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즘에 분노하고, 뉴욕에서 절망한 혁명가의 삶
독일 혁명가 톨러의 대표작, 『아이고, 우리는 살아있네!』
에른스트 톨러는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 투사였다. 그는 1918~1919년 바이에른 평의회 혁명에 참전했고, 오직 프롤레타리아의 단결만이 나치즘의 부상을 저지할 수 있다는 신념을 전파하고자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망명과 함께 정치적, 개인적 절망을 겪은 그는 혁명의 열정과 그 열정을 꺾는 요인을 동시에 대변한 존재였다.
반세기 전, 파리 시민들은 충격적인 연극을 접하게 된다. 독일 혁명을 다룬 탕크레트 도르스트의 『톨러』라는 작품이다. 이 연극은 1919년 4월 7일~5월 3일의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의 혁명 과정을 역사적 인물을 통해 연속적으로 묘사하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항하려다 실패한 봉기를 격정적 리듬으로 풀어냈다. 이 4시간짜리 장막극을 연출한 파트리스 셰로 감독은 주인공 에른스트 톨러의 학생 역을 직접 연기했다. 톨러는 혁명중앙위원회 의장으로 활동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군사재판에서 5년 형을 선고받았다.
1971년, 셰로 감독은 밀라노의 피콜로 테아트로 극장에서 초연을 올렸다. 이어 1973년에는 프랑스 동부 빌뢰르반의 국립극장, 이듬해에는 파리 오데옹 극장에서 공연했다. 1974년 4월 24일자 <르몽드>에서 비평가 콜레트 고다르는 “밀라노에서는 실현해야 하는 목표 앞에서 무력함을 드러낸 부르주아 지식인을 묘사했고, 프랑스에서는 목표를 달성해 한 달간 지속된 유토피아의 성공을 그렸다”고 대조했다.
과거 투쟁의 선구자? 아니면 현재 투쟁의 동지?
노동자 평의회에 놀란 보수주의자들에게 이 공연은 이상주의자가 비극으로 치달은 참극인 반면, 사회변혁을 꿈꾸는 자유사상가들에게는 현실화된 찰나의 꿈이자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동경을 살찌우는 양분이었다. 그렇다면 톨러는 ‘과거 투쟁의 선구자인가 아니면 현재 투쟁의 동지인가?’ 역사학자 발트라우트 엥겔베르크는 1978년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1) 바꿔 말하면, 이것은 단순한 과거 사건인가 아니면 살기 좋은 미래를 구축하는 유산일까?
1893년, 톨러는 동프로이센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독일제국의 부르주아 계층에 편입하려는 열망으로 가득했다. 1914년 4월, 그르노블 대학 문학과에 진학하지만, 그해 8월에 전쟁이 일어났다. 1915년, 그는 호전적인 혈기로 전쟁에 자원했으나 이듬해 질병과 부상 때문에 제대한 후 뮌헨에서 법학과 문학 공부를 재개했다. 서서히 평화주의로 전향하게 되고, 1918년 10월 파업에 참여했다. 이후 다시 징집됐다가 투옥되지만, 정신병을 가장해 석방됐다. 그리고 쿠르트 아이스너의 사회주의(좌파) 혁명에 가담했다. 1919년 4월 7일, 평의회 공화국이 선포되지만, 5월에 무산되고 그해 6월 4일 톨러는 다시 체포됐다.
5년 후인 1924년 7월, 톨러는 감옥에서 나왔다. 그리고 시집 『제비의 책』과 특히 1917년부터 집필해 1919년 10월 베를린에서 상연된 희곡 『변화』로 작가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톨러는 조각가 견습생 프리드리히라는 인물에게 자신의 변화를 투영시켰다. 애국적 군인이 비폭력 운동가가 되어, 인본주의적 복음을 설파했다. 당시 미학적 흐름인 표현주의에 맞춰, 이 작품은 젊은 베를린 관객들에게 죽음의 무도로 여겨지며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다.
톨러는 복역 중에 희곡 네 작품을 집필했다. 『인간과 대중』과 『힝케만』은 전쟁을 배경으로 혁명 속 인물들 간의 대립, 사상적 토론, 고통을 다룬다. 『기계 파괴자』는 산업화가 한창이던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기계의 신성화에 대항하는 노동자의 혁명을 그린다. 『해방된 보탄』은 풍속 희극으로, 이발사 빌헬름 보탄이 자신을 구세주로 착각하는 이야기다. 톨러는 비합리적이고 조악한 것에 쉽게 매료되는 독일 사회를 풍자하는 통찰력과 선견지명을 선보였다.
톨러가 새로운 독일, 즉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돌아왔을 때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 1924년 봄에 독일을 떠날 당시 그는 사회민주당(SPD)에서 분리된 독립사회민주당(USPD) 소속 당원이었다. 그는 항의운동이나 연대운동에만 전념했고, 노동계급 단결에 기여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이자 승리를 위한 첫 번째 조건이라 철석같이 믿었다.
톨러의 머릿속은 2차 세계대전 발발 가능성으로 가득했다. 1929년, 그는 “우리는 반동파가 지배하는 시대의 문턱에 있다”고 경고했다.(2) 그로부터 2년 후에는 한 남자가 베를린 문턱에서 자신은 총리로 즉위하길 기다리고 있다고 예언했다. 다름 아닌 아돌프 히틀러였다. 1932년 6월에는 바리케이드에서의 고립된 전투와 반란의 시기는 지났으며 오직 낭만적인 혁명가만이 여전히 그것을 믿는다고 경고했다.
그리고 파시스트를 실패로 몰아가려면 “노동계급 전체를 하나로 묶는 조직을 창설해야 하며, 분명한 투쟁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3) 그러나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히틀러가 자신의 예언대로 권력을 잡았던 것이다. 이윽고 1933년 2월 28일,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이 벌어지면서 첫 번째 체포 물결이 일었다. 게슈타포 대원들은 화재 소식을 듣자마자 톨러의 집을 급습했지만, 당시 그는 라디오 강연 때문에 스위스 취리히에 있었다. 사실 체포자 명단은 사전에 작성돼 있었다. 톨러는 “내 아파트는 마지막 셔츠 한 장과 원고까지 탈탈 털렸다. 내 이름은 독일 국적을 박탈당한 첫 번째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라고 1934년 12월 31일 서신에 썼다.(4)
표현주의를 포기하고 신즉물주의 흐름 속에
1933년 4월 1일 나치 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독일 전역의 유대인 가게 불매 운동’을 촉구하는 베를린 연설에서 “플랑드르와 폴란드에서 독일군 200만 명이 유대인 톨러를 처벌하기 위해 무덤에서 일어났다. 그는 감히 우리 영웅의 이상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다고 썼다”라고 외쳤다.
이때부터 톨러의 방랑이 시작됐다. 영어에 능통했던 그는 모든 작가들의 학회를 방방곡곡 찾아다니며 대재앙이 닥치기 전에 나치 독일을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치 반대파가 의견 차이를 극복하고 단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소위 민주주의 정부들이 이 투쟁의 중심에 서야 한다고 믿었다. 1936년 12월 12일, 톨러는 자신이 정착한 뉴욕에서 개최된 ‘독일의 날’ 행사에서 “세계가 히틀러에게 평화를 보장하도록 강제하지 않는다면, 히틀러는 독일과 유럽을 폐허로 만들고 문명을 파괴할 것이다”라고 연설했다.(5)
그렇다면 그의 문학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는 과장스러운 고뇌로 점철된 표현주의를 포기하고, 『아이고, 우리는 살아있네!』를 계기로 표현주의를 대체한 새로운 흐름인 ‘신즉물주의(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에서 일어난 반표현주의적 전위예술운동. 사물 자체에 접근하여 객관적인 실재를 철저히 파악하려는 경향-역주)’로 넘어갔다. 이 작품은 에르빈 피스카토어의 연출 덕분에 1927년 베를린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1933년, 톨러는 암스테르담에서 자서전 『독일에서의 청춘』을 출간하고, 두 편의 희곡을 더 썼다. 1936년에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와 나폴레옹이 등장하는 풍자적 판타지 『더 이상 평화는 없다』, 1939년에는 최초의 강제수용소를 목도한 일부 나치의 양심의 가책을 다룬 현실적 드라마 『홀 목사』를 발표했다.(6) 그러나 그의 연극은 더 이상 프롤레타리아 군중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대중을 위한 공연과 집단적 환상은 끝이었다.
나치와 파시스트에 맞서 투쟁 … 절망 속 자살
1937년, 미국에서의 톨러의 삶은 비참해졌다. 이혼과 만성 우울증에 시달리고 저작료는 거의 바닥났지만, 그래도 그는 버텼다. 나치즘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당위성 외에도, 스페인에서 공화파 연합의 승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시급한 대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톨러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의 지원을 받아 스페인 민간인 지원 프로젝트를 구상했고, 1939년 초에 프로젝트를 개시했다. 그는 식량 60만 톤을 실어 나를 자금을 모금했고, 이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939년 3월 28일, 스페인 파시스트 프랑코 장군의 군대는 마드리드 입성에 성공한다.
1939년 5월 22일, 톨러는 뉴욕 호텔 14층 방에서 의자에 쓰러진 채 비서에게 발견됐다. 목욕가운 허리띠를 창문에 걸어 목을 매 자살한 것이다. 500명의 인파가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바이에른 출신 친구이자 동료 작가 오스카 마리아 그라프, 미국 소설가 싱클레어 루이스, 후안 네그린 스페인 전 총리, 독일 소설가 토마스 만의 장남 클라우스 등이 추모 연설을 했다. 클라우스 만은 1941년에 영어로 작성한 글(본래 출판 의도 없었음)에서, 당시 연설은 ‘정직’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7) 클라우스는 톨러와 그의 작품이 나치 정권 붕괴 이후 독일로 성공적인 복귀를 할 것이라 예언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톨러가 사망한 이유는 복귀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라 믿었다.
프랑스에서는 이제 『톨러』가 거의 상연되지 않는다. 톨러가 후대에 남긴 것은 청렴한 이상주의자로서의 본보기다. 그리고 결코 사소하지 않은 그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글·리오넬 리샤르 Lionel Richard
피카르디 쥘 베른 대학교 명예교수. 『D’une apocalypse à l’autre. Sur l’Allemagne et ses productions intellectuelles, du XIXe siècle à la fin des années 1930, 종말에서 또 다른 종말로: 19세기부터 1930년대 말까지 독일과 그 지적 생산물』의 저자
번역·이보미
번역위원
(1) Waltraut Engelberg, ‘Feuerprobe des ethischen Sozialismus’, Helmut Bock, Wolfgang Ruge, Marianne Thoms, 『Gewalten und Gestalten. Miniaturen und Porträts zur deutschen Novemberrevolution 1918-1919』, <Urania-Verlag>, Leipzig-Iéna-Berlin, 1978년.
(2) Ernst Toller, 『Kritische Schriften. Reden und Reportagen. Gesammelte Werke Band 1』, <Hanser>, Munich, 1978년.
(3) Ibid.
(4) Ernst Toller, Digitale Briefedition, www.tolleredition.de
(5) 『Kritische Schriften. Reden und Reportagen…』, op. cit.
(6) 『Hop là, nous vivons! 아이고, 우리는 살아있네!』, <Les Éditeurs français réunis>, Paris, 1966년; 『Une jeunesse en Allemagne 독일에서의 청춘』 <L’Âge d’homme>, Lausanne, 1974년; 『Pièces écrites au pénitencier. L’homme et la masse, Hinkemann 옥중 작품. 인간과 대중, 힝케만』, <Éditions Comp’Act>, Chambéry, 2002년; 『Pièces écrites en exil. Plus jamais la paix, Pasteur Hall 망명 중 작품. 더 이상 평화는 없다, 홀 목사』, <Éditions Comp’Act>, 2003년; 『Le Livre des hirondelles, Allemagne 1893-1933. Souvenirs d’un lanceur d’alertes 제비의 책, 독일 1893~1933년. 내부고발자의 추억』, <Séguier>, Paris, 2020년.
(7) Klaus Mann, 『Le Condamné à vivre 삶을 선고받은 자』, Dominique Miermont 번역, <Denoël>, Paris, 199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