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살 비극의 데칼코마니, 아르메니아와 팔레스타인
콩고민주공화국부터 가자지구를 거쳐 시리아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쟁과 몇몇 권위주의적인 정권의 탈선에 대해 ‘제노사이드’라고 규정짓는 상황이 늘어나고 있다. 1944년 만들어진 ‘제노사이드’라는 단어는 이 단어가 생성된 지 오래된 만큼이나 어떤 사건이 제노사이드인지에 대한 논쟁도 오래됐다. 그리고 이는 법률가와 역사가들이 흥미로워하는 주제이다. 이들 덕분에 현재와 과거의 비극, 특히 오스만 제국 시민이었던 아르메니아인들의 비극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1904년 일어난 헤레로족과 나마족 제노사이드와 더불어 1915년 일어난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는 20세기 초 발생한 제노사이드 중 하나다. 그리고 2023년 말 우리는 21세기 첫 번째 제노사이드라 일컬을 수 있는 사건을 목도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가자지구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 섬멸이다.
팔레스타인인 섬멸을 제노사이드라 ‘일컬을 수 있다’고 했던 표현을 보면, 무엇이 제노사이드인지를 규정하는 일이 복잡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1) 법적으로 봤을 때 1948년 국제 연합(UN)이 채택한 제노사이드 범죄 예방 및 저지를 위한 협약은 제노사이드에 대해 ‘국민, 민족, 인종, 종교 집단 전체 또는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저지르는’ 모든 행동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역사와 사회학 분야에서도 제노사이드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에 대한 논쟁이 있다. 1950년부터 2000년 사이에는 ‘제노사이드 연구’에 대한 학문 간 연구에서 ‘반인류 범죄’가 논의 주제로 부상할 정도였다. 이 주제에 대한 연구 활동 중 하나는 이 반인류 범죄들을 세밀히 이해할 수 있도록 각 범죄를 비교하는 일이었다. 모든 제노사이드에는 독특한 특성이 있지만 유사성도 관찰된다. 반인류 범죄가 여럿 나타나는 경향을 보이는 전쟁 상황에서 특히 그렇다.
제노사이드를 법적으로 규정할 때 객관적인 기준을 근거로 한다지만 정치적 측면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역사가 페리 앤더슨이 말했듯 국제법은 ‘강자의 법’이다.(2) 국가 행위자(국가)와 비국가 행위자(비정부 단체)는 대규모로 벌어지는 범죄가 제노사이드로 전개되는지 여부에 자신들이 관심을 가질 때에야 법률가나 역사가와 마찰을 빚으며 그 일이 제노사이드인지 규정하는 절차에 돌입한다. 알아두어야 할 점은 1948년 제정된 제노사이드 협약은 제노사이드가 일어나거나 지속되지 못하도록 행동에 나서는 데 목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튀르키예 민족주의 세력, 아르메니아인들을 대학살
제노사이드로 보이는 새로운 케이스가 발생할 때마다 과거에 발생한 제노사이드 사건들과 비교할 부분이 많아진다. 현재 신규 사례는 가자지구에서 일어난 일이다. 비교를 통해 우리는 현재 진행 중이지만 애초부터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운 사건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사용되는 용어들이 비슷비슷하다고 볼 수는 없다.
아르메니아의 경우 제노사이드로 인해 사망자가 약 150만 명 발생했다. 1915년부터 1923년까지 오스만 제국에 거주했던 아르메니아인 2/3가 사망한 것이다. 게다가 아르메니아인을 대상으로 한 강간, 노예 삼기, 유아 유괴, 강제 개종 등도 일어났다. 프란체스카 알바니스 점령지 담당 유엔 보고관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작전을 개시한 이래 6개월간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3만 명 이상을 살해했으며, 7만 천 명을 다치게 했다.(3) 이것이 다가 아니다. 아이들 만 3천 명 이상이 사망했고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시민 80% 이상을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1908년 쇠퇴해가는 오스만 제국에서 정권을 장악한 청년 튀르크당과 파시스트 성향의 장관들로 구성된 인종 민족주의 세력—이후 무스타파 케말 튀르키예 초대 대통령이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를 완수한다.(4)—이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집단 폭력을 자행함으로써 이들을 몰아내고 튀르키예 민족을 건설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요르단과 지중해 연안 사이 영토를 되찾자는 대이스라엘(Greater Israel) 프로젝트(성경에 쓰여 있는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자는 운동-역주)를 진행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의 경우 민족 국가 설립으로 가는 과도기에 제노사이드가 일어났다. 아르메니아인이 당한 폭력은 오스만 제국에는 튀르키예인이 아닌 민족들에게 제국의 문호를 개방한 시기가 지난 뒤, 청년 튀르크당이 장악한 정부가 무슬림이라는 단일 민족의 정체성 위에 정부를 세우고자 하는 의지로 인해 일어났다. 오스만 제국 내 타민족 추방은 아시리아인, 그리스인, 유대인에게도 각기 다른 형태로 일어났다.
대이스라엘 프로젝트, 파괴적인 인종 청소 작전으로 이어져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인들이 이주해 사는 식민지, 즉 정착형 식민주의에 속한다. 이는 19세기 말부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 폭력은 시온주의, 즉 대이스라엘 프로젝트 안에 이미 존재하는 요소다. 2023년 10월 시작된 이스라엘의 공격은 오랜 기간 연이어 발생한 인종 청소 작전 중 가장 파괴적이었다. 역사가 라시드 칼리디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민족을 대상으로 “백년 전쟁”을 개시했다고 말했다.(5) 이것을 빼놓고는 하마스가 10월 7일 저지른 이스라엘 침공을 설명하는 것이 무의미하다.
아르메니아에서도 이주 문제가 있었다. 그렇지만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의 경우에는 ‘인구 공학’적인 측면이 있다. 오스만 제국은 발칸 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에 패한 바 있는데 이때 튀르키예 정부는 다른 지역, 특히 발칸 반도에 거주하던 무슬림들을 오스만 제국 동쪽에 위치한 아르메니아 지방에 정착하도록 했다. 오스만 제국 말기를 연구한 역사가들은 이것을 내부의 식민지화라고 말했다.(6) 이는 곧 지역 내 아르메니아인 절멸을 뜻한다.
“개”·“돼지”로 불린 아르메니아인, “인간 동물”로 비하된 팔레스타인인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의 시작을 1915년 4월 24일로 기억하지만 아르메니아인을 대상으로 한 다른 대규모 범죄들은 19세기 후반 이미 벌어졌다. 예를 들면 1894년부터 1897년까지 자행된 ‘하미디예’ 대학살(오스만 제국의 압둘하미드 2세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 ‘하미디예’ 기병대를 보내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한 사건-역주)과 1909년 일어난 아다나 대학살(오스만 제국의 아다나 주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당한 사건)을 특히 꼽을 수 있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대규모로 벌어지는 살인과 엄밀한 의미에서의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 사이의 연속성을 짚었다. 어쨌든 폭력은 지속됐다.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가 일어나고 한 세기가 흐른 2022년 9월 튀르키예가 지원하는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 아르메니아인 12만 명을 추방했다.
또한 두 경우 모두 이들이 인간임을 부정하는 단어를 통해 이들을 공격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개”, “돼지”로 불렸지만, 요아브 갈란트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은 팔레스타인인들을 “인간 동물”이라 불렀다. 대학살 이전에 인간임을 부인하는 행위가 선행되는 것이다. ‘탄지마트’라는 이름으로 19세기 중반 오스만 제국에서 시행된 개혁에도 불구하고 아르메니아인들은 2등 시민에 머물렀다. 여러 국제단체는 21세기 초 이스라엘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지배적이었던 상황에 대해 알렸는데 특히 국제 인권 단체 휴먼 라이츠 워치와 국제 앰네스티, 이스라엘 인권 단체 베첼렘은 민족과 종교에 따라 개개인의 권리가 차등됐다는 사실을 밝혔다.
아르메니아와 팔레스타인, 대학살로 못 이룬 독립의 꿈
그렇지만 아르메니아인과 팔레스타인인 간에는 두 가지 차이점이 있어 더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오스만 제국에서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민족으로서는 2등 시민이라 하더라도 일부는 엘리트 계층, 특히 경제적으로 상류층에 속했다. 둘째로 아르메니아인들이 겪은 공간상의 분리-아파르트헤이트는 ‘분리’를 의미한다.-는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해진 상황과 같지 않았다. 팔레스타인인들이 거주하는 요르단강 서안지구에는 분리 장벽이 있고 가자지구는 지붕 없는 감옥이다.
민족의식의 부상은 두 민족의 상황에 대해 알 수 있는 중요한 정보다. 먼저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 안에서 자신들의 여러 권리와 안전을 보장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들은 두 제국에 살았으며 추후에는 독립을 요구했다. 팔레스타인의 정체성은 오스만 제국 시절의 행정 구역인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하는 지식인 사이에서 19세기 말부터 형성됐다.(7) 그런 뒤 시온주의(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의 땅인 팔레스타인에 유대 민족 국가를 건설하려는 민족주의 운동-역주)와 대립하며 강해졌다. 아르메니아인과 팔레스타인인 모두 대학살로 인해 독립이라는 열망을 실현시키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독일, 튀르키예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방조 책임 인정
비슷한 게 또 있다. 국제 사회가 두 비극에 아주 수동적인 입장에 있었다는 점이다.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튀르키예 정부가 아르메니아인을 섬멸할 때 튀르키예의 동맹국이었던 독일 제국이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8) 어떤 이들은 독일 관리들이 직접적으로 참여했다고 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그들이 최소한 제노사이드를 막는 데 일정 부분 일조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2016년 6월 독일이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인정했을 때 독일 연방 의회 결의안에는 “유감스럽게도 오스만 제국의 주요 동맹국이었던 독일 제국은 …… 이러한 반인류 범죄를 중단시킬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라며 잘못을 인정했다. 이어 “독일 제국은 이 사건들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9)”라고 덧붙였다. 가자지구에서 일어난 학살 또한 국제 사회의 지원이 있었다. 그 중에도 미국은 최일선에서 거의 무조건적으로 무기와 탄약을 공급하고 외교적으로 방패막이 돼 주고 있다.
제노사이드는 상징적 인간성 말살을 넘어 상당히 물질적인 과정에 속한다. 튀르키예 중산층은 아르메니아인의 토지 및 통장을 강탈함으로써 부상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부상한 튀르키예 중산층은 케말주의 체제(튀르키예 초대 대통령인 무스타파 케말의 사상에 따라 이슬람주의가 아닌 세속주의를 표방함.-역주)의 기반을 다지게 된다.(10)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분쟁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영토에 자국민을 이주시킬 목적뿐 아니라 그 땅의 경제적 가치를 보고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영토를 차지했기 때문에 일어났다.(11) 1993년 체결한 오슬로 협정 전 요르단강 서안지구에 거주하던 이스라엘인 인구는 11만 명이 되지 않았는데 현재는 거의 71만명에 달한다.
국제사법재판소가 인정한 가자지구 제노사이드
이스라엘의 경우 종교적 논리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거주할 권리를 주장한다.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설명하는 데에도 종교가 포함되지만 확실히 팔레스타인 분쟁만큼 핵심적인 이유는 아니다. 역사가들은 모두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해 팔레스타인 분쟁만큼 종교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다.
아르메니아의 경우 대학살에 있어 ‘현지’ 자원을 사용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청년 튀르크당과 연계된 무장 단체 중 하나-특수 조직-는 보통법을 위반한 범죄자들이나 아르메니아인들을 제거하도록 선동된 비정규군 (특히 쿠르드족)을 이용해 아르메니아인들을 집단 학살했다.
팔레스타인의 경우 가자지구에서는 이스라엘군이 무차별 폭격을 퍼붓는 반면, 요르단강 서안지구에서는 자국의 비호를 받으며 급진적으로 행동하는 이들이 있었다. 즉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저지르는 권력 남용 또한 현지 자원을 이용한 측면이 있다.
1915년에 튀르키예에서 벌어진 제노사이드는 아르메니아인 엘리트층 숙청에서부터 시작됐다. 아르메니아 공동체의 지도층을 제거하는 일은 곧 그들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머지 아르메니아인들을 제거하는 일이 더 쉬웠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총공세를 펼쳤지만 팔레스타인 지식인들 또한 타깃이 된 것도 사실이다. 이는 2023년 12월 6일 팔레스타인인 시인 레파트 알라리르가 이스라엘군에게 살해당한 점, 기자 125명이 사망했다고 알바니스 보고관이 집계한 점, 가자지구 내 12개 대학교가 파괴됐다는 점을 보면 알 수 있다.
1세기 만에 세계가 인정한 아르메니아 대학살
점점 많은 국가, 국제 시민 사회 단체, 전문가가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일을 제노사이드로 보는 의견에 대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자르 세갈이 이 의견을 10월 13일 처음으로 표명한 듯하다.(12)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 출신 미국인이자 홀로코스트 전문가인 오메르 바르토브는 이스라엘이 의도를 가지고 제노사이드를 자행하려 한다며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13) 또한 이스라엘의 제노사이드 혐의에 대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국제 사법 재판소에 제소한 바 있는데 1월 말 압도적으로 많은 판사들이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에 대해 실질적 위험이 있다고 밝혔다.
여러 사건이 벌어지고 한 세기 만에 ‘국제 사회’가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인정했다. 우리 세상은 크게 진일보한 것이다. 그럼에도 튀르키예는 여전히 아르메니아인 학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한 행동이 학살이라는 사실도 부인한다. 튀르키예는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맥락에서의 대학살은 인정하지만 아르메니아인을 섬멸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어떤 사건을 제노사이드로 규정할지에 대해 자주 토론이 있는 이유가 그 일에 의도가 있었는지를 따지고자 함이라면, 제노사이드를 저지른 이들 중 그 의도를 명시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14) 이스라엘 지도부는 ‘추방’에 대한 표현을 여러 차례 사용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참모진에 “가자 주민의 수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계획을 세우라고 말했다. 이스라엘군은 체계적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을 살해하기 위해 인공 지능을 이용했다.(15) 팔레스타인인 말살 방법에 대한 자료를 모으는 것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렇지만 제노사이드를 할 의도가 있음은 행동으로도 확인된다.
아르메니아와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두 비극이 서로 주고받는 메아리를 인식한 팔레스타인 시인 나즈완 다르위시는 자신의 시에 “누가 아르메니아인을 기억하나?(16)”라는 문장을 썼다. 폴란드 침공 전날 아돌프 히틀러가 던진 질문을 인용한 것이었다. 다르위시는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아르메니아 역사에 대한 시를 썼습니다. 오늘 저는 우리, 팔레스타인인들이 또다시 비슷한 일을 겪는 상황을 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목도합니다. 역사는 우리를 비웃고 있죠. 역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들은 과거에 대해 쓴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사실 그대들은 그대들의 미래에 대해 쓰는 것이라네.’라고요.”(17)
글·라즈미그 크셰얀 Razmig Keucheyan
파리대학교 사회학 교수
번역·김은혜
번역위원
(1) Dominik J. Schaller, 「From Lemkin to Clooney : The development and state of genocide studies 」, Genocide Studies and Prevention, vol. 6, n° 3, Toronto, 2011년 11월.
(2) Perry Anderson, 「Le droit international du plus fort 강자들의 국제법」,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4년 2월호.
(3) Francesca Albanese, 「Anatomy of a genocide. Report of the special rapporteur on the situation of human rights in the Palestinian territory occupied since 1967 to Human Rights Council. Advance unedited version (A/HRC/55/73)」, 24 mars 2024, www.un.org
(4) Raymond Kévorkian, 『Parachever un génocide. Mustafa Kemal et l’élimination des rescapés arméniens et grecs (1918-1922) 제노사이드를 완성하다. 무스타파 케말 그리고 아르메니아인과 그리스인 생존자들의 추방 (1918~1922)』, Odile Jacob, Paris, 2023년.
(5) Rashid Khalidi, 『The Hundred Years’War on Palestine. A History of Settler Colonialism and Resistance, 1917-2017』, Metropolitan Books, New York, 2020년.
(6) Olivier Bouquet, 『Pourquoi l’Empire ottoman? Six siècles d’histoire 왜 오스만 제국인가? 6세기의 역사』, Folio, Paris, 2022년.
(7) Cf. Rashid Khalidi, 『L’Identité palestinienne. La construction d’une conscience nationale moderne 팔레스타인의 정체성. 현대 민족의식의 성립』, La Fabrique, Paris, 2003년.
(8) Cf. notamment Stefan Ihrig, 『Justifying Genocide. Germany and the Armenians From Bismarck to Hitler』, Harvard University Press, Cambridge, 2016년.
(9) Frédéric Lemaître, 「En réaction à la reconnaissance du génocide arménien par l’Allemagne, la Turquie rappelle son ambassadeur à Berlin」 독일이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를 인정하자 튀르키예, 독일 주재 자국 대사 본국 송환」, 2016년 6월 2일 자 <르몽드>.
(10) Hamit Bozarslan, Vincent Duclert et Raymond Kévorkian, 『Comprendre le génocide des Arméniens 아르메니아인 제노사이드 이해하기』, Tallandier, Paris, 2015년.
(11) Cf. Haim Yacobi et Elya Milner, 「Planning, land ownership, and settler colonialism in Israel/Palestine」, Journal of Palestine Studies, vol. 51, n° 2, Washington, DC, 2022년.
(12) Raz Segal, 『A textbook case of genocide』, Jewish Currents, New York, 2023년 10월 13일.
(13) Omer Bartov, 「What I believe as a historian of genocide」, <The New York Times>, 2023년 11월 10일.
(14) Scott Straus, 「Second-generation comparative research on genocide」, World Politics, vol. 59, n° 3, Baltimore, 2007년 4월.
(15) Yuval Abraham, 「“Lavender” : The AI machine directing Israel’s bombing spree in Gaza」, <+972 Magazine>, 2024년 4월 3일, www.972mag.com
(16) 나즈완 다르위시의 시집 『Nothing More to Lose』의 발췌문, New York Review Books/Poets, New York, 2014년.
(17) Alexia Underwood, 「Palestinian poet Najwan Darwish : “We can’t begin to comprehend the loss of art”」, <The Guardian>, Londres, 2024년 1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