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세유, 북부지구의 나침반은 누가 훔쳤나?
프랑스 북부지구에 위치한 마르세유 5개 구가 지난 8월 초 장마르크 아이로 정부가 발표한 '우선안전지대'로 꼽혔다. 1987년 필자는 마르세유 북부지구 주민에 대한 책을 저술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뒤 다시 북부지구를 방문했다.
"나는 조국이 두 개다. 여기 프랑스와 알제리. 하지만 좀더 애착이 가는 쪽은 나의 모국이다."(1) 모하메드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1987년이다. 모하메드는 두 문화권에 낀 이른바 '이민 2세대'였다. 자밀라·말리카·파티마·카림·브라힘·카데르를 비롯한 다른 이민가정 자녀처럼, 모하메드도 마르세유의 북부지구에 살았다. 솔리다리테, 프티세미네르, 뷔스린, 플라망, 카스텔란, 플랑다우, 바상 등 열악한 공공임대주택(HLM) 단지가 밀집돼 있는 동네였다. 북부지구는 방역선을 쳐놓은 듯 다른 마르세유 지역과는 단절돼 있었다. 단지 안에는 대부분 무주택자 임시주택단지(2)를 거쳐온 마그레브 출신의 이민가구가 모여 살았다.
그로부터 어느덧 25년이 흘렀다. 다시 찾은 북부지구의 풍경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도시기본계획 없이 우후죽순으로 솟아난 도시 정글, 도로, 우회도로, 성냥갑처럼 네모반듯하게 줄줄이 이어진 주택단지까지 모두 그대로였다. 언뜻 보기에 도시는 그렇게 낡았다는 인상은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25년 동안 전혀 손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건물을 새로 짓거나, 오밀조밀했던 건물 간격을 넓히는 등 거의 모든 곳에서 개발 공사가 진행됐다. 그럼에도 (첫인상과 달리 동네를 찬찬히 뜯어보면) 복도 소음이 심하고, 건물 외벽은 모두 색이 바래 있었다. 발코니는 녹이 슬고, 동네 구멍가게는 문을 닫았다.
다시 만난 그들은 예전처럼 왁자지껄 웃음꽃을 피우며 화려한 입담을 풀어놓았다. 단지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이민 2세대'라는 표현이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도시 안의 외곽'(행정구역상 북부지구는 마르세유시에 속한다)이라 불리는 북부지구에는 이민 3∼4세대가 등장한 지 이미 오래됐다. "우리는 지금도 집에 돌아가면 외출복을 벗고 간두라(중근동이나 북아프리카의 남녀가 입는 민소매 혹은 긴소매가 달린 목면이나 울의 느슨한 의복)를 걸친다." 플라망 지구 입주민 대표 파티마 모스트파위가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민 3∼4세대들은 다르다. 그들은 진짜 프랑스인이나 진배없다. 어떻게 그들이 프랑스인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상황이 그러한데도 "여전히 그들은 뵈르(Beur·프랑스에 거주하는 북아프리카 이민 자녀를 일컫는 속어)니 이민자니 하며 외국인 취급을 당하기 일쑤다!"라고 뷔스린 지구 사회센터 '아고라'에서 일하는 정력적인 카리마 베리슈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아마 그것은 그들이 여전히 조부모·부모·자녀·손자 세대가 한데 뒤엉켜 이민자 동네에서 유폐된 삶을 살아가는 탓이리라. 그렇다면 그들의 이미지는 예전과 어떻게 바뀌었을까?
1980년대 '마그레브 청년이 핸드백을 날치기했다. 이민자들의 만행을 막기 위해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식의 보도 행태에서 쌍벽을 이루는 두 일간지가 있었다. 극우 성향의 <르메리디오날>이 중도좌파 성향의 <르프로방살>보다 조금 더 과격했다. 1997년 두 일간지가 합병하면서 <라프로방스>라는 새 신문이 탄생했다. 하지만 과거와 논조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전직 철학교수 출신으로 현재 말파세 임대주택지구에서 사회복지사로 활동하고 있는 앙드레 쿨베르는 이렇게 지적했다. "우리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이미지다. 물론 시민들이 자주 접하는 사회면 사건들이 실제 일어나는 것은 맞다.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머지는 아주 평범한 이민자들이다. 그런데도 의도적으로 다른 일반 이민자들의 존재는 무시된다."
이민자의 가장 큰 걸림돌은 '이민자 이미지'
"북부지구 주민들은 빈민가에서 무주택자 임시주택단지를 거쳐 공공임대주택으로 이주해왔다. 그 과정에서 인종별로 획일화된 임대주택지구가 탄생했다." 사회운동단체 '앙크라주'의 대표 사미아 샤바니가 단언하듯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제는 단지 내에서도 동별로 인종분리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로지에, 봉스쿠르, 사빈, 플랑다우에는 코모로인이나 북아프리카인의 성을 가진 이민가정이 모여 산다. 카스텔란에는 마그레브인이 살고, 르노드에는 아랍인과 집시, 코모로인이 기거한다. 그 가운데서도 인종분리가 두드러지는 곳은 뭐니뭐니 해도 사빈이다. 사빈 지구에서 활동했던 안 마리 쇼플롱은 이렇게 증언했다. "15년 전 새 입주민들이 인종별로 무리지어 이주해왔다. 어떤 단지는 아시아인이, 어떤 단지는 마그레브인이, 또 어떤 단지는 코모로인이 차지했다. 그러다 보니 초등 1학년 수업을 할 때 여간 애먹는 게 아니었다. 다른 인종 아이들끼리 같은 조에서 공부하기를 거부했다. 그들끼리도 인종차별의 골이 깊었다."
1987년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그들은 북부지구를 떠나기를 갈망하면서도 지역 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어 정작 떠나기가 쉽지 않다. 인맥을 구축하고 정서적 위안과 경제적 혜택을 누리는 데가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북부지구를 다시 찾은 지금 현실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임대주택단지에서는 여전히 주민들이 촌에서처럼 얼굴을 트고 지냈다. 우체부를 만나러 내려오면 장을 보러 갔다 오는 이웃 한두 명쯤을 꼭 만날 수 있었다. 여전히 주민들은 돈독한 유대관계를 맺고 상부상조의 삶을 이어오고 있었다. 여름이면 밖으로 의자를 들고 나와 세탁한 옷가지며 낡은 냉장고, 유모차, 자전거 등으로 꽉 들어찬 발코니 아래에서 즐겁게 담소를 나눴다. 모든 지역민이 이처럼 공동체 생활에 애착을 느끼는 건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겉보기에 자신감 넘치는 젊은이들이라고 사정이 별반 다른 것은 아니었다. 젊은이들도 그들 동네가 마르세유시에 속하는데도 구항구나 칸비에르를 방문하는 것을 '마르세유에 간다'라고 표현했다. 루비콘강을 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시민대학에 다니는 플로랑스 라르디용은 "일터에 가서도, 일자리를 구할 때도 늘 박대를 당한다. 아랍인처럼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툭하면 경찰 심문에 시달린다"고 했다. "객관적으로 주민들의 이동성을 저해하는 걸림돌은 존재한다. 대중교통 여건이 형편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심적으로도 이동성을 저해하는 요소가 존재한다. 바로 지역민을 둘러싼 부정적 이미지다. 다른 동네에 가면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하는 우려가 지역민의 이동을 가로막는다. 그들은 이 지역 출신이라는 사실을 어디를 가도 환영받지 못할 낙인처럼 여긴다."
공공임대주택 배분 현실도 주민들의 이동성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공공임대주택 사업자는 주민들에게 자유롭게 다른 단지로 이주할 권리를 주고 있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정작 플라망 단지 주민이 다른 단지로 옮기겠다고 요청하면 클로, 베귀드 노르, 베귀드 쉬드 등 그저 엇비슷한 수준의 단지만 배정해줄 뿐이다. 애갈라드, 이롱델 등의 단지에는 많은 주민을 배정하면서도 정작 메를랭(아 얼마나 멋진 동네인가!), 샤르트뢰, 팔미에리, 팔플랑 같은 좀더 좋은 단지는 잘 내주지 않는다. 우리는 야만인이 아니다. 우리도 교육을 받은 문화인이다!" 모스트파위는 분개하며 말했다.
"눈앞에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이 놓여 있는 것과 같다. 문제는 열악한 환경에 놓인 서민일수록 자기 공동체에 대한 소속 의식이 발목을 꽉 잡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 공동체 말고는 의지할 곳이 없다고 느낀다." 베리슈가 개탄했다.
설상가상으로 마르세유의 실업 현실도 심각한 수준이다. 누군가는 마르세유의 실업 문제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라고 항변한다. 1987년 환멸에 가득 찬 무스타파도 빈정거리듯 이렇게 말했다. "누구 CAP(직업적성자격증)가 필요한 사람 있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내줄 것이다. 나는 CAP를 무려 3개나 가지고 있다. 도장공, 벽돌공, 배관공 자격증까지 줄줄이 있다. 하지만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 기와공장과 탄광공장이 문을 닫았다. 페나로야 화학공장과 그 외 수많은 비누공장, 제유공장이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1973년 3.9%에 불과했던 실업률은 1999년 26%대로 치솟았다가(일부 동네의 실업률은 40%대로 정점을 찍기도 했다) 2012년 다시 14.1%대로 내려왔다.(3) 마르세유에는 이민 2세대에 이어 실업 2∼3세대가 등장했다. 뷔슬린 지구에 사는 베나지자 라우아리아도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분통을 터뜨렸다. "남편은 포석공이다. 자격증 소지자에 경력도 탄탄하다. 아들은 치안안전요원 분야 직업바칼로레아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다. 하지만 둘 다 취직을 못해 놀고 있다." 야구모자를 거꾸로 둘러쓴 코모로 출신 청년도 피식 조소를 터뜨렸다. "친구들 얼굴 보기가 힘들다. 가끔 출근하는 모습으로 잠깐 마주칠 뿐이다."
미개인인가, 사회적으로 버려진 집단인가
하지만 심각한 실업 문제가 무색하게 오늘날 마르세유는 그 자체가 하나의 살아 있는 공사 현장을 방불케 한다. 1995년 20년 동안 경제개발과 도시재개발사업을 병행하는 것을 뼈대로 한 이른바 '유로지중해 프로젝트'가 출범했다. 장클로드 고댕(대중운동연합(UMP)당 소속) 시장은 도심을 새로 단장하고, 졸리에트 지구에 유리와 철제로 고층빌딩을 지어 간부급 노동자를 대거 유치하고, 고부가가치 일자리를 창출하기로 계획했다(하지만 임대주택단지 청년의 대다수는 그런 일자리에 적합한 직업 능력이나 학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뿐 아니라 대규모 해안지대와 도심핵구역을 개발하고, 벨로드롬 사이클 경기장 지붕 씌우기 공사(2억7300만 유로를 투입한 마르세유시의 최대 선결사업)를 시행하기로 결정했다.
아동정신의학자 자멜 부리슈는 이렇게 말했다. "일자리가 창출된 것은 맞다. 하지만 공사 현장에는 동유럽 출신의 노동자만 투입됐다. 지역민은 단 한 명도 고용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분통 터지는 일이다! 발랑틴 지구에 들어온 '이케아'도 백인이나 코트루즈 출신자들만 고용할 뿐, 생마르셀 출신자를 고용하는 법이 없다." 물론 그들도 프랑스인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름이 모하메드나 브라힘이었다. "세드르 임대주택지구 출신자라고 밝히는 것은 이민자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치명적이다"라고 한 젊은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런 현상으로 인해 "생활고 때문에 생존을 위협받는 가정이 등장했다"고 한 특수교육교사가 끓어오르는 화를 꾹꾹 눌러 참으며 말했다. "그전에는 15일이 넘어가면 생활이 어렵다고 했는데, 이제는 7일만 넘어가도 죽겠다는 소리가 터져나온다. 더 이상 사회계층 간 '격차'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 '거대한 심연'이라고 해야 옳다."
깊어지는 양극화
사회 양극화의 여파는 이미 1987년부터 나타났다. 그때도 "요즘 젊은이들은 사고방식이 우리 때와 다르다. 노파의 핸드백을 날치기하고, 목걸이를 훔쳐 달아나고, 약국을 터는 등 젊은이들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며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4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모두가 잘 알고 있듯 생활고는 불법경제를 활성화했다. 이를테면 차량 절도, 무작정 차문을 열고 물건을 털어 달아나는 절도(속칭 '열고 털기'), '다뵈르'(4)라 불리는 신종절도범에 의한 신용카드 절도, 돌 투척 행위, 버스 안에서의 몰지각하고 예의 없는 행동 등이 성행하고 있다. 장소를 초월해 다양한 형태의 불법행위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무시해서도 안 되겠지만 사태를 어느 정도 냉정하게 인식할 필요도 있다. "다른 지역이 그렇듯 이 지역에도 타인의 삶에 해를 끼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래도 업무차 이 지역을 방문할 때 안전을 위협받는다는 느낌은 가져본 적이 없다"고 라르디용이 말했다. 뷔스린 지구에 사는 코모로 출신의 프랑스인 다우다 다마니르도 불법행위가 성행하는 현실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잃지 않았다.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라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소매치기는 엄연히 존재한다. 사건이 발생하는 것을 두 눈으로 지켜본 적도 있다. 하지만 이 지역에 소매치기가 일상화된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여기는 할렘가가 아니다!"
진실이야 어찌됐든, 주민들은 오늘날 심각한 수준은 아니지만 만성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폭력 행위로 인해 많은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지역 경찰관도 축소를 거듭한 끝에 결국 완전히 사라진 실정이 아니던가. 그 결과 "우리 젊을 때는 좀도둑이 전부였지만 요즘은 더 심각하고 위험한 사건들이 일어난다"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얘네들이 어렸을 때는 말이죠…." 자밀라가 친구들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운을 뗐다. 그녀에 따르면 젊은 시절 친구들 사이에는 "너만 알고 있어. 우리 오빠 마약한다!"라는 비밀 이야기가 오고가곤 했다. 그 무렵 이른바 '마약 사업'이 뜨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저 개인들이 '용돈이나 좀 벌어보려는' 주먹구구식 거래에 불과했다. 워낙 헤로인 공용 주사기 사용으로 인한 에이즈 확대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해 있어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이곳 젊은이들도 마약으로 인해 숱한 비극을 겪었다. 눈앞에 어지럽게 떠다니는 빛바랜 영상들 때문에 괴로운 듯 부리슈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약이 젊은이들의 삶을 망가뜨렸다. 미국의 흑인가나 히스패닉 동네처럼 이곳에도 암울한 시절이 이어졌다. 마약 때문에 친구를 절반이나 잃었다."
"당시만 해도 마약 거래는 은밀하게 이뤄졌다. 하지만 요즘 마약 밀매는 공공연하게 성행하고 있다." 18~20살의 마약밀매원은 어느새 어린 꼬마들로 바뀌었다. 그 배후에는 진짜 마약 사업을 경영하는 어른들이 자리하고 있다. 가끔 '마그레브 출신 갱단' 간의 복수극이나 '기관총 난사 사건' 등이 언론 지면을 뜨겁게 달구는 것도 모두 그 때문이다. 2011년 초 이후 희생자 수만 무려 19명에 이른다. 상황이 이처럼 심각한데도 누군가 감히 마르세유의 맑은 하늘 아래 마피아나 조직범죄가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주장한다면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조직범죄가 아예 없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그런 현상을 특정 인종과 결부시키지 않았던 것뿐이기 때문이다.
마약밀매에 관여하는 이민자는 극소수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클로라로즈, 퐁베르, 비지타시용, 카스텔란, 바상, 미코쿨리에, 말파세 등 일부 북부지구의 일상생활이 큰 영향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마약밀매 조직망은 어떤 식으로 구성돼 있을까? 보통은 '슈프'라고 불리는 망지기부터 호객꾼, 상품 포장 담당, 주택단지 근처 건물 지하에 상주하는 '샤르보뇌르'라고 불리는 판매책까지 13~25살 젊은이 12명이 한 팀을 이룬다. 한 거주민의 증언에 따르면, 요즘 말파세 지구에서는 주민과 방문객이 동네를 출입하는 데 여간 애먹는 것이 아니었다. 학생들의 학습 부진 문제가 심각한 말파세에서는 아이들이 쉽게 범죄의 수렁에 빠져든다. "처음에는 마약 판매책을 위해 음료나 샌드위치를 사다주는 잔심부름부터 시작해 차츰 계급이 올라간다. 아이들에게 이런 사회적 지위 상승은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좀처럼 겪어보기 힘든 체험이다."
좌절감 속에 마약에 손대는 젊은이들
아침이면 퐁베르 같은 일부 고립지구에서는 '보스'가 '최저임금 밀매생활자'라고 불리는 마약밀매원을 모집하러 다닌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그다지 벌이가 대단한 것은 아니다. 카스텔란에서는 낯선 사람이 동네를 돌아다니면 어김없이 '경계를 보는' 젊은이들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 왔는지 심문을 당하기 일쑤다. 반면 낯익은 단골 손님들은 별 걱정 없이 동네를 마음대로 활보하고 다닌다. 대개 마약 고객은 사회계층과 피부색을 망라한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런 문제를 단순히 언론매체의 돈벌이로 치부하며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조직 운영 행태가 점차 과격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독실한 집안에서 자라거나 반듯한 아버지나 형을 둔 아이가 아닌 경우 쉽게 범죄조직의 마수에 걸려든다. 그들은 조직원에게서 신체적 학대에 시달린다. 조금만 실수해도 지하실로 끌려가 구타당하기 일쑤다. 그보다 더 심한 일을 당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이들을 우리는 비행 청소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오히려 그들을 위험에 빠진 젊은이라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지만 자녀를 보호하기 위해 가족이 나서기라도 하면 조직원들이 가족을 폭행하거나, 집을 부수거나, 자동차에 불을 질러버린다. 그러니 모두 조용히 입 다물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아예 자녀의 일탈을 묵인하는 가정도 있다. 아이가 벌어오는 돈 덕분에 생활고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미개한 족속으로 치부해야 할까, 아니면 버림받은 사회그룹으로 봐야 할까?
북부지구는 주민 안전 문제도 심각하다. 주민들이 15년간 열심히 시위하고 탄원해야 겨우 정부 당국이 플라망 임대주택단지와 인근 쇼핑센터 사이를 지나는 통행량 많은 차도에 신호등을 설치해줄 정도다. "몇 년 전 건너편 빵집을 가려고 길을 건너던 부인이 차에 치여 사망했다. 이 도로에서는 차들이 시속 200km로 달린다. 거의 매달 1건씩 교통사고가 발생한다"고 하다 베르부가 분통을 터뜨렸다. 지난 3월 24일 결국 주민들 일부는 기쁜 마음으로 가로 오프세피앙(사회당 소속) 구청장의 연설장에 초대받았다. 저명인사도 몇 명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여러분, 신호등 제막식이 그리 대단한 사건일까요? 절대 아닙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특별한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수년째 주민들의 요구를 묵살해왔기 때문입니다. (중략) 이제 비로소 우리는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손을 맞잡고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요." 아마 눈치챘겠지만 당시는 선거가 목전에 다가온 상황이었다.
벌써 30년째 열악한 북부 고립지구에서는 재개발 사업이 지속적으로 진행돼왔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일까. 70살 노인 룬 아구미넬샤는 분개하며 말했다. "승강기는 작동되는 법이 없다. 동네에 8살짜리 어린 딸을 키우는 장애인 부인이 있는데 매번 17층을 걸어서 올라간다. 우리는 개가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집주인은 오로지 집세에만 관심이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된 대형 사업을 펼치겠노라'고 정부는 호언장담했다. 2006년 주민 수 21만 명에 달하는 지역을 대상으로 한 대형도시프로젝트(GPV)의 일환으로, 무려 6개 지구를 아우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대한 재개발 사업이 시행됐다.(5) 도시민과 고립지구 사이의 왕래를 편리하게 하기 위해(특히 고립지구에서 폭동이 발생하는 경우 공권력 투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도로를 내고 건물을 신축하기로 했다.
라르디용은 이 사업의 필요성에 대해 굳이 반대하지 않았지만 몇 가지 사항을 우려했다. "건물을 허물어 다시 짓겠다고 약속했지만 같은 자리에 다시 짓는 것은 아니었다. 이론적으로 집세도 인상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어쨌든 최빈곤층은 감당하기 힘든 수준일 것이 분명하다." 개발지구에 사는 당사자들도 좌절감을 나타냈다. "주민들은 최소한의 협의라도 할 수 있기 바랐다. 하지만 사업은 협상의 여지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됐다."
한 예로 시공사 선정을 위한 공공입찰 내역을 보면 한 가지 강제 조항이 포함돼 있었다. 바로 총노동시간의 5%에 대해 반드시 해당 임대주택단지의 젊은이를 고용해야 한다는 규정이었다. 플라망 지구에 사는 모스트파위는 혐오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기업들은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들을 직접 동네로 가서 뽑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장소에서 면접을 보겠다. 그래야 옷이라도 제대로 챙겨 입고 나오지 않겠는가.' 그들은 마치 우리들이 잠옷 바람에 크루아상이나 커피를 들고 일하러 나갈 것처럼 말했다." 비록 주민들은 싸우는 데 지치기는 했어도 어설픈 논리에 쉽게 속아 넘어갈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다. 결국 거물급 건설업체들은 정부보조금도 타먹고, 법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해 포르트덱스 등에서 마음대로 죽도록 부려먹을 불법노동자들을 데려다 쓸 것이 분명했다.
해당 지역의 고용이나 교육, 보건, 공공서비스, 다시 말해 사회 통합의 기반이 되는 전 분야에 도움을 줄 수 없다면 재개발 사업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많은 이들이 말한다.
제구실 못하는 재개발 사업
그렇다면 교육 현장의 상황은 어떠할까? "하루 종일 함께 지내는 얼굴을 잘 아는 같은 동네 출신의 아이들이 정원이 32명이나 되는 콩나물시루 같은 반에서 함께 공부한다. 교사교육대학(IUFM·대학원 수준의 종합 교사 교육기관. 수습교사 자격으로 이 과정을 마치면 정교사 자격이 주어진다) 과정을 이수할 시간도 없는 21살의 새파란 수습교사에게 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교사에게 이런 환경에서 수업하라는 것은 도살장에 들어가라고 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며 한 특수교육교사가 불만을 쏟아냈다. 부모들 역시 임시직을 전전하고 있는 상황에서 자녀에게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베리슈는 "부모들은 자녀의 학교 문제나 성적에 관심이 많다. 그들은 패배주의자도 아니고, 자녀들에게 무관심하지도 않다. 단지 그들 자신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낙후된 중학교에서는 교사들이 매년 진절머리를 내며 학교를 그만둔다. 디드로고(학생 수 2천 명에 교사 수는 250명)나 생텍쥐페리고를 비롯한 고등학교들도 교원 감축, 고용불안 증가, 열악한 시설 등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심지어 시대의 변화로 인한 문제로 고생하기도 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여교사와 남학생의 관계가 매우 악화됐다. 남학생들은 교사가 여자임을 문제 삼는다. 양성 관계가 심하게 나빠지고 있다." 종교나 낙태 등의 문제에 대해 수업하는 것도 예전만큼 수월하지 않다. 칼라드 취약지구 출신으로 직업반에서 역사와 문학을 가르치는 노르딘 오신도 수업 시간에 종종 목소리를 높인다. "대체 니네 '이맘'은 어느 지역 출신인 거니? 그런 이야기는 금시초문이구나!"
1983년 마르세유는 '평등을 위한 행진'의 출발지가 되었다. 당시 정서적으로는 모국에 깊은 애착을 느끼면서도 자유·평등·박애 정신을 소중히 여기던 '이민 2세대'들이 사회운동과 반인종주의 투쟁, 노동운동 등에 앞장서며 뜨겁게 끓어올랐다. 젊은 여성들은 먼 오지에서 와 자신들의 문화를 소중히 간직하고 살아가는 부모님 세대를 부인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여성 해방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조흐'라는 여성은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놓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장광설이나 떠들고 있는 동안 음식 준비는 온통 여자들 차지다. 오늘 오후는 어땠는지 아는가? 여자와 남자가 각각 딴 방을 써야 했다. 심지어 여자들은 그곳에서 차도르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이민 2세대 가운데 용기와 재능을 가진 많은 이들이 입신출세했다. 이름과 직책을 잠시 열거해보자. 마르세유 15·16구를 담당하는 구청장이자 부슈뒤론 지역 상원의원인 사미야 갈리, 마르세유교통공사(RTM) 이사회장 카림 제리비, 사회센터를 담당하는 카리마 베리슈와 야미나 방셰니, 아베피에르 재단 지부장 파티 부아루아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내 딸들은 각각 개인병원과 법률사무소, 클레르몽페랑 경찰서에서 일하고, 아들은 해군에서 일한다. 아이들이 반듯하게 자라는 모습을 지켜봤듯 지금은 손주들이 커가는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고 있다. 모두 신의 은총이다." 취재진에게 이야기를 털어놓는 아구미넬샤의 목소리에서 자긍심이 묻어났다.
하지만 차별을 감내하며 현실에 순응해 살아가는 낙오자도 수두룩하다. '아랍 무슬림'이란 소리를 자주 듣는 나머지 스스로 정체성을 내면화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나는 아랍 무슬림 '놈'이다. 괜히 그런 사실을 부인하며 미움을 받느니 그냥 순응하고 사는 편이 났다." 설상가상으로 오늘날 북부지구 곳곳이 근본주의의 온상이 되고 있다. 말파세 곳곳에 "과격한 예배당이 등장해 젊은이들에게 근본주의 사상을 세뇌하며 동네에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샤바니가 걱정스런 말투로 말했다. "다양한 관습이 진짜 이슬람 풍습처럼 행해지고 있다. 특히 여성과 관련해 많은 관습이 강요되고 있다. 하지만 이슬람 관습에 따라 옷을 입은 여성을 보면 마치 변장한 듯한 인상만 받을 뿐이다. 그녀들이 입고 있는 옷은 결코 이주의 역사나 가문의 역사와는 상관없다. 그저 음식이나 의복에 대한 비이성적 금기를 종교적 규율로 착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급격히 확산되는 이슬람주의
이처럼 요즘 이민자들 사이에는 종교적 폐쇄성이 증가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민자 모두가 극단주의로 흐르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과장된 주장이다. 대다수 이민자들은 공화주의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전통적 이슬람 규율에 따라(만일 그 이민자가 이슬람 신도라면) 살아가고 있다. 사실 마르세유 대형 회교사원 건설 계획을 무기한 연기하는 사건만 없었더라도, 니콜라 사르코지 정권이 '국가 정체성'을 운운하며 이 프랑스인들에게 모욕을 주지만 않았더라도, 어쩌면 프랑스인과 이민자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알제리 병사들이 마르세유를 구하기 위해 전쟁에 참전한 역사적 사실만 기억했더라도 어쩌면 우리는 그들이 할라(이슬람 율법이 인정하는 방법으로 도축한 고기)를 먹는지 아닌지에 지금처럼 이렇게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 동네에는 이슬람 베일을 쓰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여자 선생님들이 있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아랍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를 가르친다. 아이들 실력이 많이 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선생님들을 근본주의자로 매도한다. 우리 동네에 광신도는 존재하지 않는데 말이다." 모스트파위의 지적이다.
'아고라' 사회센터에서 일하는 베리슈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처럼 이슬람주의가 급격히 확산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센터에서 일할 사회복지사들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대중 교육을 해줄 인력이 부족하다.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대체 좌파나 극좌파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결국 세대 간 대중교육의 맥은 그렇게 끊겨버렸다.
옛 사회적 기반은 약화됐지만 사회센터나 단체들은 여전히 꿋꿋하게 투쟁을 이어나가고 있다. 하지만 이 조직들은 과거 자원봉사자가 주축이 되어 비교적 활동이 자유로운 사회운동가들에 의해 운영되었던 것과 달리 오늘날 시 당국이나 정부 부처의 정책 속에 편입돼 제도화의 길을 걷고 있다. 쿨베르는 "오늘날 이 단체들은 정부 당국과 연계돼 있는 만큼 예전처럼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하거나 반대 의사를 표시하지는 못하는 실정이다"라고 말했다.
이 단체들은 주로 정부 부처나 도의회, 지역의회, 시청 등에 재정적 지원을 의지하고 있다. 대중 교육이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더 걸릴 것이다. 지금은 경기가 나빠 돈줄이 완전히 말라붙은 상태다. 기존에 지원금을 타던 단체가 아니면 지원금을 새로 타기도 수월치 않다. "실제 활동보다 서류를 작성하고 지원금을 신청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하지만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지난 3월 어느 날 저녁 관람객으로 객석이 가득 찬, 문화부가 인증한 프랑스 최고의 극장 '메를랑 극장' 안에 마침내 조명이 밝게 들어왔다. 아고라와 여러 사회단체들이 함께 기획한 월례공연행사 '가까이서 영화를'의 영화 상영 행사가 무사히 끝났다. 이번달 상영작은 <디트로이트, 야만도시>.(6) 황금기를 구가하다 탈산업화로 인해 위기의 악몽을 맞이하게 된 옛 자동차 산업의 요람인 미국 도시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영화였다.(7)
"기분 좋게 와서 우울하게 돌아간다"
토론 시간이 시작되자 가장 먼저 아프리카 출신의 젊은이가 마이크를 잡았다. "감히 묻고 싶다. 우리는 왜 이 영화를 봤는가? 우리가 항상 이 영화에 나오는 황폐한 건물 등과 같이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추적하는 데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덕분에 기분 좋게 왔다가 우울한 마음을 안고 돌아간다." 관중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리며 젊은이에게 박수를 보냈다. 이날 저녁 행사에는 북부지구의 주민들, 그 가운데서도 남녀 젊은이들과 아이들이 대거 참석했다. 하지만 마르세유 시민들도 곳곳에서 찾아왔다. 이날 행사에서는 완벽한 사회평등을 추구하기라도 하려는 듯 모두에게 자유롭게 발언권이 주어졌다. 주제도 마약, 힙합뮤직, 자본주의, 공장 폐쇄, 기업 해외 이전 등 제약 없이 다양하게 다뤄졌다. 얼마나 토론이 다채롭고 유익했는지, 토론이 끝난 뒤 도심에서 온 마르세유 시민들은 쿨베르의 팔을 붙들고 이렇게 말했다. "믿을 수 없어요. 그들도 보통 사람들처럼 의견을 얘기하더군요. 모두가 공감하는 문제에 대해 지적하더라고요. 그들도 우리와 똑같을 거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글/모리스 르무안 Maurice Lemoine 언론인.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1980년대와 관련한 모든 인용문은 당시 필자가 진행한 취재글에서 발췌했다. <금지된 도시(공공임대주택단지) 마르세유: 이민 자녀들의 일상>, 앙크르 출판사, 파리, 1987.
(2) 공공임대주택을 배정받을 때까지 임시로 거처하는 주택단지.
(3) François Lorcerie, Vincent Geisser, <마르세유 무슬림>, 열린사회재단, 런던, 2011·2012. www.linternaute.com/ville/ville/accueil/154/marseille.shtml.
(4) 현금인출기(DAB)에서 비롯된 신조어.
(5) 말파세 언덕, 세드르, 생폴, 플라망이리스, 생바르텔레미 3지구, 뷔스린, 피콩, 생마르트 마을의 중심지.
(6) <디트로이트, 야만도시>, 플로랑 티용의 영화, 에고 프러덕션, 파리, 2010.
(7) 알랑 포플라르, 폴 바니에, ‘빛바랜 개혁, 불타는 디트로이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0년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