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사람과 흑인의 정체성, 그리고 바그너

크리올리티의 결정체

2024-06-28     알리오샤 왈드 라소브스키 | 작가

앤틸리스 제도 출신의 시인이자 철학자였던 에두아르 글리상은 문학이 물리적·정신적 차원의 새로운 경계의 시학을 안겨주며, 소설을 쓴다는 것은 서로를 자석처럼 끌어당기는 현실과 상상 사이의 뜻밖의 연결고리들을 그려내는 것이라고 보았다. 오늘날 앤틸리스의 여러 작가들이 보여주고 있는 연결고리야말로 바로 이러한 결정체이다.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아버지와 앤틸리스 과들루프섬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제니퍼 리샤르는 기존 출간작인 『우리의 왕국은 이 세상에 없다(Notre royaume n’est pas de ce monde)』와 『자유의 길(Le chemin de la liberté)』(이상 알뱅 미셸 출판)에 이어 첫 추리소설 『긍정을 뜻하는 부정(Un non qui veut dire oui)』을 통해 독자들을 소앤틸리스 제도 중앙에 위치해 있는 마리갈란트섬으로 데려간다.(1)

이야기는 “바스테르에서 사기를 일삼다가 대도시로 향한” 강도 벨포르 퀴라세가 수감된 생마르탱드레의 교도소에서 시작된다. 그는 군경 출신의 아들 아르샹주에게 강간죄로 수감된 다른 재소자의 무죄를 입증해달라고 부탁한다. 이에 “뜨겁게 달군 쇠로 찍은 낙인과도 같은 이름”을 지닌 아르샹주(‘Archange’에는 대천사라는 뜻이 있음-역자)는 조사에 착수했고 마침내 선조들의 땅인 과들루프로 떠난다.

과들루프 푸앵타피트르에 도착한 그는 사라졌던 감각들을 되찾는다. 한 상인이 그에게 계피와 바닐라를 입힌 케이크를 내놓았을 때 그는 거절하는 시늉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긍정을 뜻하는 부정”이었다. 갈색빛 해초들과 독한 술, 거짓과 배신 사이에 이르기까지, 아르샹주는 환경과 사회문제의 고발은 물론 “뼛속까지 썩어버린 정치인”들을 비난하며 포기하지 않는다.

 

한편 크리올리티 운동(크리올의 문화적 요소가 담긴 문학과 어학의 가치를 높이자는 운동. 라파엘 콩피앙, 차트릭 샤모아조, 그리고 『크리올리티 찬사(Éloge de la créolité)』(1989)를 쓴 장 베르나베가 주동했다)의 창시자 중 한 명인 라파엘 콩피앙은 소설 『긴 손톱의 그랑종글(Grand-Z’Ongle)』을 통해 다양한 인물들을 그려냈다.

미용사 테르튈리앙, ‘동방의 마력’이라는 가게를 운영하는 시리아 출신 압달라, 마르티니크의 모른발라이에서 온 의대생 다미앙, 거친 말투의 방데 출신 크리올 아이메릭 신부, 군것질거리나 연 따위를 파는 중국인 상인 호샹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2) 책 속에서는 주사위 던지기, 가장 행렬, 라쟈(브라질의 카포에라와 비슷한 마르티니크의 전통 무술) 경기, 그리고 전통 주술 등이 생명을 얻는다.

등장인물들의 중심에 섬의 대주술가이자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다스리는 ‘그랑종글’이 있기 때문이다. 터무니없을 정도로 긴 손톱이 달린 그의 두 번째 손가락은 실제로 다른 이들을 위협하는 무기로 쓰이는 한편 ‘악마 아들의 화신-왕국’에서는 밤이 되면 그 누구도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알 수 없게 된다. 콩피앙이 ‘허구적 자서전’이라고 설명하기도 한 이 소설은 유명한 주술가의 일대기를 담아내며 저자 자신이 믿는 ‘주술적 차원의 크리올 종교’를 드러낸다.

 

롤랑 브리발의 액자식 소설 『리하르트 바그너의 마지막 나날들(Les derniers jours de Richard Wagner)』은 영감을 잃은 한 작가가 발견한 편지들의 내용을 전하는 이야기다.(3) 과거 앤틸리스 제도에서 노예로 있다가 1848년 노예제 폐지 이후 해방되어 유럽으로 건너간 바르나베 모렐이 마르티니크에 남아있었던 그의 누이와 주고받은 편지들이었다. 1882년 바르나베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하인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곤돌라를 타고 베네치아의 그 웅장한 벤드라민 궁전에 도착한 그는 바이로이트에서 온 자신의 주인을 밤새워 보살폈다. 바그너의 곁에는 장인인 프란츠 리스트, 아내 코시마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바그너가 길 한복판에서 휘청거리다가 하인에게 몸을 기댄 그때부터 두 사람의 관계에 변화가 일어났다. 경멸과 무시로 일관하던 바그너가 이 흑인 하인에 대해 우정을 가지고 그를 점점 신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편지를 통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작가는 출판사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한다. “흑인의 정체성”, “섬사람의 정체성”, 그리고 반유대주의자였던 바그너의 변화 등 모든 연결고리가 서로를 끌어당긴 것이다.

 

 

글·알리오샤 왈드 라소브스키 Aliocha Wald Lasowski
저서 『제임스 본드에 관한 다섯 가지 비밀』, Max Milo, 파리, 2020.

번역·김보희
번역위원


(1) Jennifer Richard, 『긍정을 뜻하는 부정 Un non qui veut dire oui』, Caraïbéditions, Petit-Bourg (Guadeloupe), 2023, 336 pages, 17.25 euros.
(2) Raphaël Confiant, 『그랑종글 : 보이지 않는 것들의 주인 Grand-Z’Ongle : Le maître de l’invisible』, Caraïbéditions, 2023, 432 pages, 21.30 euros. 저자의 다른 저서로는 다음이 있다 : 『샤를 보들레르의 어두운 뮤즈 La Muse ténébreuse de Charles Baudelaire』, Gallimard, coll. « Folio», Paris, 2023.
(3) Roland Brival, 『리하르트 바그너의 마지막 나날들 Les Derniers Jours de Richard Wagner』, Caraïbéditions, 2023, 416 pages, 21.30 eur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