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막 뒤의 유럽이사회

2012-09-11     크리스토프 들루아르, 크리스토프 뒤부아

유로화 위기 등의 문제를 논하는 유럽 정상회의가 열릴 때마다 언론은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27개국 정상들이 자동차를 타고 회의장에 속속 도착하는 장면을 보거나, 회의 종료 뒤 열리는 기자회견에서 반복되는 도식적 답변만 들을 뿐이다. 그들 사이에 실제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알 수 있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1995년 5월부터 유럽의 정상들은 벨기에 브뤼셀의 유스투스 리프시우스 빌딩에 모여 회의를 연다. 15세기 브뤼셀에서 문헌학을 공부한 한 인문주의자의 이름을 딴 이 육중한 건물은, 로베르슈만 로터리 부근 역사적인 유럽위원회(유럽연합(EU)집행위원회) 본부 맞은편에 있다. 이곳에서 유럽이사회(European Council·EU 정상회의, EU 회원국 정상과 EU위원회 위원장 등의 모임으로 EU 최고의사결정기구) 회의뿐 아니라 EU이사회(Council of the European Union·EU각료회의) 회의도 열린다. 이 건물 뒤편은 각국 정상들을 태운 자동차들이 신속하게 들고 날 수 있는 구조로 돼 있다. 그곳에 비밀 출입문이 있으리라 쉽게 추측할 수 있다.

50.1호실에 들어서면 벨기에 총리 출신의 헤르만 반롬푀이 유럽이사회 의장(1)과 조제 마누엘 바호주 유럽위원회 위원장이 기다리고 있다. 각 회원국의 상임대표들- 브뤼셀 주재 대사들- 도 배석해 있다. EU이사회의 입법회의를 중계하기 위해 천장에 설치된 카메라는 유럽 대륙의 최고 권력자들이 모이는 이 자리에서는 작동을 멈춘다. 유럽인들의 미래가 달린 중대한 결정이 비공개로 내려진다는 뜻이다. EU의 제도적 구조를 찬양하는 이들이 보기엔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엘리제궁에서 프랑스 대통령이 주재하는 각료회의를 리얼리티쇼처럼 카메라로 생중계하는 일은 없지 않은가. 그러니 브뤼셀에서 굳이 그런 것을 할 이유가 없다는 거다.

유럽의 미래가 결정되는 밀실

하지만 규모가 다르다. 엘리제궁에 매주 수요일에 모이는 장관들은 자신의 결정으로 고통을 받거나 이익을 얻는 시민들에게 책임을 져야 한다. 의회의 동의를 통해 임명된 만큼 최소한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유럽이사회는 전혀 사정이 다르다. 한 국가 정상이 자신의 공식적 입장을 이사회 회의에서 고수하고 요구를 관철했는지, 반대로 다른 국가들의 압력앞에 굴복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따라서 정부 수반을 추궁할 근거가 없어진다.

회의에서 어떤 말이 오갔는지 아는 방법 중 하나는 회의가 끝난 뒤 기자회견에 참석하는 것이다. 기자회견은 국가별로 열린다. 문제는 각국의 언론이 모든 정상의 기자회견 내용을 비교·검토해서 회의 내용을 재구성하기 위한 수단도 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설사 가능하더라도 기자들은 이 과정을 통해 '인간의 증언이 얼마나 상대적인지'를 새삼 느끼게 될 것이다. 이미지 부각이 절실한 지도자일수록 그런 경향은 더할 것이다. 이들에게 투명한 광고를 요구할 수는 없다. 물론 공동으로 발표하는 공식 성명 내용을 분석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공식적인 진실이지 본래적 의미의 구체적 진실은 아니다.

비밀 마이크를 설치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실제로 유럽이사회 회의실 통역 부스에 연결된 도청 장치가 발견된 적이 있다. 벨기에 비밀정보부가 조사에 나섰고, 이스라엘과 관련 있다는 추측이 제기됐다. 일각에서는 모사드 관련 설도 나왔지만 사건은 그것으로 종결됐고 정치적 문제로까지 확대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 방법이 더 남아 있다. '안티치 노트'다. 1970년대 활동했던 이탈리아의 외교관 파올로 안티치(1924~2003)의 이름을 딴 이 노트에 유럽이사회 회의에서 정상들이 나눈 대화의 거의 전부 가 꼼꼼히 기록된다. 일명 '디브리퍼'(Debriefer)라고 불리는 이사회 사무국 직원이 50.1호실과 인접한 방 사이를 오가며 각국 외교관들에게 회의 내용을 전달한다. 이 노트는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다. 2010년과 2011년 우리가 확보한 노트를 보면 당시 지도자들이 금융위기 앞에 얼마나 패닉 상태에 빠졌는지, 그들이 어떤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2010년 9월 16일 유럽이사회 개막 때 반롬푀이 의장은 경제위기 해결과 성장세 회복을 위한 대책이 만족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자축했다. 그러나 2년 뒤 상황은 그의 말을 무색하게 했다. 유럽 대륙은 여전히 공공부채 위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예산도 인권문제?

비밀리에 회의가 열리다 보니 일부 지도자들은 비민주적 조처를 도입하려는 유혹을 느끼기도 한다. 2010년 6월 14일,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안정성장협약'(SGP·1997년 6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유럽이사회에서 채택)을 준수하지 않은 국가를 제재해야 한다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들의 주장대로 '문제' 국가로부터 EU이사회 투표권을 박탈하는 식의 처벌을 감행할 경우, 해당 국가는 다른 회원국들의 보호령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2010년 10월 28일, 유럽이사회에서 독일 총리는 반격에 나섰다. "리스본 조약 7조는 심각한 상황에서 해당 국가의 투표권을 박탈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처벌을 받아야 하는 심각한 상황이란 EU의 가치, 즉 인간 존엄성과 자유, 민주주의, 평등을 지속적이고 심각한 방식으로 훼손하는 경우를 말한다. 금융질서 교란 따위의 문제와는 아무 상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 총리는 그런 구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권침해에 대비해서 7조를 도입했다. 유로화 문제 역시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단짝 '메르코지'의 주장은 여러 지도자들의 비판 표적이 됐다. 트라이안 바세스쿠 루마니아 대통령("현 상황은 인권침해와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없다"), 장클로드 융커 룩셈부르크 총리, 호세 사파테로 스페인 총리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러자 사르코지는 늘 하던 대로 교묘한 뉘앙스로 자신의 입장을 변호했다. "투표권 박탈은 리스본 조약 속에 명시돼 있다. 따라서 비상식적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럼 형법에 종신형이 명시돼 있으니 소매치기에게 종신형을 선고해도 괜찮다는 말인가. 한때 불가리아 공산당 지도자의 경호원, 가라테 국가대표팀 단장을 역임하고 불가리아 총리직에 오른 보이코 보리소프는 다음과 같은 말로 정치적 지혜의 모범을 보였다.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투표권 박탈 같은 모욕적인 해결책은 안 된다." 성명서 최종 문안 속에는 당연히 이런 발언들이 빠져 있다.

2011년 3월 24일, 유럽의 지도자들은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을 대체할 유럽안정화메커니즘(ESM)의 도입 의사를 밝혔다. 7천억 유로가 필요한 ESM 도입 계획은 5개월 전에 발표됐지만 답보상태에 머물고 있다.(2) 반롬푀이 의장은 "ESM의 모든 요소를 긍정적으로 홍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의 결단에 대해 의심을 불러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800억 유로를 분담해야 하는 회원국들은 의견이 엇갈린다. 장클로드 융커 유로그룹 의장은 "소란 피울 필요는 없다. 나는 언론에 이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거론했다"고 말했다. 당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 장클로드 트리셰는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이미 상당히 늦었다. (중략) 긍정적으로 홍보해야 한다는 말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끼리라도 솔직해지자. 우리가 서로 약속을 지키는 데만 15개월이 걸리지 않았나." EU시민이 이런 솔직한 발언을 듣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안티치 노트를 살펴보면 유로화 문제를 넘어서서 공공기관의 무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2010년 10월 29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당시 이탈리아 총리는 '붕가붕가' 파티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문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그는 산업시설 해외이전 문제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경영자들은 유럽을 떠나 노동자들이 영어를 할 줄 알고 임금을 적게 받는 인도나, 인구가 매년 2030만 명씩 증가하는 중국으로 가겠다고 말한다. 이 정도 수면 프랑스 혹은 영국의 인구(3)와 맞먹는다." 이날 베를루스코니는 흔히 알려진 이미지와 다른 면모를 보여줬다. "유럽의 기업들은 갈수록 경쟁력을 잃어간다.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심층적으로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 한 기업 관계자는 내게 현재 유럽에서 50만 명을 고용하고 있지만 그 수를 15만 명까지 감축하겠다고 했다."

보호무역주의의 불길한 조짐

중요한 주제였음에도 반롬푀이 의장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다. 사민당 소속의 베르너 파이만 오스트리아 총리는 다시 이 주제로 돌아와 유럽위원회가 유럽 각국의 경쟁력 제고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자 바호주 유럽위원장은 "보호주의적인 부정적 메시지를 내보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강하게 반발했다. "이제 순진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교역 상대국들에 좀더 직접적인 메시지를 보낼 필요가 있다. 만약 상대가 교역관계의 상호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관세 부과 같은 방법도 고려해야 한다." 흥분한 바호주 위원장은 유럽위원회가 중국과 베트남을 상대로 반덤핑 조처를 취하자고 제안했던 사실을 상기하며 "유럽이사회를 설득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유럽위원회는 보호주의에 반대한다"는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 유럽위원회는 리스본 조약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자유무역주의라는 율법을 고수한다. 유럽 각국 지도자들의 언행은 이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안티치 노트는 지도자들이 숨기고 싶어 하는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글/크리스토프 들루아르 Christophe Deloire / 크리스토프 뒤부아 Christophe Dubois <시르쿠스 폴리티쿠스>(Albin Michel·파리·2012)의 공저자.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1) 리스본 조약에 의해 유럽이사회 상임의장 자리가 신설됐다. 임기는 2년6개월이고 연임이 가능하다. 회원국 정부 수반들의 투표로 선출된다. 6개월 임기의 의장국 대표와 함께 유럽이사회를 이끈다. 반롬푀이 의장은 2010년 1월 1일 선출됐다.
(2) Raoul Marc Jennar, ‘쿠데타 위한 두 가지 협약’,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6월호.
(3) 정확한 수는 6천만 명이다.


비슷한 이름의 다른 이사회
 
유럽이사회(유럽연합(EU)정상회의)와 EU이사회는 이름이 비슷한데다 회의 장소도 같다. 그러나 엄연히 서로 다른 조직이다.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는 유럽이사회는 1974년 비공식적으로 출범한 뒤 마스트리흐트 조약(1992)을 거쳐 리스본 조약(2008)에 이르러 공식 기관으로 인정받게 됐다. 유럽이사회는 EU 각국 정부 수반들의 회의체로서 EU 운영에 추진력을 제공하고 일반적인 정치적 방향성을 제시한다. 한마디로 프랑스의 각료회의와 비슷한 결정기구라고 할 수 있다.

흔히 ‘EU각료회의’로 불리는 EU이사회는 별칭대로 27개 회원국의 외교, 사회·경제, 사법, 내무 등 각 분야 장관들의 모임이다. EU이사회는 유럽위원회(EU집행위원회)가 제안하고 대부분 유럽의회와 함께 공동으로 도입하는 법안 작성에 참여한다. 각료회의에서 진행되는 법안 관련 논의는 외부 공개를 원칙으로 한다. 회의실에 설치된 카메라로 회의 모습이 생중계되지만 때로는 기술적 문제로 놓치는 장면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 회의에 앞서 사전 협상이 진행되는데 이도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다. EU상임대표위원회(Coreper) 차원에서 이뤄지는 이 협상에는 회원국 ‘대사들’과 보좌관들이 참석한다. 고위 공무원으로 구성된 위원회와 전문가 그룹이 사전 준비를 담당하는데 그 자격이 의심스러울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