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테말라 대학, 신자유주의 유토피아의 제조 공장

2024-06-28     미카엘 포주르 | 기자

신자유주의 국가들을 언급할 때 과테말라를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중앙아메리카의 이 작은 나라 중심에 자리한 한 사립대학교가 신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죽음의 부대(정치 활동가, 반체제 인사, 정치적 숙적 등을 비밀리에 즉결 처형하거나 납치하는 무장단체를 일반적으로 이르는 말-역주)에서 활동했던 옛 단원이 자신의 전투를 다른 방식으로 이어가고자 설립한 학교다.

 

마야인들의 묘비와 꽃들이 이어진 ‘비석의 통로’를 따라 프란시스코 마로킨 대학교(UFM) 안으로 들어갔다. 16세기 과테말라의 주교였던 프란시스코 마로킨의 이름을 딴 사립대학교이다. 길 아래쪽으로는 멋진 세단 여러 대가 주차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기숙사를 지나니 “자유의 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들이 걸려 있었다.

‘생동감 넘치는’ 축제 분위기의 과테말라시티 중심지에서 떨어져 있는 이 대학교에는 수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콘크리트 건물로 뒤덮인 수도에서는 흔치 않은 중후한 붉은 벽돌 건물은 정원의 무성한 초목들과 잘 어울렸다. 이곳에서는 약 3,000명의 학생이 경제학, 법학, 국제관계학, 영화, 시각예술, 심리학, 교육학, 영양학 등 열다섯 가지 전공을 공부한다. 산카를로스 국립대학교의 경우, 2023년 기준, 전국 여러 캠퍼스에서 약 23만 명의 학생이 41개 단과대에 재학 중이다.

자유 광장, 목가적인 연못이 내려다보이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 도서관, 애덤 스미스 광장, 자유주의 소설가 에인 랜드에 경의를 표하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밀턴 프리드먼 강당 등 교내 시설에 붙은 이름들도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유토피아가 실현된 자유주의 사원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실제로 이 학교 학생들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자유 윤리 및 사회 철학 수업을 1학년 필수 과목으로 들어야 한다.

캠퍼스로 이어지는 두 개의 길 중 하나는 마누엘 아야우 길이다. 1925년 훌륭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2010년 사망한 마누엘 아야우는 면화, 석유, 세라믹 제품, 항구 건설 등으로 큰 재산을 일구었다.(1) 그는 1970년대에 국회의원을 지냈고, ‘죽음의 부대’와의 연관성 때문에 “조직 폭력 정당”으로 불린, 반공산주의 정당 국민해방운동(MLN)에 가입해 활동했다.(2)

마누엘 아야우는, ‘마로’라고도 불리는 이 학교의 설립자이다. 산카를로스 대학교의 “사회주의적 접근 방식”에 적대감을 품었던 아야우는, 사회주의적 접근 방식이 국민들 사이에 압도적인 지지를 얻는 것에 유감스러워하며 여섯 명의 친구와 함께 1958년, 경제사회연구소(CEES)를 설립했다.

 

“최고의 라틴 아메리카 대학교” vs. “학구적 측면에서는 삼류”

케인스 경제학이 지배적이고, 우파는 여전히 국가주의를 고집하고 있던 와중에 CEES는 전위적인 성향을 띠려고 노력했다. 신자유주의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루트비히 폰 미제스에 열광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야우가 내세운 “자유 사회의 윤리적, 경제적, 법률적 원칙을 연구하고 전파한다”라는 CEES의 목표는 UFM의 목표가 됐다.(3) 여러 경제 이론을 공부하고, 국제적 신자유주의 네트워크(리버티 펀드, 1978~1980년 아야우가 회장을 지낸 몽펠르랭회)에도 가입한 UFM 설립자들은 유명인사들(폰 미제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을 과테말라로 초청해 이들의 사상을 언론을 통해 전파했다.

이러한 아야우의 네트워크 덕분에 대학교 개교 허가가 났고, 재정 지원을 통해 아야우의 프로젝트는 실현될 수 있었다. 1972년 초, 마침내 마로 대학교는 문을 열고 법학, 경제학, 기업 경영학 및 신학 등 네 개 전공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프리드먼은 UFM이 “몽펠르랭회, 자유시장 및 사유재산 원칙에 완벽하게 뿌리를 둔 최고의 라틴 아메리카 대학교이며, 라틴 아메리카 내에서 매우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라며 기뻐했다.(4)

아가판투스, 유카, 종려나무로 장식된 길을 지나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15구역’에서 다니엘 아에링을 만났다. 2008년, 고국인 스페인을 떠나 과테말라에 온 아에링은 저널리즘 학사학위와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밖에 없었지만, UFM 교수로 임명돼 2009년에서 2011년까지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솔직하고 신랄한 평가를 했다.

“학구적인 측면에서 이 학교는 삼류다. 그래도 수업당 학생이 7~10명에 불과해서 개인별 맞춤 수업은 잘 이뤄진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학생들은 고객이고 교수들은 개인 코치라는 말을 공공연히 듣는다.” 프리드먼과 달리 아에링은 “UFM의 영향력은 아주 미미했고, 역동적인 지식의 장도 아니었다. 이론에 관해 이야기하지만,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않는다”라고도 말했다. 정말일까?

UFM의 교수를 역임했던 경제학자 우고 마울 리바스를 만났다. 자신이 참여하고 있는 싱크탱크 사무실에 있던 그는 “UFM의 영향력은 크고, ‘워싱턴 합의(미국과 국제 금융 자본이 미국식 시장 경제 체제를 개발 도상국의 발전 모델로 삼게 한 합의-역주)’라는 근본적인 기반을 갖고 있다”라며 아에링과 정반대 주장을 했다. 또한, 1990년대 UFM의 제안으로 이뤄진 과테말라의 개혁들에 관해서도 설명하기 시작했다.

“에너지 부문 민영화, 통신 부문 자유화, 국립 은행의 대출 금지, 관세 및 소득세 인하, 자유 외환 거래 등 UFM이 없었다면, 나처럼 이 개혁을 주도한 이들조차, 개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취재진이 후안 알베르토 푸엔테스 나이트 전 재무부 장관(2008~2010, 중도좌파)에게 질문했을 때, 전 장관은 “이곳에는 세계은행의 압력이 없다. 개혁 시도는 민간부문에서 시작됐다. 그들의 제안은 미주개발은행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었다”라고 인정했다. 

부유한 동네를 벗어나 무너져가는 벽과 갈라진 보도가 즐비한 ‘2구역’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시사잡지 <엘옵세르바도르>를 만드는 학자들의 독립 단체가 있다. 이 단체의 총괄 코디네이터인 페르난도 솔리스는 “UFM의 영향력은 호르헤 세라노 엘리아스 대통령 시절(임기 1991~1993년)에 두드러졌고, 알바로 아르수 대통령 정부(임기 1996~2000년)에서 민영화 계획과 함께 구체적으로 드러났다”라고 설명했다. 

 

싱크탱크라면서 시대에 뒤진 지식만 전달

원칙적으로는 정부를 경계했던 아야우는 늘 정치계와 연결고리가 있었고, 1994년에는 정부의 민영화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90년대부터 기업가들이 정치계로 뛰어들었고, UFM은 과테말라의 주요 싱크탱크로 자리매김했다.” 2000년대 말, 아야우는 한발 더 나아가 ‘프로레포르마’ 프로젝트까지 추진했으나 실패했다. “의원들을 종신 임명하는 ‘능력주의’ 상원 설립, 법률에 유효기간 설정, 정당 체재 재검토 등 아야우는 ‘하이에크식’으로 권력을 통제하는 방법을 찾으려 했다.”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않았던 아야우는 “민주주의를 절대적인 목표로 생각하지 않는다. 자유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역시 궁극적 목표가 아니다”라고도 말했다.(5)

UFM 교수 대부분이 학교의 강의 수준이 우수하다고 말했고, 마울은 제자 중 일부 학생들이 프랑스의 그랑제콜 고등상업학교(HEC), 하버드, 버클리 대학교 등으로 진학했다는 사실을 강조했지만, UFM은 국제 대학교 순위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지 못한다. 교수 자격으로 박사학위를 요구하지도 않고, 학생들에게 박사과정 공부를 권유하지도 않으며, 연구에 투자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UFM을 포함해 여러 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는 가브리엘 사바레타(가명)는 이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연구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학문은 정체되고, 교수들은 시대에 뒤진 지식만을 전달한다.”

‘10구역’에 위치한 고급 쇼핑센터의 한 서점에서 UFM 졸업생이자 교수였던 루시 로드리게스를 만났다. 그녀는 2006년 몽펠르랭회 총회에서 UFM 대학을 알게 됐다. 낙수 경제와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신화를 버리고 돌아온 그녀의 평가는 혹독했다. “UFM에는 학문적 엄격함이 없다. 교수들은 표면적인 이론에만 멈춰있다. 경제 개념들을 왜곡하고, 어떤 종류의 문제든 상관없이 해결책은 민영화와 자유화라 말한다. 그 결과, 학생들은 비판이나 분석 없이, 이미 정해진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로드리게스는 모순도 지적했다. “UFM에서는 국가의 역할을 제한하자고 말하면서 국가와 경쟁할 수 있는 대상을 도입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UFM에는 금기 사항도 있다. 아에링에 따르면, “특정 자본주의가 누리는 특권 및 국가와의 관계에 대해 지적했더니, 학교 측에서 내 강의 시간을 줄여버렸다. 독과점을 보호하는 반(反)자유주의법과 반(反)경쟁법에 대해서도 UFM에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아야우는 “우리는 장기적으로는 사상이 세상을 지배한다고 확신했다. 프란시스코 마로킨 대학교의 책임자들과 친구들이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택한 방법은 우리의 미래 지식인 지도자들을 제대로 교육하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6) 신고전파종합 경제학자인 에드거 밸셀 역시 “UFM은 과두정치를 섬기게 될 미래의 기업지도자 또는 정치지도자를 생산해낸다”라고 설명했다. 이 주장에 부합하는 상징적인 인물은 바로, UFM에서 기업 경영학을 전공한 후 경제대학 학과장을 지냈던 호세 라울 곤살레스 메를로다. 그는 2012년, 유력 가문인 노벨라가에서 소유한 시멘트 분야 독점 기업 ‘세멘토스 프로그레소’의 총괄 책임자 자리에 올랐다.

 

자유주의에만 관심이 있는 대학교 

파블로 메넨데스(가명)는 UFM이 부상한 것은, 1980년대 공립대학교의 발전에 대한 반발이라고 추측했다. “공립대학교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였다. 어떤 이들에게는 처음으로 좌파의 사상을 접하게 되는 곳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엘리트와 좌파 사상 혹은 진보주의 사상의 연결고리를 끊어야 했다. 이것이 바로 UFM의 존재 이유다. UFM은 대학교가 아니라 종교학교나 마찬가지다!”

다니엘 아에링은 “마로킨 대학교는 과테말라에 관심이 없다. 자유주의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라고 비꼬았다. UFM에서는 여전히 외국인 교수들과 스페인 출신 총장을 채용하고(7), 파나마(2017)와 마드리드(2018)에는 분교를 설립했다. 또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페루의 세계적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바츨라프 클라우스 전 체코 대통령, 미국 경제학자 제임스 뷰캐넌,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전 스페인 총리,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고문을 지낸 트로이 케네스 크리브 주니어 등 최고 권위자들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이런 사실들만 봐도 UFM은 항상 국제 자유주의 네트워크와 연결돼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UFM이 초청했던 유명인사 중에는 칠레의 호세 피녜라 에체니케(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정부 시절 장관, 고 세바스티안 피녜라 전 대통령의 형제), 그리고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 세 명의 학자 즉, 스페인의 자유주의 경제학자 헤수스 우에르타 데소토, 아르헨티나의 알베르토 베네가스 린치, 마르틴 크라우세도 있다. UFM이 “가장 훌륭한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학자 중 한 명”이라고 소개했던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 역시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인 2018년 7월, UFM에서 개최한 케인스 경제학에 반대하는 여러 콘퍼런스에 참석했다.

즉석에서 취재진의 가이드를 자처했던 롤란도 O.(가명)는 우리가 캠퍼스와 몽펠르랭 산책로를 걷는 동안 UFM의 역할을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의 성공은, 실수와 잘못된 결정을 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50년 전, 아야유가 생각했던 이 대학교의 사명은 과테말라에 만연한 빈곤을 퇴치하는 것이었다. 과테말라는 여전히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높은 빈곤율을 나타내고 있다. “빈곤이 줄지 않는 상황이 답답하지 않은가?”라고 롤란도에게 묻자,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아야우의 사상이 승리할 것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글·미카엘 포주르 Mikaël Faujour 
기자, 국제예술평론가협회(AICA)회원. 중남미의 정치와 예술 등에 관한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번역·김자연
번역위원


(1) Luis Solano, 『Guatemala, petróleo y minería en las entrañas del poder』, Infopress Centroamericana, Guatemala, 2005.
(2) Cf. Quentin Delpech, ‘Des usages improbables de l’économie? 경제의 불가능한 용도?’, Actes de la recherche en sciences sociales, Seuil, Paris, n° 184, 2010.4.
(3) Manuel Ayau Cordón, ‘Mis memorias y mis comentarios sobre la fundación de la Universidad Francisco Marroquín y sus antecedentes’, Universidad Francisco Marroquín, FISIC/IDEA, Guatemala, 1992.
(4) 로즈 프리드먼, 밀턴 프리드먼과의 인터뷰, 2002.10.15, https://newmedia.ufm.edu/
(5) ‘The Peculiar Case of a U.S. Embassy Attacking a Free-Market Educator in An Underdevelopped Country’, 온라인 열람 가능, https://muso.ufm.edu
(6) Quentin Delpech가 인용, op. cit.
(7) 가브리엘 칼사다 알바레스는 오스트리아학파 스페인 경제학자로 2013년부터 2021년까지 UFM 학장을 맡았다. 미제스 연구소 및 몽펠르랭회 회원이며, 스페인의 싱크탱크 ‘후안 데 마리아나 연구소’의 회장이자 설립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