게 즉각 체포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폭행을 당하고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았다.

흑인과 백인 간 예의범절과 관련된 금기에 따라 심지어는 악수, 식사, 술자리, 맞담배도 금지됐다. - 어떤 식으로든 가까운 교류가 발생하면 친밀한 관계라는 혐오스러운 사태를 불러올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남부 백인들이 봤을 때 흑인과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백인인 ‘우리’와 더러워진 흑인인 ‘그들’ 사이의 넘을 수 없는 장벽에 구멍이 뚫릴 수 있다는 위협으로 작용했다.

평등과 상호 교류에 대한 일반화된 거부의 원칙은 카드, 주사위, 도미노, 체커(체스판에서 하는 게임), 당구 게임 같은 가장 별것 아닌 놀이에 적용됐는데 앨라배마주에서는 심지어 사적인 장소에서도 함께 게임하는 것을 금지했다. 흑인은 백인이 참가하는 스포츠 경기에 참가할 권리가 없었다. 흑인들이 자기들에 필적하거나 뛰어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1910년 7월 4일 리노 시에서 열린 ‘세기의 대결’에서 ‘파파 잭(Papa Jack)’으로 알려진 흑인 복싱 챔피언 잭 존슨이 백인의 위대한 희망(Great White Hope)으로 뽑힌 짐 제프리스를 KO시키고 흑인으로서 헤비급 세계 챔피언 타이틀전에서 승리하자, 남부 전역과 그 외 지역에서 폭동이 수십 건 발생했다. 폭동이 일어나는 동안 분노에 찬 백인 무리들이 짐 제프리스의 모욕을 되갚아주겠다며 거리에서 흑인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경기 장면은 방송이 금지됐다. 이 경기가 흑인들의 거만함을 터무니없이 자극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흑인들에게 존슨은 실제보다 과장된 ‘흑인의 구원자(race savior)’였다. 한편 흑인들은 새로운 곳으로 이사한 경우 서둘러 그곳에 거주하는 흑인들에게 찾아가 자신들에게 금지된 것과 온순함을 보이는 방식에 대해 그 지역의 규범이 무엇인지 묻곤 했다. 규칙을 부주의하게 위반할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규칙을 능숙하게 지키고 위반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했어도 백인들은 친밀한 접촉에 주로 강박을 보였다. 지역의 시민 문화 측면에서 봤을 때 (흑인과 다른 불명예스러운 범주를 배제시킨 후손들이 정의한) 인종의 순수성을 특히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종 간에 친밀함이 생길 계기가 있는지 열정적으로 감시했고 실제로든 상상이든 흑인 남성이 어떤 식으로든 선을 넘으면 심하게 처벌받았다.

반면 흑인 여성과 성행위를 하거나 동거하는 백인 남성에게는 우선적으로 관용과 묵인이 이뤄졌다. 사실 판사나 주지사를 포함해 남부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백인 다수가 백인 가정 외에 흑인 여자와 가정을 꾸렸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이는 흑인과의 관계가 공개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동거녀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지 않고 혼혈 자녀를 백인 사회에 편입시키지 않는 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일이었다.

 

바람 핀 백인 남성은 봐주고, 흑인 여성만 방탕 낙인 

백인 남성들은 백인 및 흑인 여성과 관계를 이어 나갈 수 있었지만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의 경우 남녀 관계에 있어 성적인 부분에서 제한이 있었다. 이로 인해 남부 백인 여성은 순수하고 성욕이 없다고 미화됐고 흑인 여성은 성욕이 과하게 많고 방탕하다는 이미지가 있었다. 흑인 남성은 어떤 경우에도, 성매매 자리에서도 백인 여성과의 관계를 가질 권리가 없었다.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과 관계를 하는 것은 근친상간보다 더 심각하게 여겨져, 재판에 넘겨지면 문자 그대로 목숨이 위험해졌다. ‘인종적 퇴화’에 대한 히스테리에 가까운 두려움은 구타, 매질, 집단 폭행, 고문, 폭동이 폭발하듯 일어났을 때 정점을 찍었다. 19세기 마지막 20년 동안 흑인 약 2,060명이 집단 폭행을 당했는데 이 중 1/3은 백인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혐의가 있거나 가벼운 무례를 범했다는 이유로 폭행을 당했다.

백인 농장주들은 자신들이 흑인에게 폭력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농부와 소작농과의 법적 분쟁에서 이들에게 음식, 치료, 보호 차 자신들이 행한 지원을 즉각 내세웠다. 인류학자 호텔스 파우더메이커는 이에 대해 “백인이 흑인을 대하는 태도에 동반된 감정은 애정, 친절, 동정, 관용, 두려움, 적의까지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어떤 백인도 결코 흑인에게 공개적으로 내보이지 않을 행동은 바로 존중이다.”라고 밝혔다.(10)

 

 

글·로이크 바캉 Loïc Wacquant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캠퍼스 사회학 교수, 파리 유럽 정치 및 사회학 연구소(Centre européen de sociologie et de science politique) 객원 연구원. 주요 저서로 『Jim Crow. Le terrorisme de caste en Amérique 짐 크로우–미국 내 계급에 기인한 폭력』이 있다. 

번역·김은혜
번역위원


(1) George M. Fredrickson, 『The Black Image in the White Mind : The Debate on Afro-American Character and Destiny 백인의 마음 속 흑인의 이미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특징과 운명, 1817~1914』, Wesleyan University Press, Middletown (Connecticut), 1987 (1re éd. : 1971).
(2) Allison Davis, Burleigh B. Gardner et Mary R. Gardner, 『Deep South : A Social Anthropological Study of Caste and Class, 미국 최남동부 지역: 계급과 계층에 대한 사회 인류학 연구』, University of South Carolina Press, Charleston, 2009 (1941).
(3) 1865년 자유민이 된 노예들에게 자신들이 일했던 땅을 재분배해 제공한다는 약속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이 약속으로 인해 흑인들은 독립적인 농민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됐다.
(4) Hortense Powdermaker, 『After Freedom : A Cultural Study of the Deep South 자유 그 이후: 미국 최남동부 지역의 문화 연구』,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Madison, 1993 (1939).
(5) John Dollard, 『Caste and Class in a Southern Town 남부 도시의 계급과 계층』,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Madison, 1988 (1937).
(6) Allison Davis, Burleigh B. Gardner et Mary R. Gardner, 『Deep South : A Social Anthropological Study of Caste and Class 미국 최남동부 지역: 계급과 계층에 대한 사회 인류학 연구』, 출처 상동  
(7) Gunnar Myrdal, 『An American Dilemma : The Negro Problem and Modern Democracy 미국의 딜레마: 검둥이 문제와 현대 민주주의』, Harper & Row, New York, 1962 (1944).
(8) William Edward Burghardt (W. E. B.) Du Bois, 『The Souls of Black Folk』, G & D Media, New York, 2019 (1903). Édition française : 『Les Âmes du peuple noir 흑인의 영혼』, La Découverte, Paris, 2007.
(9) Cité par Neil R. McMillen, 『Dark Journey : Black Mississippians in the Age of Jim Crow 어두운 여정: 짐 크로우 시대에 미시시피에 거주한 흑인들』, University of Illinois Press, Urbana, 1990.
(10) Hortense Powdermaker, 『After Freedom… 자유 그 이후: 미국 최남동부 지역의 문화 연구』, 출처 상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