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물거리는 말리의 민주주의

2012-09-12     자크 델크로즈

말리공화국은 이슬람 율법의 확산으로 위협받고 있는가? 지난 6월 27일부터 말리 북부 지역의 도시 키달·가오·통북투가 이슬람 근본주의 그룹의 손에 넘어갔다. 이 지역은 말리 영토의 3분의 2에 해당한다. 이슬람 근본주의들은 알라의 이름으로 부당 징수를 하면서도, 분쟁이 벌어졌을 때 도망가지 않은 가난한 주민들을 구호해주는 교묘한 방식으로 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다. 이 거대한 세 지역에 둥지를 튼 살리피주의자(이슬람 개혁 사상·운동을 신봉하는 분파)들은 주민들에게 돈을 나눠주고 구호활동을 하면서, 미래가 없는 젊은 실업자들을 전혀 어려움 없이 모집하고 있다. 그들은 가오에서 석유와 식료품을 비싼 가격에 판매해, 건강센터에 장비를 설치하고 자기 대원들에게 돈을 지급한다. 북부의 한 의원은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단체 '안사르 딘'의 지도자 이야드 아그 갈리를 만나려 했다. 그러자 지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당신이 의원직을 사임하면 만날 것이오. 이슬람 율법 앞에서는 어떤 의원도 아무런 정당성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오."

프랑스보다 2.5배 더 큰 말리의 북부 지역은 인구의 90%가 사는 수도 바마코에서 동떨어져 있다. 우기가 지나고 라마단(금식의 달로 8월 중순경 끝남) 기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바마코에는 식당이 문을 열고, 술을 먹을 수 있으며, 몇몇 흡연자들이 대로에서 담배를 피우는 등 전통적 관용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주민 대부분이 참여하는 라마단은 공개적인 강요가 없음에도 경건하게 말리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첫 번째 걱정거리는 일자리다. 금융위기 때문에 경제가 누더기가 되었다. 많은 서비스 기업들이 문을 닫아서 직원들이 사실상 실업 상태다. 호텔과 식당이 직접적으로 타격을 받았고, 그 피해는 점차 모든 직종으로 퍼져갈 것이다. 에어말리 같은 거대 기업들이 직원을 감원하고 있다. 광업 분야만 운 좋게 버티고 있지만 직원의 급여는 여전히 국가가 지급하고 있다.

또 다른 혼란의 원인은 민주적 모델에 기반한 정치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지난 3월 21일의 군사 쿠데타가 외국의 규탄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환영을 받은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대통령 선거를 불과 몇 주 남기고 쿠데타를 일으키는 믿기 어려운 타이밍 속에 아마두 사노고 대령이 지휘한 카티의 육군기지 병사들은 주민들에게 약탈과 복수를 조장하는 행동을 하면서도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지역을 접수했다. 주모자들은 북부의 투아레그 반군에게 패배한 정부군에 대한 주민의 분노를 이용하는 한편, 엘리트들의 부패와 '빈 껍데기 민주주의'의 허상을 폭로함으로써 주민의 호응을 얻었다. 상당수 정치 지도자들, 특히 '공화주의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연합전선'(FDR)(1)을 통해 애초 쿠데타에 반대한 사람들까지 은밀하고 신속하게 쿠데타 옹호 세력에 동조했다.

무사 트라오레 장군의 일당 독재를 전복시킨 1991년 혁명의 주역이자 '민주주의와 독립을 위한 아프리카 연대당'(SADI)의 지도자 우마르 마리코는 "이 쿠데타가 우리를 환상에서 해방시켰고, 말리 국민을 위한 민주주의 추구라는 문제를 현재의 맥락 속에서 재검토하게 만들었다"(2)고 말한다. 여성 지식인 아미나타 드라만 트라오레는 "사노고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하나의 징후일 뿐이다"(3)라고 하며 더 이상의 언급은 피하고 있다. 이런 논리는 외부에, 특히 프랑스에 많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랑스는 말리가 제안한 '모델'을 한껏 치켜세운 뒤 말리 정부의 몰락이 당연한 것처럼 지난 20년간의 혼란을 재조명하고 있다.(4)

이런 목소리들은 1991년 탄생한 제3공화국에서 획득한 민주적 자산을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 비록 기자들이 물리적으로 공격을 받을지라도 신랄하게 정치 상황을 비판하는 기자들을 허용해주는 표현의 자유, 그리고 북부 지역에 대해 호의적인 집회에서 현재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하는 무수한 사회단체들의 설립과 같은 사회적 개방도 민주적 자산이다. '경이로운 여행자' 페스티벌에서 바마코 사진전을 개최함으로써 말리를 아프리카의 대표 얼굴로 만들고, 말리 가수들이 국제 무대를 정복하려 노력하면서 말리 수도를 대륙의 예술적 중심지로 만든 문화적 역동성도 민주적 자산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말리가 누리던 '민주주의적' 신용 덕택에 신세대 기업 경영자들이 출현하고, 관광산업이 개방되고, 외부 투자가 용이하게 이루어진 것도 민주적 자산이다.

"잘못된 결정이 내려졌다"

1992년 아마두 투마니 투레(일명 ATT)는 고고학자이면서 말리 역사상 최초의 자유투표로 대통령에 당선된 알파 우마르 코나레에게 "이 나라를 지도하기 위해서는 미쳐야 한다"고 했다. 대통령은 곧바로 북부의 반군, 동업조합주의주자들의 요구, 1991년 정치 이양기를 통해 정치적으로 고무된 학생들의 끊임없는 선동, 선거 때마다 불거지는 정당 간의 심각한 갈등에 직면해야 했다. 두 번의 임기 동안 투레가 밀어붙인 큰 과제는 분권화였지만 재원 부족으로 실패했다. 그럼에도 분권화는 여전히 달성해야 할 신화로 남아 있다.(5)

2002년 대통령에 당선된 투레는 정치적 긴장을 완화시킨 사람이다. 1991년 트라오레 체제를 전복시킬 때 장군으로서 쿠데타를 지휘했는데 체제를 전복한 뒤 권력을 시민에게 이양했다. 10년 뒤 권력의 핵심에 오른 그는 통합 지도자가 되고 싶었다. 정치 무대를 미립자화한 정부 형태를 만들어낼 정도였다. 자신을 지지하는 정당도 없이 합의점에 도달하려 애썼고, 자신의 주변에 모든 분파의 대표자들을 모이게 했다. 투레의 정치 방식은 점진적으로 정치권의 세력 교체는 물론 정당들의 정책 능력, 심지어 공개토론까지 마비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나라 전체가 공사장으로 변하고 인프라 구조(도로·수송망·에너지 등)가 급속히 성장했으나, 한편으로는 하급 간부의 고위직 지명제도 등에 따른 부패가 만연해 체제의 권위가 손상돼버렸다. 지금은 사망했지만 민주주의 투사로서 장관직을 수행한 모하메드 라민 트라오레의 표현을 빌리면, 수많은 말리 사람들은 합의를 '전체적으로 아스팔트가 깔린 민주주의에서 케이크를 나눠 먹는 것'으로 간주했다.

똑같은 관리 방식이 북부 지역에도 적용됐다. 2006년 '이슬람 북아프리카 알카에다'(AQMI) 단체로 변신한 '포교와 전투를 위한 살리피주의 그룹'(GSPC)과 정부 간의 대립이 심해지고, 리비아 전쟁의 결과로 사헬 지역 곳곳에 무기가 유통돼 북부 지역에 다시 긴장이 고조됐다.(6) 1992년 반군과 평화조약을 조인하고 4월 11일 '국가협약'을 맺음으로써 북부 지역에 평화를 가져온 투레는 당연히 궁지에 몰렸다.(7) 투레가 공모자라는 오명을 쓸 위험을 무릅쓰고 모든 이들과 토의하면서 늘 타협에 몰두한 이유는, 그것이 2003년부터 사헬 지역에서 작전을 개시한 알제리 전투 그룹의 확산을 저지해 말리 영토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같은 해 알제리에 납치된 서구인 32명의 석방을 성사시키면서 그는 중재자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2010년 2월 인질인 피에르 칼마트의 석방을 위해 프랑스가 그에게 압력을 행사한 것을 보면 그의 중재 역할이 서구 강대국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AQMI와 맺은 협정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말리에서 납치사건이 벌어지는데, 이 때문에 투레는 알제리와 프랑스로부터 방임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8)

노련했지만 군대를 해체시킨 책임이 있는 이 군인에게 오늘날 비난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잘못된 결정이 내려졌다. 장교들이 비정상적으로 밀려나거나 임명되고, 장군들이 부조리하게 임명되고, 병참과 보급이 전반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등 문제가 발생했다. 또한 모든 사람이 중요한 순간에 투아레그족 부대의 수장들을 떠나게 내버려두었다"라고 전 국방장관은 증언한다. 마지막 지적 사항은 의아심을 자아낸다. 말리 지도자들의 말에 따르면, 국가협약에 의해 투아레그 전사들이 군 내부에 실질적으로 통합됐기 때문이다. 또한 바마코의 어느 누구도, 비록 몇몇 분파에 한정된 것이지만 2006년 북부 지역에 반군이 재출현한 사태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9) 국가협약의 실질적 시행은 특히 행정자치와 경제발전 부분에서 지체됐다. 대중 일간지 <레소르> 편집장인 술레이만 드라보는 다음의 사실을 지적한다. "많은 오류가 범해졌다. 수많은 도로를 건설할 때 북부 지역을 먼저 개발해야 했다. 그러나 ATT가- 그리고 ATT 이전의 코나레 역시- 북부 지역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짓이다. 키달을 잘 아는 사람들은 이 도시가 변화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외부인이 볼 때 키달은 여전히 초라해 보인다. 그것은 키달 사람 중 상당수가 다른 지역에서 왔기 때문이다. 당시 곳곳에 시설이 부족했기 때문에, 말리의 여론은 북부 세 지역에 엄청난 자금이 투입되는 것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말리 남동부의 케스 지역의 모습이 바뀐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은 국가 덕택이 아니라 이민 온 노동자들의 자산 덕택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또한 지역 공동체를 타락시키는 부패에 침식당한 말리 정부로는, 분권화의 거대한 흐름 안에서 북부와 관련된 지역 문제를 다루려 했던 코나레 대통령의 비전을 실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독립 뒤 50년이 지난서도 "우리는 여전히 국가 문제의 덫에 빠져 있다"고 투레 정부의 마지막 외교장관인 수메이루 부베예 마이가가 인정했다. 그는 당장 닥친 문제를 넘어서 남부가 북부 지역과 멀어지고 북부 지역을 그들 운명에 맡겨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말하고 있다. 또 다른 공포가 민주주의의 자산을 위협하고 있다. '독립의 아버지'들이 말리 역사상 대제국들을(10) 여러 민족이 공존하는 혼합의 나라로 높이 평가한 데 비해, 현재의 말리는 동일성을 지향하는 흐름으로 후퇴하고 있다. 익명을 원하는 역사가이자 사회학자인 M.T.는 정체성 문제가 민감해졌다고 증언한다. "말리 사람들은 점점 더 자신을 밤바라족(다수파로 간주되는 종족으로 이 종족의 언어를 현재 매개어로 사용한다)이라 생각하고, 종족들 사이의 관계를 17~18세기 세구 왕조 통치 시절에 존재하던 지배와 복종 관계로 간주한다." 심지어 같은 공동체 안에서도 사람들은 순자타 케이타에 의해 13세기에 건설된 만딩게 제국의 고귀한 역사와 말린케 부족의 유산을 과도하게 중시한다. 그런데 만딩게 제국은 역사에는 등장하지 않는 신화 속 제국이다.

이슬람 근본주의의 위협, 민주주의에 대한 수정주의적 시각, 공동체주의 등 지난 3월 21일 이후 외부의 외교적 개입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는 민족주의가 동시에 부상하고 있다. 이것은 그 근간부터 위협을 받고 있는 말리 제3공화국의 걱정스러운 징후들이다.

글/자크 델크로즈 Jacques Delcroze

번역/고광식 kokos27@ilemonde.com 주요 역서로 <성의 역사> <방법서설> 등이 있다.

(1) 지난 3월 28일 결성된 ‘거부전선’(FDR)은 쿠데타 가담자들이 만든 ‘국가 재건과 민주주의의 부흥을 위한 국가 위원회’(CNRDRE)에 대항해 궐기한 100개 사회단체와 50개 정당이 연합해 있다.
(2) <누보 쿠리에>, 바마코, 2012년 6월 22일 참조.
(3) ‘아프리카 프레스’, <TV5>, 2012년 5월 26일.
(4) Laurent Bigot, ‘사헬 지역의 도전: 말리 위기에 대한 조명’, 프랑스국제관계연구소(IFRI) 세미나, 파리, 2012년 6월 22일 참조.
(5) Ousmanc Sy, <아프리카를 재건하다>, 찰스 레오폴드 메이어, 제네바, 2009년 참조.
(6) 마티우 기데르, ‘알제리의 알카에다 지부’, 필리프 레마리, ‘어떻게 사헬 지역이 화약고가 되었는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6년 11월호와 2012년 4월호 참조.
(7) 말리의 공화국 정부와 아자와드의 연합전선·운동단체들 사이에 맺어진 국가협약은 말리 북부의 특별한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8) ‘어떤 대사의 엄청난 분노’, <르 레퓌블리캥>, 2011년 12월 13일.
(9) 아와드, ‘투아레그족의 고독한 투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5월호.
(10) 가오·말리·송하이족의 제국들과 관련돼 있는데, 이 제국들은 9~16세기 옛 수단 지역에서 거대한 영토를 차지했다.


갈팡질팡하는 이슬람

말리의 이슬람교는 느슨하게 통합됐다. 지난 7월 회합을 연 말리의 이슬람 지도자들은 6월 30일 통북투에서 발생한 이슬람 성인들의 능 훼손에 대해 규탄했다. 그러나 표면상의 만장일치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지도자들은 심각한 노선 대립을 감추지 못했다. 수세기 전부터 대중의 신앙심을 북돋워온 초대 이슬람 성인들을 경외하는 전통적 이슬람 수장들과 석유에 의지한 걸프만 왕들의 지지를 받는 현대적인 이슬람 분파들이 대립하고 있다. ‘현대적인’ 이슬람 분파들은 이슬람교 원로와 성인들에 대한 숭배를 근절해야 할 미신으로 간주한다. 그중 한 현대적 분파가 말리에서 점점 더 많은 지지를 얻고 있다. 짜깁기된 새로운 흐름이 현재 ‘와하비즘’(사우디아라비아에 널리 퍼져 있는 이슬람 분파)의 환심을 사고 있다. 근동으로 유학 갔다 온 젊은 지식인들이 도입한 이 새로운 흐름은 기원이 식민지 시기의 마지막 몇십 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건너온 이 교리가 20년 전부터 대중에게 널리 퍼져나갔다. ‘말리의 이슬람 최고위원회’(HCIM) 의장인 마흐무드 딕코가 사우디아라비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0여 개 이슬람 단체가 1991년 3월 말리의 ‘민주주의의 봄’과 더불어 탄생했다. 가장 대중적인 단체 중 하나인 ‘안사르 딘’(‘이슬람을 방어하다’는 뜻)의 지도자 셰리프 우스만 마다니 하이다라는, 북부에서 자기 단체와 똑같은 이름으로 활동하는 이슬람 그룹이 횡령을 했다고 고발했다. 그는 자기 단체의 이름을 딴 북부의 이슬람 그룹을 테러리스트이자 사탄이라고 규정한다. 그의 설교는 유명해서 라디오와 카세트테이프를 통해 널리 중계되고 있다. 수피즘(이슬람교도의 일부가 신봉하는 신비주의 사상)의 영감을 받은 하이다라는 관용을 설파하고 있다.

어쨌든 모든 이슬람 분파는, 사회의 자유방임과 비도덕적 행동에 반대해 일어난 정화주의 사상을 지지한다. 2002년 창설된 자문기구 HCIM이 통북투 무덤의 파괴를 ‘새로운 시대의 행동들’이라고 규정했다. HCIM는 10여 년간 벌인 새 가족법에 대한 논란에서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는데, 논쟁 결과로 2011년 채택된 법안에는 여성의 권리가 오히려 쇠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