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안의 인문학 서재] 시민 없는 ‘알고리즘’ 공화국
시민사회를 살려 민주공화국을 되찾자.
해방 이후 한국 사회는 두 가지 차원에서 급격히 변했다. 경제 규모의 급격한 변화와 정치체제의 급격한 변화가 그것이다. 기업의 경영, 곧 혁신과 착취가 경제성장을 일궈 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투쟁하고 참여하는 ‘시민들의 사회운동’이 정치적 민주화를 이끌어 냈다는 사실은 자주 잊힌다. 더욱이 최근 보수정당의 ‘운동권 때리기’로 ‘운동’의 의미가 왜곡되자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운동의 역할은 급격히 망각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는 그동안 우리의 운동권(!) 선배들이 굴하지 않고 해 온 사회운동의 결과다. 한국 사회운동의 역사를 살펴보면 1960년대에는 4.19에서 시작하여 한일회담과 국교정상화 반대투쟁으로 이어졌다. 박정희 정권의 폭압에 맞서 1970년대에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이 지속되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부가 들어서자, 반독재 민주화 투쟁은 1980년대에도 계속되었다. 이때까지 사회운동의 투쟁대상은 주로 ‘국가’였다.
1987년 사회운동은 전두환 정권을 물러나게 함으로써 ‘정치적 민주화’에 이바지하였다. 그 후 정치적 유화기를 맞아 노동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당시 노동운동은 학생운동과 더불어 한국 사회의 민주 사회 대변혁을 추동하는 견인차였다. 1970년대에 이미 시작된 농민운동과 빈민운동이 여기에 가세했다. 정치적 민주화에 이어 이제 사회운동은 ‘경제적 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 첫발을 뗀 것이다. 이제 사회운동은 국가에 이어 ‘기업’을 새로운 투쟁과 개혁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사회운동은 이제 ‘민중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시민운동의 등장과 발전
1987년 6월 항쟁으로 전두환 독재체제가 붕괴한 후 새로운 정치기회구조가 도래하였다. 일단 내부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가 달성되자 운동의 방향은 독재 정권 붕괴에서 ‘공동선 제고’로 바뀌었다. 그리고 6월 항쟁에 중산층 시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중산층이 사회운동의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 결과 시민의 삶의 질과 형평성 제고를 지향하는 새로운 사회운동이 부상했고, 특히 경제정의, 환경, 여성, 통일, 인권, 장애인, 언론, 재벌개혁 등의 이슈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운동의 흐름은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 사이 동유럽에서 일어난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더불어 가속화되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신봉하던 일단의 사회운동세력이 그것을 포기하고 이러한 새로운 사회운동에서 자신의 진보적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새로운 사회운동인 ‘시민운동’이 등장한 것이다. 대표적 시민단체로 경실련,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여성단체연합이 거론될 수 있겠다. 이것은 민중적 성격을 지닌 구 사회운동과 어느 정도 구분된다.
아무튼 1990년대 한국의 시민단체는 실로 시민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시민사회를 대표하는 조직으로 활동했다. 시민운동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시민사회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민주공화국이 도래하였다! 시민적 덕성을 갖춘 시민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공익과 공동선에 헌신했다. 회원수는 늘었고, 회비도 쌓였다. 그 결과를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다. 감사할 일이다.
시민사회에 가한 민주화의 역습
전통적인 민중적 사회운동이건 새로운 시민적 사회운동이건 이때까지 모든 사회운동은 국가 및 시장 양자로부터 자율성과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그것들과 ‘갈등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견제와 균형, 그리고 비판이 가능했다. 이러한 포지션은 운동가들의 헌신과 열정, 그리고 시민정신을 소유하는 시민들의 후원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공익과 공동선이라는 도덕적 목적에 이바지하는 데 쓰였다. 이러한 목적은 사회운동의 도덕적 기반이 되었고, 이로써 사회운동은 대중으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사회운동의 역할은 실로 컸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사회운동은 큰 변화를 겪었다. 『시민사회운동의 미래는 있는가, 성찰적 비판과 실천전 과제』(공석기, 정수복, 임현진 지음, 2023, 진인진)는 그 변화의 성격을 진단하고, 그 변화가 야기한 시민운동의 위기를 타개할 방안을 모색해 보는 책이다. 미리 말해두자면 저자들이 보기에 그 변화의 성격은 부정적이다.
저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부정적 변화를 야기한 것은 역설적으로 민주화이다. 시민운동은 먼저 민주화운동을 했던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의 정책 입안과 실행을 지지함으로써 협력관계와 파트너십을 형성하였다. 이로써 운동의 결과가 공식 제도에 뿌리를 내리고, 재정적 안정을 기하는 소득을 얻었다. 동시에 시민사회단체는 짧은 기간에 외연적으로 비영리 활동, 공익 활동, 그리고 사회적 시장경제까지 그 경계를 확장했다.
그러나 치러야 할 대가는 작지 않았다. 시민운동은 “점차 독자성과 운동성, 자율성과 주체성을 잃게 되었다.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적 지지에서 점차 ‘비판’의 부분이 사라지고 정권을 획득하면서 생긴 ‘자리’와 ‘이권’을 공유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보수 진영에서 나온 비판이 ‘시민운동은 정권의 2중대’라는 표현이다. 이런 상황에서 2010년대를 거치면서 협치와 거버넌스 프레임이 만들어졌고 시민운동과 정부의 협력사업이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약화된 것이 시민운동의 운동성과 자율성이다.”(58) 그 결과, 시민사회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까지 떨어지는 역설적 상황이 전개되었다. 시민사회 활동가 자신도 스스로를 “10급 공무원, ‘순치된 조력자’, 사업대행자, 심지어 하청업자”(187)라고 자조한다. 민주화가 시민운동에 가한 역습인 셈이다!
붕괴하는 시민운동, 사라지는 시민사회
독립성, 자율성, 운동성, 그리고 도덕성이 훼손되고 신뢰마저 상실한 시민단체는 고사 직전에 처해 있다. 시민운동에 종사하던 운동가와 지식인들이 시민운동을 발판으로 삼아 정계로 영전(!)하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활동가 수가 줄어들었지만, 새로운 인력은 충원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식인은 정계진출에 도움이 되는 정당활동으로 몰렸다. 기존 회원들은 고령화되었고, 헌신에 대한 의무감은 줄어 들었다. 반면 새로운 회원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MZ세대는 시민단체를 멀리 한다. 조직은 무력해졌고, 지역의 시민단체는 1인 활동가 체제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되고 있다.
시민사회의 빠른 소멸은 유감스럽게도 문화적 뿌리를 이미 갖고 있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우리 사회의 관용구다. 그러나 이 표현에는 ‘사회’가 없다. 그러다 보니 유교사회인 한국에서 개인과 가족은 ‘사회’를 건너뛰고 바로 국가와 정치로 직행해 버린다. 해방 후 반공주의 정부는 ‘사회’를 초토화시켜 버렸다. 모임은 금지되고, ‘사회’는 금기어로 되었다. 그 결과 사회를 멀리하고, 모든 것을 국가와 정치력에 의존하는 관행이 뿌리내렸다. 이런 “국가중심주의”와 “정치환원주의” 역시 시민운동을 약화시키는 한국사회의 “문화적 문법”이다(119).
이러한 ‘정치의 과잉’과 ‘사회의 과소’는 최근 들어 혐오와 불신을 강화하는 거대 양당체제에 의해 증폭되고 있다. 이들이 생산해 내는 혐오와 진영논리는 시민의 덕성과 시민사회의 형성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제 한국 사회에는 공공선과 집단이익의 경계가 애매한 ‘가짜’ 사회운동이 득세하며 누구나 사회운동 방식을 동원하는 사이비 ‘사회운동사회’가 되어 버렸다.”(16) 정치가 시민을 광포한 ‘정치훌리건’으로 바꾸고, 사회를 파괴하는 중이다. 이 과정에서 진영논리가 공동선을 대체하고, 정략과 권모술수가 운동의 자리에 들어서게 되었다.
기술의 변화도 시민운동을 가로막는다. 우리 사회는 디지털 플랫폼 사회로 전환하고 있다. “인공 지능과 빅데이터의 상승적 결합은 보이지 않는 알고리즘을 통해 우리 삶을 부지불식간에 관리하고 통제하고 있다. ‘알고리즘 지배(Algocracy)의 시대’가 도래했다”(185). 알고리즘의 지배 아래서 우리는 자기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만을 수동적으로 제공받는다. 자신의 이해관계와 정체성에 부합한 정보만이 각자에게 전달된다. 이제는 누구나 동일한 정보와 뉴스를 받는 것이 아니라 각 개인에게 맞춤화된 정보에 기반을 두고 소통하게 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소통은 파편화되고 분절화되면서 집단 간의 단절이 강화되었다. 이것이야말로 공론장의 위기이자 위협이다. 공론장이 사라진 곳에서 시민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이제 시민은 사라지고, 이기적인 호모에코노미쿠스(경제적 존재)와 알고리즘에 지배되는 ‘태극기부대’와 ‘개딸들’만 완장을 차고 돌아다닌다. 동시에 시민사회는 축소되고 ‘리바이어던’만 강력해지고 있다. ‘시민없는 알고리즘 공화국’이 도래한 것이다.
시민사회를 복원하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자들은 몇 가지 처방을 제시하고 있다(254~257). 첫째, 시민운동은 온라인 플랫폼에 너무 의존해선 안 된다. 둘째, 시민단체들 사이에 연계와 협력이 필요하다. 셋째, 선도역할을 넘어 아래로부터의 협치를 모색해야 한다. 넷째, 현장 중심적 활동이 필요하다. 다섯째, 세대 간 소통을 강화해야 한다. 그러나 어쩐지 자신이 없고 뭔가 알맹이가 빠진 듯하다. 당연하다. 시민단체 스스로의 성찰과 비판만으로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시민단체는 그동안 자신에게 너무 많이 채찍을 휘둘렀다. 그동안도 시민운동은 모든 희생과 헌신을 감수하면서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이바지하지 않았는가! 지금 남아 노쇠한 분들은 평생 타인과 사회를 위해 살아 왔다. 그리고 공동선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시민단체를 떠나지 않았다. 정계로 영전한 동료들과 다르게 말이다! 나는 그것만으로도 존경받고 칭찬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운동권선배와 시민단체의 ‘자학적 성찰’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제 우리가 나설 차례다. 먼저 우리 스스로 시민이 되어야 한다. 공익과 공동선에 헌신하는 시민, 곧 ‘시민정신’을 가진 시민으로 말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먼저 국가중심주의와 정치환원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 종은 국가가 발생하기 훨씬 이전에 ‘사회’를 구성해 오랜 세월 조화롭게 살아왔다. 사회를 복원해야 한다. 사회와 함께 할 때 국가는 비로소 ‘공화국’이 된다. 공화국은 시민의 훌륭한 덕성으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국민’ 이전에 ‘시민’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시민정신을 갖춘 시민이라면 시민사회를 보존하고 육성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시민이 집단을 형성할 때 노력의 효과는 배가된다. 시민단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후원해야 한다. 모든 조직에는 사람과 돈이 필요하다. 특히 돈 없으면, 요즘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 없다. 내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깨어있어, 공동선에 헌신하는 시민들의 공화국은 알고리즘의 지배를 받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진정한 공화국에서 좋은 삶을 기대할 수 있다.
지난 세월 우리의 시민사회운동권 선배들은 투철한 시민정신으로 우리에게 민주주의를 선물해 주었다. 우리도 우리 후손에게 뭔가 가치있는 것을 선물해야 되지 않겠나? 어제 시민단체의 회원으로 등록해 후원을 시작했다.
글·한성안
문화평론가. 경제학자. 영산대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좋은경제연구소장'으로 활동하면서 집필, 기고, 강연 중이다. 페이스북과 블로그를 통해 진보적 경제학을 주제로 시민들과 활발히 소통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