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디부아르의 카카오 전쟁

2012-09-12     파니 파주

초여름부터 코트디부아르의 아비장에서는 친(親) 로랑 그바그보 대통령 세력 소탕이 한창이다. 대선 뒤 유혈 사태를 거쳐 2011년 3월 알라산 우아타라가 대통령직에 취임했지만 여전히 화해의 길은 요원하다. 코트디부아르 서부 지역은 국가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곳이다. 이 지역의 카카오 산업은 이미 마피아 조직의 손아귀에 있다.

온통 총알 자국으로 덮인 검게 그을린 차량 한 대. 코트디부아르 서쪽 작은 마을 타이 근처에서 지난 6월 8일 발생한 습격의 흔적이다. 이 습격으로 유엔평화유지군 7명이 목숨을 잃었다. 1년 넘게 이 지역의 마을 곳곳에서는 정체 모를 습격으로 인명 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유엔(UN)이 즉각 조사에 나섰지만 코트디부아르 정부는 '라이베리아 용병들'을 비난했다.(1) 로랑 그바그보 전직 대통령을 따르는 세력이자, 알라산 우아타라 대통령에 반대하는 세력인 라이베리아 용병들이 라이베리아와 코트디부아르의 국경인 카발리강을 건너와 코트디부아르에 공포 분위기를 확산시킨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코트디부아르의 서부 지역은 2010년 대선 뒤(2) 발생한 위기 사태 이후 천연자원 지배권을 둘러싸고 정치적·군사적 혼란의 장이 되었다. 이 지역은 이미 2002년 9월 쿠데타 시도 이후 심각한 폭력 사태에 시달려왔다.

푸르름이 가득한 서부 지역에서 부의 원천은 바로 기름지고 풍요로운 땅이다. 이 지역의 주요 농산물은 카카오인데, 코트디부아르는 세계 1위의 카카오 수출국이다. 이곳은 코트디부아르의 삼림지역으로, 주요 목재 생산지인 그왕데베숲(13만3천ha)과 카발리숲(6만2천ha)이 있다. 이 때문에 오래전부터 인접국을 포함해 다양한 지역에서 이주해온 대농장주에게 인기 있는 곳이었다. 1960∼93년 대통령을 지낸 펠릭스 우푸에부아니는 서부 지역에 대농장들이 들어서는 것을 장려했고, 심지어 '토지는 그 땅의 가치를 높이는 사람이 주인이다'라고 공표하기도 했다. 카카오가 이 지역의 주요 생산품이기는 하지만, 코트디부아르를 아프리카 최대 고무 생산국에 올려놓은 파라고무나무의 생산지이기도 하다. 한 조그만 마을의 촌장은 "파라고무나무 생산지 5ha당 매월 700~800만 CFA프랑(약 1만2천 유로)의 이익을 낸다"고 말한다. 상당한 돈벌이다.

문제의 시작은 1980년대 중반 카카오·커피 국제시장 가격이 하락하면서였다. 농장주 간 경쟁이 심화되면서 소수로 전락한 토착주민과 외국인 사이에 토지분쟁이 잦아졌다. 앙리 코낭 베디에 대통령(1993∼99)이 내건 '이부아르 정신' 정책은 이들 간 관계를 악화시켰다. 새로 이주해온 이들에게 내준 토지에 대해 이부아르인들이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여기에 1998년 법은 명백하게 이부아르인이 아닌 이들에 대한 토지소유권을 부정하기까지 했다.

국립공원 일대를 장악한 무장 청년들

2002년 9월 19일 친(親)우아타라 세력과 북부 지역 군대가 그바그보 대통령에 대항해 일으킨 쿠데타는 화약에 불을 붙였다. 이로 인해 발발한 내전은 서부 지역과 뒤쿠에가 중심이었다. 타이 북쪽 100여km에 위치한 뒤쿠에시는 라이베리아와 기네, 카카오 수출항인 산페드로를 잇는 도로가 교차하는 전략적 요충지다. '포르스누벨'(Forces Nouvelles·신세력)이라 명명된 반군세력은 라이베리아 내전(1989∼97)과 시에라리온 내전(1991∼2002)에 참여한 전투병들을 불러들였다. 이 중에는 시에라리온 내전 당시 잔인한 행위로 악명 높은 삼 보카리도 있었다. 이에 대항해 코트디부아르 정부는 라이베리아인들을 불러들이는 한편, 대부분 토착주민으로 구성된 민병대를 조직했다. 각 대항 세력이 공포 행위를 자행하면서 공동체 내 적대감을 악화시켰다.

내전 종결 뒤 코트디부아르는 사실상 둘로 분리됐다. 뒤쿠에는 야무수크로 정부의 통제하에 있는 남부와 반군세력이 지배하는 북부를 나누는 경계선상에 위치하게 되었다. 타이와 뒤쿠에가 속한 카발리 중부 지역도 카발리와 귀몽의 두 지역으로 분리되면서 정부의 지배하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내내 무장 태세가 지속됐고, 그바그보 세력의 지지를 상당 부분 받는 자위대 조직과 무장세력은 반군에 계속 대항했다. 그 결과 긴장 상태가 지속됐고, 국가의 통치는 제한된 영역에 머물렀다.

2003년 1월 24일 평화조약 체결 뒤,(3) 옛 반군 전투병들은 소강 상태를 이용해 영토 일부를 점령하기에 나섰다. 코트디부아르에서 성장한 부르키나파소인인 아마데 우에레미는 수십∼수백 명의 무장병들과 함께 뒤쿠에 북부 35km 지점에 있는 페코산국립공원에 정착했다. 그리곳 그곳에서 카카오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내쫓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2010년 이들은 코트디부아르공원 관리국 직원들을 내쫓고 관리국 차량을 불살랐다. 2007년에는 불안을 확산시키는 또 다른 사태도 있었다. 부르키나파소인들이 단체로 이주해온 것이다. 수많은 이들이 그왕데베숲을 불법 점거해 카카오를 재배했다. 내전으로 강제 이주한 많은 주민들은 여전히 본래의 토지를 되찾지 못한 상태였다.

우아타라와 그바그보 사이에 대선 뒤 위기가 닥치면서 2011년 3월 상황은 무력분쟁으로 확대됐고, 뒤쿠에는 전례 없는 고난을 맞았다. 옛 반군 출신이 대부분인 코트디부아르공화국군(FRCI)인 우아타라의 군대가 뒤쿠에를 점령할 때 청년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적십자사는 당시 희생자 수가 867명이라 밝혔다. 국제조사위원회와 각종 단체들은 코트디부아르공화국군과 북부 지역의 토속 사냥꾼이 모인 도조(Dozos), 우에레미의 지지세력이 저지른 짓이라고 했다. 2011년 4월 11일 대통령직에 취임한 우아타라 대통령은 사건 규명을 약속했으나, 이 대량학살 사건은 여전히 조사되지 않고 있다.

여기에 새로운 세력들이 끼어들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해졌다. 2011년 7월, 12개 정도의 마을이 무장세력들에게 습격을 받기 시작했다. 이들을 두고 정부는 가나에 망명해 있는 반(反)우아타라 세력의 지원을 받는 '라이베리아 용병'이라 했다. 유엔 쪽은 이들이 라이베리아로 피란을 간 토착 난민이고, 잃어버린 토지를 되찾으려는 것이라 설명했다.

뒤이어 눌러앉은 이들은 도조들이었다. 위기 사태가 지속되는 사이 자리를 잡은 도조들은 떠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토속적인 옷을 입고 '12구경'이라 써붙인 총을 멘 채 오토바이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도조들은 점차 그 수가 증가했다. 이들 상당수는 부르키나파소와 말리에서 왔는데, 일부는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타이 근처로 30여 년 전에 이주한 부르키나파소 출신 농장주는 '주민의 신변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1년 전 도조들을 불러모았다. 이들 상당수는 무장 민병대가 되어 토착민들을 위협하고 갈취하는 행위를 일삼는다. 부르키나파소로부터 전례 없는 규모의 이주 행렬도 빼놓을 수 없다. 타이 북쪽 50km 지점에 있는 자그네로 매주 200여 명을 실은 버스 8대가 도착한다. 이 이주민들의 일부는 남서부 지역으로 떠나는 화물트럭에 몰려 탄다. 이들이 쉽게 정착할 수 있는 주된 원인은 최소 7만 명으로 추산되는 토착주민들이 라이베리아에 난민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타이 남부 지역 13개 마을에는 토착주민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 6월 말 기준으로, 2011년 이전 티엘울라에 살던 200명이 넘는 우비족 중 남은 사람은 9명이다. 반면 부르키나파소인들은 3천 명에 이른다. 피르민 이로 뒤쿠에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 난민캠프 대변인은 "위기 사태 동안 집이 파괴됐고, 아직 두려움에 떨고 있어 고향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4) 뒤쿠에에는 여전히 5천 명에 달하는 게레족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친그바그보파'로 낙인찍힐까 두려워하고, 무장세력에 가담했다고 고발당하거나 체포될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토착민과 이주민의 무장 충돌

일부 부르키나파소인들은 주인 없는 땅에 자리잡았고, 상당수는 완전히 황폐해진 그왕데베숲과 카발리숲을 점거해 파라고무나무·카카오나무·대마 따위를 재배한다. 야무수크로 정부와 아비장도 이런 상황을 알고 있다. 지난 5월 말 국방부과 삼림수자원부는 6월 30일까지 숲에서 철수하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상황은 변화가 없었다. 테레 테헤 타이 부시장은 "국경을 통제하는 것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이며, 이들이 완전히 자리를 잡기 전에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정착민들이 무장을 했다는 점이다. 티엘우라 마을의 토착민 장로인 장 크농소아는 탄띠를 두른 채 총을 메고 밭으로 향하는 젊은 부르키나파소 농부를 바라보다 이내 실망스런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여기는 외국인들은 무장을 해도 되고 토착주민들은 무장을 할 수 없나 보다"고 말했다. "무장한 사람을 상대로 어떻게 소유권 분쟁을 평화롭게 해결할 수 있나?"라고 테헤 부시장이 덧붙인다. 마을 사람들은 "부르키나파소 사람들은 우아타라 대통령이 부르키나파소 출신이니, 그들도 여기서 무엇이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한탄했다. 실제로 일부 정착민은 주인이 있는 농장을 탈취하기까지 했다.

한 지방관리는 "현재 그왕데베숲과 카발리숲을 점거한 이들의 80%가 12구경용 총과 라이플로 무장한 상태"라고 밝혔다. 그는 초기에 이들이 불법 점거를 시작할 무렵 마피아 조직이 배후에 있었다고 했다. "이주민들을 수송하는 그룹, 숲 속 내 이주민들을 통제하는 지점을 담당하는 그룹이 있다. 이들에게 이주민들은 한 뼘 땅을 갖기 위해 2만5천 CFA프랑을 지급한다." 우에레미는 코트디부아르공화국군과 손잡고 이주민과 토지 불법 거래의 주된 배후 인물인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과 헌병들이 친그바그보 세력이란 의심을 사서 무장이 금지된 뒤, 코트디부아르공화국군은 나라 내에 유일한 무장 정규군이다. 어떤 처벌에서도 자유로운 코트디부아르공화국군은 그들 자체가 법이나 다름없다. 뒤쿠에에서 이들은 공포로 군림하고 약식 처형을 자행했다는 주민들의 증언도 있다. 옵서버들은 공화국군이 '라이베리아 용병'의 짓이라 알려진 여러 습격의 주범이라 비난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공화국군들이 사실은 북부 지역 출신이고, 부르키나파소인일 것이라 의심한다.

농민들에 대한 불법 징세와 갈취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2002∼2011년 포르스누벨이 북부 지방에 불법으로 부과한 세금제도를 코트디부아르공화국군이 서부 지역에서 똑같이 따라하고 있다는 것이다. 카발리와 게몽 지역의 마을들 대부분은 국가에 내야 할 세금을 코트디부아르공화국군에 바치고 있다. 유엔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지역을 이동하는 차량과 주민들에게 적게는 4달러에서 60달러, 심지어 이보다 많은 금액을 부과하고 있다고 한다.(5) 농민들도 갈취 대상이다. 타이 근처 마을에서는 한 여성이 자신의 농토에 들어가기 위해 매월 2만 CFA프랑을 이들에게 내야 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유엔평화유지군에서 사망자가 발생함에 따라 로세니 포파나 군지휘관의 로스(Loss) 작전 아래 '치안 강화'라는 명목으로 코트디부아르공화국군 수백 명이 타이 주변 지역에 배치됐다. 옛 포르스누벨군 지휘관 출신인 포파나는 10년간 디즈위트산 인접 지역을 점령했고, 2011년 뒤쿠에를 습격한 무장병들을 지휘한 인물이다. 포파나의 병사들은 게레 학살(6)에 깊게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다. 현 치안 강화 작전을 통해 포파나는 여러 곳에 통제소를 배치했다. 이 때문에 이제 카카오 한 톨도 코트디부아르공화국군의 갈취 행위를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독설이 쏟아졌다. 가나로의 밀수품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7)

지난 6월 말, 코트디부아르 국회의원들은 순찰차 서부 지역을 방문했다. 같은 시기 이 지역 군인들은 인권교육을 받았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7월 5일, 정부는 옛 전투병들에 대한 조사를 했는데 1년 새 두 번째 조사였다. 정부는 모두가 고대하던 무장해제를 약속했다. 하지만 이것도 멀고 먼 서부 지역에 사는 이부아르 주민들을 안심시키기에는 역부족이다.

글/파니 피주 Fanny Pige <폴 비야의 카메룬에서>(카르탈라·파리·2011) 저자.

번역/김윤형 hibou98@naver.com 파리3대학 통번역대학원 졸.

(1) 코트디부아르의 행정수도는 야무수크로이며, 아비장은 경제 중심지다.
(2) Vladmir Cagnolari, ‘코트디부아르, 펠릭스 우푸에부아니의 저주받은 자식’,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1월호.
(3) 마르쿠시 협약은 그바그보 대통령의 권력 유지와 복수정당제 정부를 규정했다.
(4) ‘난민들의 세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6월호.
(5) 유엔 코트디부아르전문가단 보고서 S/2012/196 참조, 2012년 4월.
(6) 휴먼라이트워치,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사람들을 죽였다’, 2011월 10월.
(7) 유엔 코트디부아르전문가단 보고서 S/2012/196 참조, 2012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