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난민 통제에 영향을 끼친 인종주의 문학

2024-06-28     뱅상 베르틀리에 | 작가

지난 4월 10일, 유럽의회 의원들은 유럽연합(EU) 국경 통제를 강화하는 이민 및 난민 협약을 채택했다. 〈마니에르 드 부아르〉 최근호는 이방의 외국인이나 기후 난민의 유입이 두려워 바리케이드를 치고 살아가는 서구 세계를 조명한 바 있다. 이런 상상을 품게 된 데에는 한 문학 작품이 주목할 만한 역할을 했을 수 있다.

 

‘백인 대체론(grand remplacement)’. 간단하고 효과적인 개념이다. 불과 몇 년 사이, 모든 나라의 민족주의자들이 사용하면서 현대 신화의 반열에 오른 이 표현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이 질문은 ‘백인 대체론’과 관련한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두 가지 답을 떠올리게 한다. 첫 번째는 순전히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로, 인터넷을 검색해보거나 별로 추천할 만하지 않은 몇 작품만 조사해 봐도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백인 대체론’이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은 르노 카뮈(Renaud Camus)로 알려져 있다. 아방가르드 작가인 그는 1970~1980년대에 문단의 호평을 받았으나, 반유대주의 성향과 관련해 물의를 빚으면서 2000년 무렵 명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는 확실히 우경화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실제로 한동안 그렇게 행동했다.(1) 하지만 이런 논란도 그의 지지자들이 소규모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는 2002년 ‘무해당(Parti de l’In-nocence)’을 창당했는데, 이 당은 ‘유해하다(nocence)’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관한 성명을 다수 발표하고, 주로 이민과 ‘국민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백인 대체론’, 문학적 차원과 정치적 논리로 구성

이 신화의 이데올로기적 원형은 2009년 4월 르노 카뮈가 무해당의 온라인 포럼에서 반(反) 반인종주의자(anti-antiracistes)의 ‘말이, 좋은 말이 부족함’을 자신의 커뮤니티에 호소했을 때부터 이미 존재했다. “보다 효율적인 용어를 논쟁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훨씬 적절하다고 봅니다. 좋은 의견 있습니까?”(2) 우리는 이 ‘성찰’의 결과가 어떠한지 잘 알고 있다. 즉 ‘백인 대체론’이라는 표현은 유희적이고 문학적인 차원(인종차별적 신조어의 집단적 창조)과 보다 정치적인 논리(가장 효율적인 표현을 찾는 것)를 엮어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르노 카뮈가 외국인이 밀고 들어와 백인들의 서구가 사라질 거라고 최초로 예언한 사람은 아니다. 예를 들어 밧 예올(Bat Ye’or)의 『유라비아. 유럽-아랍의 축(Eurabia: The Euro-Arab Axis)』(Fairleigh Dickinson University Press, Vancouver, 2005)이나 크리스토퍼 콜드웰의 『유럽 혁명에 관한 고찰: 이민, 이슬람, 서구(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Europe: Immigration, Islam, and the West)』(Doubleday, New York, 2005) 같은 에세이들이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3)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대체로 문학이 인종차별주의 신화가 등장하는 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 이로써 ‘백인 대체론’의 또 다른 계보가 성립되었다.

19세기 말, 우리는 실제로 ‘황화론’이 유행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황화론은 유럽과 중국(또는 유럽과 아프리카) 관계를 뒤바꿔놓았고, 백인을 죄의식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식민지화 조장에 기여했다.(4) 이 세기말 신화는 여러 대중소설에 단초를 제공했다. 예를 들어 1900년에 앙리 드 누산(Henri de Noussane)은 연재소설 『2000년의 중국과 유럽(La Chine et l’Europe en l’an 2000)』을 출간했다. 에밀 드리앙(Émile Driant)은 당리(Danrit)라는 필명으로 1894년에 발표한 『흑인의 침략』으로 큰 성공을 거둔 뒤, 1904년에 『황인의 침략』을 출간했다.

또한 퇴폐적 미학으로 황화론을 전복시킨 피에르 로티나 장 로랭의 작품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 장 로랭의 『레 노론소프(Les Noronsoff)』(1902)에서 죽어가는 주인공은 “아시아인들이 미래에 침략해올 것”이라거나 “아틸라의 훈족과 칭기즈칸의 타타르족, 모든 황인종 유목민들이 니스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하고 훔치고 학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영불해협 너머에서도 같은 신화가 1912년 색스 로머(Sax Rohmer)의 악당 캐릭터 ‘푸만추’(Fu-Manchu) 박사의 탄생에 영감을 주었다.

1945년 이브 강동은 『최후의 백인(Le Dernier Blanc)』이라는 기만적인 제목의 소설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는 백인들이 서로를 몰살시키는 상황을 상상한다. ‘백인 소멸’이라는 주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끊이지 않고 등장했다. 작가 루이 페르디낭 셀린이 세상을 떠나고 8년 뒤인 1969년에 발표된 『리고동(Rigodon)』은 독일 제3제국의 몰락을 다루면서, 이를 다른 인종의 침략을 받아 몰락한 비잔틴제국과 계속해서 연결 짓는다.

여기서 그는 황인종, ‘아프리카아시아인’, 브레스트(유럽 대륙 서쪽 끝에 있는 프랑스 도시-역주)의 중국인들이 침략해올 것이라고 내다봤다. 모든 것이 “우리의 위대한 운송업자(Grands-Transitaires)”의 무관심 속에서 “2000년에는 백인이 사라질 것이고 근심할 일도 없을 것이다….” 이 표현은 1938년에 셀린이 출간한 소책자 『시체들의 학교(L’École des cadavres)』에 나오는 ‘모든 종류의 고기를 실어나르는 운송업자’, 즉 육탄(肉彈)을 거래하는 지도자들을 연상시키지만, 르노 카뮈가 생각해낸 ‘백인 대체론’과도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공명한다. 

 

에밀 시오랑, “천년의 경계 끝에 문이 열린다”

그러나 셀린의 생물학적 인종주의는 공산주의에 대한 강박관념과 독립전쟁의 맥락에서 생각해야 한다. 1973년에 소설가 장 라스파유(Jean Raspail)는 『성자들의 진지(Le Camp des saints)』에서 훗날 인도인들의 침략을 받는 서구사회를 묘사했는데, 식민지화에 대한 생각은 이때 이미 더 멀어진 것처럼 보인다. 이 공상 소설은 사실상 하나의 전환점을 의미한다. 이 소설의 형식이 ‘황인종’, ‘흑인종’ 혹은 ‘유대인’의 위험을 다룬 문학과 연결된다면(소설은 백인종의 소멸을 전쟁 장면을 통해 서사시적으로 극화한다), 그의 인종주의는 식민 정복을 선동하기보다는 이민 거부를 장려하는 기능을 한다.

라스파유는 그의 왕정주의자의 감수성으로 볼 때 당시 (인민전선의 경쟁 상대인) 새힘당(Parti des forces nouvelles)과 가까웠다. 이후 특히 실뱅 테송은 “죽어가는 태양의 불꽃 속에서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응시하는 순간 삼켜지고 추락하는 세계에 대한 그의 미학”(5)에 경의를 표하며, 라스파유를 하나의 아이콘으로 추켜세웠다. 그러나 라스파유가 제국주의적 인종주의에서 반이민 인종주의로 옮겨가면서 정확히 미적 특징의 변화가 뒤따랐다. 즉 이제 인종주의 작가들은 식민지 현실과 전혀 다른 서사시적이고 극단적 비관론을 담은 줄거리의 소설보다는, 유럽 이외 지역으로의 이민 같은 실제 현상을 다루기 위해 논픽션 형식의 에세이를 더 선호하게 된다.

에밀 시오랑은 루마니아에서 보낸 젊은 시절, 파시즘과 반유대주의 성향의 철위대(la Garde de fer)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환멸 어린 격언 덕분에 우아한 허무주의 에세이스트로 프랑스에서 명성을 얻은 뒤, 소위 ‘문명화된’ 새로운 우파의 선구자인 알랭 드 베노이스트의 주장에 관심을 가졌다.(6) 1977년 그는 〈누벨 르뷔 프랑세즈〉에 ‘두 가지 진실’이라는 글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그는 지하철에서 마주친 이민자들의 풍경에서 영감을 얻은 인상을 적었다. “오늘날 이민은 이제 밀도 높은 이동이 아니라 연속적인 침투로 이루어진다. 사람들은 ‘영토’라는 개념에 비굴한 자세를 취하기에는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너무 탁월한 ‘원주민들’ 사이로 조금씩 스며든다. 천년의 경계 끝에 문이 열린다….”

 

인종주의 신화를 없애는 것은 문학의 책임

리샤르 밀레(Richard Millet)는 반동적 성향 탓에 요즘은 주목을 못 받지만,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오랫동안 유명 대표 작가 자리를 지켰다. 그는 여러 차례 시오랑과 비슷한 무대 구성을 선보였다. 작가는 지하철이나 광역급행철도(RER)에서 “흑인, 마그레브인, 파키스탄인, 아시아인 및 다양한 혼혈인”(7)이 뒤섞인 군중 속에서 자신도 “유일한 백인”(8)(지적장애 프랑스인, 레즈비언, 레게머리를 한 청년이나 베일을 쓴 백인여성 제외하고)이었다고 묘사했다.

따라서 ‘백인 대체론’은 야만족 침략의 서사시적 수사(修辭)를 우수 어린 또 다른 침투로 대체하려 한다. 반면 소설이 상상을 위한 구조적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면, 에세이 장르는 직관에 가치를 부여하는 데 적합하다. 예를 들어 질 들뢰즈는 1977년 6월 20일자 〈르몽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상의 내용이 빈약할수록, 사상가가 중요성을 얻을수록, 발화 주체는 공허한 진술에 대해 스스로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인구통계학자 미셸 트리발라처럼 공식 통계를 통해 ‘백인 대체론’을 합리화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존재하는 이상, 에세이스트가 사회과학 전문가의 합리적 사고에 접근하는 것을 막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겠는가? 확실히 이런 학술적 작품들은 국민의 변화가 있다 해도 그것은 내일을 위한 것이 아니거나, 혹은 공간적 분리 같은 다른 요소들을 고려하지 않고 숫자를 해석하면 그 숫자는 무의미하다는 점을 대부분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9) 그러나 더 세세하게 짚어봐야 할 문제는 (‘유럽 외 이민’으로 인한) ‘인구통계학적 변화’의 구체적 의미다.

그 이유는, 여기서는 숫자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민감한 정도다. 따라서 그 숫자를 어느 쪽도 인정하지 않기보다는, 반(反) 서사의 ‘대체론적’ 신화에 반대해야 한다. 탈문명화를 선언하는 사람들에게 영화제작자로 사회학자였던 기 드보르의 아이러니로 답해야 한다. 즉 탈문명화는 기정사실이고, 이민자들에게는 그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말이다.(10) 금발머리의 소멸을 우려하는 사람들에게는, 배우 장 가뱅보다 국민연합의 조르당 바르델라와 더 닮은 스페인이나 이탈리아의 갈색머리가 금발머리를 이미 대체했다는 점을 일깨워줘야 한다. 사회학적 지표는 그들에게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민감한 가치들과 불가분의 관계다. 이런 점에서 문학이 만들어낸 인종주의 신화를 되도록 많이 없애는 것은 여전히 문학의 책임이다.

 

 

글·뱅상 베르틀리에 Vincent Berthelier
작가. 『반동적 스타일. 모라스에서 우엘베크까지(Le Style réactionnaire. De Maurras à Houellebecq)』(Éditions Amsterdam, Paris, 2022)의 저자.

번역·조민영
번역위원


(1) Maurice T. Maschino, ‘Les nouveaux réactionnaires 새로운 반동 세력’,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02년 10월호.
(2) ‘Questions de vocabulaire 어휘에 관한 질문’, 2009년 4월 5일, www.in-nocence.org 
(3) Raphaël Liogier 라파엘 리오지에, ‘Le mythe de l’invasion arabomusulmane 이슬람의 유럽 정복은 가능한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4년 5월호, 한국어판 2014년 7월호. 
(4) François Pavé, 『Le Péril jaune à la fin du XIXe siècle : fantasme ou réalité? 19세기 말의 황화론: 환상인가 현실인가?』, L’Harmattan, Paris, 2013. Jacques Decornoy, ‘Quand l’homme a peur de son nombre 인류가 자신의 숫자를 두려워할 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1990년 6월호. 
(5) Emmanuel Fontaine, ‘Retour des steppes, entretien avec Sylvain Tesson 초원으로의 회귀, 실뱅 테송 인터뷰’, 〈Les Épées〉, n° 19, Asnières-sur-Seine, 2006년 4월. François Krug, 『Réactions françaises. Enquête sur l’extrême droite littéraire 프랑스의 반동. 문학계 극우파에 대한 조사』, Seuil, Paris, 2023에서 인용. Evelyne Pieiller, ‘La réaction, c’était mieux avant 작가들의 반동, 옛 시절에 대한 향수?’,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3년 8월호, 한국어판 2023년 10월호.
(6) Alexandra Laignel-Lavastine, 『Cioran, Eliade, Ionesco : l’oubli du fascisme. Trois intellectuels roumains dans la tourmente du siècle 시오랑, 엘리아데, 이오네스코: 파시즘의 망각. 세기의 혼돈에 빠진 세 루마니아 지식인』,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Paris, 2002. 
(7) Richard Millet, 『Arguments d’un désespoir contemporain 이 시대 절망의 논증』, Hermann, Paris, 2011.
(8) Richard Millet, 『L’Opprobre. Essai de démonologie 타락. 악마학에 관하여』, Gallimard, Paris,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