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정당을 키운 것은 ‘약자를 배제한’ 세계화였다!

프랑스 선거가 남긴 것

2024-07-31     브누아 브레빌 외

유럽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킨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이 급히 치러진 6월 30일 프랑스 총선 1차 투표에서 1위를 기록해 유럽연합과 세계를 놀라게 했으나, 7월 7일 결선투표에서 중도우파와 좌파가 함께 협력한 ‘공화주의 아치’에 가로막혀 3위에 머물렀다.

하지만 RN(본래 당명은 국민전선 FN이었으나 2018년 국민연합으로 개명-역주)이 창당 50여 년만에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것은 프랑스 사회가 직면한 어두운 현실의 단면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RN이 이념적 우선순위에 두는 형법 강화, 이민자 및 ‘생활보호대상자’에 대한 투쟁 등은 이미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정책에 영감을 주고 있고, 훨씬 오래전부터 집권당의 양보와 타협으로부터 힘을 얻어 왔다.

 

극우정당 국민연합(RN)이 태풍의 눈으로 소용돌이친 것은 해체된 정치 질서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6월 9일 유럽의회 선거에서 조르당 바르델라가 당수로 있는 국민연합(RN)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속한 집권당 ‘르네상스’에 두 배 차이로 압승을 거두자 마크롱 대통령은 의회 해산을 결정했다. 의회 해산은 은행을 운영하듯 국가를 운영하려고 했던 극단적 중도파의 쓰라린 실패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권력의 문이 열리기도 전에 극우파에 대항하는 방패 역할을 자처했던 충동적이고 오만한 마크롱의 실패를 의미했다. 그는 2017년 3월 20일 라 플렌 생드니에서 “우리가 이기면 그들은 다음날 무너질 것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말했다.

극우 세력이 정치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후 역대 프랑스 정부는 극우 세력의 부상을 비난했지만 사실상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역대 정부였다. 마크롱의 변덕은 그 오랜 위선의 주기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1983년 지방 선거에서 국민전선(FN)이 처음으로 성공을 거둔 것은 집권당이었던 사회당이 강령에 명시된 ‘자본주의와의 단절’ 정책을 포기하고 유럽공동체의 재정적·정치적 제약을 따르기로 한 시기와 일치한다.

당시 두 사건이 서로 연관은 없었지만, 좌파와 우파 정당 모두 때때로 ‘행복한’ 것으로 표현하던 세계화 규칙에 복종함으로써 1981년 총선에서 10만 표를 얻었던 국민전선에 비옥한 토양을 제공하게 됐다. 지도층이 점점 더 많은 경제적·통화적·법적 주권을 초국가적 기관에 넘겨주면서 이전까지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대립이 지배적이었던 공론은 국가, 문화, 안보, 정체성, 심지어 문명적 갈등으로 재구성됐다.

과거 비시정권과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1972년 설립한 군소 정당에 불과했던 국민전선은 탈산업화와 대량 실업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 속에서 세력을 키웠다. 국민전선은 세계화의 관리자가 된 자유주의나 사회주의 과두정권에 대한 분노를 위로는 역대 지도자와 그들의 지식인 동맹과 언론 동맹에, 아래로는 가장 취약한 계층에 대한 불안한 분노로 전환했다. 가장 취약한 계층은 첫 번째 대규모 실업이 일어난 기간 동안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은’ 아랍 노동자와 2001년 9월 11일 테러와 그 이후 2012년에서 2016년 사이에 있었던 프랑스 테러 공격 이후 ‘우리의 가치를 위협한’ 무슬림들이었다.

극우의 성공은 (충분하지 않지만) 실업과 고용 불안, 삶의 혼란, 그리고 그로 인해 야기되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달려있었다. 하지만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이용된 결과이기도 하다. 지배 계층은 국민전선이, 그리고 이후에는 국민연합이 선거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파리아(사회에서 배척받는 사람)’ 정당인 국민전선-국민연합과 이민 및 안보 관련 우선순위를 어느 정도 타협한 후 재선을 위해 이들과 반대되는 선거운동을 진행했다.(1)

6월 9일 이후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극단주의 세력과의 싸움’이라는 주제는 마크롱 대통령의 표현처럼 오직 ‘중도적이고 진보적이고 민주적이고 공화주의적인 집단’만을 위한 중도 정당만이 영원히 국가를 통치할 권리가 있다는 옛 주장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국민전선 장마리 르펜, 레이건과 피노체트로부터 영향받아

의회 해산은 또한 정치적 그림자 연극이 끝났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1990년대 초부터 이 드라마는 연극 속 배우들이 수용한 논리를 따랐다. 첫 번째 논리는 민족주의의 부상(이 경우에는 국민전선의 부상)이 주로 세계화와 변동성, 세계화로 인한 두려움의 정치적 부산물이라는 점이다. 두 번째 논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지도자들이 세계화가 불가피하고 심지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면, 이제 민주주의에서는 매 투표마다 극우 세력의 집권을 막고 극우 세력을 ‘저지’하는 일을 우선순위에 놓고 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이미 수년 전부터 전통 정당들은 그들에게 유리하게 조정된 투표 시스템을 활용해 왔고 국민전선과 국민연합은 전통 정당들에게 이익을 제공해 왔다. 2022년까지 국민연합은 의회 의석수가 많지 않았고 오늘날에도 프랑스의 13개 레지옹 중에서 행정권을 장악한 곳은 한 곳도 없다. 결국 ‘공화주의 아치(극우 세력을 막기 위해 중도 및 좌파 정당들이 협력하는 연합-역주)’에 속하는 정당들은 번갈아가며 국민전선-국민연합에 대항했고, 국민전선-국민연합이 왜 성공을 거두는지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 그들을 이길 수 있다고 거의 확신했다.

공공연히 인종차별주의자인 국민전선과 국민연합 활동가와 간부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선거에서 점점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 노동자 계층과 중산층 유권자들을 선거 경쟁에서 배제하기 위한 구실이 된다. 한편 노동자 계층과 중산층 유권자들은 기존의 주요 정당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 국민전선과 국민연합을 선택하고 있다. 처음에는 국민전선에 투표했다가 이후 국민연합에 투표한 사람들은 잠시 엘리트들을 놀라게 했지만, 이후에는 기권표처럼 정치적으로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태로 되돌아갔다.

 

사회당 미테랑 대통령, 장마리 르펜의 뉴스 생방송 출연 도와줘 

민주주의가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무차별적인 정치적 열정에 위협받으며 최근에는 가짜 뉴스와 외국의 간섭으로 인해 위협받는 상황에서 민주주의의 절차를 우회하려는 ‘공화주의적’ 요구는 전문가들의 판단이 대중의 선택과 반대되더라도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극우 정당을 지지하는 투표 그 자체 이상으로 ‘포퓰리즘’ 투표에 대한 경멸이 정치적 미덕으로 자리잡았다. 유럽연합과 무디스(신용평가기관), 맥킨지(컨설팅회사)의 요구가 전통적으로 파리정치대학(Sciences Po)이나 국립행정학교(ENA), 에콜 폴리테크니크(École Polytechnique) 출신에게는 좀 더 자명하게 보였지만, 그에 반해 2005년 5월 29일 국민투표(유럽연합 헌법조약안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역주)에서 반대표를 던진 54.8%의 사람들과 ‘노란 조끼’ 시위자들, 의료진, 파업 노동자, 최근 연금 개혁에 반대하는 70%의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우파와 좌파 정치인들은 여전히 신속하고 강하게 행동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과거 경쟁 세력이 유럽연합 규칙을 무시하자고 요구했을 때는 불가침이라고 응했지만 이제는 그 규칙을 배제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모든 것이 이전처럼 계속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자유무역협정에 대한 협상이 새롭게 이루어지고 은행에 자금이 지원되고 팬데믹 동안 경제 지원이 이루어졌다.

서방 국가의 주요 경제·사회 방침은 모두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에 프랑스도 예외가 아니다. 노동자와 사무직 직원, 경영진, 공공서비스 사이의 보편적인 경쟁 체제는 모든 곳에서 안정된 자와 불안정한 자, 경제활동을 하는 자와 실업자, 교통시설이 잘 마련되어 있는 대도시와 버려진 지역, 교육받은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 사이에서 국가적 대립을 불러 일으켰다.(2)

지역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국가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극우 세력도 다양한 형태로 커졌다. 하지만 국민전선의 세력이 확장된 데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공장과 우체국 폐쇄, 구매력 상실, 6월 9일 선거에서 극우 정당이 얻은 31.4%의 지지율 등으로 이어지는 우여곡절을 따라가려면, 40년 동안 기존 정치 엘리트들의 행동이 어땠는지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극우 정당을 신이 내린 부기맨(유령과 비슷한 괴물로 어떤 모양도 없다-역주)쯤으로 받아들였고, 정치적인 위협으로 간주하면서도 정계에서 영원히 배제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그를 통해 지속적인 기쁨을 누렸다.

1988년 4월 24일, 대선 1차 투표에서 14.39%를 득표한 장마리 르펜은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국가 재생의 큰 물결”이 “쇠퇴하고 뒤처지는 지지자들”을 끌어모을 것이라고 자축했다. 그는 2%포인트 차로 레이몽 바르 전 총리를 바짝 뒤쫓았고 공산당 소속 앙드레 라조니(6.76%)를 크게 앞질렀다. 1972년 창당 이래 국민전선은 프랑스 혁명 반대, 극렬한 반공주의, 이민자 추방, 사형제 부활 등 전형적인 극우 강령을 옹호했다. 도덕적 질서도 빠뜨리지 않았다. 친가부장적 성향의 국민전선은 낙태의 자유와 성 소수자의 권리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국민전선, 198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첫 승리 거둬

경제적 측면에서는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의 재무부 장관(1959~1966, 1969~1974) 재임 시절 마르크스주의와 혼합 경제에 반대했고, 지스카르 데스탱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1974~1981)에는 그가 지향하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반대했다. 르펜은 국가 경제(보호주의)와 복지국가의 해체, 세금 인하, 사회보장제도 폐지, 세대 간 분배 연금제도(현재 일하는 세대가 납부한 기여금으로 현재 은퇴한 세대의 연금을 지급하는 방식-역주), 대규모 민영화를 지지했다. 그가 함께 사진을 찍으려고 큰 공을 들인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 또한 그가 “조국을 구했다”고 지지를 표한 칠레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에게서 영감을 받은 강령이었다.

국민전선이 전국적으로 거둔 첫 번째 승리는 1984년 유럽의회 선거로 거슬러 올라간다(득표율 11%를 기록함). 장마리 르펜은 소규모 사업자와 기술이나 상업 교육을 받은 관리자, 가톨릭 신자이자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는 반동적 부르주아층 사이에서 최고의 결과를 얻었다. 4년 후 탈산업화로 위협받는 장인, 상점 주인, 사업주 중에서 국민전선을 지지하는 비율이 증가했고(27%), 노동자 비율도 높아졌다(19%). 이처럼 서로 이해관계가 다른 유권자들이 함께 지지층을 형성하는 현상이 20년 동안 지속됐다.

당시 정당의 강령보다는 정치적 상황이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 이민 노동자와 그 자녀를 둘러싼 사회적 문제는 공공질서와 민족-종교적 분리 문제로 재구성됐다. 1982~1984년 수천 명의 노동자가 정리해고된 자동차 공장 분쟁이 일어났고, 보수 언론에서는 이민자들에 대한 혐오 감정을 부추겼다. 사회당 소속 피에르 모루아 총리는 1983년 1월 “종교 및 정치 단체에 의해 선동된 (...) 이민 노동자들”이라고 언급하면서 외국인 혐오 분위기를 더 자극했다. 주로 이민자 출신의 숙련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대량 실업, 좌파 정부의 동요, 혼란과 범죄에 대한 우익의 과잉 경쟁, 이민과 불안정을 향한 높은 미디어의 관심 등으로 국민전선은 선거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83년 3월, 국민전선은 ‘이민, 불안, 실업, 세금, 지긋지긋함’을 내세워 파리 20구에서 11.26%의 득표율을 얻었다! 그해 가을 드뢰 지방선거에서 국민전선은 16.72%를 득표했다. 온건파 지식인 레이몽 아롱은 “파시즘 스타일을 띠는 유일한 인터내셔널은 갈색이 아니라 붉은색이다”라고 말했다(그의 말은 웬만하면 틀린 적이 없었다). 아롱은 “(장마리) 르펜의 동료 네 명”이 드뢰 시의회석에 앉아 있다는 사실은 “내각에 공산주의자 네 명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덜 심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사회당 좌파는 사회적인 측면보다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극우 세력의 진전에 대응했다.

언론은 ‘마그레브 젊은이들의 문화’를 찬양하고, 사회당은 이미 많은 간부가 가입한 SOS 인종주의(SOS Racisme: 반인종차별단체-역주)를 후원했다. 그중 한 명인 할렘 데지르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5년 임기 초기에 사회당을 이끌다가 유럽 담당 차관이 되기도 했다.

국민전선은 사회당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사회당은 1983~1984년 자유주의적 대전환으로 망연자실한 활동가들을 재결집시키고 적들 사이에 불화를 뿌리기 위해 국민전선을 이용했다. 1984년 6월 피에르 베레고보이 사회부 장관은 “국민전선을 부추기는 것이 우리에게 유리하다. 국민전선이 우파를 당선 불가능하게 만든다. 국민전선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우리는 무적이 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는 사회당에게 역사적인 기회였다. 미테랑 대통령은 1986년 총선에서 국민전선의 성장을 예상하고 비례대표제를 실시하게 했고, 그 결과 국민전선 소속 의원 35명이 의회에 입성하게 됐다. 사회당은 국민전선의 부상을 부추겨서 우파 의원들이 선거에서 성공을 거두지 못하도록 방해하려고 했고 이민자에게 지방 선거에서 투표권을 주겠다며 주기적으로 선동했지만 막상 입법은 하지 않았다.

장마리 르펜의 첫 번째 미디어 출연 기회는 미테랑 대통령 덕분이었다. 미테랑 대통령은 미디어 노출이 부족하다며 불만을 표시한 르펜의 편지를 받고 1982년 6월에 직접 개입하여 텔레비전 뉴스에 생방송 출연 기회를 만들어줬고, 1984년 2월에는 정치적 도약의 발판이 될 수 있는 ‘진실의 시간(L’Heure de vérité)’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도와주었다. 당시 사회당 소속이었던 미테랑 대통령은 장마리 르펜을 그저 무해한 ‘주목할 만한 인물’ 정도로만 여겼다. 그는 2022년 자신의 텃밭인 니에브르에서 장마리 르펜의 딸인 마린 르펜이 승리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장마리 르펜, 유럽연합체제에 반대 제기 

그동안 국민전선은 트레이드 마크로 남을 두 가지 행보를 취했다. 첫째, 미디어의 변화를 활용하여 시사 이슈를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는 근거로 제시했다. 샤를 파스카와 로베르 팡드로의 엄격한 감독 아래 이루어진 우파 안보 의제의 급진화(1986~1988년)부터 1990년 10월 ‘교외의 투석전’으로 텔레비전에서 생중계된 볼앙벨랭 폭동, 크레이에서 벌어진 최초의 이슬람 히잡 사건과 1년 전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작가 살만 루시디를 상대로 발표한 파트와(이슬람 교리와 법을 바탕으로 한 이슬람 판결-역주)까지 미디어와 정치적 상황은 아랍 출신과 이슬람 종교에 대한 충성도보다 프랑스에 대한 충성도가 더 낮은 이민자 2세에 대한 불안을 부추겼다. 두 번째로 국민전선은 국수주의적 교조주의를 전술적 유연성으로 보완했다. 우파와 사회당이 찬성했던 단일시장의 시행(1986~1993년)과 냉전의 종식은 장마리 르펜의 행보에 급격한 변화를 몰고 왔다.

그는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소련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하나의 통화와 유럽 공동 방어를 찬성했지만 이후 ‘세계주의적이고 제3세계주의적인 유럽’, 유럽연합의 ‘연방주의자’, 마스트리흐트 조약(장마리 르펜은 이 조약에 반대했다)의 배후에 있는 ‘무국적 은행가’를 비난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3) 그리고 공동농업정책(CAP), 자유무역협정, 2005년 유럽헌법조약, 그리고 2년 후 리스본조약도 반대했다.

이를 바탕으로 1992년 국민전선의 경제 강령에 변화가 일었다. 이제 국민전선은 ‘자유방임적 자유주의’와 ‘일반화되고 규제가 완화된 글로벌 자유무역을 추구하는 주요 다국적 기업의 지원을 받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 대한 개념’과의 투쟁에 중점을 뒀다. 마스트리흐트 조약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를 두고 같은 의견을 가진 정치권과 언론은 만장일치를 예상했으나 결과는 찬성이 51%에 불과했고 유럽시장의 인기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국민전선은 레이건의 초자유주의를 포기했다. 그리고 유럽연합으로부터 위협받는 ‘많은 공공서비스, 경찰서, 산부인과 병동, 병원서비스’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마린 르펜, 유로화 탈퇴 요구 

사업가, 교육받은 계층, 언론 및 여당은 유럽통합 프로젝트에 강한 지지를 표명했으나 국민전선은 일반 대중 사이에서 인기가 시들해진 유럽연합 체제에 급진적인 비판을 제기하는 위치를 사실상 독점하게 됐다. 국민전선은 좌파와 달리 ‘사회적 유럽’ 방향으로 개혁하자고 주장하지 않았다. 2009년 국민전선은 유럽에 관한 정책 성명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럽연합은 전체주의 체제가 됐으며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정말 재앙이라 할 수 있다. 경기 침체, 해외 이전, 국민들의 경멸, 유로화 도입 이후 물가 폭등, 농업과 공공서비스의 소멸, 대규모 이민, 국가 정체성의 파괴가 나타났다.” 마린 르펜은 유로화 탈퇴를 요구하면서 위와 같은 입장을 이어갔고 2018년까지 고수했다.

여러 요인이 주기적으로 극우 세력의 부상을 저지했다. 첫째, 내부 분열이나 위기가 있었다. 1998~1999년 장마리 르펜과 브뤼노 메그레 간 분열로 국민전선에서 많은 핵심 인물이 이탈했고 그 결과 2002년 대선에서 참담한 성적을 거두었다. 국민전선은 2차 결선투표까지 진출했지만 득표율이 18%에도 미치지 못했고 1차 투표 때와 거의 비슷하게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당시 국민전선이 직면한 ‘유리 천장 지수’는 아주 낮고 깨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견고해 보였다. 2005년 11~12월 폭동 이후 불안정과 이민, 국가 정체성에 중점을 둔 선거 캠페인 덕분에 당시 내무부 장관이었던 니콜라 사르코지 후보는 국민전선 유권자 일부를 흡수했고, 장마리 르펜의 대선 득표율을 10.4%에봉 머물게 하며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대권 도전에서 승리했다.

모두가 보기에 위험은 지나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국민전선의 부상을 저지하는 또 다른 요소가 등장했다. 좌파 활동가들이 신자유주의 개혁에 대한 항의를 주도하는 역할을 더 잘 수행한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사회운동이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국민전선에게는 곤란한 상황이 초래됐다.

2015년 4월, 사르코지당 출신 에릭 시오티 의원은 “마린 르펜 후보의 경제 공약은 장 뤽 멜랑숑과 올리비에 브장스노(반자본주의당·NPA 당수)의 경제 공약과 아주 똑같다”고 주장했다.

물론 ‘아주 똑같’지는 않다. 극좌파와 극우 유권자들은 이슬람과 이민 문제에 관해서는 비슷한 입장이지만, 60세 은퇴와 부유세 폐지, 자본주의 시스템의 ‘근본적’ 개혁, 더 나아가 ‘부자에게서 빼앗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사회 정의’에 관해서는 이미 점점 더 의견이 갈리고 있었다.(4) 따라서 우파 정당 간의 연정은 불가능해 보였고, 실제로 마린 르펜은 연정을 원하지 않았다.

보수 정부와 사회주의 정부가 시행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사회운동에서 국민전선-국민연합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노조가 이들 극우 정당을 거부한 것도 있지만, 사회운동에서는 ‘프랑스인’과 이민자를 함께 아우르기 때문에 극우 세력의 정책적 무기인 ‘정체성 갈등’ 이슈가 뒤로 밀려나게 되어 노조의 대의는 오히려 극우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부분적인 승리라 할 수 있는 1995년 11~12월의 대규모 사회운동, 2010년 연금 개혁, 2014년 철도 노동자 파업, 2016년 노동법, 2018년 ‘노란 조끼’ 운동, 이듬해의 새로운 연금 개혁 등에서도 국민전선-국민연합은 편치 않은 상황에 처했다. 국민전선-국민연합은 사회적 시위와 연대하면서도 유권자와 가까워야 하고, 동시에 경찰을 향해 폭력을 행사하는 시위대에 대해서는 ‘질서의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유지해야 했다.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국민전선-국민연합은 자신들도 반대하는 사회적 신자유주의 정책이 일부 노동조합과 좌파 활동가들이 지지한 유럽조약에서 비롯된 결과며, 극우를 막기 위해 선출된 역대 정부(2002년, 2017년, 2022년)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1992년부터 미테랑과 자크 시라크가 마스트리흐트 조약을 지지했고, 13년 후 사르코지와 올랑드가 유럽헌법조약을 지지했다는 사실을 내세웠다. 1981년부터 2017년까지 4명의 대통령(우파 2명, 좌파 2명)이 유럽통합과 관련하여 동일한 선택을 했다는 사실은 유럽연합이 점점 더 많은 경제 및 사회 정책에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국민전선-국민연합은 주요 우파 정당인 대중운동연합(UMP)과 좌파 정당인 사회당(PS)의 약자를 결합해서 ‘UMPS’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이 용어를 통해 우파와 좌파가 유럽의회에서 동일한 다수파를 구성하고 있으며, 둘 다 유사한 유럽통합 정책을 지지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현실을 크게 왜곡하지 않고도 자신들의 주장을 전달했다.

 

기성 정치권, ‘봉쇄 투표’ 전략으로 국민전선-국민연합에 맞서

유럽조약을 동일하게 지지하고 유럽연합에서 동일하게 다수파이며 주요 선거에서 극우에 대항하기 위해 ‘공화주의 전선’에서 동일하게 투쟁하는 등 프랑스의 주요 정당들의 모습을 보면 국민전선-국민연합이 주요 대안 세력으로 나타난 것도, 기존 정당들이 국민전선-국민연합을 막기 위해 연합하는 ‘봉쇄 투표’가 현상 유지를 위한 노력으로 보이는 것도 놀랍지 않다.

‘봉쇄 투표’ 전략은 1936년 인민전선(파시즘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공동전선-역주)의 경우처럼 초기에는 파시즘적이고 정치적 결집을 넘어서는 활동을 하는 조직의 집권 경로를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설득력을 잃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리고 극우가 점점 일상화되고 있고 자신들의 주장을 완화하고 심지어 친유대주의를 표방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극우에 맞서기 위해 연합한 정당들이 극우 핵심 정책 요소를 계속 모방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2016년 11월 16일, 올랑드 대통령은 의회 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국가의 근본적 이익을 공격하거나 테러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은 개인이 프랑스에서 태어났더라도, 확실히 말하지만, 프랑스인으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다른 국적의 혜택을 받는다면 프랑스 국적을 박탈해야 합니다.”

마린 르펜은 사회당 소속 대통령이 프랑스 국민을 출신에 따라 구분한다는 사실에 즉각 환영의 뜻을 표하며 “국민전선은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에게 영감의 원천이 될 만큼 현실적이고 진지한 강령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마크롱 대통령의 경우에는 극우파에게 크리스마스와 같다. 경찰 권력 강화, 시위 금지, 이민법, 반‘분리주의’법, ‘야만으로의 회귀’나 ‘탈문명’, ‘이민주의’ 등의 극우적 용어 사용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번에는 국민연합의 장필리프 탕귀 의원이 기쁨을 표했다.

“우리의 주장이 검증되면서 프랑스 국민들이 보기에 우리 당의 집권 가능성이 크고 바람직하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원본은 항상 나쁜 복제본, 심지어 (내무장관인 제라르) 다르마냉식의 극단적인 복제본보다 우위에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다르마냉 장관은 마린 르펜에게 이슬람주의에 대해 “너무 무르다”고 말한 바 있다.

 

2008년 금융위기, 극우 정당 세력 확대에 불붙여

2001년 9월 11일, 프랑스에서는 테러리즘과 급진 이슬람 문제가 주요 논쟁 주제로 자리잡게 됐다. 알카에다의 공격으로 국제적으로 불안정한 시대가 열리면서 이주민이 크게 증가했고 극우파는 이 점을 이용했다. 1980년 전 세계적으로 강제로 이주한 사람들은 840만 명이었다. 1990년에는 1,730만 명, 2001년에는 1,910만 명, 2013년에는 4,100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2024년 4월 말에는 1억 2,000만 명에 달했다. 동시에 히잡과 부르카와 관련된 논쟁이 뉴스를 장악했는데, 특히 유대인 학교 테러와 샤를리 에브도 테러, 바타클랑 공연장 테러, 니스 테러, 사무엘 파티 피살사건 이후 논쟁은 더 거세졌다.

국민전선은 네덜란드에서 이탈리아까지 이슬람을 유럽 문명의 숙적이라고 표현하는 새로운 상황에 맞춰 담론을 조정했다. 24시간 뉴스 채널이 그와 같은 주장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국민전선-국민연합은 (악마화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인종주의적 편견을 과도하게 내세우지 않고 오히려 ‘잃어버린 공화국 영토’ 내에서 무슬림의 ‘분리주의’에 의해 위협받을지도 모르는 자유와 공생(양성평등, 게이 및 레즈비언 권리, 표현의 자유 및 풍자만화)을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남반부로부터의 이민과 싸울 수 있게 됐다. 즉 위와 같은 이념과 샤를리 에브도 사건 이후 새로운 세속 종교로 자리 잡은 ‘공적인 영역에서의 종교의 철저한 분리원칙’이 융합되면서 극우파의 주장에 공화주의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국민전선-국민연합의 이념적 영향력은 점점 커졌지만 그렇다고 실제 권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2008년 금융위기와 그로 인한 사회적 충격은 국민전선-국민연합의 영향력을 확장시키는 데 기여했다. 1980년대 석유 파동 이후 대도시의 대형 공장이 전멸했다면,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목재와 판지, 운송 장비, 농식품 및 의약품 부문 등 농촌과 소도시의 소규모 사업장들이 붕괴했다.

수만 명의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집에서 먼 곳까지 이동하느라 교통비 부담이 커졌다. 그전까지 해외 이전도 견뎌냈던 지방의 제조업 기반이 붕괴됐고 국가는 이를 방치했다. 세계화된 대도시는 빠르게 회복했지만 나머지 지역은 그렇지 못했고, 이로 인해 대도시와 지방 간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졌다.

공정하지 못하다는 생각은 급속한 디지털화와 유럽연합에서 강요하고 프랑스 정부에서 옹호하는 긴축정책에 의해 악화됐고, 이는 국가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몇 년 사이에 대도시뿐만 아니라 특히 소도시와 촌락에서 학교와 기차역, 법원, 산부인과, 응급실, 세무서 등이 수백 개씩 문을 닫았다. 예를 들어 프랑스 북서부의 사르트 데파르트망에서는 2011년부터 2016년 사이에 우체국 절반이 문을 닫았다.

국가는 점차 이들 지역에서 철수하고 있었다. 국민전선은 이 같은 상황을 이용해서 빈곤층 간의 경쟁을 부추기는 전략을 손쉽게 펼칠 수 있었다. 국민전선은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공적자금의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보장제도를 악용하는 외국인, 프랑스공화국의 법을 따르기를 거부하는 교외 지역이 혜택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2014년 말 역사학자 발레리 이구네는 이런 주장을 했다. “노동총연맹(CGT)의 티에리 르퐁 사무총장이 노조 연맹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전단지 하나를 큰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보호주의가 필요하다, 전략적 국가가 유럽연합에 ‘헐값에 팔아치운’ 주권을 되찾아 공공서비스를 방어해야 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그는 동료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이 전단지는 국민전선에서 작성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5)

 

농촌 지역의 빈곤화가 국민연합 세력 확장의 촉매

세계화에서 배제되고 상류층으로부터 멸시받는 사람들을 옹호한다는 국민전선의 포지셔닝은 지리학자 크리스토프 길루이의 ‘주변부 프랑스’에 관한 논문과 여론조사 전문가 제롬 푸르케의 분석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정확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효과적이었다. 사실 도시 엘리트들은 농촌 지역을 휴가지 정도로 보기 때문에 시골 지역의 걱정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환경 문제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그 모습도 변했다. ‘지하철-직장-집’이라는 일상에 지친 도시 거주자와는 달리, 오랫동안 이상적으로 여겨져 왔던 소규모 단독주택 소유 모델은 기후 위기의 시급함으로 인해 기피 모델로 변해버렸다. 미래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유기농 채소를 먹고 짧은 유통 경로를 선호하는 등 가격이 비싸더라도 가치 있는 것을 도덕적 의무로 삼는, 친환경적인 시민의 몫이다. 긴축정책으로 여러 혜택이 대도시에 집중되면서 이 새로운 진보적 현대성은 그 외 지역의 많은 이들을 뒤떨어진 존재로 만들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잘못된 투표를 하는 것밖에 없었다. 국민전선은 지난 20년 동안 남동부와 북동부 지역에 그 세력이 집중되어 있었지만 다른 시골 지역으로 눈을 돌려 기반을 넓힐 수 있었다.

마크롱 대통령이 보인 농촌 지역에 대한 무관심,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에 대한 멸시, 연금과 실업 보험, 노동법, 유류세 등 주요 개혁은 대도시가 아닌 지역의 빈곤화에 대한 정치적, 대중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사회적 구성과 행동 방식 면에서 전례가 없는 ‘노란 조끼’ 운동은 언론의 적대감, 일부 좌파의 불신, 정부의 탄압에 맞서야 했다. 그리고 결국 이 운동도 극우 세력에 장악당했다.

마린 르펜은 “저는 ‘당신들은 아무것도 아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다’라는 말을 듣고 굴욕감을 느낀 프랑스를 대신해 여러분께 말씀드리러 왔습니다”라며 분노했다(<유럽1>, 2018년 11월 29일 방송). “이제 그만하면 됐습니다. 수년 동안 정치가들은 프랑스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소수자에게 우선권을 부여하고 심지어 배타적인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이제는 우리 다수의 차례이고 우리는 배려와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과연 극우파에 승리할 수 있는 전략은? 

“우리”라고? 마린 르펜이 언급한 노동계급 유권자들은 종종 투표보다 기권을 선택했다. 그들 중 일부가 극우파에 표를 던진 이유는 노동자와 사무직 직원 및 소수의 중산층을 초토화시킨 세계화를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는 질 수밖에 없는 도박이었다. 왜냐하면 마린 르펜의 정당은 안보와 이민에 대한 집착으로 우파와 중도 세력을 오염시키면서 자신들이 원하는대로 유럽연합 문제를 비롯해 경제 문제의 (국수주의적인) ‘정상화’를 이루어나가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에서 소수당으로 밀려났지만, 추후 혹시라도 마린 르펜이 집권하게 되면, 2002년 4월 21일 그녀의 아버지 장마리 르펜이 말한 것처럼 “소시민, 말단, 배제된 자, 광부, 금속공, 여성 노동자, 남성 노동자, 쥐꼬리만한 연금 때문에 빈곤에 내몰린 농민” 같은 지지층에게 (일부는 바랄 수도 있는) 외국인 혐오 정책이 시행될 가능성이 크다. 물론, 극우가 집권한다더라도 지금의 마크롱 정부가 망쳐 놓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다. 따라서 이번 선거에서 제1당으로 부상한 좌파연합이 우리가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들에 진정으로 집중한다면, 새로운 기회를 맞이할 것이다. 길에는 장애물이 가득하겠지만 동시에 새로운 역사를 써나갈 기회가 주어지기 마련이다.

 

 

글·브누아 브레빌 Benoît Brévill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세르주 알리미 Serge Halim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편집고문
피에르 랭베르 Pierre Rimber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기자

번역·이연주
번역위원


(1) 세르주 알리미, 「Le Front national verrouille l’ordre social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국민전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6년 1월호.
(2) 「Pourquoi la gauche perd 좌파는 왜 패배하는가」기사 참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한국어판 2022년 1월호.
(3) Emmanuelle Reungoat, 「Le Front national et l’Union européenne 국민전선과 유럽연합」, dans Sylvain Crépon, Alexandre Dézé et Nonna Mayer, 『Les Faux-Semblants du Front national 국민전선의 가식』(Presses de Science Po, Paris, 2015)에서 인용.
(4) <르피가로>, Paris, 2015년 4월 8일.
(5) Valérie Igounet, 「La conversion sociale du FN, mythe ou réalité ? 국민전선의 사회전환, 신화인가 현실인가?」, <프로제(Projet)>, n° 354, Paris, 2016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