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착취'미국식 경영의 샐러리맨 죽이기

2009-03-02     노엘 뷔르기 | 소르본 정치연구소 연구원

대량해고·구조조정 '국가의 계획적 사기'…'포식자' 행태
노동자 불안감 이용 '채찍과 착취·해고', 개인·가정 파괴

던랩, 그의 나의 52세. 몇 달 전에 던랩은 안락한 은퇴 생활을 즐겼으나 그것도 잠시, 이내 골프장과 테니스장에 있어도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마침 1907년에 두루마리 화장지를 제조했던 미국 기업 스캇 페이퍼 사가 도움을 청해왔다.
 스캇 페이퍼 사에 들어간 지 몇 주 후에 던랩은 약 1만 1천 명의 노동자를 해고한다는 발표를 했다. 전 직원의 1/3에 해당하는 수였다. 직급에 관계없는 '군살빼기'였을 뿐만 아니라 '먼지를 탈탈 털어내는 과정'이기도 했다.
 "구시대적인 기업 문화를 대표하는 사람들을 내보내지 않으면 언젠가 이들에게 공격을 당할 것이다."라는 게 던랩의 생각이다. 던랩은 우유부단하지 않고 칼 같이 단호한 조치를 취하는 인물로 유명하다.
 "회사를 제 자리에 돌려놓고 어려운 결정을 내릴 줄 아는 인물은 던랩 뿐이었습니다. 던랩은 환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를 순환시키는 외과의사 같은 인물입니다."
 프랑스계 영국인 백만장자이자 극단적인 보수주의자인 제임스 골드스미스의 말이다. 그러나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포식자 같은 사람들은 과거에는 영광을 누렸으나, 이제는 점점 비난을 받고 있다. 1980년대 초부터 사회 계약의 전적인 해체를 진두 지휘한 미국에서 바로 이러한 변화의 바람이 감지되고 있다.
 
 '구조조정은 노동자 착취' 비난
 미국식 기업 경영방식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변하면서 어떤 현상이 일고 있을까. 텍사스 대학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는 제임스 K. 갤브레이스는 "포식자 같은 국가가 계획한 사기"라고  비난하고 나섰다.
 "훌륭한 경영방식이었다고? 사실은 가차 없는 횡포로 노동자 전체를 착취한 것에 불과하다. 한 마디로 대대적인 강탈인 것이다." 이는 <뉴욕 타임스>의 스티븐 그린하우스 특파원이 집필한 저서 <커다란 압박>에서 나온 내용이다.
 "윈-윈 전략에 따라 각자 자기 책임을 다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 모두에게 번영이 기다린다는 '약속'은 정녕 어떠했나. 오히려 개인과 가정들이 풍족한 생활도 못하고 사회 보장의 혜택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한 채 과도하게 착취당한 셈이다."
 <로스앤젤리스 타임스>의 피터 고슬린 특파원도 <높은 줄>이란 저서에서 이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실제로 개인과 가정에 대한 극심한 횡포가 현재 미국에서 심하게 일어나고 있다. 미국의 현실은 유럽에서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사회 보장이 축소되고 공격적인 경영이 일반화되면서 소수 부유층을 제외한 모든 사회 계층이 고통을 겪고 있다. 현재 금융 위기로 미국식 모델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긴 했으나, 여전히 유럽은 미국이 갔던 길을 그대로 가고 있다. 이에 대한 우려는 여러 저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저서들에 따르면 시스템의 부당함과 마주치게 되면 부유한 국가의 시민들일수록 자기 자신만을 의존하고 자기 책임에만 갇혀 심리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일이 더 많다고 한다.
 
 사회보장 '철학'의 붕괴
 미국의 사회보장 시스템은 세 가지 수당을 기본으로 한다. 첫 번째 서비스는 국가가 마련해주는 수당으로, 최악의 상황을 맞은 소수를 위한 것이어서 혜택을 누리기 어렵다. 두 번째는 질병, 장애, 은퇴 후에 관련 기업이 직원들에게 마련해주는 수당인데,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세 번째는 개인 보험에 들어 나중에 자신을 위해 받게 되는 수당이다.
 미국의 사회 보장 시스템은 유럽의 사회 보장 시스템과 너무나 다른 모델이지만 근본 원칙은 생각 만큼 그렇게 다르지 않다.
 1935년에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사회 보장을 창설한 후 40년 동안 사회 보장의 역할은 사회의 균형을 유지하고 상호 의무를 잘 지켜 시장의 가치와 개인의 자유 신장이란 원칙을 제대로 지키는 것이었다. 살면서 당하는 갑작스러운 일은 개인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으며, 사회적인 연대 의식이야말로 자본주의 시스템을 안정시키고 인간답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한 시기였다.
 아무리 시스템이 불완전해도 위와 같은 철학은 사회 계약의 기초가 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철학이 깨져 버리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이 같은 철학은 자유로운 시장의 논리에 완전히 밀려 버렸고 그 자리를 '엠파워먼트'와 '개인의 책임'이라는 미덕이 꿰찼다. 
 '자수성가한 사람'을 찬양하는 '아메리칸 드림'을 연상시키는 '권한이양'과 '개인의 책임'과 같은  가치가 부활하고 동시에 '큰 정부'를 비난하는 캠페인이 진행되면서 대중은 사회 보장의 해체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게 되었고 그 결과가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지 못하게 되었다.
 고슬린이 '들어가는 글'이란 저서에서 지적했듯이 이젠 사회 보장의 약화, 공공 대책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를 벌여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사회 원조, 실업, 질병, 은퇴, 기타 수당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다. 빈곤층, 나아가 최빈곤층은 사회 보장의 혜택을 누려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정작 몸이 아파도 제대로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기업·보험사 사회보장 역이용 '잇속'
 최근 도움의 손길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에 대한 수당을 줄이려는 정책을 펴려 하자, 빌 클린턴 전 대통령(1993-2001년 집권)을 비롯한 각계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그런데 이 시기에 민간 분야 시스템의 중심(고용주와 보험회사)도 커다란 변화를 맞고 있었다. 그 변화는 조용하게 이루어졌다. 사회보장 수당이 줄어들고, 삭감되곤 했으나, 공개적으로 이에 반대하는 집단적 반응이 전무한 가운데 자신들의 잇속을 은밀하게 챙긴 것이다.
 예컨대 유럽의 엘리트들은 '사회보장 부담금'이란 개념을 더욱 선호했다. 과거에 유럽의 '사회보장 부담금'은 샐러리맨, 특히 대기업의 샐러리맨들에게 실질적인 보장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엔 경제가 계속 안정되었기 때문에 '사회보장 부담금'은 부수적인 혜택으로 생각되었을 뿐 큰 관심을 가질 분위기가 아니었다. 법으로 보장되는 사회권이 아닌 경우에만 비판의 대상이 될 뿐이었다.
 기업들은 세금을 적게 부담하는 대신 직원들의 연금을 납부해야 했으며, 필요할 경우 이 같은 의무를 오랫동안 준수해야 했다. 직원들의 연금을 납부해야 하는 건 1963년의 사건 이후 10여 년 만에 법적인 의무가 되었다. 1963년의 사건에 대해 잠시 알아보자.
 당시 자동차 회사 스투드베이커는 인디아나 주의 사우스 벤드 공장을 폐쇄한 후 해고된 직원 7천 명에게 연금을 지급하기로 약속한 바 있지만 연금 지급을 못 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74년 법이 마련되어 기업들은 스투드베이커처럼 되지 않기 위해 비축금을 마련해야 했다. 그런데 1985년에 최고법원 판결에서는 1974년 법이 원래의 취지와 달리 기업과 보험회사에게 유리하다고 해석했다. 즉, 피고용자들이 보호를 받는 게 아니라 자금을 든든히 챙기는데 도움을 주는 법이라는 것이었다.
 1974년 법은 고용주와 보험회사들이 직원, 즉, 피보험자들에 대해 지켜야 하는 의무를 없애는 건 아니더라도 줄이는 데 도움을 주는 수단으로 변모하였다. '사회보장 부담금' 의무에서 교묘히 빠져나가는 일이 더욱 쉬워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외에 다른 술책들도 만들어졌다. 가령, 보험회사들은 자신들이 보장해 주어야 할 몫을 많은 경우 '나몰라라' 하고, 이를 피보험자들에게 어렵고 모호한 전문용어로 알리고자 정교하기 그지 없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노동자 위한 '사회보장 부담금'으로 기업주 배불려
'착취·강요·지배'의 사회모순 '행동으로 저항해야'

 불황속 노동자에 '째찍정책'
 2005년에 카트리나 허리케인과 그 외 강력한 폭풍우에도 불구하고 보험 산업이 거둔 수익은 450억 달러라는 기록을 세웠다. 또 1976년에 도입된 개인 적립형 기업연금 401(k)는 샐러리맨에게 지급되는 기존의 연금에 비해 기업에게 부담이 적은 연금 시스템이다. 이는 기업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전략적인 수단이 되었다. 401(k)의 경우 연금을 금융시장에 투자하고 엔론 사의 경우처럼 간혹 기업의 주식으로 투자하며, 직원들은 스스로 재원을 적립하여 노후생계비를 저축하곤 했다.
 그런데 직장을 잃게 되면 건강보험 같은 사회보장 수당은 중단되거나 없어지게 된다. 실업자 혹은 이전보다 보수가 적은 새로운 일자리로 가려는 사람은 보험료를 마련할 수 있는 처지가 못됐기 때문이다.
 1929년의 위기를 분석한 두 경제학자 리차드 버크하우저와 그레그 던컨은 주식 붕괴와 실업만으로는 미국인들이 당시 겪은 어려움을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당시 금융시장은 거의 관련되어 있지 않았고 샐러리맨 75%가 일자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두 경제학자는 한 가정이 붕괴하려면 질병, 사고, 이혼, 갑작스럽게 생긴 아이, 감봉처럼 조그만 일상적 사건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했다. 설립되는 기업보다 무너지는 기업이 더 많아지거나,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경제적으로 혼란한 상황이 되면 갑자기 소득이 줄어들게 된 개개인은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갖게 된다.
 이 같은 불안감이 생겨나면 공격적인 경영이 판을 치는 법이다. "사랑받고 싶으면 개를 키워. 비즈니스에서는 존경을 받아야 해!" 던랩의 설명이다.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을 만들려면 당근 정책과 채찍 정책이 있다고 제리 뉴먼 교수가 설명한 바 있다. 빡빡한 예산으로 비용을 줄이려 한다면 자연스럽게 직원들에게 채찍 정책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무자비하게 직원들에게 압력과 괴로움을 주고 다른 한 편으로는 법을 교묘히 위반하는 일이다.
 
 노동자 위기감 이용, 착취
 불법 노동과 아동 노동이 기업가들 사이에서 경쟁력 있는 노동력으로 떠오르자 되레 합법적인 노동자들은 경쟁력을 잃을까봐 전전긍긍하게 된다. 이 같은 불안감을 이용하여 합법적인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방향으로 법이 이용되게 된다.
 미국에서도 이미 어느 정도 일어나는 일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노동환경이 열악해진다. 주당 60시간에서 80시간까지 강행군으로 일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일을 이렇게 뼈 빠져라 했지만 그에 대한 금전적인 보상이 반드시 따르는 것도 아니다. 추가 근무를 하면 법정 수당을 받는 게 당연한데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게 다반사다. 심지어 월급을 통째로 뜯기는 일도 발생한다.
 예산 범위를 초과하지 않으려는 경영자들은 실제 노동시간을 편법으로 고치고 직원들에게 휴식 취할 틈도 주지 않고 출퇴근 카드를 찍지 못하게 해서 직원들의 실제 노동시간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추가 시간 노동은 금지되어 있다"며 불만을 터뜨리는 직원은 해고하겠다는 위협까지도 한다.
 또한 경영자들은 정규직 직원들의 일부를 임시 고용 노동자들로 바꾸기도 한다. 임시직 노동자, 외주 직원, 프리랜서 등은 모두 임시 고용 노동자들에 속하는데, 이들의 수는 2005년에 약 1천 800만 명이었다. 뿐만 아니라 외국인 출신의 숙련 노동자들도 고용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인도에서 온 노동자들이 대표적이다.
 해고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경영자들은 당당하게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다. "아직 일자리가 있어서 감사하다면 더욱 자주 미소를 지으라!" 그렇다보니 경영자들은 야간 작업반을 가둬놓고 비상구까지 폐쇄해 버리기까지 한다. 누구보다 불법 노동자들이 피해자다. 특히 월마트(혹은 월마트의 하청업체) 등 '모범적'이란 이미지를 지닌 뉴욕의 일부 슈퍼마켓에서 이 같은 비열한 경영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부끄러운 선진국의 노동 조건
 노동 착취는 어쩌다가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미국 전반에서 심각하게 일어나고 있다. 일본 역시 노동 착취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2009년도 1월 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기사 <착취·인권 유린…일본 외국인 노동자>에서 <절망의 공장>의 저자 사토시 카마타는 도요타의 충격적인 노동 현실을 고발한 바 있다.
 "기계 꼭대기 혹은 가정집 지붕 위에 올라가 몸을 던져 자살한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사람들이 제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이런 사건이 신문에는 전혀 보도되지 않는다고요."
 서유럽은 전반적으로 노동자들이 보호를 잘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물론 여기저기서 은밀히 불법이 행해지는 등 어두운 면이 존재한다. 서유럽 역시 노동자에 대한 열악한 대우, 공격적인 경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시민들이 이러한 상황을 그냥 받아들이고 견디면 어떻게 되겠는가? 한 예로 <회피하는 사회 분쟁>이라는 공동 저작물은 지난 30년 동안 유럽에서 반노조 공세가 강하게 몰아친 적이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더구나 새로운 형태의 노동조직으로 인해 규제가 풀리면서 노동 조건이 더욱 열악하게 되었다. 새로운 형태의 노동 조직이 도입된 사회에서는 시민과 소비자들의 상상력과 욕망을 이용하는 일에만 관심을 가질 뿐 자기 성찰을 회피한다.
 
 모순 사회와의 '분쟁' 감수해야
 마리-안느 뒤자리에는 이에 대해 저서 <노동의 이상과 소비자의 노동>에서 심도있는 분석을 시도, "샐러리맨과 소비자들의 주관적인 자아가 '최고'와 '언제나 더 많이'를 우선으로 하는 사회에 저당 잡혀 도구로 사용되는 체제를 연구해야 한다"고 밝혔다.
 '최고'와 '언제나 더 많이'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지만 현실에서는 샐러리맨들에게 강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대기업의 경영진은 직원들에게 강도 높은 책임감을 강요하고 능력을 모두 동원하라고 하면서도 막상 직원들이 일하면서 겪는 실질적인 어려움은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서술하고 있다.
 독자들로선 자신 또한 소비자이자, 노동자로서 포식자 같은 경영진의 부를 늘리는 데 일조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게 된다. 특히 자신 역시 '손님은 왕'이라는 공식을 당연히 여기며 노동자에게 압력을 가하는 존재로 이용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원하든 원하지 않든 힘의 횡포, 부당한 사회에 기여하게 된 셈이다.
 착취, 강요 혹은 지배가 사회에 어떠한 악영향을 끼치는지 정확히 알고 싶다면 단순히 착취, 강요, 지배를 폭로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좀더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엠마뉴엘 르노는 <사회의 고통, 철학, 심리학 그리고 정치>에서 사회 구성원들이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어떻게 하게 되는지 자문해 본다. 가령 우리는 동료들이 해고되는 것을 그대로 지켜보고 노동 조건과 봉급 조건이 악화되는 것을 그대로 감수하고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당하는 횡포를 알면서도 눈을 감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사회 분쟁을 회피하려고 하면 사회 문제는 가려지게 되고 개개인이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박탈당하고 만다. 그러면 경제와 정치는 사회 분쟁을 회피하고자 더욱 입을 다물고 사회 분쟁 자체를 인정하지 않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