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축, 보여주기 위한 행위인가?
순수예술과는 다르게, 건축의 의미는 단 하나밖에 없는 환경 속에 흔적을 남길 유용한 대상물을 구상하고정확한 기능을 수행하는 데 있다. 그럼에도 지난 몇십 년간 두 사명에는 무관심한 채 개념적이기만 하고 자기도취에 빠진 작품이 늘어나는 것을 보아왔다.
픽셔너리(Pictionary·'그림+사전'의 조합어로 그림-단어 게임을 뜻함) 보드게임에서는 한 조가 상이한 두 역할을 하는 참가자들로 구성된다. 한쪽에는 말없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 다른 쪽에는 그 그림이 무엇을 표현하는지 한 단어로 알아맞혀야 하는 사람. 여기에서 유추 작용이 풍자적 차원까지 이르게 된다. 그리는 형상은 해당 단어에 대한 최대 근사치로의 시각적 표현이 되도록, 가능한 한 그 단어에 근접한 것이어야 한다.
20여 년 전부터 도시 풍경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건축물들은 미디어를 통해 유명해졌다. 그들은(그것을 지은 건축가들은) 자신의 놀라운 성공 비결을 곧잘 '영감의 형상화(Figuration)'로 비유하곤 한다. 도미니크 페로가 설계한 파리 프랑스 국립도서관(BNF)의 직각으로 펼쳐진 '네 권의 책'에서, 페들 토르프와 워커(PTW) 건축사무소가 설계한 베이징올림픽 수영센터 수리팡(水立方·Water Cube)의 '거품 외관'을 거쳐, 장 누벨의 바르셀로나 수도관리국 본사 아그바르 타워의 '땅에서 솟은 결정체'까지, 이 건물들의 핵심은 전체 모습으로 보여주기보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소재'(Motif) 때문에 오히려 빛을 잃고 있다. 그 건물들은 이야기의 시각적 표현이며, 광고 방식을 따른 말놀이 같은 물체일 뿐이다. 거기에서 외관은 공연물이 되고 내부 공간은 무대의 이면이 된다.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건축 실무는 형상의 모방이 아니라 측량의 문제였다. 그런데 갑자기 건축가들이 형상을 열망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르코르뷔지에의 '시적 반향을 일으키는 사물들'이나 핀란드 건축가 알바 알토의 어렴풋한 지리학적 추억처럼 상상의 세계를 위한 활력소도 아니고, 연구 과정의 촉발제도 아니다. 요컨대 시작 단계로서가 아니라 결말로서, 쉽게 알아볼 수 있고 의사 전달이 가능한 상을 꿈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이것은 소비자인 시민들의 눈과 평론가들의 문필 활동을 사로잡기 위한 그럴듯한 공학적 외관으로 포장됐다.
오랫동안 건축에서 핵심이라 여겨졌던 원칙과의 결별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원칙에 따르면, 건물은 '공간과 시간'(Espace-Temps)의 펼쳐짐에 따라 모습을 드러내고 이해되기에, 부분들의 정연한 배치는 공간 속 시각의 여정을 안배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이는 건물의 미적 잠재력을 한 번의 짧은 시선에 탕진하지 않고 우리의 인식을 잠정적으로 유보시킨 뒤, 공간을 경제적으로 분배하기 위한 것이다. 반면 지금 시대의 건축은, 서론과 본론이 따로 없는, 결국 대체로 아주 단순한 이야기의 물리적 구현체가 된다.
예전에는, 시간 편성표가 확대된 듯이 건축물의 도면이 '분할'(Partition)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시인 폴 발레리는 그리스 건축가 에우팔리노스를 언급하면서 "좋아하는 물건이 사람을 부추기듯이 나의 신전도 사람들을 자극해야 한다"고 쓰고 있다.(1) 분할 속에서는, 전체의 단일성이 외관의 획일성에 의해 확보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부분들 사이의 비례관계에 기초한다. 반대로 건축물이 하나의 기호로 간주될 때는, 다시 말해 한 개념의 문학적 표현으로 간주되면(예를 들어 수영장-물-거품 한 통으로 만들어진 매끄럽고 균일한 수리팡의 거품 외관) 더 이상 건축 윤곽의 긴밀한 결합을 가능케 하는 구성은 없게 된다. 다만 벽지처럼 다루어진 외관의 한 면이나, BNF처럼 문자 그대로 그 대상물을 취한 건축적 형태로 묘사된 '이야기'만 남는다.
대체로 우리는 이 도구화의 시점을 장 누벨의 파리 라데팡스 지역을 위한 계획안 '무한의 마천루'가 발표된 1989년으로 잡는다. 건설된 적이 없음에도 이 건물은 전파를 많이 탔다. 기저 부분에는 짙은 색의 창유리를 사용하고 층이 올라갈수록 점점 더 옅은 색의 유리를 사용하는 것으로 계획됐다. 이렇게 단계적 변화를 줌으로써 이 건축물은 마치 구름과 뒤섞인 듯한 인상을 주도록 돼 있었고, 거기에서 건물 이름도 나왔다.
흔히 이미지로 헤게모니를 알리는데, 여기에 건축 분야의 쇠퇴 이유 중 하나가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이미지들은 발상과 소통이 결합하는 서술과 은유를 위한 도구들일 뿐이다. 인쇄술로 인해 구식이 돼버린 중세 건축에 종말을 알렸던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 드 파리>의 '새로운 것이 옛것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책이 건물을 죽일 것이다'- 라는 대사가 마치 오늘날 그 진가를 제대로 발휘하는 것 같다. 건축 창작에서 원본 격인 텍스트의 개입으로, 형상은 이야기의 권위를 업고 장소의 구조와 용도의 필요성을 등한시한다. 건축 계획안을 설명하는 이야기가 한번 마음을 사로잡은 이상, 세워진 건축물이 그 제작 개념으로 보여주지 못한다 해도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센다이 미디어테크의 '투각 기둥들'은, 건축가 이토 도요에 따르면, 물속에서 흔들리는 수초들의 움직임을 연상시켜야 하는데, 실제로는 유리 방화 내벽 뒤에 갇힌 바구니처럼 보인다. 나타나는 현실이 자기선전의 말에 못 미치는 것이다.
2010년 상하이 세계박람회를 계기로 계획된- 그리고 계획으로만 남은- '런(人) 호텔'은 이름과 형태에 '사람'을 의미하는 표의문자를 내세운다.(2) 이는 전형적인 닮은꼴 계획안(프로젝트)으로 부를 수 있다. 이 '닮은꼴 계획안'은 미리 정해놓은 형상을 따름으로써 건축 면적에 관한 논란을 피하는 동시에 자신들이 선전하려는 핵심을 시각화한다.
이 건물은 지금은 널리 알려진 건축 방법의 상징적 사례다. 거주 공간을 등한시하는 이런 설계는 현대문화의 역행적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때 건축물은 빈 공간이 아닌, 형태(벽과 같이 가득 찬 부분)를 그린다. 그런데 공간을 그린다는 것은 빈 공간을 그리는 것으로, 가득 찬 부분은- 때로는 건축된 형태로- 이 빈 공간을 위해 구상된다. 반대로 건축가가 기호적 형태들(닮은꼴 계획안)을 설계할 때의 빈 공간은 형태를 만드는 게 아니라, 아예 그것으로부터 나온다. 예를 들어 런 호텔 입구 부분의 크기와 비율은 사용자들의 필요에 의해 결정된 게 아니라 애초 계획된 외관의 이미지를 완성하기 위해 결정됐다.
이는 흔히 과학적 요소와 감각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 '빈 공간과 빛의 과학'을 대립시키는 것과는 무관한 일이다. 돈 많은 건축사무소들이 몰두하는 과학기술의 난맥을 넘어, 대개 딱딱한 정밀과학에서 끌어오는 개념에 대한 건축적 행위의 세밀함이, 덜 체계적인 과학이지만 미적 경험의 본질인 질적 정밀함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이 '감각적 수학'은 르코르뷔지에에게 소중한 것이었는데, 그에게 건축은 계산이 끝나는 그곳에서 시작된다.
두 전개 방식의 차이점은 무엇보다 자유의지의 두 유형에 대한 구분을 가능하게 해준다. 건축 계획안의 목표는 자유의지- 작가 자신의 의사- 로 필요한 것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이 자유의지가 건물의 성공을 일련의 추론으로만 단순화할 수 없게 만든다. 실용적 기능, 설계계획의 전후 맥락, 도시계획에 대한 규정, 예산같이 건축 계획안을 선행하는 모든 것은 제약을 명시하지만 형태를 결정짓지는 않는다. 닮은꼴 계획안에서는 자유의지가 종종 상업적 가치로 여기는 이상한 것의 지배를 받아 시각적 판단과 용도의 범주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건축에서 용도는 공간의 존재 이유 자체고, 그로 인해 조각과는 달리 사람이 거주하는, 쓸모 있는 것을 만드는 것이다. 거듭 런 호텔을 예로 들면, 건물의 형태를 강요하는 표의문자에 대한 일방적인 결정은, 아주 생소한 방법인 안쪽으로 휜 두 개의 막대로 침실에 필요한 것과 사무실과 공동공간의 분배를 결정짓는다. 또 빌라 18.36.54로 말하면, 공간은 접기의 결과에 지나지 않고 그 결과는 막힌 풍경과 별로 쾌적하지 못한 주거 환경이다.
여기서의 자유의지란 전적으로 개인적 열정에 의지해 건축이란 직업에 대한 자기도취식 면죄부를 작품에 각인한다. 지난 5세기 동안 서양 건축은 새로운 형태로 변신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그것은 공동의 언어, 즉 고대인들로부터 물려받은 건축언어 주변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자본주의 가치에 얽매인 현대성의 고유한 극작법은 그 공동의 언어를 개개인의 무수한 작은 거품으로 분열시켰다. 공동의 기반에서 개별적 독특함에 이르는 것이 가능했던 '놀이터'로서의(3) 건축 프로젝트 실행은 거기에서 살아남지 못했다. 이야기와 형상들의 흩어짐 속의 방황, 고독 그리고 공허함은 자유주의를 동반하는 가치 혼란을- 미학을 포함해- 반영하고, 이것은 놀랍게도 바벨탑의 혼란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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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카림 바부 Karim Basbous 건축가. 노르망디 국립고등건축학교, 파리이공대 교수.
번역 | 채미서 yarche@hanmail.ne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위원. 파리8대학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1) 폴 발레리, Eupalinos, Gallimard, coll. <NRF Poésie>, Paris, 2005(초판 1923).
(2) www.big.dk/#projects-ren.
(3) 사유의 공간으로서 ‘놀이터’ 개념에 대한 것은 Avant l’œuvre. Essai sur l’invention architecturale, Editions de l’imprimeur, Besançon, 2005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