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혜의 문화톡톡] 육체와 정신 그리고 사랑 <러브 라이즈 블리딩>(로즈 글래스, 2024)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개막작
육체와 정신, 감정에 자리잡은 다양한 모양의 힘 <러브 라이즈 블리딩>(2024)
제28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슬로건은 'Stay Strange(이상해도 괜찮아)'이다. 이 표어 아래 개막한 <러브 라이즈 블리딩>(2024)은 충실한 퀴어물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퀴어'를 주요 소재나 유다른 관계처럼 다루지는 않는다.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같은 성별인 것을 사랑의 성사에 있어 문제 요소로 두거나, 특별히 강조하지 않는 것이다.
잭키(케이티 오브라이언)와 루(크리스틴 스튜어트)는 연인이다. 그러나 둘이 서로에게 이끌려 운명의 동반자가 되기까지 영화는 굳이 긴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감독 로즈 글래스는 루와 막 대화를 시작한 잭키 앞에 "루가 레즈비언인 걸 알아?"라고 물어오는 남성인물을 등장시켜 시비를 걸게 한다. 이 장면은 영화 초반부에 의도적으로 삽입된다. 이 씬에서 잭키는 추파를 던지는 보디빌더 남성과 말 그대로 주먹다짐을 한다. 이때 루는 잭키가 여성임을 소리치며 둘을 말리지만, 잭키와 덩치가 큰 남성은 성별에 관계없이 주먹을 주고 받고서야 싸움을 마무리한다. 이 사건 직후 잭키와 루는 동침한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이 강조하는 '힘'
이 영화는 사실 어떤 감정적 관계의 성사가 아니라 육체와 정신, 감정에 자리 잡은 다양한 모양의 '힘'에 대해 말하는 영화다. 그러므로 정직한 '퀴어물'이지만 '퀴어'에 집중하지 않는 영화다. 오히려 외적으로 보여지는 힘에 대해 탐구하며, 자기 자신이 얼마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관계를 포장한 형태나 우위가 달라진다고 말하는 영화다.
잭키의 '힘'은 육체적인 힘이다. 즉 근육이 도드라지는 '강한 몸', 외양을 갖는 것이다. 그의 목표는 곧 개최 될 보디빌딩 대회에서 우승해 몸 편히 사는 것이다. 따라서 잭키는 '몸'과 관련된 목표가 아닌 경우라면 빈번하게 충동적인 선택을 한다. 영화에서 이는 얼핏 용기처럼 보여진다.
반면 무법지대나 마찬가지인 소도시의 헬스장에서 일하는 루의 '힘'은 정신적인 힘이다. 그는 자신을 억압하는 것들을 평생에 걸쳐 인내할 힘은 있지만, 그것들을 직접 떨쳐내거나 이겨낼 물리적 '힘'은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스테로이드 주사, 헬스장, (아버지의) 재력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무기처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잭키와 루는 서로의 결여를 본능적으로 알아보고, 단번에 매료된다. 둘은 결핍을 메워주는 제법 괜찮은 연인처럼 보이지만, 이들의 사랑은 주사약에 타는 스테로이드나 노른자 빠진 계란처럼 허울만 좋을 뿐 영양가가 없다.
스테로이드, 총, 그리고 잭키
첫만남에서 루는 잭키에게 스테로이드 주사를 들이민다. 자신이 내츄럴(약물을 쓰지 않고 헬스로 몸을 키우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자부심을 가졌던 잭키는 큰 망설임 없이 루의 주사를 맞는다. 사실 루는 총기사격장을 운영하며 불법적 삶을 사는 아버지를 혐오하지만, 누구보다도 아버지와 닮은 사람이다.
학대와 가정폭력, 살인 등 루를 둘러싼 문제들이 동력이 될 때 잭키는 분노하고, 이 분노는 충동덩어리인 잭키를 <헐크>(2003)처럼 변하게 한다. 결국 잭키의 큰 몸은 루가 의도하지 않았어도, 루를 둘러싼 억압을 소거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따라서 잭키의 몸이 점점 커질수록 루는 기쁘다. 커진 루가 우발적으로 벌이는 살인은 잭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사실 루의 문제였다. 루가 뒷처리해주는 것처럼 보이는 문제들은 사실 루의 손으로는 해결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싸우고, 피 흘리고, 서로가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힘의 균형이 맞다고 착각한다. 그러니까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두 여성에게 '힘이 있다'가 아닌, 애초에 '힘이 없었다'라고 전제하고 볼 때 재밌는 영화다. 따라서 서로가 서로를 무기와 방패로 활용하며, 이렇게 거짓말이 난무하고 피가 낭자한 관계가 그럼에도 '사랑'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지 되묻는 영화다.
나약함이 떠난 자리에 남은 연인
영화 초반 헬스장에서 클로즈업 되는 장면들 중 "고통이란 육체에서 나약함이 떠나는 것"이라는 표어는 영화의 주제 의식을 환기하는 중요한 단서다. 나약함이 떠나는 자리를 무엇이 대체하는가? 위의 문장을 뜯어보면 고통이 남는다. 고통을 마주하고 스스로 겪어 낼 때 근육이, 말하자면 생을 살아낼 힘이, 사랑이 생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잭키와 루는 스스로의 고통을 마주하지 않았다. 약물에, 담배에, 폭력에, 서로에게 의지하며 외면해왔다고 보는 것이 옳다.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루의 언니가 강하다. 그는 고통을 마주했기 때문에 루의 형부를 사랑했다고, 그러니까 루에게 "너는 (자기파괴적인) 사랑을 모른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러브 라이즈 블리딩>은 도파민이 넘쳐 흐르는 영화다. 몸과 힘, 폭력과 사랑의 관계에 대해 말하다보니 서부극만큼이나 낯뜨겁고 헐벗은 몸을 드러내는 장면이 많다. 퍼석하고 삭막한 도시의 풍경은 어떤면에서 <본즈 앤 올>(2022)의 황폐한 여름 더위와도 맞닿은 듯 보인다. 또한 <델마와 루이스>(1993)에서 출발해 <아가씨>(2016), <녹야>(2023)까지 이어진 로드무비 퀴어물의 영화문법을 결말까지 가만히 되짚는다. 하지만 영화 말미 의미심장한 기미가 피어난다. 루가 태우는 담배연기와 함께 질문이 타오르는 것이다. 이 관계가 사랑인가?
모든 힘을, 모든 관계를 가만히 들여다 보며 되물을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랑일까? 사랑이 맞는지, 아니면 성별과는 관계 없이 힘의 문제로 귀결되고 종속되고 굴복한 관계인지 말이다. 약물이든 관계든 모든 중독의 결말은 항상 처참하지만 당사자에겐 일단 환희다. 이상한 일은 내 앞에 닥친 일이 아닐 때에야 괜찮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계가 사랑의 한 모양이라면 영화라서 덜 안타깝고, 영화라서 짜릿하다.
글·이지혜(이해이)
문화평론가. 2022년 문화전문지 《쿨투라》 제16회 영화평론 신인상으로 등단.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글쓰기를 강의하고 있다. 월간 《쿨투라》 와 영화전문매체 <코아르>에 영화평론을, 르몽드 문화톡톡에 문화평론을, 서울책보고 웹진 <e-책보고>에 에세이를 기고 중이다.
· 인스타: leehey_cine · 이메일: leehey@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