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본능적으로 인종차별주의자일까?

2024-06-28     에블린 피예에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우리는 본능적으로 인종 차별주의자이다.”

인간 본성에 관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극우파에 매료된 유권자의 주장이 아니다. 정신의학자인 세르주 티스롱이 한 말이다.(1) 이 말을 듣는 순간 우울감이 밀려온다. 그러나 계속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 앞서 언급한 ‘인간 본성’은 그 반대의 측면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과 유사한 존재와의 연결을 우선시하도록 진화론적으로 프로그래밍” 되었다 할지라도, 뇌를 단층 촬영해 본 결과 인간에겐 이를 위한 해결책이 내재해 있다. 바로 공감 능력이다. 이 능력이 그렇게 자랑할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니다. “다양한 종이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개발한 적응 방식”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인간은 “더욱더 사회적이고 협력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데도 충분히 많은 사람이 이런 다정한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못내 아쉽다. 게다가 우리가 원하는 것만큼 공감하는 태도는 “본능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이를 해결할 방법은 공감 능력을 “증폭”시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본능, 다시 말하자면 우리 유전자에 새겨진 이 좋은 본성이 때로 안타깝게 쇠퇴한 경우에 이를 개선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상식에도 맞는 방법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공감’이라는 용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공감이라는 용어는 ‘감정 이입’을 뜻하는 독일어 ‘Einfühlung’에서 유래한다. 독일 철학자인 로베르트 피셔가 1873년 그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미학 분석을 위해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로 알려져 있다. 이후 정신분석학에서 이 용어를 사용했고 그다음은 사회학에서, 결국 오늘날 모두가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필립 K. 딕 작가 소설을 즐겨 읽는 독자들에게 공감이란 오래전부터 익숙한 개념이었다. 그의 소설 속에서 로봇은 어느 곳에서나 등장하는 익숙한 존재다. 이 로봇과 인간을 원칙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공감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여전히 흐릿하다.

게다가 공감이라는 용어는 양극화, 자아도취, 정교분리원칙과 함께 사람들이 구글에서 가장 많이 검색하는 단어다. 『라루스 사전』은 간결하게 “타인의 입장에 서서 타인이 느끼는 것을 이해하는 직관적 능력”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프랑스의 『대백과사전(Encyclopaedia Universalis)』에서는 이 “내재한 능력”을 세 가지 측면에서 말하고 있다. 감정, 인간 고유의 인지, 그리고 “동기”다.

프랑스 공영 라디오 방송 <프랑스 앵테르(France Inter)>는 2019년 12월 11일 자신만의 정의를 내놓았다. “올바른 반응으로 여겨지는 것이 무엇인지 분석할 수 있는 인지적 기능”이다. 이 기능의 목적은 “항상 대립, 시기, 질투를 유발하지 않고 대화”하기 위해서, 그리고 “협력과 호의”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것은 모방, 감정 그리고 인지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진다. 세르주 티스롱 정신의학자는 간결하지만, 구체적인 연구 결과를 내놓았는데, 요약하자면 공감은 생물학적 측면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선천적인 능력”으로 “부드러운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준다. 남은 문제는 이 공감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성화되는지 아는 것이다.

 

공감이 모든 것의 해결책이 될 수 있나?

프랑스 교육·청소년부는 이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학교 폭력을 예방하려는 방안으로 학생들에게 공감을 가르치기로 했다. 학교 폭력으로 인한 어린 학생들의 자살 문제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학교 폭력 예방 “프로그램”이 1월부터 6월까지 시범 운영되어 평가를 마친 후 9월 개학하는 시기부터 전국 초등학교로 확대될 예정이다.

가브리엘 아탈 전(前) 프랑스 교육부 장관에 의하면 교사들에게 배포되는 교육 자료 서두(2)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교육은 “공동체 생활, 자존감, 타인 존중에 필수적인 능력 함양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마련되었다. 더 나아가 “본 교육의 목표는 학생들의 사회적·심리적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중독 증상 완화, 폭력 성향 감소, 건강 및 복지 향상, 학업 성취도 향상, 자신 및 타인과의 관계 강화 같은 긍정적 효과가 있다.”

우리는 이 “연구”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이 교육 도구 개발에 참여한 유일한 기관은 프랑스 공중보건 기관인 것으로 보인다. 학생들은 게임, 토론, 마임 등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판단’하지 않고 자신과 더 유연한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 가운데 때때로 생각지도 못한 가치가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한다. 예를 들어 “권력 카드놀이”를 하면서 겸손이 큰 미덕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확실히 겸손이 “공동체 생활”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교육·청소년부의 정책은 1993년부터 덴마크에서 시행한 실험에 기반을 두고 있다. 덴마크에서도 “학생들 특히 중학생, 고등학생들의 행복한 학교생활이 무너지고 있다.”(<프랑스 퀼튀르(France Culture)>, 2022년 11월 9일) 2017년 덴마크는 학교 폭력에 대항하여 강경한 법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런 법안이 얼마나 효과 있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특히 주어진 모델에 따라 개개인의 선과 악을 정의하고, 판단하고 고치고, 스스로 판단하고 고치게끔 부추기는 이런 시도가 이론의 여지가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자기 자신 그리고 타인과 평화로운 관계를 맺도록 만드는 미래 시민 교육과 상관없는 다른 영역에서 공감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살펴보면 그 모순성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공감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공감이라는 개념을 마치 간단한 프로젝트처럼 취급한다. 당신의 감정 자산의 생산성을 최대한 뽑아내라는 식이다. 88유로 21센트로 조이크(JoyK)라는 브랜드의 공감 인형을 살 수 있다. 이 인형의 목적은 “인형과 인형을 구매한 사람 사이의 감정적 연결”이다. <알츠하이머 해결책(Alzheimer Solutions)>이라는 사이트에 의하면 이 헝겊으로 만들어진 인형은 “노인의 팔 안에서 마치 진짜 아기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심지어 심장 소리도 옵션으로 선택 가능하다) 이는 “감정적 표현을 도와주고” “기억을 깨우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포브스>는 공감은 “필수적인 가치”로 회사 대표에서부터 직원에 이르기까지 이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연구에 의하면 리더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능력”(3)이라고 강조한다. 공감이야말로 “대가족”이 되는 경영 전략에 원천이 되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기업 입장에서 조금 더 솔직히 이야기해 보자면, 프랑스 공공 투자은행 비피아이프랑스(Bpifrance)는 이 “공감이라는 카드”가 고객의 입장을 잘 이해(‘파악’이라는 단어는 너무 적나라해서 피했다)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조언한다.(4) 담당 부서에서는 “고객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을 분석”한다. 이들은 “고객은 무엇을 생각할까? 고객은 무엇을 느낄까? 고객은 무엇을 듣는가? 고객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와 같은 질문에 답하려고 애쓴다. 이 대답을 아는 사람들, SNS, 인터넷 게시판, 더 나아가 AI까지 동원하여 이 질문의 답을 찾고 있다.

과연 공감이 모든 것의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이 야만적인 세상에 약간의 상냥함을 더하는 정도가 아닐까? 프랑스 경제지인 <레제코(Les Echos)>는 2022년 7월 22일 해고에 관한 기사를 다루면서 “절차와 공감을 적절히 조합하는 방법”을 배운다면 상황이 즉각 개선될 것이라고 말했다.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 하고, 충돌을 피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예시로 파업 노동자들이 절차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가브리엘 아탈은 파리교통공사(RATP) 노동자들이 파업하자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모든 프랑스인에 대해 공감 능력이 전혀 없다”라면서 분노했다.(<르 피가로(Le Figaro)>, 2022년 11월 10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 철도청(SNCF)의 “파업 노동자들은 공감 능력이 전혀 없다”라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다.(<프랑스 앵포(France Info)>, 2022년 12월 22일) 그러면 정말 이들은 이기주의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며 타인의 감정을 헤아릴 수 없는 중대한 죄를 범하는 사람들일까? 파업할 권리를 제한하고자 하는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의 제안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 발판을 마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공감의 물결과 범죄자의 마력 사이에서

분명한 것은 “과학적으로” 인증받은 이 공감이라는 개념에 이것저것이 달라붙어서 이중적으로 이용될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는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보편적인 행동”을 위하여 공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뒤에서는 자기 자신과 공동체에 해가 되는 개인의 “악덕”을 고발하는 수단으로 공감을 이용하고 있다. 인류의 번영 그리고 전반적인 안정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공감이라는 틀에 가두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기존의 흐름에 거부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다른 의도가 있는 것처럼 호도하며 하고자 하는 말을 삼키게 만든다. 정치적 혹은 사회적 투쟁을 이타주의의 부족으로 동일시하며 깎아내리는 것이다. 이 투쟁은 단지 개인적인 문제라면서 기묘하게 문제 방향을 틀어버린다. 물론 이것은 오래전부터 사용한 낡은 수법인데, 상당히 성공적으로 현대화했다. 이 수법은 어느 곳에서나 사용될 수 있다.

2023년 11월 28일에 실린 <르몽드> 기사에 따르면, 특히 프랑스 문화계에서 이스라엘보다 가자지구를 지지하는 움직임은 정치적으로 심사숙고한 결과가 아니다. “창조의 핵심 요소인 공감”이 기묘하게 비틀린 결과다. 조심해야 한다! 공감이라는 어둠에 빠질 수 있다! 공감에 빠지면 단순히 일을 그르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무력해질 수 있다. 공감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반의어가 없다고 해도 공감과 반대 선상에 있는 존재는 있다. 폭력성을 표출하는 존재, 바로 사이코패스다. 그리고 이 사이코패스가 우리를 매료시키고 있다.

연쇄 살인범을 다룬 프로그램이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도 이런 흐름과 관련이 있다.(5) 연쇄 살인범은 타인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는 놀라운 지능을 지닌 경우가 많다. 식인이라는 주제도 상당히 인기 있는 소재다.

<다머(Dahmer)>는 넷플릭스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영화 <양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Lambs)>에 등장하는 한니발 렉터는 그야말로 모든 식인 캐릭터의 기준으로 굳건히 남아있다. <나르코스(Narcos)>, <그리셀다(Griselda)>처럼 마약 거래자들이 진정한 ‘보스’로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드라마는 대성공을 거두고 있다.

공감의 물결과 거대한 범죄자가 뿜는 마력이 조화를 이룬 놀라운 결과다. 정부의 권력은 계속 확장 중이고 권력은 개인화되고 있다. 역사를 그저 “위대한 인물”의 이야기 정도로 축소하는 흐름 속에서 벌어지는 신자유주의 폭력이 난무한다.

증오를 증오하라는 반복적인 권고와 좋은 시민의 조건은 투쟁을 거부하는 것이라는 압박 속 상상의 세계에서는 아슬아슬한 긴장 상태가 이어진다. 이 세상에서는 사회적 투쟁을 거부해야 좋은 시민이 되고, 그렇지 않게 되는 순간 사회 질서를 교란하는 자요, 위험한 병자이자, 더 나아가 범죄자가 되어버린다.

그러면 좋다. 이런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은 명백하다. 지배적인 이념을 완전히 없애버리거나 코에 뿌리는 스프레이를 개발하는 것이다. 자연적으로 분비되는 호르몬인 옥시토신을 흡입하면 공감 능력이 향상된다고 한다.(6) 이것이야말로 과학적인 방법이고 연구는 현재 진행 중이다.

 

 

글·에블린 피예에 Evelyne Pieille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이정민
번역위원


(1) Serge Tisseron, 『L’Empathie 공감』, PUF-Que sais-je ?, Paris, 2024.
(2) ‘Kit pédagogique pour les séances d’empathie à l’école 학교 공감 프로그램을 위한 교육용 도구’ », ministère de l’éducation nationale et de la jeunesse, 2024년 1월, https://eduscol.education.fr 
(3) Tracy Brower, ‘Empathy Is The Most Important Leadership Skill According To Research’, <Forbes>, New York, 2021년 9월 19일.
(4) ‘Utiliser la carte de l’empathie pour développer son entreprise 회사 발전을 위해 공감이라는 카드 활용하기’, https://bpifrance-creation.fr 
(5) Laurent Denave, 『L’Inhumanité. Serial killers et capitalisme 잔인성, 연쇄살인마와 자본주의』, Raisons d’agir, Paris, 2024.
(6) Marcel Hibert, ‘Ocytocine mon amour 옥시토신, 나의 사랑’, <humenSciences>, Paris,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