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대제를 긴장시켰던, 스웨덴 카를 12세의 침공

2024-08-30     리오넬 리샤르 | 역사학자

18세기 초, 스웨덴 군주의 계획은 러시아 차르의 땅을 침략하고 우크라이나를 통해 모스크바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전쟁 전문가들이 이러한 작전의 타당성에 동의하기 전까지, 오랫동안 이는 전략적 실수로 여겨졌다. 무모할 수도 있던 우크라이나 원정에 대해 현대 전문가들은 다른 관점의 평가를 내린다.

 

19세기에 생산적이고 수완이 뛰어난 지리학자 콘라드 말테브룬은 <제국신문>에 정기적으로 칼럼을 기고했다. 그는 1807년 1월 7일자 칼럼에, 얼마 전 파리에서 출간된 『유럽 여행안내서』에 관해 썼다. 이 책은 센 강변에 거주하는 ‘서적상이자 지리학자’ 이아생트 랑글루아가 번역·편집한 것이다.(1)

이 책의 저자는 독일인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오토카르 라이하르트로, 그는 새로 유행하게 된 ‘여행안내서’라는 장르의 선구자로 1784년부터 이 분야를 전문으로 다루었다. 이후 ‘장바티스트 리샤르’라는 가명으로 파리의 서적상 오댕(Audin)이 라이하르트를 모방하여 표절했다. ‘측량기사이자 우체국 직원’이었던 오댕은 1828~1829년에 두 권으로 된 『유럽 여행자를 위한 정통 안내서』를 출간했다.

말테브룬은 라이하르트의 묘사와 논평에 감탄했다. 라이하르트의 책이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형태로 각색되어 곳곳에서 출간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말테브룬의 감상평은 틀리지 않았다. 『유럽 여행안내서』에서 그는 특히 러시아를 다룬 부분에 주목했다. 그는 ‘어떻게 그런 나라가 외국에 정복당할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

1708~1709년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중 한 사람이었던 스웨덴 국왕 카를 12세는 러시아 표트르 대제를 상대로 위험을 무릅썼다. 1709년 겨울 동안 그의 군대는 혹독한 추위로 약해진 상태였다. 1709년 7월 8일, 지칠 대로 지친 군대는 우크라이나 중부의 폴타바 전투에서 결국 패배했다.

 

우크라이나는 모스크바 공격을 위한 최적의 경로

말테브룬은 “카를 12세는 러시아 차르를 공격해 북부 유럽의 자유를 영원히 공고히 하기를 바랐다”라고 언급했다. 전략의 오류로 인한 실패일까? 대부분의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말테브룬도 그렇게 생각했다. 카를 12세는 모스크바에 당도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지났는데, 그것은 몹시 힘겹고 험난하며 “무모함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여정이었다. 그야말로 패망을 부르는 길이었다.

그러나 “지역 사정을 다시 조사해보고” “우크라이나 출신의 지식인들”로부터 정보를 얻은 뒤, 이 지리학자는 생각을 바꿨다. 그는 카를 12세가 “과연 러시아 중부에 머물 생각으로 그곳으로 쳐들어갈 최적의 경로를” 선택했다고 가정했다.

그는 이어서 “이 루트에는 없는 게 없었다. 볼히니아의 밀밭에서 보리스텐(드네프르강)이 흐르는 환상적인 목초지를 지나, 셈강과 데스나강을 거슬러 오르면 러시아 최대의 곡창지대인 비옥한 오렐과 쿠르스크 주로 들어간다. 이처럼 르벤하우프에게 불행이 닥치지만 않았다면,(2) 스웨덴 국왕은 단 한 번의 전투(이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그는 모스크바 코앞까지 갈 수 있었을 것이다)로 러시아의 운명을 쥐락펴락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말테브룬은 거기에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그는 그저 지리학자이기를 바랄 뿐이다. 그는 자신이 전쟁학이나 전쟁을 분석하는 전문가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지도의 관점에서 그리고 원주민들의 경험을 토대로, 모스크바를 점령하는 것이 목표라면 우크라이나에 의지하는 것이 확실히 좋은 전략임을 인정한다. 그는 카를 12세의 실패에 대해서는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위험성을 명확히 간파했던 최초의 인물

유명한 전쟁 이론가인 프로이센의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이런 과감한 설명을 제시하기도 했다. 스웨덴의 젊은 국왕은 1718년, 오늘날 노르웨이 남부에 위치한 프레드릭스텐 요새를 포위 공격하던 중에 총알이 머리를 관통하여 3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클라우제비츠는 스웨덴 국왕이 용맹한 알렉산더 대왕과 똑같다고 봤다. 불행하게도 그는 본질적인 사실을 과소평가했다. “아무리 총사령관의 천재성이 뛰어나다 해도, 자기보다 몇 배는 센 상대와 싸워야 할 때는 승리하기가 몹시 힘든 법이다.”(3)

1768년 볼테르의 매우 명예로운 시도 이후(4) 처음 나온 카를 12세의 상세한 전기는 민족주의를 신봉하는 독일 역사학자 오토 하인츠가 썼는데, 전체 3권 중 제1권만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인 1936년에 출간되었다. 이 역사학자는 이 전기의 서문에서, 동부 ‘생활권 공략’을 꿈꾸는 나치 지도자들에 가려진 경고를 던지면서 클라우제비츠의 판단에 동참했다.(5) “군사적으로 천재적인” 카를 12세가 “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지평선에서, 유럽에서 러시아의 위험성을 명확하게 간파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 사내는 오만하고, 자신감이 과하며, “대립하는 상황들의 헤게모니”를 가늠할 능력이 없는 인물임이 드러났다.

 

 

글·리오넬 리샤르 Lionel Richard
역사학자, 피카르디대학교 명예교수

번역·조민영
번역위원


(1) Conrad Malte-Brun, 『Guide des voyageurs en Europe 유럽 여행 가이드』, M. Reichard, 독일어 번역, 제4판, <Journal de l’Empire 제국신문>, Paris, 1807년 1월 7일. 
(2) 아담 루트비히 르벤하우프트는 1709년 폴타바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보병을 지휘했다. 
(3) Carl von Clausewitz, 『Théorie de la grande guerre 대전 이론』, 바트리 중령 불역, L. Baudoin, Paris, 1889. 
(4) Voltaire 볼테르, 『Histoire de Charles XII, roi de Suède 스웨덴 국왕 카를 12세 이야기』, 전2권,  Christophe Revis, Bâle, 1731. 이것은 볼테르의 첫 번째 역사물이다. 그는 1768년까지 이 책의 다양한 판본을 작업했다. 특히 Éric Schnakenbourg, ‘“L’histoire de Charles XII” de Voltaire dans une perspective historique 역사적 점에서 볼테르의 “카를 12세 이야기”’, <Dix-Huitième Siècle 18세기>, n° 40, Paris, 2008. 
(5) Otto Haintz, 스웨덴의 왕 『König Karl XII 카를 12세』., 제1권 : Der Kampf Schwedens um die Vormacht in Nord- und Osteuropa (1697-1709) 북유럽과 동유럽에서 스웨덴의 패권다툼, De Gruyter, Berlin, 1936. 1951년과 1958년에 추가로 두 권이 출판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