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요트는 생사의 갈림길에 있다!”
좌파마저 등 돌린 마요트의 불법 이민자들
프랑스의 101번째 데파르트망(département, 프랑스에서 레지옹(région) 다음으로 규모가 큰 행정단위-역주)인 마요트의 치안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이미 인프라 부족과 공공 서비스 부재로 신음하던 마요트에 불법 이민 증가로 인한 치안 불안까지 가중되자 주민들의 동요가 확산되고 있다. 좌파 사상을 옹호하는 주민들도 예외는 아니다.
인도양 마다가스카르섬 인근에 위치한 마요트의 두 섬, 프티트테르와 그랑드테르를 잇는 바지선에서 손에 휴대폰이나 작은 물병을 든 승객들이 내린다. 마요트의 주도 마무주에서는 33℃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선착장 주변 ‘핫플레이스’ 카미옹 루쥬와 ‘분위기 좋은 스낵 바’ 카미옹 블랑에서 몇몇 ‘외국인’이 맥주를 마시고 있다. 검은색, 갈색 피부의 흑인 또는 다양한 피부색의 혼혈이 혼재하는 마요트 현지인들은 이슬람 율법에 따라 술을 마시지 않는다. 프랑스 본토 교수 출신의 한 주민은 “공공장소에서는 자제하지만 학생 때는 언덕에 모여 술을 마셨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마무주에서 몇 km 떨어진 카웨니에 도착했다. 밤이 되자 모스크 첨탑에서 이슬람 신도들에게 기도 시간을 알리는 노래가 울려 퍼진다. 열린 창문으로 <프랑스 앵테르(France Inter)> 방송 소리가 흘러나온다. 노점에서 마요네즈가 가득 뿌려진 커다란 햄버거를 주문한 한 ‘본토인’은 스마트폰의 애플리케이션으로 결제를 한다. 부부(boubou, 서아프리카 전통 복장)를 입은 남성들, 화려한 색상의 살루바(Salouva, 마요트 여성들의 전통 복장)(1)를 입은 여성들, 평범한 서양식 옷을 입은 사람들이 조용히 발걸음을 재촉한다.
마요트 현지어 시마오레어와 시부시어로 나누는 대화도 들린다. 마요트 북부에서 마무주를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도로인 1번 국도(N1)는 극심한 교통 체증으로 꽉 막힌 상태다. 거북이걸음을 하는 합승 택시 속에서 승객들이 한숨을 내쉰다. 택시 기사는 “조금만 참으세요. 곧 도착합니다”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승객들의 한숨이 잦아들더니 마요트에서 가장 흔히 들을 수 있는 두 표현, “파드수시(pas de souci, ‘괜찮다’라는 뜻의 프랑스어)”, “인샬라(‘신의 뜻대로’라는 뜻의 아랍어)”가 들린다.
마요트 주민의 77%가 빈곤선 아래 생활
엄연히 프랑스의 일부인 마요트에는 쓰레기 수거 서비스가 존재하지 않는다. 1번 국도변에 줄지어 선 컨테이너들 주변에 쓰레기들이 쌓여있다. 마무주 도심에 위치한 마요트 의회 주변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지난 총선에서 ‘불복하는 프랑스(LFI)’ 후보로 출마했던 고등학교 교사 야스미나 아우니는 마요트의 열악한 상황을 지적했다. “쓰레기 수거 서비스만 부족한 것이 아니다. 공공장소 정비, 교육이나 보건 서비스 접근성도 부족하다. 정부가 수십 년간 마요트를 방치한 결과 마요트가 얼마나 어지러운 상태에 빠졌는지 보라…”
마요트는 프랑스의 101번째이자 가장 가난한 데파르트망이다. 경제는 침체됐고 치안 악화로 관광산업은 몰락했다. 주된 생업은 농업으로, 주로 식량 작물을 재배하는데 이 역시 생산량이 많지 않다. 마요트는 거의 대부분의 식료품을 수입한다. 과거 마요트에 거주한 적이 있는 파블로 게바라는 “남미 산 냉동 닭 날개에 모두 익숙해졌다”라고 설명했다.
고용 대부분을 창출하는 중앙 정부와 마요트 당국은 공무원과 그들의 가족 및 친지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주민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하지만 본토인 마르크 세네는 “어디를 둘러봐도 마요트가 데파르트망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최저소득 지원금과 사회보장 지원금은 본토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프랑스 전역에서 1,398.69유로로 책정된 월 최저 임금은 마요트에서는 1,203.36유로에 불과하고, 적극적 연대소득(RSA, 저소득층에 지급되는 소득보조금-역주) 역시 전국 기준 635.71유로 대비 303.88유로로 매우 낮은 수준이다. 사회보장 분담금은 징수액이 지급액을 초과해 본토 재정만 살찌운다. 마요트 주민의 평균 연금 수령액은 월 276유로에 불과하다. 경제활동 인구의 34%가 실업 상태며 주민의 77%가 빈곤선 아래에서 살고 있다.(2)
전국초중등교원통합노조(SNUipp-FSU) 마요트 지부장을 맡고 있는 교사 리보 라코통드라벨로(이하 리보)는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모르겠다. 사르코지는 마요트를 반의 반쪽짜리 데파르트망으로 승격시켰다. 사르코지의 뒤를 이은 (프랑수아) 올랑드는 연간 교실 100개를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실제 개설된 교실 개수는 10개도 안 된다!”라고 한탄했다. 마요트 대학은 취학 연령 아동 중 미취학 아동의 수가 1만 4,000명에 달한다고 집계했지만 교육 당국이 집계한 수치는 5,000명에서 1만 명 사이에 불과하다.
“정확한 수치를 집계하기는 힘들다. 대부분 불법 체류 아동들이기 때문이다. 모든 면에서 힘에 부치는 상황이다. 현 구조로는 이 아이들을 모두 수용하고 가르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실패와 배제를 답습하고 있다.” 리보에 따르면 마요트 중등교사의 50%는 계약직으로 “안정적이지 않은 지위 때문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교사 학위를 소지한 교사들은 “마요트에 부임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프랑스 잔류 택한 마요트, 이슬람 국가 코모로와 경쟁
프랑스 본토에서 8,000km 떨어진 마요트는 마다가스카르, 아프리카 그리고 그랑드코모르, 앙주앙, 모엘리 3개 섬으로 구성된 코모로 사이에 위치한 섬이다. 주목할 점은 마다가스카르와 코모로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각각 480유로와 1,360유로인 반면 마요트의 1인당 GDP는 부진한 개발에도 불구하고 2022년 기준 1만 1,590유로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앙주앙을 비롯한 이웃 섬들의 주민들에게 면적 374㎢의 프랑스 데파르트망 마요트는 에덴동산과도 같다. 마요트는 앙주앙에서 불과 70km 떨어져 있으며 배로 5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콰사콰사(kwassa-kwassa, 길이 6~9m의 보트)는 헌병대, 국경 경찰(PAF)과 숨바꼭질을 하며 불법 이주민을 마요트로 실어 나른다. 이들의 목적지는 대부분 음창보로시 북쪽에 위치한 천상의 섬 시슈아 음창보로의 음창가 사파리(‘여행의 해변’)다. 현지 어부들은 돈을 받고 이들을 마요트 본섬으로 실어 나른다. 본섬에 도착한 이들이 마요트 내 조직망의 도움을 받아 향하는 곳은 앞서 도착한 동포들이 이미 터를 잡고 있는 마무주의 빈민가와 인근 소도시 쿵구, 뎀베니다.
마요트의 이민자 수는 급속도로 증가했다. 1968년 2만 3,000명에 불과했던 마요트 인구는 2000년 14만 7,000명으로 증가했다. 현재 인구는 공식적으로는 32만 1,000명, 비공식적으로는 40만 명에 달한다.(3) 이 중 절반이 이민자다. 출생아 수는 2022년 1만 770명, 2023년 1만 200명을 기록했으며 산모의 3/4이 외국인, 특히 코모로 출신 이민자였다. 마무주의 마요트병원(CHM) 산부인과는 프랑스에서 분만 수가 가장 높은 병원이다. 2019년 마요트에서 태어난 아이 중 부모 모두가 프랑스인인 경우는 17.8%에 불과했으며 부모 모두가 외국인 경우는 45%에 달했다.(4) 이미 폭발 직전의 상태에서 설상가상으로 불안감도 급속도로 고조되고 있다.
강한 반식민주의 성향을 띠는 동시에 이데올로기적 성향도 강한 프랑스 본토의 일부 좌파는 마요트에서 벌어진 일련의 상황들을 (실제로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자업자득’으로 평가한다. “프랑스는 1970년대에 마요트를 코모로에서 분리시켰다. (...) 마요트의 유력 가문들과 종교계는 마요트와 코모로의 역사적인 경쟁 관계를 이용해 1976년 실시된 주민 투표에서 마요트 주민들이 프랑스령 잔류에 찬성표를 던지도록 유도했다. 이후 2009년 데파르트망 승격 및 프랑스로의 정식 편입을 결정하는 주민 투표에서도 찬성이 압도적인 표를 기록했다.”(5) 이러한 과정은 본질적으로 강제 동화에 해당하지만 마요트인들 역시 조상 대대로 내려온 코모로 제도와의 유대 관계를 스스로 부정했다.
1841년 4월 25일, 술탄 안드리안촐리는 지대(地代)와 군사적 보호를 조건으로 마요트를 프랑스에 양도했다. 코모로 제도의 나머지 섬들은 1886년 프랑스 보호령이 됐으며 1946년 프랑스의 해외영토로 편입된 후 1958년부터는 일정 부분 행정 및 재정적 자율성을 누렸다. 1960년대, 코모로 제도에 속한 마요트에서는 코모로의 독립을 지지한 ‘악수(serrez-la-main)’ 운동과 프랑스령 잔류를 희망한 소로다(Sorodat, 군인)들이 대립하기 시작했다.
“마요트인들은 코모로인들과 공동 운명 힘들어”
후자는 코모로로의 회귀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이때부터 이미 마요트의 데파르트망 지정을 지지했다. 1974년, 코모로 제도는 (애초에 계획했던 4개 섬 통합 투표가 아니라) 각각의 섬에서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묻는 주민 투표를 최초로 실시했다. 전체적인 결과는 찬성이 94.56%로 압도적이었지만 마요트 주민의 65.47%는 반대에 표를 던졌다. 1976년 다시 실시된 주민 투표에서는 거의 대부분(99.4%)의 마요트 주민이 프랑스 잔류에 찬성했다. 프랑스는 막 탄생한 코모로 연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요트를 코모로 제도의 나머지 섬들과 분리시켰다. 국제연합(UN) 역시 국경선 신성의 원칙(uti possidetis juris,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한 신생 국가는 그 국가가 이전에 이루었던 행정구역과 동일한 경계를 가진다는 국제관습법의 원칙-역주)에 근거해 프랑스의 결정을 비난했다.
프랑스 본토에서도 “프랑스인의 가면을 쓴 코모로인!”이라는 극렬한 비난이 일기도 했다. 가짜 ‘마요트 민족’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이미지와 스토리를 동원해 역사가 다시 쓰였다.
이 과정에서는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프랑스와 코모로의 대립을 조장한 현지 엘리트들의 ‘이면 공작’도 큰 역할을 했다. 식민 제국에 대한 향수를 가진 세력이 ‘공화국의 용병’ 보브 데나르와 함께 코모로에서 벌인 세 차례의 파렴치한 쿠데타(1975년, 1978년, 1995년)도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1998년 모하마드 바카르가 주도한 앙주앙 분리 독립운동을 프랑스가 지원한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하지만 이러한 요소만 강조해서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진짜’ 마요트인들은 오늘날까지 다른 이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결정하도록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파 성향을 띤 단체 라바투아르(프티트테르 소재)의 대변인 사이드 무두아리는 “우리가 코모로인과 가진 공통점은 피부색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LFI 소속 아우니 역시 “마치 중국인과 일본인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에 따르면 이미 언어에서부터 차이가 존재한다. 마요트는 앙주앙과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랑드코모르와 모엘리와는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마요트인의 절반은 마다가스카르어를 사용한다. 코모로 제도의 다른 세 섬에 비해 마요트는 마다가스카르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마요트는 지배구조에서도 코모로와 차이를 보인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무역이 기승이 부리를 동안 코모로 제도의 ‘호전적인 술탄’들은 끝없는 전쟁을 벌였다. 이 와중에 마요트는 유일하게 술탄이 아니라 해방된 노예 마와나 마흐디가 통치한 섬이다. 페미니스트이자 독실한 무슬림인 아우니는 “지금까지도 코모로는 술탄의 후손이 통치하고 신분제와 엄격한 이슬람 교리를 따르는 반면 마요트는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회로 독재에 가까운 권력 구조를 갖고 있다. 자유를 사랑하는 마요트인이 코모로와의 공동 운명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고 설명했다.
마요트 불법 이민을 택한 코모로인들… 확산되는 갈등 폭발
아우니는 음창보로에서 거주하며 학생들을 가르친다. 음창보로의 언덕에서 우리와 만난 아우니는 외국인 혐오증을 배제한 시각으로 마요트인의 특수성을 설명했다. “우리의 선택을 이해하는 열쇠는 바로 여성이다. 코모로에서는 여성들이 봉기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마요트의 여성들은 애초부터 정치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물론 가부장제도 존재하지만 마요트는 분명히 모계 중심 사회다.” 아우니는 1960년대 코모로 모로니의 지방 정부에 반기를 든 ‘간지럼 부대(Chatouilleuses, 마요트의 프랑스령 잔류를 위해 코모로 정치 지도자들을 간지럼을 태워 고문한 마요트의 여성 군인들-역주)’의 역할을 상기시켰다.(6) 1967년 이들은 <프랑스국영방송국(ORTF)> 앞에 모여 “우리는 자유를 위해 프랑스인으로 남고 싶다!”라고 외쳤다. 이들의 외침은 이후 프랑스 잔류 운동의 슬로건이 됐다.
피부색이 같고 비슷한 문화를 공유한다고 해서 이해관계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마요트와 코모로의 관계에 대한 논쟁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상 대대로 그래왔듯 코모로인들은 오랫동안 각 섬을 자유롭게 오갔다. 마요트를 찾는 코모로인들은 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거나 일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완전히 정착하지는 않고 잠시 머물다 떠나고는 했다. 그런데 1986년부터 마요트를 방문하는 코모로인은 비자를 발급받아야 했다. 유효 기간 3개월의 이 비자는 마요트를 떠났다 다시 들어와야만 갱신이 가능했다. 이때부터 비자 유효 기간을 넘겨 체류하는 사람의 수가 늘기 시작했다. 1993년, 에두아르 발라뒤르 프랑스 총리가 1995년 대선을 앞두고 선거 유세차 마요트를 찾았다. 자우지 공항에 도착한 발라뒤르 총리에게 마요트의 시장들은 폭증하는 이민을 억제하기 위해 더 엄격한 규칙을 도입할 것을 요구했다. ‘30년 지기’ 자크 시라크 대통령과 대선에서 맞붙게 된 발라뒤르 총리에게는 한 표 한 표가 중요했기에 그는 마요트 시장들의 요구를 수용했다.
이후 ‘발라뒤르 비자’ 혹은 ‘한정적 체류 허가증’으로 불리는 비자가 도입됐다. 발급이 까다로웠던 이 비자는 오직 마요트 입국 및 체류만 허용하고 다른 프랑스 영토로의 이동을 제한했다. 마요트는 들어올 수는 있지만 나갈 수는 없는 섬이 됐다. 비자를 발급받지 못한 코모로인들은 불법 이민을 선택했다. 섬을 나갔다 다시 들어오려면 또 한 번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야 했기에 코모로 출신 불법 이민자들은 쉽게 마요트를 떠나지 못했다. 이들은 결국 마요트에 정착했다. 합법적인 체류 자격을 취득한 이들에게도 문제는 남아있다. 다른 프랑스 영토로 이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마요트에 발이 묶였다.
코모로 출신 이주민은 마요트가 이들을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을 뛰어넘는 속도로 급격히 증가했다. 이들은 사유지를 점유(혹은 임대)하거나 비탈진 언덕에 정착했다. 좁은 골목, 통로, 계단이 뒤얽힌 이 언덕들은 외지인에게는 미로와 같다. 빈민촌은 확장됐다. 공공서비스 부재로 파리, 모기, 악취, 흙먼지가 들끓는 비위생적인 공간에 나무와 함석으로 지은 열악한 주거지인 방가(banga)가 우후죽순 들어섰다. 2004년 처음 불거진 마요트인과 외국인 이민자 간의 갈등 사태는 도시의 주민들이 불법 이민자 거주지를 상대로 집단적, 조직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는 ‘데카자주(décasage)’의 시초가 됐다. 이러한 갈등은 2016년 더욱 악화된 형태로 다시 대두됐다.
외국인 갱단의 폭력 증가, 통학도 출퇴근도 위험
보호자가 없는 미성년자의 수가 점점 늘고 있는 상황 역시 우려를 자아낸다. 이들은 부모의 추방으로 버려지거나, 친척에 맡겨지거나, 홀로 남겨진 채 아동 복지 서비스의 보살핌도 받지 못하고 있다. 게바라는 “프랑스 정부와 마요트 엘리트들은 외국인 아이들은 돌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한탄했다.
마요트는 시한폭탄과 같다. 마요트인 뿐만 아니라 외국인으로 구성된 청년 갱단의 폭력행위가 점점 증가하면서 마요트의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한 식당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를 포착했다. “폭행당했던 너희 형은 괜찮아? – 아직 회복하지 못했어. 목에 닿았던 마체테 칼날의 느낌이 완전히 트라우마로 남았어.” 2019~2023년, 무장 강도 횟수는 121% 증가했다. 강도 상해 역시 2배로 늘어났다. 마을 또는 이웃 간 싸움, 도로 봉쇄, 돌팔매질로 인한 집과 차량 파손, 스쿨버스 공격(2023년 11월 34건)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무기도 등장했다. 끝부분에 콘크리트를 입혀 길고 뾰족하게 간 쇠를 던져 버스에 타고 있던 두 소녀가 사망했다. 해변, 평온하기로 이름난 동네, 노상에서의 공격도 되풀이됐다. 프티트테르의 한 주민은 “그들은 숨어 있다가 공격 직전에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라고 경고했다.
공공연한 ‘좌파’ 성향의 교사 리보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중고등학교를 비롯한 학교 내부뿐만이 아니라 학교 근처에서도 폭력이 만연하다. 출근길도 예외는 아니다. ‘에손느나 센생드니의 상황도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곳 사람들은 집을 나서면 일단 회사에 도착할 수는 있다. 우리는 출퇴근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저녁 7시가 되면 상점들은 문을 닫는다. 야간 행사, 친구들과의 외출, 야외 콘서트, 영화관, 레스토랑은 더 이상 엄두를 낼 수 없다. 깨끗한 바닷물과 아름다운 산호초를 자랑하는 해변에도 발길이 끊겼다. 운동을 즐기는 한 주민은 “더 이상 조깅을 하지 않는다. 아무리 조심해도 언제 어디서 공격당할지 모른다”라고 토로했다. 마요트에 오래 거주한 ‘본토인’들은 ‘그들의’ 섬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버렸다고 말한다. 이들에게 남은 결정은 하나뿐이다. “언제 마요트를 떠날 것인가? 더 이상 희망은 없다. 점점 더 나빠질 뿐이다. 마요트가 폭발할 때 이곳에 있고 싶지 않다.” 여력이 있는 마요트인들도 섬을 떠났다. 기업가들은 가족들과 함께 레위니옹에 정착해 비행기를 타고 마요트를 오간다.
가난한 주민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마요트를 떠날 여력이 없는 이들은 시민 단체에 가입하고 “모두의 권리인 안전” 보장을 국가에 요구한다. 치안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주장도 등장했다. 2023년 4월 24일 마요트 공영방송 <라프르미에르(La 1ère)>에 출연한 마요트 의회 제1부의장 살람 음데레는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그들 중 일부를 죽여야 할 수도 있다”라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7) 프랑스 본토의 ‘도덕적인 좌파’는 ‘열대성 미시 파시즘(micro-fascism, 국가 차원의 파시즘과 비교되는 일상생활에서 발견되는 개인의 파시스트적 행태-역주)’이라고 마요트인 전체를 싸잡아 비난했다. 마요트인들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네 동지들”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2023년 4월 24일, 우암부슈(Wuambushu, ‘탈환’을 뜻하는 마요트어) 작전을 개시한 경찰은 불법 이민자들이 거주하던 불법 건축물 700채를 파괴했다. LFI 소속 아우니는 이 작전에 대한 미디어의 과잉 보도 열기에 유감을 표하며 “필요한 작전이었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하는 말이다. 프랑스는 혼란에 빠져버린 영토를 온전히 되찾아야 한다. 점점 더 야만적으로 변해가는 갱단을 해체하고, 그들의 본거지를 파괴하고, 지도자를 체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스로를 ‘좌파’로 규정하는 리보는 다른 시각의 분석을 제시했지만 근본적인 측면에서는 아우니에 동의했다. “SNUipp-FSU 본부는 이 작전을 규탄했지만 마요트 지부의 입장은 다르다. 마요트인들은 우암부슈 작전을 지지한다. 불법 이주민 단속을 해야 한다면 단속을 하라. 대신 너무 강경한 단속은 자제해 달라.”
마요트가 새 람페두사로 변한다는 공포 확산
우암부슈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마요트에 파견됐던 경찰 일부는 작전이 끝나자마자 나헬 사망 사건으로 촉발된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급히 본토로 복귀했다.(8) 이들이 떠나자 폭력과 치안 상태가 다시 악화됐다. 아프리카 대호수 지역(브룬디, 콩고민주공화국, 우간다, 르완다)과 아프리카의 뿔 지역(소말리아, 지부티, 에티오피아, 에리트레아) 출신 망명 신청자들이 마무주 카바니 지구 축구 경기장 주변에 지은 숙소가 급속도로 확장되자 카바니 지구의 여론이 들끓었다. 폭력과 가난을 피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온 500명의 남녀가 파란색 플라스틱으로 지어진 열악한 방가에서 생활했다. 시민단체 마요트 2018(Mayotte 2018)의 사피나 술라 회장은 “경기장을 빼앗겼다고 느낀 카바니 청년들은 이들에게 적대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주기적으로 충돌이 발생했고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진압에 나섰다. 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주민들은 난민캠프 이동을 요구하기 위해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본토와 유럽으로 향하는 이 새로운 ‘통로’를 개척한 것이 코모로의 밀매업자들이라는 사실에 주민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그들은 마요트의 존재조차 몰랐던 아프리카인들에게 마요트행을 주선했다!”
이미 팽배하던 긴장감에 마요트가 새로운 람페두사(아프리카 이민자들의 유럽행 통로 역할을 하는 이탈리아 최남단 섬-역주)로 변하고 있다는 공포감마저 엄습했다. 술라 회장은 “프랑스는 정치적 난민을 보호하는 국제협약 가입국이다. 난민 보호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요트는 이들을 모두 수용할 능력이 없다”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망명 신청자 지원 단체 마요트 연대(Solidalité Mayotte)의 (익명을 요구한) 한 관계자는 “우리는 4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와 마요트에 새로 도착한 이들을 위해 50인을 수용할 수 있는 비상 숙소를 보유하고 있지만, 이 숙소들은 이미 꽉 찼다”라고 설명하며 “이민자 유입 규모에 비해 정부의 대응은 매우 부족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망명 신청이 받아들여져도 행정 절차의 기간과 단계를 고려하면 1년이 넘어야 프랑스 본토로 입국할 수 있다. 망명 신청이 거부당한 이들은 조용히 시야에서 사라진다….
비정부기구 시마드(Cimade)와 인도주의단체 음레지 마오레(Mlézi Mahoré)와 마찬가지로 정부의 위임을 받은 단체인 마요트 연대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했다. 불법 이민을 ‘조장’한다는 비난에 직면한 이 단체는 협박과 위협에 시달렸으며 분노한 시민들은 난민 신청자들이 머물고 있는 숙소의 문을 자물쇠로 걸어 잠가 출입을 막기도 했다.
“치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소용없다!”
2024년 1월 22일~2월 29일 마요트 전 지역에서 봉쇄 운동을 벌여 여론을 들끓게 한 단체 맹렬한 힘(FV)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탄생했다. 무두아리는 “카바니 주민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우리는 파리 시민이 마요트로 와서 함께 싸워줄 일은 없으니 직접 거리로 나서기로 결심했다”라고 회상했다. 그랑테르 반대편에 있는 팅고니 청년센터의 압두 바디루 센터장 역시 “마을 입구 원형 교차로 봉쇄에 참여했다”라고 밝혔다. 좌파 활동가인 아우니와 함께 FV의 대변인이 된 바디루 센터장은 “내가 아이들을 키우며 사는 곳에서 폭력이 자행되고 있기 때문에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 운동에 동참했다”라고 설명했다. 다른 노조(FO, CFDT, CGT, SNUipp) 활동가들과 마찬가지로 리보 역시 개인적으로 봉쇄 운동에 동참했다.
카바니를 둘러싼 긴장이 고조되자 암브딜와에두 수마일라 마무주 시장은 수차례 경고를 했지만 정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바디루 센터장은 “바오밥 나무를 이해시키려면 바오밥 나무를 흔들어야 한다고 FV는 생각했다. 비록 파리에서 80만(sic)km 떨어져 있지만 마무주의 시장도 엄연히 프랑스의 시장으로서 안 이달고 파리 시장만큼 존중받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제랄드 다르마냉 프랑스 내무부 장관과 마리 게브누 해외영토담당 차관이 직접 행동에 나서야 한다. FV의 일원인 나빌루 알리 바카르 마무주 경제사회환경위원장은 “정부가 자신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시장들은 뒤로 물러나 FV에게 정부와의 협상을 맡겼다”라고 설명했다. 협상 결과 다르마냉 장관은 한정적 체류 허가증을 폐지하고, 가족 비자 발급에 더 엄격한 규칙을 적용하고, 경찰의 존재를 강화하고, 첨단 해상 감시 기술을 활용해 섬 주변 해상에 ‘철의 장막’을 구축하는 등의 대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길을 끈 조치는 헌법 개정을 통해 마요트의 속지주의를 폐지한다는 내용이었다. 바카르 위원장은 “마요트인들이 바라왔던 조치”라고 설명하며 속지주의 폐지에 암묵적인 동의를 표했다. 바디루 센터장과 술라 회장 역시 “정당한 조치”라고 평가했다. TV 방송에 출연한 마요트 해외영토자유독립당(LIOT)의 에스텔 유수파 의원은 “속지주의 폐지는 이민 열기 가열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유수파 의원은 차기 ‘다르마냉 정부’의 해외영토 장관으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협상의 최일선에 섰던 아우니는 속지주의 폐지에 강한 이의를 제기했다. “FV의 요구사항 중 최우선 사항은 “발라뒤르 비자”였다. FV는 속지주의 폐지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다르마냉이 느닷없이 꺼낸 카드다. 그가 선거를 위해 마요트를 이용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과거 발라뒤르가 그랬듯이 말이다.”
“봉쇄 운동을 벌였던 이들은 속지주의에는 관심이 없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치안이다!”라고 토로하는 리보의 말에서 실망감이 느껴졌다. “노조 활동가들은 우파와 극우파 담론과의 싸움에서 졌다. 사회보장도 중요하고, 좌파의 담론도 중요하고, 공공서비스 발전도 중요하지만 한 가지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치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모든 것이 소용없다!” 아우니 역시 본토의 ‘안일한 진보주의’에 불만을 표시하며 “좌파 운동가들은 이민자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익히 알고 있다. 하지만 틀이 마련되어 있어야만 관리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틀을 잃었다. 자유로운 왕래가 불가능하고 치안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굿 거버넌스를 고민할 수 있는 여유도 없다. 마요트는 생사의 갈림길에 있다!”라고 역설했다.
글·모리스 르무안 Maurice Lemoine
기자 겸 작가. 주요 저서로『Juanito la vermine, roi du Venezuela 베네수엘라의 왕, 버러지 후아니토』(Le Temps des cerises, Montreuil, 2023)가 있다.
번역·김은희
번역위원
(1) 마요트의 여성 전통 복장. 화려한 색상의 천을 가슴에 둘러 묶고 발까지 늘어트린 옷으로 머리나 어깨에 긴 스카프 키살리(kishali)를 함께 두른다.
(2) ‘Chiffres-clés 주요 수치’, 국립통계경제연구소(Insee), Paris, 2024년 2월 29일.
(3) Ibid.
(4) 나머지 신생아(37.2%)는 부모 중 한 명(30%가 아버지)이 프랑스인으로 ‘출생과 동시에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다. (‘Diversité et précarité : le double défi des univers ultramarins – Mayotte 다양성과 취약성: 해외영토의 이중 과제’, 가족아동연령 고등위원회[HCFEA], Paris, 2022).
(5) François Héran, ‘À Mayotte, de quel droit du sol parle-t-on? 마요트의 속지주의란?’, <르몽드>, 2024년 2월 13일.
(6) 인도양 문학상 수상작인『La Chatouilleuse 간지럼 부대』(Éditions du Signe, Strasbourg, 2022)는 아우니가 쓴 소설이다.
(7) 2024년 3월 7일, 음데레는 범죄 선동죄로 집행유예 3개월과 벌금 1만 유로를 선고받았다.
(8) 2023년 6월 27일, 낭테르에서 17세의 나헬 메르주크가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자 여러 도시에서 이에 항의하는 폭동이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