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걷기, 여행 또는 인생
하지만 정말 그런가? 자동으로 작동하는 사회적 관계에 내맡긴 삶은 탈없이 굴러가는가?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의문이 싹튼다. 정말 이게 다 내 탓일까? 내가 부족하기 때문일까? 최선을 다하면 마술처럼 해결될까? 길은 미로 속에서 갈피를 잃는다. 고민은 가지를 뻗지만 답은 미로 속에 있지 않다. 바야흐로 떠날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우리 가운데 좀더 용기 있는 사람이 먼저 일을 실행에 옮긴다. 그는 다 내려두고 홀연히 떠난다. 입버릇처럼 예고해왔지만 정작 저지를 때는 낌새도 없이.
왜 걸어서 떠나는가?
걸어서 여행하는 사람들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백사장 낀 해변과 고지대의 흔들바위 하나만 믿고 공영주차장을 늘려가던 지방자치단체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래서 화물트럭이 벽돌을 떨어뜨리며 달리는 국도 갓길에까지 다급하게 고유명사를 붙이고 여기도 걸어보지 않겠느냐며 호객 행위를 벌이고 있다. 수레와 자동차, 비행기를 만들어낸 인류가 우주 시대의 초입에서 느닷없이 발로 다시 걷기 시작할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수천억 원을 들여 건설한 고흥 나로 우주센터의 체험 시설은 한산하고, 노란 유채가 수북이 핀 인근 청산도의 슬로길은 북적댄다. 여수엑스포는 예상 관객을 한참 밑돌아 울상이고, 엑스포 부지 공사에 갈아엎인여수 밤바다의 낭만을 찾는 사람들은 차라리 해협 건너 남해에 새로 등장한 바래길로 발길을 돌린다.
도보여행이 특별한 건 걸음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걸음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를 가져온다. 나른한 여름휴가 시즌을 거쳐 새 사람이 되어 돌아오는 관광객은 없다. 박제된 액자처럼 일상을 정지시킨 아름다운 풍경은 비현실적이고 초현실적이라 여행자는 액자 테두리처럼 풍경에 스미지 못하고 겉을 맴돌게 된다. 도보여행은 다르다. 삶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키는 게 아니라 완전히 개종시켜놓는다. 세상을 걸을 때 우리는 태생적으로 익숙하지만, 여태 배우지 못한 속도와 크기를 터득하는 까닭이다. 가장 느린 속도와 가장 작은 크기, 바로 몸의 속도와 몸의 크기다.
올레꾼으로 제주도를 찾는 여행자는 제주도를 걸어서 일주하는 게 가능하다는 간단한 물리적 사실을 먼저 깨닫는다. 다음으로 제주도가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사실에 놀란다. 제주도는 렌터카로 한나절이면 일주할 수 있는 지도 위의 작은 타원에서 해가 뜨고 지는 끝 모르게 광활한 대지로 변모한다. 감각의 통로를 관념에서 세상으로 퍼뜨리며 걸어가는 여행자는 몸의 척도로 세상을 헤아리게 된다. 뜨거운 햇살이 쏟아지는 대낮의 길 위로는 바다 건너 남쪽에서 전설 같은 바람이 불어와 들꽃을 흔들고, 창백한 달이 오른 밤길 위에서는 근해로 나간 오징어잡이 배들이 별을 대신해 희미하게 반짝인다. 그 모든 곳을 느릿느릿 걷는다. 며칠을 두고 걷는다. 자동차로 단숨에 넘어가던 작은 고개 하나마저 커다란 난관이다. 많은 좌절 속에서 겸허해진 여행자의 세상은 마침내 본래 크기를 회복한다. 세상의 크기가 달라지면 삶의 소명도 달라진다. 여행자는 부질없이 세상에 맞서 겉을 넓히기보다 안으로 깊고 단단해져야겠다고 느낀다. 그는 걷는 동안 자신과 대화하고, 내면의 목소리에 귀기울여 속삭이는 부름에 지체 없이 응답한다. 나 스스로를 하나의 숭고한 종교로 격상시킨다.
걸음의 속도
도시의 걸음에는 서사가 없다. 도시의 보행자는 수많은 사람과 건물을 스쳐 지나가지만 어떤 경험도 하지 못한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의미 있는 일은 도시 속도에 맞춰 움직이는 사람에게만 추상적인 형태로 일어난다. 도시는 속도 그 자체가 목표인 곳이다. 도시는 빠르다. 복잡하게 얽혀 있다. 거기에 거시적 구조에서 독립해 개인적 의미가 부여된 정적인 장소는 거의 없다. 어떤 측면에서 도시는 텅 비어 있다. 도시의 걸음은 진공 속의 부유와 같다. 속도가 곧 가치인 곳에서 걸음은 단순히 기능으로 전락한다. 발은 차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걸음은 계급 혹은 건강과 결부되어 보행자를 평가하는 세속적 척도가 된다.
어떤 속도의 길 그 자체가 바로 여행이다. 문명의 속도는 순례의 이름을 휴가로 바꾸어왔지만 바꿀 수 있었던 건 이름뿐이다. 걸음은 비행기나 자동차로 대체될 수 없다. 걸음이 단지 공간을 느리게 움직이는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걸음은 시간을 느리게 잡아두는 방법에 속한다.
한 시간은 짧은 시간이다. 반면 한 시간의 걸음은 짧지 않다. 길은 쉽게 좁혀지지 않고 초와 분은 더디게 흐른다. 거칠어진 호흡과 맥박으로 매 순간 순간이 몸의 기억에 새겨진다. 우리가 기억하는 만큼이 바로 우리가 보낸 시간이다. 그러니 일주일을 걷는다면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날까! 여행지에서 멋진 풍경을 발견하면 누구나 차에서 내려 걸어서 돌아보게 된다. 그건 본능이다. 겨우 몇 m 더 가까이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시간을 느리게 잡아두기 위해서이다.
걸음이 시간을 늘리고 거기에 밀도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몸을 기초적인 목적에 부합하도록 사용하기 위해 진화해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정신은 걸음의 속도로 자극받을 때 가장 예민해지는 것 같다. 따라서 걸음은 여행의 속도가 아니라 여행의 분량을 결정한다.
걸음의 서사
걸음은 풍경에 서사를 입힌다. 육체를 한계까지 밀어붙여 하루 종일 걷다가 뉘엿뉘엿 기운 석양에 붉게 타오르는 어떤 압도적 풍경 앞에 얼어붙은 듯 멈춰설 때 대개 여행 서사는 절정을 지나게 된다. 멋진 풍경은 여행자를 기다리고 있다가 저절로 속을 펼쳐 보이는 법이 없다. 풍경은 순전히 발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제 발로 풍경을 만들어냈을 때의 벅찬 감흥은 종교적으로 숭고한 체험이며, 한 사람의 인격을 단숨에 도약시킬 위력을 갖는다. 바로 옆에는 호텔에서 목욕을 마치자마자 택시를 잡아 타고 바로 직행한 사람들이 서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눈에 비친 풍경 역시 아름답겠지만 완전히 같을 수 없다. 그들은 클라이맥스일 때 상영관에 들어가 영화를 보게 된 관객들이다. 그들이 보는 풍경에는 맥락이 없다. 절벽이 드물게 기괴하며 바다가 시리게 투명하다는 따위의 단순한 시각적 사실을 감지할 뿐이다.
서사예술 종사자로서 감히 말하면, 여행 계획을 짜는 데도 작가적 역량이 동원되어야 한다. 좋은 이야기꾼은 이야기의 마스터플랜을 세우지 않는다. 이야기의 진정한 힘은 이야기가 작가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구르기 시작했을 때 발휘됨을 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좋은 여행가라면 발길의 힘을 믿어야 한다. 꽉 찬 스케줄대로 완벽하게 진행되는 여행은 완벽한 여행과 가장 거리가 멀다. 어떻게 수백km 떨어진 곳에서 세운 계획대로 낯선 땅의 하루가 진행될 수 있는가? 그게 가능하다면 실현된 건 여행이 아니라 스케줄일 터다. 이때 여행자는 직장에서 늘 하던 것처럼 여행지 방문이라는 스케줄 목록을 '처리'한 것일 뿐이다. 매력적인 서사를 만들어가기 위해 여행자는 돌연한 사건의 여지를 열어둬야 한다. 동선은 위험을 자발적으로 감수하는 방향으로 세워져야 한다. 인적이 끊긴 길을 탐색해야 하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야 하며, 게스트하우스에서 합숙하거나 민가에 숙박을 문의해야 한다. 숙소를 예약하는 건 신중하게 고민해야 한다. 예약한 숙소는 자연스럽게 진행되던 여행 서사의 결절점으로 작용하기 일쑤다.
그저 시각적 욕망의 띄엄띄엄한 충족만 고려한 여행 계획은 특수효과로 뒤덮인 영화처럼 체험 서사의 입체감이 떨어지기 쉽다. 여행의 미적 가치는 잔기술을 부릴 때보다는 오히려 여행의 내적 서사 요인에 손을 댈 때 현격하게 변한다.
상처와 치유
홀로 걷는 사람은 인간에 대한 갈증에 시달린다. 홀로 걷는 사람은 타인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스쳐 지나가는 인연을 놓치지 않는다. 도시의 편리에 생략당했을 자질구레한 가능성들이 여행 과정에서 무수히 실현된다. '우연한' 만남들. 우연한 만남은 여행의 중요한 대목을 차지하고, 그 우연한 특성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여러 차례 일어난다.
그들이 만났다는 사실은 그들의 공통점을 증명한다. 길 위를 발로 걷는다는 것. 장기 도보여행자들의 뚜렷한 특징은 버스를 타지 않으려고, 기차를 타지 않으려고 걷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몸을 쓰려고 걷는다. 몸을 혹사하는 건 대개 기억 저편 잊고 싶은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비슷한 사연이 있다. 연인과 쓰라리게 이별하거나, 대학 입시에 실패하거나, 취업에 실패하거나, 다니던 직장을 잃거나. '귀중한' 여름휴가를 얻어 녹초가 되도록 걷는 데 투입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들은 렌터카를 빌려 관광지 몇 군데를 찍고 숙소로 돌아간다. 재충전을 끝낸 뒤에는 휴가의 흔적을 깨끗이 지우고 용수철처럼 앞으로 튀어나가야 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들에게는 삶을 되돌아보는 것보다 한숨 돌리며 멈추는 게 훨씬 시급한 과제다.
걸음은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는가? 핵심은 자발성이다. 도보여행자는 도시를 자발적으로 걸어 탈출했다. 도보여행자들은 고생을 '사서' 한다. 다양한 난관에 부닥친다. 어떤 일은 상상조차 못해본 것이다. 먹을 것이 없거나, 잘 곳이 없거나, 소지품을 잃어버리거나, 피를 흘리고 근육과 뼈에 이상이 생기기도 한다. 여행을 도저히 끝마칠 수 없을 것만 같다. 여행을 반드시 끝까지 밀어붙여야 할 이유도 없다. 그건 의무가 아니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여행은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는다. 기이하지만 모든 난관이 극복된다. 몸에 닥친 문제이기에 뒤로 미뤄둘 여지가 없는데도 해결법은 더 단순하다. 여행자는 정면을 직시하며 뚜벅뚜벅 걸어갈 에너지를 잃지 않으면 될 뿐이다. 오르막길이 숨차고 골목에서 제자리를 맴돌며 헤매는 것은 걸음이 미숙하기 때문이 아니다. 걸음은, 멈추지 않는 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분명한 확신을 준다. 걷다 보면 결국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 자존감을 회복하면서 여행자의 상처는 천천히 아문다.
우리 삶과 비슷하게, 실패와 시행착오는 여행의 일부를 이룬다. 경계해야 할 것은 오히려 길을 축소하고 생략시키는 기술적 편리다. 길을 생략하면 여행도 생략된다. 여행은 언제나 길 끝이 아니라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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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손아람 소설가, 가수. 저서로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 <소수의견>, 공저로 <너는 나다: 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하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