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들러보다 더 많은 유대인 구하고도 암살된 희생양

카슈트너, 헝가리 유대인 구출의 숨겨진 영웅

2024-08-30     소니아 콤브 | 역사학자

80년 전인 1944년 3월 19일, 나치 독일과 동맹국이었던 헝가리에 독일군이 도착했다. 석 달도 되지 않아 유대인 44만 명이 강제이주를 당하고 3/4이 아우슈비츠에 도착하자마자 학살됐다. 헝가리 변호사였던 레죄 카슈트너는 부다페스트에서 뛰어난 침착성과 명석한 판단력으로 1,684명을 구했다. 전쟁 후 독립한 이스라엘에서 극우파의 숙청 요구에 맞선 그는 법정에서 자신의 결백을 밝히려 했으나 암살되고, 대법원은 뒤늦게 무죄를 선고했다.

 

1920년 벨러 쿤의 짧았던 공산주의 정권이 패배한 이후, 반(反)혁명주의자 미클로시 호르치 제독이 헝가리를 지배했다. 제3제국을 지원한 대가로 헝가리는 제1차 세계대전 말기에 잃었던 영토를 되찾았다.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호르치 정권은 반(反)유대주의법(1938년, 1939년, 1941년)을 통과시키고 21~60세의 유대인 10만 명을 강제 노동에 보냈는데 그중 절반 가까이는 살아남지 못했다.

헝가리가 1943년 이후 전세가 바뀌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연합국과 별도의 평화 협상을 시도하지 않았다면 상황은 그대로 유지되었을지도 모른다. 독일 학자 라디슬라우스 뢰프는 “히틀러는 광신적인 반유대주의자일 뿐 아니라, 자신의 급진적인 반유대주의 조치에 대한 연합군의 보복에 두려움을 가진 기회주의자였다”(1)라고 평가했다.

정보를 입수한 히틀러는 1944년 3월 독일군을 헝가리에 파견했다. 다른 나라에서 점진적으로 시도됐던 절차가 헝가리에서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유대인의 위치 파악, 거류지화, 수용, 재결합, 최종적으로 강제 이주를 위한 유대인중앙위원회가 설립됐다.

그해 5월부터 7월 초까지 열차 250대가 헝가리 지방에서 출발해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향했다. 홀로코스트의 주범인 나치 친위대의 아돌프 아이히만 중령은 헝가리 경찰, 헌병대, 지역 공무원의 도움을 받아 현장에서 작전을 지휘했다. 이 기간에 추방된 유대인 44만 명 중 33만 명이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몰살당했다.(2)

그 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기반을 둔 바다위원회(Vaad, Va’adat Ezrah Vehatzalah, 시오니스트 인사들의 유대인 구호 및 구조 집단)가 개입했다. 이 네트워크는 이미 루마니아와 슬로바키아에 있던 유대인들을 헝가리에 보내 임시로 보호하는 등 유대인들을 구출해낸 경험이 있었다.

 

독일군에 군수품 지원하는 조건으로 유대인 구출 협상 벌여

독일 학자 뢰프는 레죄 카슈트너를 “나치 친위대(SS)를 매수하고 속여 유대인 학살을 막겠다는 불가능한 활동에 착수한 소규모 시오니스트 단체의 수장”이라고 기억했다. 나치 독일군이 군수 물자 지원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것을 간파한 바다위원회는 아이히만이 유대인의 생명을 대가로 군용 트럭 1만 대(차, 비누, 텅스텐 등)를 유대인 기관(3)과 협상할 수 있다고 믿게 했다.

이를 위해 1944년 5월 바다위원회 지도부 중 조엘 브랜드가 중립국 터키에 있는 유대인 기관에 연락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는 이 첩보를 입수한 영국군에 의해 투옥됐다. 영국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대로 그를 나치 스파이로 오인한 것일까, 아니면 애당초 영국은 유대인을 구출해 팔레스타인으로 보낼 의도가 전혀 없었던 것일까?

카슈트너는 아이히만과의 포커 게임에서 홀로 남게 됐다. 브랜드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협상이 계속되고 있다고 믿게 만들었다. 그는 변호사 공부와 강인한 성격을 바탕으로 침착하게 이 일을 해냈다. 작가이자 의사이자 변호사인 티바다르 소로스처럼 카슈트너는 적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유대인들 구출하면서 나치 친위대의 협조받은 것이 불씨

소로스는 카슈트너와 마찬가지로 포커를 좋아했고, 자신과 같은 비유대인 친구인 에스페란티스트의 도움을 받아 그 유명한 후츠파(이스라엘 특유의 도전적 의견 조율 방식)를 발휘해 가족을, 점차 반경을 넓혀 아들들의 친구와 친척까지 구했다.(4) 카슈트너는 아이히만을 필요한 만큼 길게 꾀어서 더 많은 사람들을 구해냈다.

그의 성공을 과대망상으로 설명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래도 아이히만이 그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뿜었을 때 그도 똑같이 반격할 정도로 용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히만이 약속한 장비가 도착하지 않아 초조해하자 카슈트너는 협상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위협에 직면해서도 두려움을 무릅쓰고 반격했다. 적어도 그는 전후 작성된 보고서에서 그렇게 묘사했다.(5)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아이히만의 눈을 피해 나치 친위대 첩보원 쿠르트 베허의 도움을 받아 유대인 구출 작전을 수행했다. 베허는 바다위원회를 통해 부유한 유대인들로부터 돈과 귀중품을 거둬 부를 축적하는 동시에 유대인을 구할 방법을 찾았고, 전쟁이 끝난 후에 이를 유용하게 사용했다.

전쟁이 끝을 보이고 있었다. 1944년 봄 소련군은 번개같이 전진했고, 베허와 그의 상관인 내무장관 라이히 하인리히 힘러는 이를 파악하고 있었지만, 아이히만은 그렇지 못했다.

1944년 6월 30일, 카슈트너 열차는 1,684명의 유대인을 태우고 부다페스트를 출발해 아우슈비츠가 아닌 하노버 인근의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향했다. 카슈트너는 ‘당시 헝가리 유대인 사회를 대표하는 소규모 표본’에 속하지 않았다.

그는 현장에 남았고, 아이히만이 여전히 군용 트럭을 요구하며 위협 수위를 높이는 상황에서 미국 유대인 공동 분배 위원회(American Jewish Joint Distribution Committee, JDC)가 어렵게 마련한 돈을 스위스에 가까스로 보냈다.

카슈트너는 구조한 목숨값을 치렀고, 베허는 이 인신매매를 통해 꾸준히 축재했다. 1944년 8월 중순, 베르겐-벨젠 수용소에서 포로 318명이 해방되어 스위스에 왔고, 그해 12월에는 다른 사람들도 돌아왔다. 군수품이 곧 도착한다는 명목으로 모두 현금 몸값을 치르고 풀려난 것이다.

그 후로도 카슈트너는 베허와 함께 여러 수용소를 찾았고, 베허는 학살 절차를 중단시켰는데 그는 이 활동이 자기 목숨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서로 허세를 부리고, 속이고, 착취하려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둘 사이에 우정이라고 하기에는 뭐하고 어떤 친밀감이 형성된 것 같다. 카슈트너는 베허에게서 아이히만에 대적하는 동맹군의 모습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쉰들러보다 더 많은 1,684명의 유대인들을 구출해

유명한 열차 사건 외에도 카슈트너는 수많은 구조 작업에 동참했다. 일부는 문서화되었고 일부는 흔적도 없지만, 그가 독일계 체코인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1,200명)보다 더 많은 유대인(1,684명)을 구한 것은 분명하다.

1945년부터 1946년까지 카슈트너는 연합군이 세운 뉘른베르크 군사재판소에 증인으로 섰다. 특히 헝가리에서 유대인을 구출하는 과정에서 베허(및 다른 나치 친위대원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진술을 했다.

1948년 7월에 유대인 기구 재무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카슈트너는 “쿠르트 베허는 전직 나치 친위대 대령으로 구출 작전 당시 친위대와 게슈타포의 수장 힘러와 나 사이에서 연락 장교로 근무했다. 그는 내가 개인적으로 접촉한 덕분에 연합군 점령군에 의해 뉘른베르크 감옥에서 석방되었다”라고 적었다.

 

이스라엘 독립 후 극우파가 카슈트너 숙청 요구 

그런데 이 편지 때문에 카슈트너는 목숨을 잃게 되었다.

1948년 카슈트너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영웅은커녕 나쁜 소문의 대상이 되고 친인척을 구하지 못한 헝가리 생존자들의 분노를 샀다. 반면 이스라엘 국가 건국자인 데이비드 벤 구리온은 그를 환영했다.

카슈트너는 벤 구리온의 노동당(마파이)에 입당했고, 이후 그가 수립한 정부의 일원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극우 정통파 운동의 일원인 헝가리 유대인 말첼 그륀발트는 카슈트너가 “나치와 ‘협력’했다”며 그를 “‘숙청’해야 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 구성원의 명예를 훼손함으로써 신생 국가 이스라엘의 명예를 공격했다. 이에 법무부 장관은 그륀발트를 고소하기로 했다. 재판은 1954년 초에 열렸다. 자기 권리를 확신한 카슈트너는 협상과 ‘협력’의 차이를 어렵지 않게 입증했다. 그는 상황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하는 훈계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륀발트의 변호사 슈무엘 타미르는 히든카드를 꺼냈다. 나치 친위대 베허에 관한 뉘른베르크 재판의 증언을 들이밀었다. 한때 파시스트 시오니스트 무장조직인 이르군에 속했던 타미르는 사회주의자에 대한 혐오감을 품고 있었다. “치열한 정치적 야망에 이끌려 타미르는 마파이 정부를 무너뜨리고 우파 대이스라엘의 지도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유죄 판결

반동적 언론에 의해 악마화된 카슈트너는 깊은 분열과 트라우마로 고통받으며 폭력 속에서 탄생한 사회에서 이상적인 희생양이었다. 새로운 국가 이스라엘은 국가적 서사를 구축할 영웅이 필요했지 대부분 시오니스트가 아닌 생존자나 유가족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2년 전인 1952년 9월 콘라트 아데나우어 총리와 벤 구리온 총리가 체결한 서독-이스라엘의 배상 협정은 카슈트너가 돈으로 유대인의 목숨을 협상한 게 맞느냐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헝가리에서는 저항 운동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유일한 무기는 베허와 같은 나치 친위대원들의 부패뿐이었지만, 이스라엘 야당 언론은 사회가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노력했다.

벤야민 할레비 판사는 극도로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그륀발트에게 무죄를, 카슈트너에게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나치와 협력했으며 전쟁 후 나치 친위대 출신의 베허를 구했다는 죄목으로 유죄를 판결했다. 당시 판사가 짊어진 짐은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라 이 사례를 바탕으로 극한 조건에서의 선택의 문제를 연구 주제로 삼은 이도 있다.(6)

뒤이은 선거에서 마파이당은 의석을 잃었고 우파 정당(헤룻, 리쿠드)이 이 자리를 차지했다. 카슈트너와 그의 가족은 실추된 명예를 지고 쫓기거나 괴롭힘을 당했다. 사람들은 그들을 나치일원으로 대하며 살해 위협을 가했다. 정부는 판결에 이의를 제기했고 검찰총장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암살되고 나서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 받아

17개월 후 열린 두 번째 재판에서 카슈트너에게 무죄가 선고되었지만(복권은 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1957년 3월 3일 극우 운동가가 암살을 시도했고 이때 입은 부상으로 그는 3월 15일 사망했다.

카슈트너에 관한 게일른 로스의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역사학자들과 목격자들은 베허에 대한 그의 진술이 ‘약탈당한 재산을 되찾기 위한 유대인 기구’의 동의를 얻었다고 입을 모았다.(7) 베허를 직접적으로 변호하지는 않으면서도 유죄 판결을 면하게 해줬고 추후 석방까지 가능(3년 복역 후 독일연방에서 큰 부자가 됨)하게 한 카슈트너의 증언에 대한 반대급부로, 베허는 자기 전리품의 일부 혹은 전부를 향후 이스라엘 국가의 비밀 군대에 반환하는 데 동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슈트너는 유대인 기구에 누를 끼치지 않고 정부에도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이 협상을 비밀로 간직했다고 한다. 벤 구리온은 침묵을 지킴으로써 자신의 당을 구했다. 베르겐-벨젠 수용소의 생존자 아들인 요람 레커는 자신의 저서 『악마의 영혼』에서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국가의 존재 이유’, 즉 더 큰 대의의 이름으로 저지른 불의, 이 경우 초기 이스라엘국가 군대를 위한 자금 마련이라는 대의”(8)라고 적었다.

 

유족들의 노력으로 예루살렘 홀로코스트 기념관에서 명예회복 

카슈트너의 가족은 이스라엘 비밀기관이 그를 불편한 증인으로 간주해 제거하기로 했다고 믿고 있다. 비밀경호국 책임자 역시 헝가리 출신 유대인이자 아우슈비츠 생존자였는데, 정작 자신과 가족을 열차에 태우지 않은 카슈트너에게 분개했는지 모른다. 범행 후 곧바로 체포된 살인범은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3년 후 석방되었고, 게일른 로스의 다큐멘터리에서 이에 관해 확인할 수 있다. 두 재판을 모두 목격한 좌파 평화주의 저널리스트 유리 아브네리도 이렇게 확신한다.

국가 존립을 명문으로 사회적 제재를 받다가 살해된 카슈트너는 잊혔다. 예루살렘의 홀로코스트 기념관인 야드 바셈은 그의 이름을 땄고 헝가리에서 유대인 1,684명을 구한 열차에 마땅히 있어야 할 그의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손녀 메라브 미사엘리(이스라엘 노동당 지도자이자 정교 분리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 운동가)를 비롯한 유족은 분투한 끝에 홀로코스트 기념관에서 카슈트너 관련 기록물을 수용하는 것에서 뜻깊은 위안을 얻었다.

이스라엘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나 기관이 없다. 오늘날까지도 카슈트너가 이스라엘 국가 탄생 시점까지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기관이었던 유대인 기구와 협력해 활동했다는 증거가 있는 기록물은 ‘국방 기밀’이라는 명목으로 여전히 접근이 불가능하다.

결국 카슈트너 재판은 좌파 시오니즘의 마지막 화신인 노동당에 대한 재판이었다. 독일 학자 뢰프는 이때부터 이스라엘이 우익화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글·소니아 콤브 Sonia Combe
역사학자

번역·서희정
번역위원


(1) Ladislaus Löb, 『L’Affaire Kasztner. Le Juif qui négocia avec Eichmann 카슈트너 스캔들. 아이히만과 함께한 유대인』(André Versaille éditeur, 2013).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인용문은 이 책에서 발췌함.
(2) 편주: 이 극적인 에피소드는 조나단 글레이저의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2024)의 배경이 되었다.
(3) 시오니스트 조직으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지원하고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까지 사실상 현지 유대인들을 통솔한 단체.
(4) Tivadar Soros, 『Masquerade. Dancing Around Death in Nazi-Occupied Hungary 가면무도회. 나치 점령기 헝가리에서 죽음의 춤』(에스페란토어에서 번역), Arcade Publishing, New York, 2000.
(5) Rezsö Kasztner, 『Der Kasztner-Bericht über Eichmanns Menschenhandel in Ungarn 운가른에서 아이히만의 인간 취급에 대한 카슈트너 보고서』, Kindler, Munich, 1961.
(6) Frédérique Leichter-Flack, 『Le Laboratoire des cas de conscience 양심수의 실험실』, Flammarion, Paris, 2012.
(7) Gaylen Ross 감독의 다큐멘터리 <Killing Kasztner>(2008)는 2012년 4월 프랑스에서 <나치와 함께한 유대인>이라는 제목으로 방송됐다.
(8) Yoram Leker, 『L’Âme au diable 악마의 영혼』, Éditions Viviane Hamy, Paris, 2021.