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요원해진 ‘드골-미테랑주의’
나침반 없는 프랑스 외교부
프랑스는 오랫동안 독자 노선을 고수해 오다 이제 다른 서구권 국가들과 끊임없이 보조를 맞추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 분쟁 상황에 대한 프랑스의 입장은 미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현재 진행 중인 지정학적 재편과 남반부 국가들의 주장은 ‘드골-미테랑주의(샤를르 드골과 프랑수아 미테랑이 지지했던 외교 원칙으로 프랑스의 전략적 독립과 비동맹, 핵무기 보유를 핵심으로 한다-역주)’ 방식과는 상반되는 상황이다.
도덕적·지적 명성과 경제적 영향력, 군사력은 지배 강대국의 이익을 쉽게 충족시킬 수 있게 해 준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 국가들은 그렇게 자국의 영향력을 이용해 왔고 때론 남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련 역시 오랫동안 핵무기를 등에 업고 군사력과 해방 논리를 바탕으로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의 혜택을 누렸다. 그러자 서구권 국가들은 그들의 자유를 형식적인 것으로, 경제는 자본주의로, 외교 정책은 제국주의로 규정지었다.
역학 관계가 서구에게 유리하게 바뀐 것은 소련과 유럽 국가, 미국, 캐나다가 1975년에 체결한 헬싱키협정 이후였다. 최종 협정문은 국경선 불가침 원칙(소련이 바라던 불변성 원칙이 아님. 소련은 협상을 통하거나 민주적 결정으로 도출된 사항이라도 모든 변경사항을 배제하기를 바랐음)을 확인하고, (소련에 필요한) 경제 협력과 사상·정보·사람의 자유로운 이동(이것이 그 유명한 ‘제3 바스켓’이다)을 강조했다.(1) 헬싱키협정은 실제로 소련 해체의 시작을 알렸다. 소련의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은 점차 흐려지고 경제적 지배력은 약화됐고 이후 베를린 장벽까지 무너졌다.
현재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동일한 역학 관계의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그 변화는 이미 해당 사태가 벌어지기 전부터 시작됐으며 역사적 변곡점으로 볼 수 있다. 군사적·경제적·가치론적 면에서 서구 세계가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1953년 한반도에서 양측의 대결은 ‘무승부’였다. 하지만 서구는 1945년 이래 남반부(베트남,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대부분 패배했고, 승리를 거두었을 때(2003년 이라크와 2011년 리비아)조차 서구의 개입은 혼란을 초래했다.(2) 유일하게 성공을 거둔 경우는 몇몇 ‘경찰’ 작전(1965년 도미니카 내전이나 1989년 파나마 침공 등)이나 제1차 걸프전(1990~1991) 때처럼 유엔 결의안 등으로 국제적으로 널리 정당성을 인정받았던 임무 정도다. (테러리즘 근절, 마약 거래 근절, 인도주의적 개입이나 지정학적 고려 등) 동기야 다양하지만 위 사례에서는 막강한 서구라는 공통적인 감정이 존재했다. 하지만 서구 정부는 매 경우 실질적인 승리가 없고 해당 작전이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몇 년이 지나면 철군 협상을 했다. 1975년 베트남이나 2021년 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패주(敗走)로 끝난 미군 철수는 예산이나 선거를 고려해서 정치적으로 내린 결정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승리를 거두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결과이기도 했다.
최근 사건을 보더라도 역학 관계가 변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이란의 지원을 등에 업은 예멘 후티 반군이 홍해에서 선박을 공격했지만 서구권 국가들은 이를 제압하지 못했다.(3) 전 세계 해운 교역 컨테이너의 20%가 수에즈 운하를 지나는 상황에서 컨테이너 운송에 큰 차질이 빚어졌으며 이집트 경제도 큰 타격을 받았다. 서구권 국가들은 10년 전부터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예멘에 지상 개입을 배제하고 홍해를 오가는 선박에 미사일 방어 장치를 장착하면서 피해를 줄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미국과 영국이 가진 기술 및 군사적 위력은 이란이 지원한 미사일과 드론으로 무장한 반군에게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 후티 반군이 제시한 정치 조건인 가자지구 휴전만이 지금의 불안정한 상황을 종식시킬 유일한 타개책일 것이다. 이제 서구가 쉽게 개입했다가 철수하는 시대는 지났다. 남반부에 속하는 많은 국가가 이란이나 터키산 드론 등의 군사 기술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효과 없는 제재
서구는 가치 전쟁에서도 패하고 있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가 저지른 살육을 보고 남반부의 여론은 다소 충격을 받았지만(인도는 이스라엘에 대해 동정을 표한 몇 안 되는 국가다), 관심은 금세 가자지구에 쏟아진 대규모 폭격에 쏠렸다. 희생된 가자지구 주민 3만 4,000명 중 70%가 여성과 아동이라는 사실과 굶주림과 전염병의 징조, 인도주의적 지원 방해, 치밀하게 계획된 유산 파괴 등으로 인질 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났고, 이스라엘은 공세를 이어나가는 데 몰두했다.
유엔 안보리 내 미국의 외교적 입장은 확실히 변했다. 미국은 휴전을 촉구하는 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가 임시 휴전 결의안(러시아와 중국 거부로 부결됨)을 제출했다가 결국 2024년 3월 25일에 휴전과 인질석방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기권을 통해) 인정했다. 이에 이스라엘은 실망을 금치 못했다. 민주당 유권자들과 정권 안정을 걱정하는 일부 아랍 정권의 압력과 영상의 폭력성 등 여러 요소가 원인으로 작용했겠지만, 서구의 가치가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은 변하지 않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 범죄 혐의로 빠르게 기소되고, 국제형사재판소(ICC) 검사장이 가자지구 인근까지 왔지만 묵묵부답으로 응한 것을 보더라도 서구권의 가치가 흔들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이스라엘을 제소한 뒤 이스라엘에게 인도주의적 구호물 반입을 허용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도 남반부가 미국의 주요 동맹에 맞서 얻어낸 전례 없는 도덕적 승리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은 이스라엘에 군수품을 전달하고, 유럽과 서구 매체들은 팔레스타인의 인도주의적 상황에 상대적으로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중잣대’라고 생각을 더 확고하게 만들었다. 서구의 도덕적 영향력 상실을 가속하는 것 말고는, 서구가 강조하는 인권 존중 관련 권고사항이 설 자리는 점점 더 좁아지고 있다.
경제면에서도 상황은 더 나아 보이지 않는다. 오랫동안 G7 국가들은 중국이나 시리아, 베네수엘라 등 특정 국가의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엄청난 제재를 가했다. 쿠바에 대한 미국의 금수 조치는 매년 유엔 총회에서 회원국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비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2023년 미국과 이스라엘만 반대표를 던졌고 우크라이나는 기권했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시행 중이다. 유엔 안보리에서 (이라크와 이란, 북한의 경우) 통과된 몇몇 제한조치들은 경제적 효과와 달리 정치적 효과는 항상 미미했고, 그래서 해당 국가 국민에게는 재앙을 초래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침공 후 러시아에게 가해진 1만 5,000개의 제재는 달랐다. 러시아에 대한 조치들은 개수가 많고 조직적이었지만 전쟁을 향한 러시아의 노력을 꺾지도 못했고, 러시아의 정책을 변화시키지도 못했으며 특히 경제적으로도 효과가 없어서 서구를 놀라게 했다. 모든 예측과 달리 러시아는 신속하게 경제 성장률을 회복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23년 러시아의 경제 성장률은 3.6%로 미국의 경제 성장률보다 높았다. 그에 반해 유럽연합은 사실상 불황에 빠졌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의 실질 소득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증가했으며 투자심리도 회복되고 인플레이션과 재정적자는 조절되고 있다.(4)
위와 같은 긍정적인 상황은 전쟁 경제 덕도 있지만 제재 조치에 참여하지 않은 남반부 국가가 많기 때문이다. 교역과 재정, 기술상 지배력은 더 이상 서구의 전유물이 아니다. 러시아는 남반부 국가들 위주로 경제를 전향했다. 러시아와 중국 간 교역은 이제 위안화로 이루어지며 다른 국가들도 이를 따르고 있다. 이제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 시스템에서 중국국제결제시스템(CIPS)으로 대체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러시아중앙은행이 서구 금융기관에 예치한 3,000억 달러 규모의 자산이 동결되자 많은 국가가 자산의 다양화(금, 통화 다양화, 위안화뿐만 아니라 확장세를 보이는 디지털 위안화 등)를 꾀하게 됐다. 전 세계 GDP의 27%를 차지하고 있는 브릭스 회원국(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공, 이집트, 아랍에미리트, 에티오피아, 이란)은 자체 통화를 만들려고 작업 중이다. 금융 네트워크가 많아지면서 서구의 독점이 무너지는 현상은 이제 거스를 수 없다.
현재로서 프랑스의 외교 정책은 급변하는 국제 관계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프랑스는 여전히 많은 서구와 유럽 연대 메커니즘에 갇혀 있기 때문에 뾰족한 수가 없다. 군사적으로 후티 반군에 맞서는 해양 동맹을 맺었지만(프랑스가 지휘하고 있음) 동맹국인 영국이나 미국처럼 예멘에 폭격을 가할 생각은 없다. 정치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은 동맹국의 지원 규모를 넘어섰고, 마크롱 대통령은 지상군 파견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5)
가치적인 면에서 가자지구 주민에 대해 프랑스가 절제된 태도와 침묵을 취하는 것은 작년 10월 7일 이스라엘과 함께 연대를 외쳤던 모습과도, 올해 4월 13일 이란의 공격 이후 보였던 모습과도 상반된다. 하마스가 학살을 저지른 이튿날, 마크롱 대통령이 반(反)하마스 연합이라는 생각을 경솔하게 꺼냈고(프랑스 외교부는 이에 놀란 듯 보였다) 아랍 세계가 들썩였다. 대부분 하마스가 잔혹하기는 해도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점점 더 ‘서구주의적인’ 입장
중동을 잘 아는 많은 외교관은 상부에 제출하는 보고서에서 남반부와 아랍세계에서 프랑스의 특이점을 찾기 어렵다며 실망감을 토로했다.(6)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서구와 유럽이 실시하는 제재 정책에서도 프랑스의 특이점은 찾아보기 어렵다. 2015년 핵 프로그램을 중단하는 조건으로 미국과 이란은 핵 합의에 도달하면서 대이란 제재가 해제됐지만, 이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일방적으로 해당 합의를 파기했다. 하지만 프랑스는 해당 합의를 지킬 능력이 없거나 지킬 의지가 없었다. 프랑스는 공개적으로 반대와 유감을 표했지만 결국 기류를 따랐다. 미국은 이란과 러시아나 다른 지역에서 해당 합의를 준수하기를 바라며 2차 제재를 가했지만, 프랑스는 현지에 진출한 자국 기업과 투자를 보호하지 못했다. 그리고 유럽연합 이사회에서 제재 대상 국가들과 비군사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제3국가들에게 가하는 미국식 조치에 찬성표를 던졌다.
이란은 시리아 다마스쿠스 이란 영사관 폭격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프랑스는 진정을 호소했지만 그 대상은 이란을 향한 것으로 보였고, 스테판 세주르네 프랑스 외교부 장관은 이란 대사를 소환했다. 프랑스는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할 가능성이 있는 미 대선을 앞두고 유럽을 설득하기보다는 국제무대에서 특정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것 같다. 프랑스는 미국의 압박과 독일을 제외한 대부분의 연합국들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고수하고 있다. 과거 마크롱 대통령은 러시아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브라질을 비난했지만, 2024년 3월 말 해외 순방 당시 브라질과 관계를 회복했다.
세계는 세력에 따라 여러 극으로 분열될 일만 남았고, 프랑스는 제자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프랑스의 외교는 ‘서구주의적인’ 입장으로 굳어졌고 ‘드골-미테랑주의’ 유산과는 더 멀어졌다. 하지만 세계가 남반부에 유리하게 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드골-미테랑주의’ 원칙이 가지는 의미는 다시 커지고 있다.
글·장 드 글리니아스티 Jean de Gliniasty
전 러시아 주재 프랑스 대사(2009~2013). 프랑스 국제관계전략연구소(IRIS) 소장. 『une diplomatie déboussolée 나침반 잃은 외교』(L’Inventaire, Paris, 2024) 저자.
번역·이연주
번역위원
(1) Philippe Devillers, ‘La conférence d’Helsinki : sécurité et coopération 헬싱키회의: 안보와 협력’,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73년 7월호
(2) Anne-Cécile Robert, ‘Origines et vicissitudes du “droit d’ingérence” ‘개입할 권리’의 기원과 변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1년 5월호.
(3) Tristan Coloma, ‘Les houthistes défient Washington 미국에 도전하는 후티 반군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4년 3월호.
(4) Cf. Agathe Demarais, ‘10 points sur les sanctions 제재에 관한 10가지 사항’, 2024년 1월 18일, https://legrandcontinent.eu
(5) Serge Halimi et Pierre Rimbert, ‘Les nouveaux chiens de guerre 마크롱의 우크라이나 파병에 박수치는 언론인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4년 4월호∙한국어판 2024년 5월호.
(6) Georges Malbrunot, Conflit Israël-Hamas : des ambassadeurs au Moyen-Orient manifestent leur inquiétude 이스라엘-하마스 분쟁: 중동지역 대사들이 우려를 표명하다’, <르피가로>, Paris, 2023년 11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