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영원한 스승

Spécial 중국은 제국주의로 가는가

2012-09-12     안청

서양인이든 중국인이든, 17세기 유럽이든 현재의 중국이든 정치를 도구화하는 데 공자를 자주 이용했다. 공자는 현재 앞다퉈 예찬하고 싶은 인물로 등극했다. 특히 그의 어록 <논어>에 대한 보수적인 독서(암송하기)가 유행하고 있다.

중국의 현 상황에서 공자는 왜 자주 거론되는 것일까? 기원전 5∼6세기에 살았던 고대의 대(大)지성이, 2500년이 지난 글로벌화한 세계 한복판의 경제적·지정학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거둔 21세기 중국에서 상징적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17세기 예수회 선교사들은 공자의 중국 이름 공부자(孔夫子·Kongfuzi), 즉 공스승(Ma?tre Kong)을 라틴화해 유럽 엘리트들에게 처음 소개했다. 중국 고대사에 따르면, 공자는 의례와 인(仁) 사상 속에서 국가와 자신을 다스리는 예술을 실천할 수 있는 제자들을 양성하는 데 일생을 바친 것으로 알려졌다. 221년 최초로 통일된 중국 제국은 이후 새로운 질서 이데올로기의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 공자의 가르침과 그의 글들을 동원했다(법가사상에 치우친 진시황은 공자의 유가사상 탄압을 위해 분서갱유를 단행했지만, 그의 사후엔 유가사상이 대세를 이뤘다). 이후 20세기 초반까지 공자의 운명은 중국제국의 운명과 함께했다. 공자가 현재 중국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상징처럼 등장할 수 있는 것은 그래서다. 서구사회는 적어도 공자를 중국의 전형적인 상징처럼 인식하고 있고, 중국 본토 또한 공자를 소개하는 데 열 올리며 심지어 그를 도구화하고 있다.

사람들은 공자가 중국 현대사에서 겪은 온갖 수난을 거의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1860년부터 1960년까지 1세기 동안 파괴의 시기를 보냈다. 1860년대 발발한 제2차 아편전쟁은 중국 엘리트들에겐 역사적인 터닝포인트로, 이때부터 이들은 서구 열강을 인식하게 됐다. 1898년 이 엘리트들은 메이지시대(1)의 일본을 본뜬 정치개혁(실패로 끝남)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이어 19세기 초반 유교는 심각한 고비를 맞는다. 1905년 100년의 전통을 자랑하던 제국주의 체제의 핵심 기반인 과거제도(2)가 폐지되고 중국식 정교분리가 시작됐다. 결국 몇 년 뒤 만주에 뿌리를 둔 청왕조의 몰락을 끝으로 1912년 중국의 제국시대는 막을 내렸고, 쑨원이 이끈 신해혁명으로 중국에서 공화국 시대가 도래했다.

보수주의의 핵심으로 고발당한 공자

상징적 측면에서 1919년의 5·4운동(베이징의 학생들이 일으킨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혁명운동)은 굴욕적인 중국의 현실을 인식한 중국 지식인들이 표출한 좌절감이기에, 중국인들의 정신에 가장 깊이 그리고 가장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이 지식인들은 과학적이고 민주적인 서구의 용어로만 중국의 현대성을 정의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들은 중국의 모든 악덕, 물질적·정신적 후진성을 공자 탓으로 돌리며 공자를 깎아내렸다. 유럽식 모더니즘을 추구하던 5·4운동 주동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그랬던 것처럼 유교를 역사박물관으로 보내버렸다.

1920년대 또 다른 진단, 물론 서구적인 진단이 유교를 철저히 깔아뭉개며 유교가 새로운 전환기를 맞는다. 요컨대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유럽의 자본주의 기원 속에서 이데올로기적 요인(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을 중국에 소개하는 데 애썼다. 그는 중국에도 자본주의가 도래할 수 있는 물질적 여건이 갖춰져 있지만 중국에 자본주의가 도래하지 못한 큰 이유로 유교를 탓했다. 그 결과 거추장스러운 짐(유교)을 청산하는 것이야말로 서구적인 현대화로 가는 필수조건처럼 간주됐다.

1919년 이후 세대는 중국과 일본 간 갈등과 내전이 종식되고, 1949년 공산당이 중국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패주하는 것을 몸소 체험한 세대다. 이후 마오쩌둥 신봉자들이 주도하던 중국의 변화를 우려의 눈으로 지켜보던 반(反) 또는 비(非) 마르크시즘 진영의 많은 지식인들이 장제스 정부를 따라 대만으로 떠났다. 중국 내의 파괴적인 극좌 변혁세력은, 1966년 마오쩌둥이 주도한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과 함께 정점을 찍었다가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과 함께 시들해졌다. 이후 이 세력은 중국 전통사회의 유물을 척결하겠다는 의지로 무장한 채 마치 5·4운동의 수구 급진세력처럼 다시 등장했다. 지난 1세기 동안 공자의 유산에 대한 척결 작업 이후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이같은 놀라운 반전은 30여 년 전인 1980년대부터 시작됐다. 반전의 징후가 처음 감지된 곳은 중국 대륙이었다. 절대로 다시 등장할 필요가 없는 장애물로 간주되던 유교가 갑자기 세계화의 핵심 동력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 반전의 원인은 유교와는 거의 무관했다. 오히려 이례적인 역사적·경제적 상황과 연관이 있다. 10여 년간의 문화혁명 이후 공산주의 혁명 모델은 중국에서조차 등한시됐다. 중국의 주변국들, 일본을 필두로 한 ‘4마리의 작은 용들’(대만·홍콩·싱가포르·한국)은 전례 없는 경제적 호황을 누렸다. 제국(중국)의 주변국들은 ‘아시아적 가치’를 증명해 보이듯 아시아의 중심국이 되었고, 특히 서방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중국 공산주의와 동유럽이 정치적 위기를 맞았을 때, 서구 자본주의 사회는 자신들도 침체기에 접어들고 있음을 감지했다. 이런 맥락에서 유교적 가치(가족 중시, 서열 존중, 교육열, 워커홀릭, 절약정신 등)가 아시아의 놀라운 도약을 주도한 것으로 드러나자, 서구사회는 한물가고 실패한 서구의 현대화 모델에 유교 가치를 접목시키는 데 주목한다.

1980년대 이같은 급격한 방향 전환을 촉발한 요인은, 세계 정세와 반전의 진원지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중국 사회가 아니라 미국과 싱가포르 등 이른바 서구화된 영어권 중국 사회에서 찾아야 한다. 이 시기에 아시아의 패권을 노리며 마오쩌둥의 유산을 청산하는 데 여념이 없던 중국 대륙을 유교가 강타했다. 수세대 동안 유교를 비방하고 문화혁명 때는 유교 탄압이 극에 달해 유교를 물리적으로 파괴까지 했던 중국이 1978년, 유교 복원 국제 심포지엄을 처음 개최한 것이다. 이후 중국에서는 한 해에도 수차례 국제 유교 심포지엄이 열리고 있다. 1984년 중국공산당 최고위층의 주도로 베이징에 공자 재단이 창설됐다. 1992년 덩샤오핑은 중국 남부 지방을 순회할 때 중국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게 되면 싱가포르 총리 리콴유(3)의 모델을 중국에 도입할 뜻이 있음을 밝혔다. 아이러니하게도 막스 베버가 자본주의 발전에 심각한 타격을 주는 장애물로 여기던 요인(유교)이 이제 서구 현대사회에 악영향을 끼친 문제로부터 동아시아를 구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드디어 중국과 일부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1세기 전부터 호시탐탐 노리던 서구의 패권에 반격을 가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유교의 부흥이 시장과 별 관계는 없지만, 사회·정치적 구조가 미처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룬 싱가포르·중국·한국의 권위적인 지도자들이 유교를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들은 유교의 가치관이 서구의 쇠락을 가져온 개인주의와 쾌락주의와 달리 사회의 안정과 규율, 그리고 질서를 보장해준다고 설파한다. 이같은 신(新)권위주의 속의 한 지점에서 친(親)마르크스주의와 반(反)마르크스주의 성향의 관념론자들이 서로 조우한다. 예컨대 이들은 서구의 도움 없이 산업 현대화를 이루겠다던 열망을 서구 사상에 물들지 않은 마오쩌둥의 유토피아 사상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이론으로 대체하며, 포스트모더니티의 기치 아래 의기투합했다.

서구 지배에 반격할 기회 잡은 공자의 후예들

1997년 경제위기 때 잠시 수그러든 공자 열풍이 다시 고개를 드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0여 년 전부터(상징적으로 3000년대를 바라보기 시작한 21세기부터) 공자 열풍이 중국 대륙의 사회 각층을 강타하고 있다. 정치권의 최대 과제는 사회적 안정을 유지해 장기적인 경제성장을 이루는 것이다. 2005년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조화로운 사회주의 사회’를 기치로 내세웠다. 그가 덩샤오핑의 ‘상대적인 번영 사회’나 장쩌민의 ‘미덕에 의한 통치’를 명확히 거론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뒤를 이어 유교 노선을 걸을 것임을 암묵적으로 밝혔다. 이는 유교의 경영기법을 사회 안에서 찾아내 서구의 모델인 자유민주주의 대안으로 쓰겠다는 뜻이다. 현재 공자의 이름은 조화와 암묵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며 시장경제를 움직이는 주역처럼, 혹은 상징적인 자본처럼 쓰이고 있다. 공자 재단이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중국 본토에 공자 센터가 우후죽순으로 들어서고 있다.

공자 열풍의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제자들이 기록한 공자의 어록 <논어>가 다양한 형태로 도구화 대상이 되고 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은 공자가 정치선전에 동원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세계적인 영화감독 장이모가 연출한 개막식 때 <논어>에서 발췌한 격언들이 쓰인 그림이 등장했다. 그림 속의 인민해방군 병사들은 한자 모양으로 변장한 채 공자의 격언을 외쳤다. 하지만 공자의 어록이 주로 위력을 발휘하는 곳은 교육 분야다. 지난 2천 년간 중국 봉건주의 시대 내내 <논어>가 교육의 핵심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교육에서 <논어>의 부활은 중국식 특별 교육 관행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유교 덕목을 가르쳐서 사회를 도덕적으로 재무장시키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이런 정책이 전통적 교육 방법으로 주로 교육기관과 유사 교육기관에 도입돼 어린이들에게 시행됐다. <논어>를 필두로 한 고전을 암송하는 기계적인 반복 수업이 이뤄졌다. 성인들 사이에도 이같은 열풍이 불어닥쳐 이들을 겨냥한 수업, 세미나, ‘국가 연구’ 연수 코스 등이 생기고 있다. 도시나 시골 지역에서 개인적으로 유교 대중화를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은, 인터넷을 소통의 장으로 활용해 유교 사상을 설파하며 전례 없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기존 질서를 옹호하는 단순한 메시지?

유단은 <논어>를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주는 <공자가 말하는 행복>(4)이란 제목으로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해 공자의 어록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공자나 중국 전통문화 전문가가 아닌 커뮤니케이션 전문가가 쓴 이 역서는 최근 수년간 서점가에서 잘 팔리는 도서 중 하나다. 언론매체도 이 현상에 한몫하고 있다. TV 방송에서 유단의 책을 수차례 거론하며 그의 프랑스어판 책은 이미 1천만 부 이상 팔렸다.

비판적인 시각으로 유단의 책을 보는 자들은 ‘문체가 간결하고 평이해 독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어 일어나는 현상’이라며 이 책의 성공을 평가절하한다. 예컨대 유단이 <논어>에 내포돼 있는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은 좌시한 채 <논어>를 인간적인 메시지로 축소시켜 사회 안정화의 공식 구호에 걸맞은 이른바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잭 캔필드의 베스트셀러)를 패러디했다고 지적한다. 한편, 지금 중국은 사회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관심과 조화로운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요구가 서로 조우하며 공자의 초상화가 전국에 내걸리고 있다.

글/안청 Anne Cheng
출판사 벨 레트르(Belles Lettres)에서 발간 중인 시리즈 <중국 도서관>의 공동 책임자. 저서 <공자의 대담>(Seuil·파리·1981), <중국 사상의 역사>(Seuil·파리·2002), <중국은 생각하는가?>(Fayard·파리·2009)의 프랑스어 번역자. www.college-de-france.fr/site/anne-cheng에 프랑스어·영어·중국어로 콜레주 드 프랑스 강연이 공개돼 있다.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강의 중.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1) 메이지 시대(1868~1912)는 일본이 현대화에 박차를 가한 시기다.
(2) 7세기부터 시행된 국가 핵심 부서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 시험.
(3) 리콴유는 1959년부터 2011년까지 국무총리, 선임장관, 국무총리인 아들의 멘토장관 등 주요 관직을 거쳤다.
(4) Yu Dan, <공자가 말하는 행복, 보편적 지식에 대한 작은 지침서>, Belfond, 파리,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