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호의 시네마 크리티크] 액션 대신 애정이 깃든,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히트맨>

2024-07-15     송상호(영화평론가)
영화

우리는 과연 ‘진짜’ 인생을 살아가는가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영화 <히트맨> 속 게리 존슨은 뉴올리언스 대학에서 심리학과 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이혼한 뒤로는 반려동물을 기르면서 조용히 살아간다. 전자기기와 디지털 기술을 다루는 데 능숙한 그는 틈틈이 뉴올리언스 경찰국 시간제 잠복 수사관으로도 일한다. 영화에서 각본 및 제작과 주연을 맡은 배우 글렌 파월은 게리 존슨 역을 완벽히 소화해 냈다. 이 가운데 그가 연기해야 하는 삶 역시 기묘하게도 영화가 소재로 택한 게리 존슨의 인생과 똑 닮았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가짜 살인청부업자로 변장했던 실제 게리 존슨 역시 잠복 수사를 통해 늘 다양한 여건과 환경 속에서 각기 다른 삶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살아가지 않았나.

그러면 누군가를 연기하는 삶은 거짓이고, 누군가처럼 분하지 않은 채 살아가는 건 진실인가? 전제부터 잘못됐다. 이렇게 질문해 보고 싶다. 과연 우리가 매 순간 진짜 나로 살아가는 순간을 자각할 수는 있나? 또 우리가 진짜 나라고 여기는 나의 모습이 정말 진정한 내가 맞나?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아마 전 세계 모든 인류가 답할 수 없는 난제일 테다. <히트맨>이 건드리는 쟁점이 바로 이와 맞닿아 있다. 혼돈으로 가득한 삶 속에서 우리가 어떤 가치에 의지해야 하는지 반추해 볼 기회를 제공하는 셈이다.

청부살인업자 론인 척 의뢰인 메디슨(아드리아 아르호나)을 속여왔던 게리 존슨이 엉겁결에 “나는 가짜 킬러다. 사람을 죽여본 적이 없다”라고 자신의 정체를 실토하는 장면부터 시작해 보자. 이 대사를 내뱉는 존재는 과연 누구인가? 이에 관한 화두를 띄우려면, <히트맨>의 도입부부터 짚어봐야 한다. 암전 상태에서 한 지시문이 떠오른다. “이 이야기는 게리 존슨의 삶에서 영감을 받아 어느 정도 실화(somewhat true story)를 바탕으로 제작됐다”고 말이다. 그러니 영화가 선택한 영역은 완전한 사실도 아니고 완전한 거짓도 아닌 모호한 회색지대다.

극 중 론이 유력한 살인 용의자로 꼽히는 메디슨을 만나는 신도 함께 떠올려 보자. 론으로 분한 존슨은 집의 대문을 열자마자, 경찰이 도청 중이라며 나의 리드에 따라오라고 정해진 방식으로 상황을 돌파하자는 의사를 내비친다. 이를 이해한 메디슨과 존슨이 역할극을 펼친다. 본질적으로 이 상황극은 남편 살해범으로 수사선상에 오른 메디슨의 혐의를 벗겨주려는 존슨의 전략에서 비롯됐다. 그렇다면 질문. 두 사람은 목적 달성을 위해 완벽한 거짓을 연기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두 사람이 내뱉는 말들이나 그 사이사이 피어나는 표정이나 눈빛 등 비언어적 표현을 하나하나 곱씹다 보면, 정보 전달을 위한 표현 외에도 서로의 진심을 녹여내는 수단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가령 존슨이 내뱉는 “같이 헤쳐 나가자고요”와 같은 말 역시 두 사람의 서사를 미뤄봤을 때 중의적인 뉘앙스가 깃들어 있지 않나. 그러니 완벽한 거짓도 완벽한 진실도 없다. 그저 이 순간을 버텨내는 너와 나, 그리고 우리들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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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과 재현에서 멀어진 영화

얼떨결에 동료 재스퍼 대신 가짜 히트맨으로 투입된 존슨이 첫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내자, 잠복 수사팀원들은 존슨을 현장 요원으로 계속해서 투입하며 재미를 본다. 재미를 본 사람은 비단 팀원뿐만이 아니다. 존슨 역시 타인으로 변장하고 연기하는 자기 모습을 반추하면서 따분하고 무료하던 일상으로 가득했던 삶의 호수에 돌 하나를 던진 것처럼, 차츰 삶에 대한 의지와 희열의 파형이 연쇄적으로 번져가는 걸 몸소 느낀다. 인간이라는 존재에 관한 진지한 탐구를 이어갔던 게리 존슨에게 이런 기회는 오히려 자극제이자 삶을 꾸려가는 원동력이 된다. 고객에 맞춰 킬러의 외형과 성격을 조정하고 연기한다.

게리 존슨을 연기하는 글렌 파월이 <아메리칸 사이코>(2000) 속 패트릭 베이트먼을 따라 하며 의뢰인과 만나는 장면도 기억난다. 이때 지나쳐서 안 되는 사실이 있다면 베트남 참전용사였던 게리 존슨이 생존해 있을 당시와 시공간 문법이 연동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글렌 파월이 모사한 킬러들의 이미지가 수용되는 대상에 따라 그 효과가 달라진다는 데 있다. 가령 현실 속 관객인 우리에게 이 이미지가 인식될 때를 떠올려 보라. 우리들은 존슨이 어떤 캐릭터를 유형화해 복제하고 패러디했는지 손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하지만 실제 게리 존슨이 킬러인 척하며 잠복 수사를 했을 당시엔 패트릭 베이트먼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게리 존슨을 ‘실제로’ 알던 이들이 이 영화를 볼 때는 그가 따라 하는 킬러 캐릭터들에 관해 충분히 공감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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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 영화는 게리 존슨의 삶을 비료 삼아 만들어지긴 했으나, 링클레이터가 존슨이 활동하던 당시의 시공간대에선 벗어나고자 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극 중 인물들은 스마트폰을 이용하고, 페이스북에서 상대방의 정보를 탐색한다. 그렇다면 링클레이터는 어째서 실화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끌어왔는데도, 게리 존슨이 실제로 활약하던 80~90년대의 시공간을 그대로 재현하고 고증하는 데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걸까.

잠시 스크린을 벗어나 실제 게리 존슨의 삶을 들여다보자. 루이지애나주에서 자랐던 게리 존슨은 베트남전에 참전해 군 감독 헌병으로 복무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루이지애나에서 보안관 대리로 일하다 1970년대 중반부터 텍사스주 포트 아서 경찰서로 옮겨 마약 중독 관련 잠복 작업에 동원됐다. 존슨은 80년대 후반부터 300건이 넘는 고용 살인 혐의를 조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수사관으로 일하는 동안 60건이 넘는 체포 기록을 남겼다. 90년대에 들어서자, 지역 언론들도 연이어 ‘완벽한 가짜 암살자’ 존슨의 이중생활을 조명하는 등 그의 행보는 여기저기서 화제를 모았다.

이런 그의 사연이 링클레이터의 레이더에 걸려든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관심사는 언제나 사람 그 자체가 아니었나. <멍하고 혼돈스러운>, <비포> 시리즈, <버니>, <보이후드>, <어디갔어, 버나뎃> 등 그의 필모그래피를 수놓는 작품들을 떠올려 보자. 링클레이터는 사람이 살아가는 존재 양식과 삶을 추동하는 요소들을 자신의 카메라와 스크린에 녹여내는 데 평생을 할애해 왔다. 일상에서 피어나는 비일상의 순간들, 비일상처럼 보이는 일상의 면면들. 이런 장면들이 게리 존슨의 삶에 대한 정보를 접한 링클레이터의 머릿속엔 자연스레 재생됐을 테다. 그렇기에 링클레이터는 그의 삶을 늘어놓는 작업보다도 그라는 존재 자체를 풀어내길 원한 것처럼 보인다. 사람을 말하는 데 있어 중요한 건 그 사람에 대해 매달리는 일이지, 시공간 배경을 정확히 따져보는 일이 아니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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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타주가 배치된 ‘이유’보다 중요한 것?

<히트맨>에서 존슨은 “히트맨은 환상”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스스로 그 환상이 되길 기꺼이 자처하며 가짜 킬러로서의 삶에 서서히 적응해 간다. 이때 몽타주로 삽입되는 ‘히트맨 레퍼런스’는 그냥 지나치기엔 다소 이상한 구석이 있다. 인류 문명과 함께 해온 콘텐츠 발전의 역사 속에서 흑백영화의 시대를 지나 디지털 시대에 이르기까지 살인청부업자들이 어떻게 묘사되어 왔는지 살펴볼 기회이긴 하지만, 사실 이 같은 시퀀스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게다가 재밌게도 이 구간에는 원대한 야망보단 사소한 취향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데이미언 셔젤의 <바빌론> 후반부의 몽타주 시퀀스에 깃든 야욕보다는 <펄프 픽션> 속 곳곳에 숨어 있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취향이 잔뜩 묻은 B급 정서 코드에 가깝다는 말이다. 아주 찰나 동안 ‘덕후’ 링클레이터의 컬렉션을 들여다본 느낌이랄까.

아마 링클레이터는 자신이 영감을 받았거나 평소 인상 깊게 여겼던 작품들의 장면들을 정성껏 선정한 뒤 삽입했을 테다. 이를 구성하는 영화들은 모두 암살자 내지는 킬러와 얽혀 있다. <백주의 탈출(This Gun For Hire)>(1942), <다이얼 M을 돌려라(Dial M For Murder)>(1954), <석양의 무법자(The Good, the Bad, and the Ugly)>(1966), <테크니칼(Tecnica di un omicidio)>(1966), <살인의 낙인(Branded to Kill)>(1967), <권총은 나의 패스포트(A Colt Is My Passport)>(1967), <냉혈인(The Mechanic)>(1972), <킬러들의 도시(In Bruges)>(2008), OTT Hulu 시리즈 <미스터 인비트윈(Mr Inbetween)>(2018~2021), OTT HBO 시리즈 <배리(Barry)>(2018~2023) 등 인류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들부터 다소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까지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드는 10여 편의 레퍼런스 속 킬러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펼쳐진다.

그렇다면 이 몽타주 시퀀스를 통해 우리가 유추해 볼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인가. 결국 삶을 대하는 존슨의 태도에서 우리는 답을 찾을 수 있다. 수많은 레퍼런스를 통해 대중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히트맨’의 이미지를 존슨이 왜 빌려왔고, 또 영화가 굳이 왜 늘어놓았는가. 킬러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의 여부보다도, 킬러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선택하는 우리들의 몫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링클레이터가 이 장면을 왜 삽입했는지 따져보는 것보다 이를 수용하는 관객들이 각자의 기준과 관점에서 자신만의 사례 보관소를 들여다보는 일이 더 가치가 있는 셈이다. 그래야만 환상을 연기하는 게리 존슨의 사례를 경유한 뒤 스크린에 맺힌 현실과의 접점을 거쳐 우리네 삶으로 도달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결국 몽타주 시퀀스가 배치된 이유보다 우선순위에 와야 하는 요소는 우리가 이 구간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우리는 앞서 <보이후드>가 왜 만들어져야만 했는지 당위를 따지는 일에 몰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작품 속에서 드문드문 피어나는 일상의 순간들을 자연스레 우리네 현실과 연동시키려고 하지 않았나. 그런 점에서 보면 <히트맨>은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필모그래피를 수놓는 영화들과 궤를 같이한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수 있어도, 장막을 한 꺼풀 걷어내면 그의 영화가 지금껏 우리에게 스며들던 작법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청부살인업자의 서사는 그저 외피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킬러들의 피비린내 나는 액션을 기대한 관객들이 오히려 <히트맨>에서 만날 수 있는 요소는 액션이 아닐 수밖에 없다. 그저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에 빠진 사람들을 향해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링클레이터의 태도를 마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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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송상호
영화평론가, 경기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글을 쓰고 있다. 2021년 박인환상 영화평론 부문 수상. 202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 우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